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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섯명은 너무 많잖아요 (118)화 (118/156)

117화. 24시간이 모자라(2)

베탄이 당황할 거라 예상은 했지만 이렇게까지 놀랄 줄은 몰랐다. 내가 말을 꺼낸 지 몇 초가 지났는데도 아직 대답하지 못하는 것을 보면 말이다.

그런데 고심 끝에 나온 베탄의 대답은 완전히 예상 밖이었다.

“어……. 오늘은 안 되겠는데. 갈 데가 있어.”

진짜 갈 데가 있는 건지, 완곡하게 거절하는 건지 알 수가 없었다. 그래서 나는 그냥 카드를 쓰기로 했다.

‘카드2 사용!’

어떻게 사용하는 것인지 알 수가 없었기에 마음속으로 외쳤다. 그러자 눈 앞에 황금색 카드가 떠오르기 시작했다. 공중으로 떠오르며 빛을 발하는 카드는 베탄에게는 전혀 보이지 않는 듯했다.

제자리에서 빙글빙글 도는 카드는 마치 역할을 다한 듯 가루가 되어 사라졌다.

그러자 거짓말 같게도 바로 베탄이 입을 열었다.

“같이 갈래?”

약속을 취소하는 것이 아니라 같이 가자고 할 줄은 몰랐기에 나는 잠깐 눈을 굴렸지만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요. 어딜 가는 거죠?”

“가 보면 알아. 자, 시간이 촉박하니 어서 가지.”

아까까지만 해도 여유로워 보였던 베탄이 갑자기 눈빛을 바꾸며 나에게 어서 가자고 재촉했다.

어딜 가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나를 데려가도 되는 곳인 건 맞겠지?

“마저 준비를 하고 내려올게.”

“네.”

나를 만나기 전에 약속을 위한 준비를 하고 있었던 베탄은 후다닥 계단을 올랐다. 그가 나를 문 앞에 세워 두었기 때문에 지나가던 메이드들이 힐끗거리며 나를 쳐다보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외투를 걸친 베탄이 모습을 나타냈고, 그와 함께 집을 나갈 수 있었다.

나는 우리의 행선지가 어디인지 궁금했다. 친구들을 만나러 가는 건가? 아니면 마법 협회에 볼일이라도 있는 걸까?

전자라면 나는 베탄의 친구들을 만나야만 했고, 후자라면 그의 일터에 가는 것이었다. 뭐가 되었든 간에 내가 따라가는 것은 그림이 굉장히 이상했지만 그의 호감도를 올릴 사건들을 만들려면 그와 함께 시간을 보내는 것이 중요했다. 머릿속으로 여러 상황들을 상상하며 그와 마차 위에 올랐다.

“해가 일찍 지기 때문에 빠르게 움직여야 해.”

베탄은 우리가 어디를 가는지 정확히 말하지 않았다. 덜컹거리는 마차를 타고 가는 중에도 그는 아무 말 없이 바깥 풍경을 바라볼 뿐이었다.

그리고 우리가 도착한 곳은…….

“시장? 웬 시장이죠?”

험버트 시장, 그것도 사람들이 바글대는 상점 거리였다. 쇼핑이라도 해야 하는 것일까? 옷을 고른다거나, 마법 물품을 구매한다거나…….

“식재료를 사야 해.”

“심부름이라도 가는 건가요?”

“아니.”

짧게 대답한 베탄은 성큼성큼 가게들 사이사이를 걷기 시작했다. 주변에는 어린아이들을 앞에 두고 묘기를 하는 사람들, 길거리에 가판대를 두고 정체를 알 수 없는 아이템을 판매하는 사람들, 그림을 잔뜩 내걸어 놓은 채 지나가는 행인들을 그리고 있는 화가도 보였다.

“오늘의 메뉴는 호박 수프야.”

정말로 엄마가 심부름이라도 시킨 건지, 그는 종이에 적어 놓은 식료품 목록들을 살펴보고 있었다.

“베탄, 저기가 식료품점인 것 같아요.”

환한 불빛을 내뿜으며 탐스러운 과일과 싱싱한 야채를 팔고 있는 가게가 눈에 들어왔다. 베탄은 ‘아!’ 소리를 내며 나를 그곳으로 이끌었다.

“목록 좀 봐 봐요.”

옆에서 내가 괜히 참견을 하며 물었다. 사야 할 것들이 그리 많진 않았지만 전부 요리에 필요한 재료들이었다.

“어서 오시게. 오늘은 당근 한 묶음이 단돈 200골드!”

반갑게 맞이해 주는 주인 할머니에게 인사를 하며 우리는 같이 가게 안으로 들어섰다. 베탄은 필요한 것을 찾고 있는 건지 주변을 두리번거리고 있었다.

“호박이라면 여기에 있어요.”

내가 말하자 베탄은 눈을 동그랗게 뜨며 내가 가리킨 곳으로 걸어왔다. 과일과 야채가 가득한 허름한 가게 안은 왠지 모르게 베탄과 어울리지 않았다. 틈만 나면 바깥에서 검술 연습을 하고 있을 것만 같은 남자가 신중하게 야채를 고르고 있으니 왠지 웃긴 것 같기도 했다. 아냐, 전생에서는 가정적인 남자가 인기라고 했잖아? 저번엔 레크리드도 요리를 해 주었고.

베탄은 호박이 잔뜩 쌓인 가판대 앞에서 자신의 턱을 살살 쓸었다.

“선생님, 뭐 하는 거예요?”

내가 묻자 베탄이 작게 중얼거렸다.

“뭘 사야 하는지 잘 모르겠어서.”

항상 나에게 선생님이라고 불렸던 자가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고 하니 꽤 낯설었다. 나는 호박 더미를 이리저리 둘러보다가 집게손가락으로 몇 군데를 가리켰다.

“이게 가장 탐스럽게 생겼고요. 이건 크기가 큰데 여기에 상처가 있고. 이건 색깔은 좋은데 너무 익은 게 아닐지 모르겠어요.”

“…호오.”

야채에 대해 아는 건 쥐뿔도 없지만 그저 오감에 의해 호박을 판별하니 베탄이 작게 놀라는 것이 느껴졌다. 뭐야, 이런 거에 놀라고 그래. 귀엽게).

“이건 어때?”

베탄은 아까부터 자신이 만지작대고 있던 호박을 들어 올렸다. 그런데… 저거는 윗부분이 너무 지저분한데?

그때, 길목을 향해 ‘당근 묶음이 단돈 200골드’를 외치던 주인 할머니가 우리 쪽으로 다가왔다.

“총각이 아무것도 모르네. 그거는 꼭지 부분이 못생겨서 맛이 없을 거야.”

홀홀, 웃음기 있는 목소리로 베탄을 향해 타박 아닌 타박을 주자 베탄의 얼굴이 당황스러움으로 물드는 게 보였다.

어울리지 않는 곳에 와서 그런가, 오늘따라 그의 얼굴에 감정이 그대로 드러나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보아하니 여자 친구가 잘 아네. 호박은 표면이 탐스럽고 빛깔이 좋은 것을 골라야 한다고.”

“……?”

“여…자 친구요?”

난데없이 나를 여자 친구 취급하는 할머니를 향해 내가 손사래를 쳤다.

“지금 무슨 말씀을! 그냥 아는 사이에요! 여자 친구가 아니라고요……!”

“허허, 둘이 서 있는 게 너무 잘 어울려서 아가씨 남자 친구인 줄 알았지. 그럼 이참에 만나 보는 건 어떤가? 선남선녀가 서 있으니 보는 사람도 기분이 좋구먼.”

“네?!”

구렁이 담 넘어가듯이 말하는 할머니 덕에 나는 기겁을 하며 부인했다. 남자 친구라니! 베탄이 어떻게 내 남친이 된단 말이야!

“루나, 굉장히 기분이 안 좋은가 봐? 극구 거부를 하는 걸 보니.”

그때 베탄이 옆에서 중얼댔다. 저 남자는 지금 뭐라는 거야. 그럼 인정을 하겠냐!

“아니 오해를 하시니까 정확히 말씀드린 거예요. 선생님과 제가 여, 연인…이라뇨. 말도 안 돼.”

“나 또한 사양이야. 이깟 꼬맹이가 어딜 봐서 내 여자 친구라는 건지.”

“꼬맹이요?!”

“그래. 그럼 네가 어른이라도 되나? 아직 미성년자인 주제에. 넌 코 묻은 어린애나 다름이 없어.”

“허, 그럼 선생님은 완전 늙다리나 다름없거든요?”

“느, 늙다리……?”

익숙한 단어가 아니어서 그런 건지 베탄은 어버버하며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늙다리라는 말을 들으니까 충격적이긴 한가 보지?!

“허허허, 노인네 앞에서 사랑싸움이라도 하는 건가?”

“할머님!”

우리를 놀리는 것에 재미를 들린 건지 할머니는 자꾸만 짓궂게 나와 베탄을 엮어 댔다.

“빨리 골라요, 선생님……!”

내 재촉에 베탄이 호박 하나를 가리켰다. 아까 내가 추천한 것 중 하나였다.

“이걸로 주시죠.”

“그래 그래, 내가 덤도 넣어 줄게. 젊은 사람들을 보니 나까지 젊어지는 것 같구먼.”

그렇게 우리는 어쩔 수 없이 할머니의 압박(?) 속에서 식료품을 골라야 했다.

“밀가루는 여기서 안 파나요?”

“그건 저기에 있는 가게로 가면 된다네.”

그가 가져온 식료품 목록이 다양했기 때문에 우리는 여러 가게를 돌아야만 했다. 나는 잠자코 베탄의 뒤를 따르며 그가 이상한 물건을 고르지는 않는지 봐 주곤 했다.

“그건 너무 시들었잖아요.”

“선생님, 여기가 더 가격이 저렴한 것 같아요.”

“선생님, 물건을 보고 고르고 있는 것 맞죠?”

베탄은 딱히 대꾸는 잘 안 하지만 물건 구입에 내 의견을 적극적으로 반영하고 있는 것 같았다. 이 사람, 내가 안 왔으면 온갖 이상한 것들만 사서 갔을 것 같잖아?

그렇게 양손에 짐을 가득 든 채 우리는 사람이 가득한 거리를 걷고 있었다. 주변에는 장을 보러 나온 부부들이 주를 이루었고, 아이를 데리고 온 경우도 많았다.

식료품 거리가 지나고, 우리는 옷과 액세서리를 파는 거리에 다다랐다. 여기저기 자리한 의상실에서는 다양하고 화려한 드레스와 남성복이 모습을 뽐내고 있었다.

“어디 보자, 여기서부터는 옷을 파는 것 같아요. 향신료를 사려면 뒤를 돌아가야 할 것 같은데요?”

“어……. 잠깐.”

베탄이 가져온 목록을 보며 중얼거리고 있던 나는 고개를 들어 그를 쳐다보았다. 그런데 그가 어딘가에 시선을 뺏겨 눈을 떼지 못하는 것을 보았다.

“루나, 이리 와 봐.”

“?”

베탄은 긴 다리로 성큼성큼 걸어 시선이 꽂힌 곳으로 향했다. 짐이 무겁지도 않은지 발걸음이 아주 가벼웠다.

“이게 뭐예요?”

그가 도착해서 가리킨 것은 가판대 위에 올려진 다양한 액세서리들이었다. 하얀색 모조 진주 목걸이부터, 탄생석을 박아 넣었다는 팔찌까지, 누가 봐도 여성용이었다.

“여긴 왜요, 여자 선물이라도 사는 거예요?”

“그게 아니고.”

저번에 히드라의 언덕에 같이 갔을 때 전 여자 친구를 언급하더니, 설마… 그녀에게 줄 선물인 건가?

“괜찮은 거 같아서.”

그는 숫기 없는 남자아이처럼 말했다. 예쁜 걸 예쁘다고 말하지 못하는 사람같이 말을 돌려서 하고 있는 것이다.

“이거요?”

나는 그가 가리킨 것을 들어 올렸다. 레이스가 달린 검은색 머리띠였다. 베탄이 이런 걸 보면서 예쁘다고 생각하다니, 전혀 관심도 없을 것 같이 생겨서는 완전 의외잖아?

“응. 해 봐.”

나는 내 앞에서 대놓고 다른 여자 선물을 고르고 있는 베탄을 보자 호감도를 올려야 한다는 생각이 싹 사라졌다. 그저 선물 고르는 걸 도와주러 온 여사친처럼 그의 말에 따라 머리띠를 이리저리 살펴보았다.

“나쁘지 않네요. 거추장스러울 것 같긴 하지만. 이거 어떤 마법 효과가 있는 건가요?”

“아뇨, 아무런 효과 없습니다. 단순 장식용이에요.”

내 말에 가판대 주인은 단호하게 대답했고, 나는 속으로 아무 효력도 없는 저런 걸 왜 사는 건지 모르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해 봐. 어떤지 봐야 하니까.”

“제가요?”

“응.”

베탄의 말에 가판대 주인은 냉큼 우리 앞으로 나와 나에게로 다가왔다.

“제가 묶어 드릴게요.”

내가 알던 머리띠와는 달리 귀 뒤로 끈을 묶어야 하는 스타일이었다. 나는 떨떠름한 표정으로 가만히 있자 가판대 주인은 손을 들어 올렸다.

“잠시 손 좀 대겠습니다.”

“…네.”

오늘 데이트는 내가 베탄을 따라온 것이니 그가 원하는 대로 해 주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잠자코 있었더니 가판대 주인은 끈을 풀어내 귀에 묶기 시작했다.

“어, 어때요. 괜찮나요?”

이런 오글거리는 대화는 젬병이나 다름없는 나는 최대한 딱딱한 말투를 유지하며 그에게 물었다.

다른 곳을 바라보고 있던 베탄이 내 말에 고개를 돌려 나를 보자 나는 괜스레 멋쩍어지는 것을 느꼈다.

“…….”

“왜 아무 말이 없어요. 괜찮은 것 같으니까 그냥 구입하는 게…….”

내가 어색한 표정으로 내 귀에 묶인 리본을 풀기 위해 손을 가져다 대려고 할 때였다. 베탄이 급하게 내 행동을 저지하더니, 입을 열었다.

“풀지 마. 예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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