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다섯명은 너무 많잖아요 (116)화 (116/156)
  • 115화. 팔렌티움(2)

    엔딩이 다가오고 있는 것이 느껴졌다. 에르셈프가 베라일 공국에 쳐들어가는 것이 정확히 언제인지는 알지 못했지만, 그것이 전쟁의 서막을 열 것임은 분명했다.

    “…진심으로 하는 말이냐?”

    팔렌티움의 표정이 좋지 않았다. 여유롭던 아까의 표정과는 달리 싸늘하게 굳은 채 얼어 있었다.

    “그렇습니다. 제 평생의 염원이었습니다. 그 과정에서 제가 죽는 한이 있더라도…….”

    에르셈프가 올곧은 눈빛으로 팔렌티움을 바라보자 그가 세게 인상을 찌푸렸다.

    “언제까지 철없는 소리를 할 셈이지? 베라일을 치지 않고 지금까지 참아 왔던 것은 모두 다 아버지의 뜻 때문이야. 지금 그 뜻을 거스르겠다는 말이냐? 고작 네까짓 놈이?”

    “아뇨. 정확히 말하면 카리브 제국 때문이겠죠. 베라일 공국은 카리브 제국과 연합을 맺고 있으니까요. 앞으로의 교역에 차질이 생길까 봐 두려워하시는 것 아닙니까?”

    “넌 국제 정세도 하나도 모르는 한심한 놈이야. 함부로 나섰다가 일을 그르칠 생각은 하지도 마라.”

    “언제부터 이 비젠티아 왕실이 이렇게 겁쟁이가 된 거죠?”

    “뭐?”

    “국모를 죽인 나라에 아무런 보복도 하지 않고 있잖습니까. 아무 말 하지 않지만 다들 비웃고 있을 거라고요. 고작 라인하르트 왕국이 이 정도라면서. 다들 어머니께서 지병으로 돌아가셨다는 말을 믿을 거 같습니까?”

    “네가 감히 어머니를 언급할 자격이 있느냐? 에르셈프 네가?”

    “…….”

    “곧 있으면 왕위 계승식이 다가올 거다. 그 전에 소란을 피우면 가만두지 않겠어.”

    저번에 비무 대회 때 길리안 놈에게 들었던 대로 팔렌티움은 왕위를 물려받는 것 같았다. 저런 사람이… 국왕이 된다는 생각에 답답함이 몰려왔지만 내가 어찌할 수 있는 건 없었다.

    “형.”

    “더 이상 듣고 싶지 않다. 처신 잘하거라. 널 지켜보는 눈이 많으니.”

    팔렌티움은 매서운 눈빛으로 에르셈프를 바라보며 쏘아붙였다. 에르셈프는 무어라 말하려고 입을 열었지만 팔렌티움은 매몰차게 등을 돌린 상태였다.

    옆에서 이 상황을 지켜보던 나는 이상한 의문이 들었다. 팔렌티움이 의도적으로 이 상황을 피하려고 하는 것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왕비를 죽인 것이면 충분히 전쟁을 일으킬 명분이 있을 텐데, 말을 피하기만 하다니. 이해가 되지 않았다. 아니면 내가 알지 못하는 국가 간의 어떤 관계가 있는 걸까? 하지만 그것도 아니라면…….

    “루나, 이만 들어가지. 계속 세워 둬서 미안하군.”

    “전 괜찮아요.”

    에르셈프가 내 어깨를 가볍게 감싸며 동궁 내부로 이끌었다. 대리석으로 가득한 홀이 나오고, 계단을 올라 복도를 걸을 때까지도 에르셈프는 아무런 말이 없었다.

    “일단 의원을 만나도록 해.”

    그가 방문을 연 곳은 커다란 침실이었다. 중앙을 차지한 침대 옆에는 의원으로 추정되는 노인이 가만히 앉아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팔을 다치셨다고 들었습니다. 보여 주실 수 있으십니까?”

    왕실 전담이어서 그런 건지 아주 공손한 태도로 나를 대하는 의원은 조심스럽게 내 옷소매를 걷었다.

    “붕대를 풀겠습니다.”

    내 팔의 상처는 꽤 컸다. 아픔은 무뎌져서 잊은 지 오래였지만, 검붉은 피가 눌어붙어 있었고 상처는 깊게 벌어진 채였다. 분명 에르셈프가 연고를 발라 주고 붕대를 감아 줬음에도 불구하고 전혀 나아진 기미가 보이지 않은 것이다.

    “치료를 진행하겠습니다.”

    의원이 직접 가져온 의료 도구들을 꺼내며 내 팔을 치료하기 시작했다. 에르셈프는 벽에 기댄 채 비스듬히 서서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

    내 상처를 치료하는 장면은 도무지 쳐다볼 엄두가 나지 않았기에 나는 팔을 의원에게 맡긴 채 다른 곳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렇게 허공을 응시하고 있었을까, 팔짱을 끼고 서 있던 에르셈프가 입을 열었다.

    “루나, 요새 밖을 나다니는 건 괜찮아? 살해 위협을 받진 않고?”

    예전에 에르셈프와 세이먼의 집에 찾아갈 때 암살자를 만났던 적이 있었다. 그때를 떠올리는 것일까, 그는 나에게 다정한 말투로 물었다.

    “네. 요새는 아무 일도 없어요. 누군가 쫓아오는 것 같지도 않고요.”

    “…그래? 다행이군. 별일이 없다니.”

    “아니면 때를 노리고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기도 해요. 저를 방심하게 만들다가 돌연 나타나서 절 잡아가진 않을까… 하는 걱정이요.”

    그러자 에르셈프가 빠른 속도로 대답했다.

    “그런 걱정은 하지 않아도 돼.”

    너무나 단호한 말투에 내가 그를 쳐다보며 되물었다.

    “왜요……?”

    “왜라니, 쓸데없는 걱정이니까 그렇지.”

    “쓸데없다뇨, 충분히 가능성이 있는 이야기라고 생각하는데요? 에르셈프도 봤잖아요!”

    “…….”

    “설마 혹시…….”

    “그 눈빛은 뭐지?”

    내가 에르셈프를 바라보던 눈을 가늘게 뜨며 묻자 그가 갑자기 말을 돌렸다.

    “혹시 아는 거라도 있어요?”

    “…글쎄. 잘 모르겠는데.”

    에르셈프는 어디 가서 거짓말할 성격은 못 되는 것 같다. 저렇게 얼굴에 훤하게 써 있으니, 어떻게 사람을 속일 수 있을까.

    “에르셈프 얼굴 완전 티 나요. 숨기는 거 있으면 말해 줘요.”

    “…….”

    “설마 에르셈프가 공작가에 입김이라도 넣었어요?”

    그냥 찔러보듯이 한 말이었는데, 에르셈프가 흠칫 놀라는 것이 느껴졌다. 그러고는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나를 마주 보았다.

    “…그냥 한마디 정도 한 것뿐이야.”

    “정말이에요?!”

    치료를 받다 말고 내가 벌떡 일어나려고 하자 의원이 깜짝 놀라며 손을 뗐다.

    “우, 움직이시면 안 됩니다.”

    “…죄송해요.”

    내가 다시 자리에 앉아서 팔을 내밀자 의원은 치료를 재개했다. 에르셈프는 집게손가락으로 자신의 볼을 살살 긁으며 대답했다.

    “위험한 것 같으니까……. 단지 걱정되어서.”

    “…….”

    “화났어?”

    “전혀요. 화날 이유가 없잖아요.”

    정말 고맙고, 또 화가 날 이유가 없다고 생각해서 그렇게 말한 건데 내 의도보다 말투가 차갑게 나가서인지 에르셈프가 얕게 인상을 쓰는 것이 보였다.

    “너에게 미리 말하고 했어야 했는데. 한시라도 빠르게 너를 위험에서 빠져나오게끔 하고 싶어서 그랬어.”

    “…고마워요. 저를 생각해 줘서.”

    “항상 생각하고 있어. 네가 하지 말라고 해도 할 거니까. 그러니 내가 볼 수 있는 곳에만 있어.”

    “…네.”

    대답은 짧게 했지만 머릿속엔 복잡미묘한 감정들이 무수히 오갔다. 비슷한 감정을 예전에 세이먼과 함께 있을 때도 느낀 적이 있다. 누군가에게 보호를 받는 느낌. 그래서 그에게 의지하고 싶은 느낌 말이다.

    에르셈프는 흔들림 없는 눈동자로 나를 바라보았다. 저 굳건한 눈동자가 마치 튼튼한 나무 기둥과도 같아서, 그에게 기대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정말… 그들의 손에 꼼짝없이 죽을 줄 알았는데.”

    나는 지금까지 밀리센트 공작가에서 필사적으로 벗어나고 싶었다. 하지만 그들의 손아귀는 무슨 짓을 해도 피할 수 없었다. 시시각각 나를 덮쳐 오는 그것은 내 삶을 피폐하게 했으며, 절망을 주었다.

    “네가 죽는 일은 없어. 무슨 일이 있어도, 내가 지킬 거니까.”

    하지만 이제는 죽음에서 한 발자국 멀어질 수 있었다. 그것도 나를 힘들게 하던 남주인공의 도움을 통해서 말이다. 존재 자체만으로 나를 위협하던 남주인공 덕에 내가 한시름을 놓게 된 것이다.

    그래서 나도, 그런 그를 돕고 싶었다.

    “치료가 끝났습니다.”

    의원이 달그락거리는 소리와 함께 의료 도구를 정리했다. 내 팔을 확인하자 깔끔하게 묶여 있는 붕대가 보였다.

    치료를 마친 의원이 밖으로 나가자 나는 묻고 싶었던 질문을 던졌다.

    “아까 팔렌티움 왕자에게 하던 이야기를 마저 해 줄 수 있나요?”

    “…….”

    그의 눈빛은 내가 이런 걸 물을 거라고는 전혀 생각하지 못한 것 같았다.

    “베라일 공국에 들어가 칼을 훔쳐 올 생각이라는 것 말이에요. 에르셈프에게 그 칼은 어떤 존재인가요?”

    에르셈프는 잠시 머뭇거리더니, 입을 열었다.

    “그 칼은 비젠티아 왕실에서부터 대대로 전해져 내려오던 전설의 보검이야. 제3 왕자까지 열세 살이 된 왕자에게 하나씩 부여되는 것인데, 나는 하사받지 못했어. 베라일 공국의 침입 사건 때, 그 칼을 도둑맞고 말았거든.”

    에르셈프는 한 번 입을 여니 그다음부터는 막힘없이 술술 말하기 시작했다.

    “다들 심증으로는 베라일 공국이 가져갔다고 생각하지만, 전설로 내려오던 보검을 잃어버렸다는 사실이 비젠티아 왕실에 큰 타격을 줄 것이라는 생각 때문에 아무런 조치도 할 수가 없었지.”

    “그럼 베라일 공국에서는 그 칼이 전설의 보검이라는 걸 모르는 거예요?”

    “그렇지. 그 검에 내려오는 전설을 아는 건 라인하르트 왕국의 왕족뿐이니까.”

    “…….”

    매번 드는 생각이지만 에르셈프는 정말 비밀 없이 모든 사실을 다 나에게 말해 주는 것 같다. 내가 알아도 되는 게 맞겠지?

    “그리고 수년이 흘렀어. 어머니도 그 사건 당시에 돌아가셨기에 왕실은 경황이 없었고 결국 유야무야되어 버렸지. 하지만 난 이렇게 당하고만 있지 않을 거야. 어떻게든 베라일에서 도난당한 칼을 빼앗아 오고, 어머니를 죽인 대가를 치르게 할 셈이라고.”

    에르셈프는 과거에 대한 이야기만 나오면 눈이 무섭게 번뜩이곤 했다. 그만큼 열망이 있는 것일까, 내가 알지 못하는 그의 감정은 복잡하게 얽혀 있는 것 같았다.

    “하지만 팔렌티움 왕자가 지금 그걸 막고 있는 상황인 거잖아요.”

    “맞아. 형은 예전부터 보수적인 태도를 취해 왔어. 물론 외교가 중요하지 않은 건 아니야. 요새처럼 무역이 중요해진 시점에서는 결코 무시할 수 없는 부분이지. 하지만……. 이렇게 계속 상황을 유지하다가는 베라일 공국뿐만 아니라 카리브 제국, 나아가 율리우스 제국까지. 전 세계 나라에게 무시만 당하게 될 거야. 그것에 대한 반증으로 요새 타국의 사신이 정기적인 방문을 끊고 있어.”

    “그러면… 베라일 공국을 치고 칼을 빼앗아 오는 것에 대한 계획은 어떻게 되는 거죠?”

    그가 무슨 생각을 가지고 일을 꾸미고 있는 건지 궁금했다. 그 상황 속에서 나는 죽음을 맞이할 운명이기에, 그의 작전은 미리 들어 놓을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다.

    “어째서 네가 이런 걸 궁금해하는 거지? 자칫 엮이기라도 한다면 위험해질 거야.”

    “에르셈프를 돕고 싶어요.”

    문제의 상황을 정확히 타파하기 위해서는 내가 그 상황에 들어갈 필요가 있었다. 게임 시스템에게 농락당하지 않기 위해서는 직접, 빠져나갈 수 있는 탈출구를 찾아내야 한다는 것이다.

    “나를… 돕고 싶어?”

    “네. 베라일 공국 침입 작전. 제가 도와줄게요. 분명 제가 도움이 될 수 있을 거예요.”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루나. 이건 애들 장난이 아니라고. 사방에서 널 죽이려고 공격할 거라고.”

    “나도 알아요. 그렇다면 지금까지 에르셈프가 그렇게 훌륭한 검술 실력을 가지고도 이 작전을 망설인 이유가 뭐죠? 어떤 기폭제가 없었기 때문 아닌가요?”

    “…….”

    “일에 착수하기 위해서는 불꽃을 붙여 줄 사람이 필요하죠. 그 사람의 역할, 제가 해 줄게요.”

    나 또한 이 선택이 옳은 선택인지는 알 수 없었다. 하지만 내 머릿속에는 한 가지 계획이 있었다.

    “그러니 저와 함께 작전을 짜요. 에르셈프가 칼을 도로 가져와서 왕자의 자격을 인정받고, 왕비님에 대한 복수를 할 수 있도록 도와줄게요.”

    “다시 한번 묻지. 대체 이렇게까지 하는 이유가 뭐야?”

    에르셈프가 한쪽 눈을 찌푸리며 나에게 물었다. 의심의 눈빛이라기보다는, 확인하고 싶어 하는 마음 같았다.

    나는 그런 그를 향해 들릴 듯 말 듯 조용하게 중얼거렸다.

    “당신의 마음을 얻고 싶거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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