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다섯명은 너무 많잖아요 (115)화 (115/156)

114화. 팔렌티움(1)

샐라임의 솔직한 인사를 마지막으로 우리는 헤어져야만 했다. 곧 날이 어두워질 터라 무슨 일이 벌어질지 알 수 없었기에 빠르게 움직여야 했기 때문이다.

“아버지, 루나가 북쪽 숲을 무사히 빠져나갈 수 있도록 힘을 써 주세요.”

샐라임이 정령왕을 향해 부탁하자 정령왕이 고개를 끄덕거렸다.

“좋다. 너를 북쪽 숲 입구로 이동시켜 주면 되는 것이냐?”

그러고는 나를 향해 알 수 없는 주문을 내뱉기 시작했다. 나는 가만히 그 주문을 바라보다가, 뭔가 허전한 기분이 드는 것을 느꼈다.

“아! 레크리드랑 에르셈프! 둘도 데리고 가야 해요!!”

“정령국 입구에 있는 녀석들인가 보군.”

북쪽 숲의 사정을 전부 아는 것인지 레크리드와 에르셈프의 존재를 바로 알아챈 정령왕은 또다시 주문을 영창하기 시작했다.

“5초 뒤면 너희들은 북쪽 숲 초입에서 만날 수 있을 거다.”

“……!”

“5, 4, 3, 2, 1…….”

정령왕이 읊는 숫자가 떨어짐에 따라 내 눈앞의 것들이 점차 흐려지기 시작했다. 눈앞이 픽셀화되는 것 같더니, 잘게 부서지며 정령국은 자취를 감추었다.

“루나, 안녕.”

희미하게 들리는 샐라임의 목소리를 마지막으로 나는 눈을 떴다.

나보다 3초 정도 늦게 도착한 에르셈프와 레크리드는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멍하니 서 있었다.

“다들 괜찮은 거죠?!”

내 목소리가 들리자 에르셈프와 레크리드는 퍼뜩 정신을 차렸다.

“여기는 어디지……?”

“북쪽 숲의 입구예요. 정령왕이 우리를 여기로 바로 보내 주었어요!”

눈앞에는 <북쪽 숲에 오신 걸 환영합니다.> 라고 쓰인 허름한 팻말을 볼 수 있었다.

그 지옥 같은 숲에서 또 밤을 보낼 자신은 없었기에 나는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다행이에요. 밤이 되면 어쩌나 걱정했는데.”

“안 그래도 우리 또한 그것 때문에 골머리를 앓고 있었는데 이렇게 간단하게 바깥으로 내보내 줄 줄이야. 정령왕도 능력 하난 대단한가 보군.”

“정말로 정령국에 갔었어요, 루이아나 씨?”

“네, 맞아요. 여러 정령들도 보고, 정령왕도 만날 수 있었답니다. 무사히 샐라임의 봉인도 풀 수 있었고요.”

“샐라임의 봉인?”

영문을 알 리 없는 에르셈프가 물었다.

“루이아나 씨의 칼에는 불의 상급 정령이 봉인되어 있었어요. 그 봉인을 해제하기 위해 정령국에 왔었던 거구요.”

“…상급 정령을 지니고 있었다니, 분명 몸에 무리가 갔을 텐데. 괜찮나, 루나?”

“그럼요. 아무 문제 없어요.”

정령왕의 말도 그렇고, 방금 에르셈프의 말도 그렇고 나는 샐라임을 지니고 있었다는 것에 대한 위험성이 컸다는 것에 놀랐다. 나는 전혀 아무렇지도 않았는걸.

“어서 돌아가요.”

우리는 음산한 분위기를 풍기는 북쪽 숲을 떠나 게이트로 발을 옮겼다.

게이트를 타고 마을로 돌아올 수 있었던 우리는 갈림길에서 가던 길을 멈추었다. 그리고 나는 한 명씩 감사의 인사를 했다.

“레크리드, 제 여정에 참여해 줘서 고마워요.”

물론 예상대로 우리는 레크리드의 물품을 전혀 쓰지 않았고, 그가 이 여정에 큰 기여를 했던 것도 아니었다. 하지만 위험하다고 소문이 자자했던 북쪽 숲을 내 부탁에 따라 흔쾌히 나서 줬던 것을 생각하면 아주 고마울 따름이었다.

“아니에요. 제가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해서… 미안해요.”

“아무 일도 안 일어난 것이니까 오히려 다행인 거죠! 숲의 내장에 끌려가는 이상한 일이 벌어지긴 했었지만 레크리드와 에르셈프 모두 다치지 않고 무사히 돌아와서 천만다행이에요.”

“…….”

“에르셈프도 어서 가서 쉬어요. 후유증이라도 있을까 봐 걱정이네요.”

“무슨 소리야, 루나.”

“?”

“나와 같이 내 전담 의원에게 가기로 한 건 잊은 건가?”

“그게 진심이었단 말이에요?”

“이리 와. 왕실로 가지.”

그의 말을 들은 내가 우물쭈물하고 있자 에르셈프가 내 손목을 잡고 확 이끌었다. 레크리드는 그런 우리를 두 눈 뜨고 가만히 바라보고 있었다.

“……?”

그런데 레크리드의 표정이 이상했다. 평소처럼 탐탁지 않은 표정으로 보는 것이 아니었다. 아쉬운 얼굴도 아니었고, 화가 난 것도 아니었다. 입꼬리를 잔뜩 올린 채 방긋방긋 웃음을 짓고 있는 것이다.

“왜 그래요, 레크리드……?”

그러자 레크리드가 정신이 확 든 사람처럼 눈을 동그랗게 떴다.

“네? 뭐가요?”

“괜찮은… 거죠? 어디 안 좋은 데는 없고요?”

“전혀요. 아무런 문제 없답니다.”

그는 나에게 안심을 주려고 하는 건지 이내 포근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전 이만 이쪽으로 가 볼게요.”

그러고는 짧은 인사를 뒤로 미련 없이 자리를 떴다. 에르셈프는 레크리드를 전혀 신경 쓰지 않은 채 나를 다시금 이끌었다.

“앞에 내 호위 기사 킬베르가 나와 있을 거야.”

“아, 아니, 제가 궁에 들어가도 되는 거예요?”

“당연하지. 내 집인데 뭐가 문제인가?”

얼마 걷지 않아 정말로 왕실의 기사복을 입은 채 에르셈프를 기다리고 있는 기사 한 명과 휘황찬란한 마차 하나가 보였다.

에르셈프가 가볍게 손짓을 하자 기사는 한걸음에 이쪽으로 달려왔다.

“시간 하나는 잘 맞추는군.”

“안 맞추면 왕자님께 무슨 짓을 당할지 몰라서요.”

“누가 들으면 매일 같이 내가 널 괴롭히는 것 같다고 생각하겠는걸.”

“며칠 전에도 왕자님께서 아무런 예고 없이 정비 부대를 나가시는 바람에 그 뒤처리는 모두 제가 맡아서 했다고요……!”

“쓸데없이 말이 많아.”

에르셈프는 내가 마차에 잘 올라탈 수 있도록 뒤에서 허리를 받쳐 주었다. 평소에 타는 마차와 달리 높이가 꽤 있던 터라 오르는 것이 익숙하지 않았다.

“왼편에 발을 대고 한 번에 올라야 해.”

에르셈프는 내가 오르는 것을 옆에서 보다가, 몸을 휙 돌려 킬베르에게 쏘아붙였다.

“왜 계단을 가져오지 않은 거지?”

“와, 왕자님께선 항상 잘 오르시잖아요……! 저번엔 거추장스러우니 두고 다니라고 하셨었으면서…….”

킬베르가 입을 삐죽거리자 에르셈프는 더 이상 들을 가치도 없다는 듯 마차에 올라탔다.

“출발해.”

그렇게 우리는 라인하르트 왕국의 비젠티아 왕실로 향하게 되었다.

* * *

영화에서만 보던 비주얼이 내 눈앞에 있었다. 붉은색과 황금색으로 어우러진 거대한 왕궁이 사방에 가득했다. 길고 긴 정원을 지나 방향을 꺾어 도착한 곳은 에르셈프가 살고 있다는 동궁이었다. 멀리서만 봐도 눈이 멀어 버릴 것 같은 본궁과는 달리 동궁은 좀 더 깔끔하고 다듬어진 듯한 외관이었지만 이마저도 화려하기 그지없었다.

“우와……. 왕자님은 이런 곳에 사는군요. 엄청 근사해요.”

“왜, 맘에 드나? 여기서 살고 싶다면 방을 마련해 줄 수 있어.”

“그, 그건 좀…….”

에르셈프는 말끝을 흐리는 나를 이끌고 성큼성큼 걸어갔다. 의원은 이미 도착하여 나를 기다리고 있다고 말했다.

그렇게 궁 안으로 들어가려던 찰나였다. 문을 들어가려던 그때, 안쪽에서 누군가 나오는 것이 느껴졌다.

“……?”

에르셈프 또한 느꼈는지 발걸음을 우뚝 멈추었다. 그를 슬쩍 바라보자 그의 표정이 차갑게 굳어 있는 것이 보였다.

“어, 오랜만이구나, 동생아.”

문에서 나온 사람은 에르셈프와 마찬가지로 회색빛 머리칼을 가진 한 남자였다. 팔렌티움은 에르셈프의 형제답게 그 또한 키가 크고 덩치가 좋았지만 그래도 에르셈프보다는 덜한 것 같았다.

“무슨 일로 오신 겁니까.”

에르셈프의 목소리에서는 차가움이 뚝뚝 묻어 나왔다. 도무지 형제를 대하는 말투라고는 느껴지지 않았다.

하지만 그건 상대편도 마찬가지였다. 동생을 바라보는 눈빛이 저렇게 음흉할 수가 없었다. 그는 무언가 꿍꿍이를 꾸미는 것 같은 얼굴로 한쪽 입꼬리를 올리며 씨익 미소를 지었다.

“네가 궁을 잠시 비웠다는 말을 들어서 말이야. 그렇게 열과 성을 기울이던 아카데미 정비도 내팽개치고 간 곳이 어디인가 궁금해서 이 형님이 한걸음에 달려왔지.”

“평소엔 저에게 관심도 없으시던 분이 무슨 바람이 드신 겁니까.”

에르셈프의 말에 팔렌티움은 시선을 돌려 옆에 있는 나를 훑어보았다.

“요새 재미 좀 보는 여자인가 보지?”

“말조심하십시오.”

“이봐, 이놈이 얼마나 싹수가 노란지 알아? 어렸을 때부터 아주 남달랐다고. 너도 재미 다 보면 버려질지도 몰라. 얘는 지 어미도…….”

“형님!”

“…….”

“멈추지 않으시면 저도 가만히 있지 않겠습니다.”

“안 멈추면 어쩔 건데?”

“원하는 게 뭡니까. 용건만 말해 주십시오. 갈 길이 바쁩니다.”

에르셈프는 팔렌티움에게 애써 예의를 차리고 있는 것이 느껴졌다. 형제에게 남은 최소한의 애정이라도 있는 걸까. 지나가는 개 보듯 대하는 팔렌티움과는 달리 에르셈프는 자신의 감정을 꾹꾹 눌러 참고 있었다.

에르셈프가 고개를 숙인 채 시선을 피하자 팔렌티움은 그제야 만족스럽다는 듯 본론을 꺼냈다.

“네가 베라일 공국에 관심을 가지고 있다는 소문이 들려왔다. 지금 와서 무얼 어쩌겠다는 거냐?”

“형님도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베라일 공국이 이 나라에 얼마나 큰 모욕을 주었는지, 그로 인해 저희가 입은 피해가 무엇인지. 저는 아직도 그 생각만 하면 잠을 이룰 수가 없습니다.”

“…하하.”

“?”

“그건 전부 다 네 놈 책임 아니더냐? 누누이 말하지만 칼을 잃어버린 건 네 잘못 때문이야. 이제 와서 베라일 공국을 치려고 했다간 국제적으로 큰 문제가 생길 것이라는 건 모두가 다 아는 사실일 텐데?”

“어떻게 그런… 말씀을 하실 수 있습니까? 어머니가 돌아가신 것은 모두 다 베라일 놈들 때문입니다. 그것에 대한 복수도 전혀 하지 않겠다는 겁니까?”

그러자 팔렌티움이 흥미로운 표정으로 탈바꿈하며 에르셈프의 귀에 입을 갖다 대었다.

“너, 군사 기밀을 영문도 모르는 여자애 앞에서 나불거릴 셈이냐? 그 정도로 정신머리가 없어? 저 계집애가 베라일 공국 첩자라도 되면 어떡할 셈이지?”

갑자기 화살의 방향이 나를 향해 왔다. 팔렌티움 또한 찢어진 눈매로 여유롭게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아까부터 느낀 거지만, 저 팔렌티움이란 작자는 형이라는 무기를 내세워서 에르셈프를 입맛대로 가지고 노는 것만 같았다.

사실상 베라일 공국이나 칼을 잃어버렸다는 일 같은 것은 나와 알 바가 아니었다. 순전히 에르셈프의 배경이었고, 그 혼자서 겪어 내야 할 문제였다. 그런데 옆에서 듣자 하니 팔렌티움이 내 성질머리를 살살 긁는 것이다.

뭐? 내가 재미를 보면 버려진다고? 아니면 베라일 공국의 첩자라도 돼?

하지만 상대는 이 나라의 왕자였다. 그것도 에르셈프의 형. 괜히 말을 함부로 놀렸다가 어떻게 될지 모르는 노릇이었다.

그때, 가만히 입을 다물고 있던 에르셈프가 조용히 말을 꺼냈다. 낮은 음성이었지만 비장함이 느껴지는 목소리였다.

“베라일 공국으로 들어가 칼을 되찾아 올 겁니다.”

그리고 나는 그 말을 듣자, 왠지 모를 데자뷰가 떠올랐다.

내가 ‘가이즈 인 러브’를 플레이하며 보았던 엔딩. 에르셈프 루트를 탄 뒤 내가 죽던 그 엔딩 장면은… 변방에 있는 작은 나라와의 전쟁 도중에 있던 일이었다.

“전쟁이 일어난다 할지라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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