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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섯명은 너무 많잖아요 (117)화 (117/156)

116화. 24시간이 모자라(1)

나는 작게 중얼거렸지만 에르셈프는 듣지 못한 것 같았다. 다시금 묻는 표정으로 나를 쳐다봤지만 나는 이내 고개를 내저었다.

“아까도 말했잖아요. 에르셈프를 돕고 싶으니까 그런 거예요. 에르셈프가 지금까지 저에게 많은 도움을 준 만큼, 저도 힘이 되어 주고 싶어요.”

에르셈프 당신의 마음을 얻어 애뮬릿을 받아 내야만 한다고 말할 수는 없었다. 그리고 애뮬릿을 차치하고서라도, 나에겐 에르셈프를 돕고 싶은 마음이 진심으로 있었다.

“…….”

에르셈프는 자기가 위험한 일에 나를 끌어들인다고 생각하는 것인지 줄곧 표정이 좋지 않았다. 금방이라도 그런 생각은 하지 말라며 나무랄 것만 같았다.

“제게 계획이 있어요.”

“계획?”

“네. 이쪽으로 와 봐요.”

나는 에르셈프에게 가까이 다가올 것을 제안했다. 그는 내 손짓에 따라 침대 위에 앉자 그의 무게 때문에 침대가 옆으로 기울었다.

그렇게 나는 에르셈프와 한참 동안 이야기를 나누었다. 에르셈프도 처음에는 탐탁지 않은 표정으로 들었지만 내가 말을 꺼낼수록 그도 진지하게 듣기 시작했다.

“진심이야? 루나.”

“그럼요. 허튼소리를 왜 하겠어요. 어떤 것 같아요?”

“…꽤 괜찮은 것 같아. 이대로 수행해도 아무런 문제가 없겠어.”

이야기를 마치자 궁을 나갈 준비를 하는 나에게 에르셈프가 다급하게 물었다.

“하루는 자고 가지 그래? 방도 많은데.”

그리고 나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거절했다.

“아니에요. 가 봐야 할 곳이 있어서요.”

내 말에 에르셈프는 아쉬운 표정을 지었다. 자신의 감정을 잘 숨겼던 예전의 에르셈프와는 달리 요즘 들어 그가 표현에 있어서 솔직해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디를 가려는 건데?”

그의 눈빛에는 호기심이 잔뜩 묻어 있었다. 호감도가 높아짐에 따라 나의 일거수일투족에 관심을 가지는 것이었다.

나는 그의 눈동자를 바라보며 호감도를 확인했다. 저번부터 호감도 알림이 오지 않는지라 호감도가 오르는지 내리는지 일일이 직접 확인을 해야만 했다. 그 때문에 내가 모르는 사이에 호감도가 훌쩍 올라 있기도 했다.

+

이름: 에르셈프 카이센 비젠티아

나이: 18

직위: 비젠티아 왕실의 제3 왕자

호감도: 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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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시나, 마지막으로 확인한 에르셈프의 호감도보다 올라있었다. 벌써 70%라니. 아직 100%에 달하려면 꽤 많이 남긴 했지만 가장 높은 세이먼과 고작 4%밖에 차이가 나지 않았다.

그리고 내 계획을 위해서는 이제 다른 남주인공들에게 다가가 그들의 호감도를 올려야만 했다.

“베탄에게 가려고요.”

“뭐? 베탄?”

베탄은 램클리프 기사단의 총기사단장이자 저번에 에르셈프에게 인사를 해서 일면식이 있던 사이였다.

“그게 누군데?”

그래서… 기억을 할 줄 알았건만 이 남자는 본인의 관심사 이외의 것엔 전혀 무지한 것 같았다.

“그… 저번 비무 대회 때 만난 키 큰 기사단장 있잖아요. 머리 새까만 사람.”

“…아. 기억났어. 그때 너를 데리고 갔던 놈 말이지?”

“…그렇게 기억하시는군요. 나름 마법협회에서 높은 직위라고 했는데.”

“마법협회 놈들은 하나같이 다 음침한 구석이 있어서 관심이 안 간단 말이야. 그 녀석은 왜 만나려는 건데?”

에르셈프가 힐끗 눈짓을 하며 물었다. 안 그런 척하지만 내심 궁금해하는 것이 느껴졌다.

“비밀이에요.”

“비…밀? 나에게 말 못 할 비밀이 있다는 건가, 지금?”

“그럼요. 에르셈프, 이 문은 어떻게 여는 거죠?”

바깥으로 나가는 커다란 문이 열리지 않았다. 아까 내가 들어오고 나서부터 시종들을 물린지라 문을 열어 줄 사람이 없었다. 내가 문 앞에서 낑낑대고 있자 에르셈프가 와서 문고리를 덥석 잡았다.

“감히 나랑 있다가 다른 남자를 만나러 가겠다는 건가? 응?”

“네. 에르셈프랑 있다가 다른 남자를 만나러 가려고요. 문제 될 것 있나요?”

“…그건 아니지만.”

내가 두 눈을 똑바로 뜨고 말하자 에르셈프가 오히려 당황하며 말을 줄였다. 목소리 한 번 깔았다고 이렇게 기가 죽는 꼴이라니, 귀여운데?

나는 거기서 멈추지 않고 말을 이었다.

“문 좀 열어 주세요. 한시라도 빨리 가 봐야 하거든요.”

내가 생글생글 미소를 지으며 에르셈프에게 말하자 그의 눈빛이 잠시 흔들렸다. 문고리를 잡고 무거운 문을 밀던 그는 열던 것을 멈추고 다시 문을 닫았다. 틈으로 보이던 바깥 풍경이 금세 닫혀 버렸다.

“명령이야.”

“네?”

“가지 마.”

갑자기 명령을 내리는 에르셈프의 모습에 나는 움직임을 멈추었다. 내가 세게 나온다고 이제는 왕자의 권한을 사용하겠다는 거야?

“…거부하겠다면요?”

“나도 같이 가.”

“네……?”

지금 이 남자가 뭐라고 하는 거야?

“아무것도 안 하고 가만히 있을게. 옆에서 지켜만 보게 해 달라고. 혹시 몰라, 네가 위험할 수도 있잖아? 그럴 상황을 대비해서 뒤에 내가 있을게.”

진지하게 중얼거리는 그의 말에 나는 웃음이 풋, 하고 터졌다. 덩치는 산더미만 한 남자가 수줍어하며 저렇게 말하고 있으니 어딘가 사랑스럽다는 생각이 들었다.

“……!”

사…랑스러워……?

나는 내가 느낀 감정에 놀랐다. 내가 지금 에르셈프를 보고 무슨 생각을 한 거지? 저 안하무인 싹수없는 남자가 뭐가 사랑스럽다는 거야!

나는 문고리를 잡고 있던 그의 손을 떼어 냈다. 그리고 양손으로 문고리를 잡은 뒤 손에 마나를 감아 거세게 벌컥 열었다.

눈부신 동궁 앞 정원의 풍경이 한눈에 들어왔다. 일반인은 구하기도 힘든 식물들이 예쁘게 수놓아져 있는 것이다. 에르셈프는 그런 배경과 기가 막히게도 잘 어울렸다.

“에르셈프, 우리는 아까 말한 시간에 다시 만나는 거예요. 그때까지 꼭 몸조심해야 해요.”

팔렌티움의 음흉한 눈빛과 그의 정체 모를 속내를 눈치채서일까, 자칫하면 에르셈프가 다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에르셈프는 정말로 강하지만, 아무리 강한 사람도 계획적인 꿍꿍이 앞에서는 나약해지는 법이었다.

“…내 걱정은 하지 않아도 돼.”

항상 저렇게 말하는 사람들이 가장 먼저 다치더라? 나는 그의 두 손을 꼭 부여잡고 신신당부했다.

“먹는 것도 항상 사람을 시켜서 먼저 먹게 해요. 에르셈프를 죽일 수 있는 가장 쉬운 유입 경로가 독약을 타는 것일 테니까. 어딘가에서 바늘에 찔리지 않도록 유의하고요.”

나는 전생에서 봤던 게임이나 소설 속 스토리를 떠올렸다. 왕족들이 가장 흔하게 죽는 케이스가 독살이었지?

“가 볼게요.”

이젠 정말로 간다는 것이 느껴진 것인지 에르셈프는 나를 붙잡지 않았다.

“…알겠어. 루나 뜻이 그렇다면 더 이상 붙잡지 않도록 하지.”

“고마워요.”

그렇게 나는 에르셈프에게 작별 인사를 하고는 궁 밖으로 나왔다.

그런데…….

“여기서 어떻게 가는 거야?”

길의 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드넓게 펼쳐진 정원만이 눈에 들어왔다. 도저히… 걸어갈 거리는 아닌 것 같았다.

“에, 에르셈프.”

나는 그를 부르며 다시 뒤를 돌자 그가 외투를 걸치며 밖으로 나오고 있는 것이 보였다.

“여기서 혼자 가려고 했어? 간도 크군. 병사들에게 발각되어 시체로나 발견되지 않으면 다행일 텐데. 자, 마차를 불러서 데려다줄게.”

동궁의 중앙으로 나를 이끈 에르셈프의 얼굴은 어느새 평소처럼 여유로운 표정으로 돌아와 있었다.

“아, 안 그래도 에르셈프를 부르려 했다고요.”

“잘했어. 무슨 일이 있든 나를 부르는 건 좋은 자세야.”

만족스러운 에르셈프의 미소와 함께, 나는 그와 함께 궁 밖으로 나가는 마차를 탈 수 있었다.

* * *

나는 마차를 갈아탄 뒤 베탄의 집으로 향했다. 예전의 퀘스트 덕분에 그의 집은 기억하고 있었기에 쉽게 찾아갈 수 있었다.

“이걸 위해서 그때 그런 퀘스트를 내려 준 건가?”

시스템을 피하려고 노력했지만 결국엔 시스템의 뜻대로 가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땐 술에 취한 척을 하느라 눈을 감고 있었기 때문에 도착한 풍경은 꽤 낯설었다. 저택 앞에 선 나는 그를 어떻게 불러내야 할지 고민했다.

“벨을 누르면 메이드가 나올 텐데. 뭐라고 해야 하지?”

이럴 땐 샐라임이 이젠 내 곁에 없는 게 새삼 피부로 느껴졌다. 지금까지 사소한 고민들은 모두 샐라임이 같이 머리를 맞대 주었던 터라 허리춤이 잠잠한 것이 적응이 되지 않는 것이다.

문 앞에서 잠시 고민을 하던 나는 이내 초인종을 눌렀다.

“누구십니까?”

예상한 대로 그때 보았던 얼굴의 메이드가 문을 벌컥 열고 나왔고, 나는 어정쩡한 말투로 내뱉었다.

“선생님을 만나러 왔어요.”

“몇 번째 도련님을 말씀하시는 겁니까?”

“베탄 선생님이요.”

“사전에 약속이 되어 있으십니까?”

딱딱하게 묻는 메이드를 향해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네. 말하면 아실 거예요.”

“안으로 들어오십시오.”

메이드의 안내에 따라 나는 베탄의 집 안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예전엔 제대로 보지 못했었지만 그의 집 안은 공작가 못지않게 화려했다.

“손님용 방으로 안내하겠습니다.”

나는 접객실 내부 소파에 앉아 베탄을 기다렸다. 곧이어 옷을 말쑥하게 차려입은 베탄이 성큼성큼 들어왔다. 병원에서 환자복을 입은 모습을 본 게 마지막이었으니, 반가운 마음이 먼저 올라왔다.

“루나……? 네가 여긴 어쩐 일이지?”

평상시에 보던 기사복이 아닌 일상복 차림의 베탄은 색다른 모습이었다. 간단하게 셔츠에 바지를 차려입었음에도 팔다리가 길쭉해서인지 태가 좋았다.

그는 예상치 못한 얼굴이라고 생각한 건지 당황한 티를 내었다.

+

이름: 베탄 오스가르드

나이: 21

직위: 램클리프 마법협회의 총기사단장

호감도: 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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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먼저 그를 찾아왔다는 이유만으로 5%가 올랐다. 베탄은 아직 호감도가 낮은 상태여서 그런지 사소한 것에도 호감도가 잘 오르곤 했다. 처음 봤을 때 부동의 0%를 유지하던 남자라고는 믿을 수 없는 모습이었다.

나는 어쩐 일로 찾아왔냐는 베탄의 물음에 잠시 대답을 머뭇거렸다. 내가 베탄을 찾아온 이유는 그의 낮은 호감도를 올리기 위해서였다. 베탄은 다섯 남주인공들 중에서도 가장 최하위의 호감도를 기록하는 남자였다. 머지않아 에르셈프가 베라일 공국 침입 작전에 돌입할 것이기 때문에 나는 베탄의 호감도를 올려야 할 의무가 있었는데, 다행히 그것에 적격인 방법이 하나 있었다. 그건 바로…….

+

# 카드 2

남자 주인공 한 명과 24시간 같이 있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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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에 퀘스트를 성공하고 받은 랜덤 카드가 있었다. 나는 오늘 이걸 쓰기 위해서 왔다. 이걸 사용해서 24시간 안에 베탄의 호감도를 최대한으로 끌어 올리는 것이었다.

의아한 얼굴로 내 대답을 기다리는 베탄을 향해 나는 입을 열었다. 뒷수습은 나중의 내가 알아서 하겠지, 지금은 지르고 보는 거다.

“선생님, 오늘 저와 데이트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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