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다섯명은 너무 많잖아요 (113)화 (113/156)

112화. 부자지간(2)

“이, 이게 찾아온다는 거였어요?!”

“방법이 뭐 중요하겠냐. 가기만 하면 되지.”

“붙잡히는 건 저잖아요! 저 감옥 가면 어떡해요?”

“그럴 일 없어.”

금세 나에게 다가온 병사 정령들은 포승줄로 내 팔을 묶기 시작했다. 아니, 이렇게 죄인처럼 끌고 가야 할 일이야?!

“이쪽으로 오십시오.”

나는 그들이 이끄는 대로 순순히 따라갔다. 둥둥 떠다니는 병사 정령들과 함께 긴 복도를 통과하자 넓은 공간이 나왔다.

그리고 그 공간의 가운데에는 아주 거대한 무언가가 자리하고 있었는데, 처음 보는 형상인지라 눈을 비비고 다시 쳐다보았다.

“저, 저게 설마 정령왕……?”

“그래, 불의 정령왕이지.”

불의 정령왕이라는 이름답게 정말 화르르 타오르는 불꽃의 모습을 한 정령왕은 저 높은 천장에 닿을 정도로 커다란 몸집을 자랑하고 있었다.

“꿇어라!”

병사 정령들은 나를 끌고 정령왕의 앞에 데리고 갔다. 강제로 무릎이 꿇린 나는 고개를 들어 정령왕을 바라보았다. 새까만 검은색 눈이 부리부리하게 빛났고, 정령왕에게서 뿜어져 나오는 아우라 때문에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이게 그 말로만 듣던 정령왕……! 위엄 때문인지 함부로 쳐다보지도 못하겠다.

잔뜩 긴장한 채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덜덜 떨고 있을 때였다. 정령왕의 중후한 목소리가 위에서 내려왔다.

“샐라임 아니냐.”

역시 정령왕이었다. 칼을 꺼내지도 않았는데 샐라임의 정체를 알아채고 먼저 말을 꺼내다니. 나는 바로 칼집에서 칼을 뽑아 바닥에 내려놓았다. 내가 칼을 만지자 주변 정령들이 움찔거렸지만 정령왕이 괜찮다는 사인을 보냈다.

“새, 샐라임. 이젠 샐라임이 대화를 할 차례예요.”

떨리는 손으로 칼을 바닥에 내려놓았다. 그러자 샐라임이 바로 입을 열었다.

“아버지!”

응? 지금 아버지라고 한 거야?

나는 내가 제대로 들은 게 맞는지 의심이 되었다. 정령왕이 샐라임의 아버지라고? 왕과 정령의 관계는 원래 그렇게 되는 건가?

“그래, 샐라임. 아직 형기가 이백 년이나 남아 있을 텐데 어떻게 여기를 찾아온 거지?”

정령왕은 몸을 숙여 샐라임이 봉인되어 있는 칼에 고개를 갖다 대었다. 정령왕이 나에게 가까이 오자 나를 태워 버릴 것처럼 강한 불의 기운이 느껴졌다.

“맞습니다, 아버지. 하지만 전 이 봉인을 풀어 달라고 요청드리기 위해 여기까지 찾아왔습니다. 더 이상 저 검 쪼가리 안에 갇혀서 살 수 없어요. 이러다가 정신이 미쳐 버릴 것만 같다고요.”

처음엔 예의를 지키는 듯하더니 샐라임은 이내 아버지에게 투정을 부리는 여느 아들처럼 말했다.

아니, 정령왕이 아버지인데 대체 얼마나 잘못을 크게 저질렀길래 봉인을 당한 거야?

“어허, 네가 지은 죄를 아직도 모르는 것이냐. 마구 날뛰다가 한 나라를 통째로 불태워 멸망시킨 것을 잊었느냔 말이다.”

“압니다. 알아요. 하지만 아버지라면 제 봉인을 풀어 주실 수 있잖아요. 벌도 오랜 시간 동안 받았고요.”

“흐음……. 확실히 저지른 죄에 비해 처벌이 무겁긴 했지.”

“그쵸!”

샐라임은 이때다 싶어 정령왕에게 호소했다. 자기가 지금까지 벌을 받으며 얼마나 고독하게 지내 왔는지, 반성을 얼마나 많이 했는지… 말이다.

“여기까지 길은 어떻게 찾아온 거지?”

“저 아이가 도와줬습니다. 루이아나라고 하는 인간 여자인데, 제가 에고를 표출할 수 있도록 해 주었어요.”

“네가 에고를 표출할 수 있었단 말이냐?”

“저 녀석이 불의 친화력이 어마어마하게 세서 정령계에 있을 때처럼 자유롭게 말을 할 수 있게 되더라고요. 덕분에 여기까지 찾아올 수 있게 되었습니다.”

“보아하니 네가 길을 인도하던데, 어떻게 이곳으로 오는 길을 알았지?”

정령왕은 나에게 호기심이 생긴 건지 재미있다는 눈빛으로 나를 유심히 살폈다.

“저는 정령의 향기를 쫓아왔을 뿐입니다.”

아까 샐라임이 정령의 향기가 난다는 말에서 착안하여 시치미를 뚝 뗐다.

“…믿을 수 없군. 어찌 되었든 샐라임의 봉인을 풀어 줄 수는 없다.”

단호한 목소리가 넓은 공간을 울렸다. 아까는 봉인을 풀어 줄 것 같이 말하더니 지금은 칼같이 자르는 것이다.

“…….”

샐라임은 아무 말이 없었다. 끓어오르는 속을 꾹꾹 눌러 참고 있는 것 같았다.

“다들 죗값을 전부 치르고 오는데, 네가 적자라는 이유로 봉인을 풀어 주면 아주 난리가 날 거다.”

정령왕의 말도 이해가 되었다. 샐라임 하나 때문에 사회적 혼란을 일으킬 수는 없는 노릇이니까.

“그럼 이제 이만 돌아가거라.”

정령왕은 아예 샐라임에게서 시선을 거두며 말했다. 하지만 샐라임은 쉽게 물러서지 않았다.

“제발요, 아버지. 봉인만 풀어 주시면 무엇이든지 다 하겠습니다. 그러니 제발…….”

샐라임이 이토록 무언가를 강하게 원하는 건 본 적이 없는지라 쳐다보는 내내 신기한 기분이 들었다. 자존심 다 버리고 아버지에게 빌빌 기어서라도 봉인에서 풀리고 싶은 거겠지. 쉽게 봉인이 풀리지 않을 거라는 건 예상했지만 이렇게 단호하게 안 된다고 할 줄은 몰랐다…….

“무슨 말을 해도 소용없어. 그리고 투정을 부릴 나이는 지나지 않았느냐.”

“아버지…….”

샐라임의 모습이 보이진 않았지만 그의 목소리는 울먹이고 있었다. 항상 여유만만했던 샐라임이 이런 모습을 보이니 안쓰러움이 몰려왔다.

나는 샐라임에게 작게 속삭였다.

“샐라임, 풀어 달라고 막무가내로 말하는 것 말고 다른 방법은 없어요?”

“생각 안 해 봤는데…….”

“그런 것도 생각 안 하고 뭐 했어요! 설득을 해야죠, 설득을.”

“그러니까 그걸 어떻게 하냔 말이다. 아버지는 설득이 통할 정령이 아니야.”

“좀 더 동정심에 호소해 본다든지…….”

“동정심?”

“제가 한번 해 볼게요.”

될지 안 될지는 미지수였지만 일단 도전하고 봐야 했다. 기껏 여기까지 왔는데 봉인을 못 풀고 돌아가면 안 되잖아!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정령왕의 앞으로 성큼성큼 다가갔다. 그리고 다시 한번 무릎을 쾅 찍었다.

“정령왕님! 제가 한마디 올려도 되겠습니까!”

“?”

내 말에 정령왕의 부리부리한 눈이 형형하게 빛났고, 관심이 가는 듯한 표정을 보였다.

“저는 샐라임을 만난 지 고작 몇 개월밖에 되지 않았습니다. 우연히 칼을 샀는데 그 안에 샐라임이 봉인되어 있었죠. 그때까지만 해도 샐라임은 사람이 나쁜 모습을 보이면 죽여도 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을 정도로 무자비한 인간, 아니 정령이었습니다.”

“…그런데?”

“하지만 저와 만나고 함께 시간을 보내면서 그는 확연하게 달라진 모습을 보였습니다. 정령술에 대해 무지했던 저에게 정령술을 가르쳐 주기도 하였으며, 제가 위기에 빠질 때면 본인의 일처럼 생각하며 걱정과 위로를 해 주었습니다. 저는 그런 샐라임의 모습에 아픔을 딛고 일어서기도 했고, 또 의지하며 위로를 받기도 했죠.”

“…샐라임이 그랬단 말이냐?”

대체 정령계에서 살 때 얼마나 난리를 치고 다녔길래 이 정도로 정령왕이 놀란단 말인가. 나는 어이가 없는 마음이 들었지만 진지한 표정을 유지하려고 애썼다.

“그렇습니다. 그는 이제는 사람을 진정으로 생각할 줄 아는 이해심 넓은 정령이 되었습니다. 물론 그가 과거에 씻을 수 없는 죄를 지은 건 맞습니다.”

“…….”

“하지만 그는 충분히 반성했고, 그것에 대한 죗값은 모두 치렀다고 봅니다. 정령왕님도 아까 샐라임의 처벌이 지은 죄보다 무겁다고 하지 않으셨습니까.”

“그건 그렇지.”

나이스, 이 정도면 많이 넘어왔다.

“그렇다면 샐라임을 조기 석방 시켜 주시고, 남은 형기 동안 벌을 대체할 만한 다른 업무를 주는 건 어떨까요?”

나는 전생에서 중고등학교를 다닐 때 사고를 친 녀석들이 사회봉사를 받는 것을 기억해 냈다. 샐라임도 사회에 공헌하며 남은 죗값을 치를 수 있다고 생각했다.

“흐음……. 일리가 있는 말이구나. 샐라임 녀석이 그렇게나 많이 변했다니.”

정령왕은 무시무시한 얼굴과는 달리 생각보다 오픈 마인드인 것 같았다. 무작정 사람이 정령국을 찾아왔으면 거부감이 들 텐데도 내 말을 곧잘 들어 주는 것이다. 이런 정령에 대고 막무가내로 꺼내 달라고 하니 당연히 거절당하지.

“지금의 샐라임은 과거의 정령왕님이 아시던 그 샐라임이 아닙니다. 자고로 짐승이든 인간이든 보상을 주어야 더욱더 발전할 수 있다고 합니다. 이렇게까지 큰 변화를 이루어 낸 샐라임에게 작은 보상 정도는 주어야 하지 않을까요?”

“루나…….”

내 긴 연설에 샐라임은 적지 않게 감동을 받은 것 같았다. 아까보다 더 울먹거리고 있잖아!

정령왕은 고민에 빠진 얼굴이 되었다. 그래도 내 말이 어느 정도 먹혔다는 거다. 나는 말 없이 정령왕의 처분을 기다렸다. 만약에 안 된다고 하면 바짓가랑이라도 붙잡고 빌 생각이었다.

한참을 고민하던 정령왕은 이내 입을 열었다.

“좋다. 샐라임 너를 석방시켜 주마. 대신 조건이 있다.”

“!!”

“대체 뭐죠?!”

흥분한 샐라임이 소리쳤고, 나 또한 깜짝 놀라 눈을 동그랗게 떴다.

“네가 한 번 더 발전했다고 느낄 때까지 이 여자아이에게 너를 귀속시켜 놓겠다.”

“귀, 귀속……?”

“너의 주인이 되는 것이나 다름없지. 위험에 처했을 때나, 도움이 필요할 때나 언제든지 소환되어 사람을 도와주어야 한다. 일반적인 정령들은 소환에 응하거나 거부할 수 있는 권리가 있지만 귀속에는 그런 것이 없지. 주인이 부르면 무조건 소환되어야 한다.”

꽤 나쁘지 않은 형벌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샐라임 또한 만족하는 눈치였다. 평소엔 정령계에 살다가 내가 샐라임을 필요로 할 때만 소환되어 나를 도와주는 것이라니. 팔자 펴도 단단히 폈다.

“그런데 저는 아직 하급 정령술사예요.”

“그렇게 강한 불의 친화력을 가지고도 아직 하급이란 말이냐?”

“…네. 그래서 상급 정령인 샐라임을 받아들이지 못할 것 같아요.”

저번에 샐라임이 말한 적이 있다. 자신을 소환하면 아마 내 몸이 터져서 죽을 거라고. 그만큼 감당하기 어려운 존재라는 거겠지.

둥그런 턱을 쓰다듬던 정령왕은 좋은 생각이 났는지 ‘아!’ 소리를 냈다.

“그럼 내가 너를 샐라임을 받아들일 수 있는 몸으로 만들어 주면 되는 것 아니냐.”

“그건 그렇지만… 가능한가요?”

“나 정령왕에게 불가능한 건 없단다. 내 아들을 이렇게까지 갱생시켜 주었으니 너에게도 보상을 내려 주는 게 맞겠지. 자, 가까이 오거라.”

정령왕의 말에 나는 주춤대며 앞으로 걸어 나갔다. 커다란 난로 앞을 걷는 것처럼 열기가 뜨거웠고, 그의 위협적인 분위기는 더욱 강하게 느껴지는 것 같았다.

“눈을 감아라. 인간의 몸은 불완전해서 받아들이는 것이 어려울 수 있다. 하지만 괜찮을 거다. 너는 보통 인간과는 다른 것 같으니. 온몸을 이완하고 숨을 내쉬어라. 내가 너에게 정령석 하나를 주입할 거다.”

저, 정령석 주입……?

무언가를 몸속에 넣는다는 것에 확 거부감이 들었다. 하지만 일은 이미 시작된 것 같았다. 불에 잔뜩 달군 뜨거운 돌이 내 아랫배에 닿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너무나도 뜨거워서 제대로 감각을 느낄 수조차 없을 정도였다. 나는 인상을 세게 찌푸리며 주먹을 꽉 쥔 채 그것을 참아 냈다.

“그리 길지 않아. 좀만 더 기다려라.”

“…….”

말 그대로 받아들일 수 없는 힘을 견뎌 내고 있는 기분이었다. 이러다가 몸이 터져 버리면 어떡하지? 이렇게 죽으면 너무 허무하잖아!

“됐다. 몸에 힘을 풀어도 된다. 이 정령석은 네가 죽기 전까지, 아니 죽고 나서도 기능을 할 거다.”

“헉, 허어…….”

숨을 몰아쉬고 있는 나에게, 정령왕은 가뿐한 목소리로 말했다.

“뭐가 바뀌었는지는, 직접 확인해 보거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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