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다섯명은 너무 많잖아요 (114)화 (114/156)
  • 113화. 부자지간(3)

    뜨거운 느낌이 지나고, 아주 고귀하고 신성한 힘이 내 배에 안착하는 것이 느껴졌다. 음식을 삼킨 것처럼 배 속을 떠돌던 그것은 온몸 전체로 뻗어 나가기 시작했다. 손가락 끝까지 나아간 정체 모를 힘은 온전히 나에게 흡수되고 있었다.

    “…처음 느껴 보는 감각이야.”

    에너지가 차오르며 내가 가지고 있었던 불의 친화력이 융합하는 것만 같았다. 지금까지 가지고만 있고 사용은 하지 못했던 거대한 불의 친화력을 이제는 쓸 수 있는 느낌이었다.

    나를 감싸고 있던 신성한 힘이 서서히 사그라들고 다시 원래대로의 모습으로 돌아왔지만 나는 이전의 나와 확연히 다르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뭐가 바뀌었는지 어디 한번 확인해 볼까.”

    혼잣말로 중얼거린 나는 ‘상태창’을 외쳤다.

    +

    이름: 루이아나 밀리센트

    나이: 16

    직업: 상급 정령술사(임시)

    보유 스킬:

    -패시브: 검술 Lv.8, 체술 Lv.6, 정령술 Lv.40

    -액티브: 불꽃 칼날, 붉은 낫, 채찍질, 물방울 무도, 찔러 베기

    호감도:

    세이먼 유리츠 74%

    에르셈프 카이센 비젠티아 65%

    잰퓨어 이브 41%

    레크리드 니엘 40%

    베탄 오스가르드 26%

    +

    “허, 헉!”

    내 눈이 터질 듯이 크게 확장되었다. 잘못 본 건 아닌지 눈을 몇 번이나 비비며 확인했다. 하지만 달라지는 건 전혀 없었다.

    “상급… 정령술사……?”

    샐라임을 받아들이려면 상급 정령술사가 되어야 하는 건 맞았다. 샐라임은 상급 정령 중에서도 높은 편이라고 했으니까 중급 정령술사로는 꿈도 못 꿀 거다. 그런데 그렇다고 정말 이렇게 눈 깜짝할 사이에 상급 정령술사가 되어 버린다고? 상급 정령술사는 세계에 몇 명 없다고 했을 정도인데?!

    “그런데 ‘임시’는 뭐지?”

    이상한 글자가 괄호 안에 써 있었다. 처음 들어 보는 등급에 고개를 갸웃거리고 있었는데, 내 혼잣말을 들은 정령왕이 입을 열었다.

    “남다른 아이란 건 알았지만 그런 것까지 알아챌 줄은 몰랐구나.”

    “……?”

    “아마도 내가 너의 자질을 억지로 끌어 올려놓았기 때문에 그런 것이겠지. 네 변화가 불완전한 상태임을 뜻하는 말이다. 정확히 말하자면 상급 정령술사라고 할 수는 없지. 하지만 상급 정령술사 능력치의 일부는 가져올 수 있어.”

    눈에 띄게 놀라는 나를 보며 정령왕이 친히 설명해 주었다. ‘임시’는 인간 세계에 있는 ‘인턴’ 같은 느낌인 건가? 완전한 상급 정령술사는 아니더라도 이 정도라면 엄청난 승급이었다. 하지만 고작 하급 정도의 실력을 가졌던 내가 이렇게 갑자기 상급의 실력을 가져도 되는 걸까, 하는 의문이 들었다.

    다른 사람들은 피를 깎고 살을 도려내는 듯한 고통을 겪어 가며 수련한 뒤 얻어 낸 자격일 것이기 때문이다.

    “제가 과연 이 힘을 받아도 되는 걸까요……?”

    그러자 정령왕은 인자한 목소리로 대답해 주었다.

    “정령과 함께 지낼 수 있다는 것은 결코 평범한 일이 아니다. 누구보다 특별하고 강인한 사람에게만 허용되는 일이지. 나는 그런 너에게 하나의 ‘시험’을 제시한 거다. 지금은 임시 상태이기 때문에 상급 정령술사 능력의 10분의 1도 사용할 수 없어. 샐라임을 받아들이기 위해 상급 정령술사라는 타이틀만 붙여 준 것이지. 하지만 앞으로 샐라임 녀석을 잘 다룰 줄 알게 된다면 그땐 정식으로 승급할 수 있을 거야.”

    “…그렇군요.”

    “많은 힘을 가지게 된 만큼 큰 책임도 따를 거다. 올바르고 현명하게 사용하는지 내가 잘 지켜보마.”

    “알겠습니다.”

    정령왕의 말에 나는 그나마 마음이 편해질 수 있었다. 나도 내 분수에 과한 힘은 받고 싶지 않았다. 감당할 수 없는 힘은 독이라는 걸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헉, 그러면 이제 샐라임을 쓸 수 있는 거잖아?”

    그와 호흡을 맞출 생각에 벌써부터 기대가 몰려왔다.

    그리고 한 가지 더 기대가 되는 것이 있었는데, 그건 바로…….

    “그럼 이제 봉인을 풀어 주십시오, 아버지.”

    “알겠다.”

    샐라임의 봉인이 풀린 모습이 너무나도 궁금했다. 대체 어떤 형상을 하고 있을까? 샐러맨더는 도마뱀, 카사와 정령왕은 불꽃 모양의 생김새였다. 정령술 수업을 대충 들은지라 불의 상급 정령엔 어떤 모습들이 있는지 알 길이 없었다.

    “칼을 들어 올리거라.”

    정령왕이 나에게 명령했고, 나는 잽싸게 칼을 정령왕의 앞에 대령했다.

    그리고 정령왕은 알 수 없는 주문을 영창했다. 정령들이 썼던 고대 언어인 건지 전혀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긴 주문을 마친 정령왕이 손바닥으로 바닥을 내리쳤다.

    쾅!!

    손바닥이 바닥과 닿음과 동시에 펑, 하는 소리가 겹쳐졌다. 그리고 이 주변을 빼곡하게 메우는 하얀 연기가 피어오르며 거센 바람이 일었다.

    나는 눈을 찌푸리며 바람을 견뎠고, 내 몸이 조금 밀려 나가는 것을 느꼈다. 뿌옇게 피어오른 연기가 차차 걷히며 나는 정령왕 앞에서 주황빛으로 활활 타오르고 있는 무언가의 형상을 볼 수 있었다.

    그 형상은 이내 나에게로 다가왔고, 나는 그걸 보자마자 경악을 할 수밖에 없었다.

    “괴, 괴, 괴물……?”

    온몸엔 불꽃을 감싼 채 두 발로 서 있는 그것은 인간형 몬스터와 흡사했다. 인간의 형상은 띠고 있지만 팔다리가 굉장히 길쭉해서 인간인지 괴물인지 알 수 없었다.

    “히, 히익.”

    나를 향해 다가오는 괴물, 아니 샐라임의 형상에 내가 기겁을 하며 입을 틀어막자 샐라임이 멈칫하는 것이 보였다.

    “이 모습은 좀 무서운가?”

    샐라임은 그 말을 함과 동시에 펑! 소리를 내며 사라졌다. 그가 사라지면서 만들어 낸 하얀 연기 안에서 무언가가 움직였고, 나는 그것을 보기 위해 손을 뻗어 연기를 걷어 냈다.

    “새……?”

    연기가 걷히자 드러난 것은 새빨갛게 빛나는 커다란 불사조였다. 깃털 하나하나가 누가 매만진 것처럼 아주 정갈하고 깔끔했고, 불사조가 풍기는 그것만의 분위기는 무엇보다 열정적이고 강렬했다.

    “샐라임 원래 새였어요……?”

    입을 틀어막은 채 샐라임에게 말하자 그가 어처구니가 없다는 듯 코웃음을 팡 쳤다.

    “불사조와 새는 전혀 비교할 수 없는 대상이야. 급이 다르다고, 급이.”

    “새라고는 전혀 생각 못 했는데…….”

    뭔가 내 은연중에 있던 샐라임의 이미지와 너무 달라서 충격을 먹을 수밖에 없었다.

    “왜, 별로냐?”

    “그건 아니지만… 전 샐라임을 상상할 때마다 인간 모습을 떠올렸어요.”

    이유는 알 수 없었다. 너무 친구처럼 지냈던 탓일까, 정령인 걸 알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샐라임의 모습을 상상할 때마다 짓궂은 남자아이를 떠올렸었다.

    “그래? 그렇다면, 뭐.”

    펑!

    다시 한번 더 모습을 바꾼 그, 아니 불사조는 또 하얀 연기 속으로 사라졌다.

    그리고 뭉게뭉게 피어오르는 연기 속에서 모습을 드러낸 것은…….

    “파, 팔?!”

    인간의 팔이었다. 연기 속에서 기다란 팔이 쭉, 하고 뻗어 나온 것이다.

    내가 기겁을 하며 그 광경을 지켜보고 있는데, 곧이어 연기가 전부 걷히고 진짜 모습이 드러났다.

    “사람이잖아!”

    그랬다. 불사조가 사라진 자리에는 커다란 장신의 남자가 서 있었는데, 붉은 머리부터 까무잡잡한 피부를 가진 모습이었다.

    “이게 샐라임이에요?!”

    “반은 맞고 반은 틀리지. 나는 상급 정령이기 때문에 항상 원하는 모습으로 바뀔 수 있어. 그중에서 인간의 모습도 가능한 거고.”

    “…허억.”

    “네가 하도 무서워하고 기겁하는 것 같길래 친근한 인간의 모습으로 바꿔 줬다.”

    새빨간 머리에 갈색 눈동자를 가진 남자는 목 끝까지 올라오는 하이칼라의 흰 셔츠를 입고 있었는데, 참 예쁘게 잘 어울렸다.

    또 다리는 어찌나 긴지, 상체는 예의상 존재하는 게 아닌가, 싶은 생각이 들 정도였다.

    날렵한 브이라인의 턱에 반항아처럼 약간 위로 올라간 눈매, 적당히 도톰한 입술까지, 샐라임은 누가 봐도 엄청난 미남이었다.

    내가 이런 남자랑 동고동락을 한 거라니!

    아카데미에 다녔으면 세이먼, 에르셈프와 견주어질 정도로 말끔한 얼굴이었다.

    “자, 잘생겼네요, 샐라임…….”

    “뭐?”

    나는 감탄사를 내뱉듯이 그에게 말했고, 그 말을 들은 샐라임은 순식간에 얼굴이 새빨개졌다. 은근 귀여운 구석이 있다니까.

    “이런 남자가 수백 년이나 산 할아버지라니…….”

    “할아버지라니! 정령 중에선 아직 젊은 편이란 말이다!”

    내 말에 샐라임이 발끈해서 소리를 쳤는데, 정말 입에서 불꽃이 나올 것만 같았다.

    “…….”

    나는 계속해서 그의 모습을 관찰했다. 몇 개월 동안 내 속을 터놓고 내 일거수일투족을 공유하던 남자가 사실은 이렇게 생긴 모습이었다니.

    “뭘 그렇게 뚫어져라 봐.”

    “샐라임이요. 언젠가 너무 만나 보고 싶었는데, 이렇게 생겼었구나.”

    “그렇게 말하니까 모습을 보여 주는 게 민망하잖아.”

    “눈에 많이 담아 놔야지.”

    “뭐 헤어지는 것도 아닌데 담아 놓긴 뭘 담아 놔. 네가 ‘샐라임’ 한마디만 부르면 바로 달려올 텐데.”

    “그래도 일분일초를 붙어 있었는데, 이제 떨어져야 하는 거잖아요. 이제는 샐라임이랑 대화하다가 혼잣말한다는 오해를 받을 수도 없고, 시시각각으로 생기는 고민들을 샐라임에게 털어놓을 수도 없어요.”

    그러자 샐라임이 집게손가락으로 자신의 볼을 긁었다.

    “그럼 가지 말까?”

    “네?”

    그의 입에서 나온 말은 예상 밖이었다. 이 남자가 방금 뭐라고 한 거야?

    “가지 말고 너 옆에 붙어 있으면 어떻겠냐고, 물었어.”

    “그, 그거야…….”

    나는 쉽사리 대답을 하지 못했다. 샐라임이 옆에 붙어 있다는 건 너무 좋은 일이지만… 이런 남자가 내 옆을 따라다닌다고?

    지금 에르셈프와 레크리드 사이에 있는 것도 힘든데, 다섯 남주인공도 모자라 한 명이 더 추가된다니, 상상만 해도 끔찍한 일이었다.

    “그래도 샐라임은 정령계에서 쉬어야 하잖아요. 옛날부터 그걸 원해 왔기도 했고.”

    “그건 그렇지만 너랑 지내면서 많이 적응했어. 인간 세계도 많이 익숙해졌고.”

    샐라임은 긴 다리로 성큼성큼 나에게 다가왔다. 그을린 듯한 구릿빛 피부가 인상적이었다.

    그의 시선이 나에게 꽂혔고, 나는 그와 눈을 맞췄다. 처음으로 마주하는 시선이었다.

    “아니에요. 이런 모습으로 제 옆에 있는 것도 좀 그렇고…….”

    “뭐가 그런데?”

    “어, 그건……. 아, 샐라임의 지금 모습은 너무 눈에 띄어서 사람들에게 시선 집중을 받을 게 분명해요. 여자 기숙사에는 들어갈 수도 없을 거고요. 분명 곤란한 일이 많이 생길 거라구요.”

    순간적으로 다섯 남자들과 샐라임까지 합쳐진 여섯 명 사이에 내가 껴 있는 장면을 상상했다.

    샐라임은 또 분명 아빠처럼 잔소리를 해 댈 거고, 남주인공들이 이상한 짓을 하려고 할 때마다 훼방을 놓겠지. 그러면 호감도를 올리는 것에 차질이 생길지도 몰라. 그래, 샐라임은 정령계에 두는 것이 맞아.

    생각을 마침과 동시에 나는 샐라임에게 내뱉었다.

    “앞으로는 정령계에서 푹 쉬고, 제가 필요로 할 때 절 구해 줘야 해요. 알겠죠?”

    “그걸 말이라고.”

    “…….”

    “정령의 의무는 널 지키는 것뿐이야. 그런 걱정은 하지 않아도 돼.”

    그는 평소처럼 아무렇지 않은 말투로 내뱉었다.

    “그럼……. 이제는 헤어져야 할 때인가.”

    샐라임은 깊은 눈매로 나를 지그시 쳐다보았다. 그의 눈빛에는 가족과도 같은 애정이 묻어나는 것 같았다.

    “뭔가… 허전하네요. 항상 제 허리춤에서 목소리가 나왔었는데.”

    왠지 모를 씁쓸한 기분이 들었다. 샐라임을 보내는 게 맞다는 생각이 들면서도, 동시에 보내고 싶지 않았다.

    “……!”

    그때, 샐라임이 입꼬리를 올리며 내 머리에 손을 툭 얹었다. 그리고 부드럽게 내 머리를 쓰다듬었다.

    “내가 옆에 안 붙어 있어도 잘 지낼 수 있지?”

    “…그럼요.”

    “…….”

    “더 할 말 없어요?”

    샐라임이 입술을 달싹이면서 무언가 할 말을 망설이고 있는 것 같자 내가 물었다.

    그러자 샐라임은 머뭇거리던 입술을 열고는, 말했다.

    “고마워.”

    “…….”

    “날 자유롭게 해 줘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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