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1화. 부자지간(1)
“뭐, 뭐가요.”
나는 당황스러운 목소리로 작게 중얼거렸다. 내가 가까워진 그의 얼굴을 바라보자 그의 눈동자에 내 모습이 그대로 비치는 것이 보였다.
입꼬리를 씨익 올린 채 여유로운 미소를 짓던 그는 느릿하게 말을 내뱉었다.
“네가 그럴수록 더 애탄다는 것만 알아 둬. 그리고 나는 언제나 그렇듯 참을성이 부족한 놈이거든.”
“제가 뭘 했다고 그래요. 애먼 사람 잡고 있…….”
“항상 은근하게 내 표현을 무시하잖아. 다른 이야기로 말을 돌리는가 하면 장난을 쳐 버리기도 하고.”
“그건…….”
나는 그의 말에 할 말을 잃고 말았다. 그의 말에 틀린 부분 하나 없었기 때문이다. 나는 사람이 애정을 표현할 때마다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지를 몰랐다. 살면서 그런 애정을 받아 본 적도, 줘 본 적도 없었다. 에르셈프를 비롯한 다른 남주인공들이 나에게 들이댈 때마다 밀어 내는 것은 쉬웠지, 그들의 감정을 받는 것은 너무나도 낯선 일이었다.
하지만 이제는 호감도를 올려야 할 때다. 그리고 호감도가 일정 수준 이상 오르면 그 이상의 호감도는 쉽사리 오르지 않는다는 것도 알았다. 진짜 호감도를 올리기 위해서는 정말로 감정의 교류가 필요할 것이었다. 나는 앞으로 이어질 남주인공들의 애정 공세를 자연스럽게 받아 낼 수 있을까?
잘 모르겠다. 그래서 그냥 솔직하게 말했다.
“모르겠어요. 저는 사람을 대하는 게 어려워요. 저를 생각해 주는 건 너무 고맙지만 그 대가로 어떻게 해 줘야 할지도 모르겠고요.”
“대가가 아니야. 그냥 마음이 가는 대로 하면 돼. 그 어떤 사람도 너에게 대가를 바라고 무언갈 베풀지 않을 거야. 설령 대가를 바란다면 그런 사람들은 인생에 도움 되지 않는 사람이니 최대한 빠른 시일 내에 관계를 끊든가…….”
“……?”
“그냥 나에게 데리고 와. 없애 줄 테니까.”
그의 말에 나는 풋, 하고 웃음이 나왔다. 아, 웃으면 안 되는데. 아까의 에르셈프랑 똑같은 꼴이 되어 버렸잖아?
“지금 웃는 건가? 응? 왕자의 말을 듣고 웃는 거냐고.”
“아, 에르셈프가 먼저 웃긴 말을 했잖아요!”
내가 그의 손길에서 벗어나려 발버둥 치며 그에게 말하자 오히려 그가 팔로 내 목 뒤를 감싸며 몸을 더 밀착시켰다.
나는 너무 가까워진 몸에 민망해하며 고개를 돌렸고, 아무렇지 않은 척하려 애썼다.
“안 되겠어. 궁에다가 가둬 놓고 책임을 물어야 하겠는데.”
그렇게 내가 본의 아니게 에르셈프와 몸을 부비적대고 있는데, 뒤에서 헛기침 소리가 들려왔다.
“큼큼!”
내가 화들짝 놀라며 뒤를 돌아보자 레크리드가 다른 쪽을 바라보며 목을 가다듬고 있었다.
“악! 저리 가!”
순식간에 창피해진 마음에 내가 에르셈프를 퍽 밀쳤다.
“미, 밀쳤어, 지금……?”
“레, 레크리드! 몸은 좀 괜찮아요? 그냥 이야기를 좀 하고 있었을 뿐인데 레크리드가 나온 줄은 몰랐네요! 얼굴 좀 봐 봐요. 아까보다 괜찮아진 것 같은데…….”
내가 금세 걱정스러운 얼굴을 하며 그에게 다가가자 그가 입을 꾹 다물더니 갑자기 홱 몸을 돌렸다.
“레크리드……?”
“저리 가요. 마저 놀던 거나 놀아요.”
그는 귀엽게 생긴 얼굴로 나에게 저렇게 중얼거렸다. 등을 돌린 그는 마치 빨리 달래 달라는 것 같기도 했다. 아니, 다들 왜 이래? 내장에 끌려갔다 오더니 어디가 이상해졌나?!
“루나, 거기 붙어 있지 말고 이리로 와.”
그때 이쪽으로 훌쩍 다가온 에르셈프가 입을 열었다.
그리고 내 쪽으로 눈동자를 굴린 레크리드가 질세라 빠르게 내뱉었다.
“아니야. 가지 마요. 제 옆에 있어요, 응?”
애처로운 눈빛으로 나를 쳐다보는 레크리드를 보자 그를 차마 뿌리칠 수가 없었다. 레크리드는 내 오른 손목을 살며시 잡았다.
“루나, 이리 오라니까.”
그리고 에르셈프는 나에게 다가와 내 왼 손목을 덥석 잡았다.
“…….”
대체 뭐 하는 거야, 둘이서? 나를 반쪽으로 찢어 가르기라도 하겠다는 거야?
나는 그들에게 양손을 붙잡힌 채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었다. 신도 야박하시지, 일처다부제면 얼마나 좋아?
나는 날 원하는 잘생긴 남자 둘 사이에서 행복한(?) 고민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나에게 선택권이란 없었다. 아직까진 누가 진짜 남주인지 모르니까. 내가 할 수 있는 거라고는 둘의 호감도를 최대한 올려놓는 것뿐이었다.
“이, 이거 좀 놓죠, 다들.”
“루이아나 씨, 이젠 제 차례예요. 아직 시작도 안 했다구요.”
“대체 뭘 시작한단…….”
내 말이 끝나기도 전에 에르셈프는 중간을 자르더니, 레크리드를 향해 내뱉었다.
“네 차례 따위 평생 없을 테니까 이 손 좀 놓지?”
차갑다 못해 얼음이 뚝뚝 떨어질 것만 같은 음성이었다. 하지만 레크리드 또한 지지 않았다.
“왕자님, 외람되지만 이상한 강요를 받고 있는 여성이 있다면 나서서 도와줘야 한다고 배웠습니다만.”
“이상한 강요? 지금 강요라고 했나? 다시 한번 생각해 보겠어?”
“강요가 아니라면 그 손을 놓으시면 될 것 같은걸요.”
“그건 그쪽도 마찬가지 아닌가? 어린 애처럼 투정을 부리는 꼴이라니, 웃기기 짝이 없어.”
에르셈프는 한쪽 눈을 치켜뜨며 한껏 비웃음을 머금었다. 아, 잊고 있었다. 이 남자 인성 장난 아니었지. 건들지 않는 게…….
“그럼… 투정 부린 김에 이대로 끝까지 더 부려 보겠습니다. 루이아나 씨는 제가 데려가도 되는 거죠?”
“뭐? 지금 뭐라고 했나? 여봐라, 이놈을 당장!”
“어휴, 그만들 좀 하세요.”
양팔을 붙잡힌 채 한숨을 푹 내쉰 내가 나지막이 내뱉었다. 남주인공 둘을 데리고 오기로 할 때부터 예상하지 않은 그림은 아니었다. 그런데 막상 당하니 그들을 어떻게 잠재워야 할지 가늠이 가지 않았다. 둘 다 마구 날뛰는 망아지… 같았다.
“루이아나 씨가 그만하라니 그만할게요.”
“나야말로. 진작에 그만할 생각이었어.”
저것 봐. 이젠 입술에 침도 안 바르고 거짓말을 하네?!
“또다시 해가 지기 전에 빠르게 움직여야 한다구요. 여기서 지체할 시간 같은 거 없어요.”
내가 단호한 표정으로 말하자 순식간에 분위기가 정리되었다.
하지만 여전히 내 양팔을 꽁꽁 붙잡고 있는 그들 덕분에 내가 발걸음을 내딛지 못하자, 나는 소리를 꽥 질렀다.
“셋 하면 놔요. 하나, 둘, 셋!”
“!!”
빠르게 쏘아붙인 내 말에 그들은 화들짝 놀라며 내 팔을 툭 놓았다. 그래, 말은 잘 듣네.
나는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그들을 뒤로한 채 앞장을 섰다.
* * *
텐트를 거두고 다시 정령국을 찾기 위한 여정을 시작했다. 여전히 내 시야엔 분홍색 길이 보였고, 나는 그걸 따라 에르셈프와 레크리드를 인도했다.
“거의 다 온 것 같은데…….”
숲의 끝에 다다른 느낌이었다. 우리 앞엔 아찔한 절벽이 막아서고 있었고, 그래서 더는 앞으로 나아갈 수 없었다. 내가 발걸음을 멈추자 에르셈프와 레크리드가 동시에 말을 걸어왔다.
“여기가 목적지인가, 루나?”
“하지만 앞은 절벽인데…….”
분홍색 길은 절벽을 끝으로 끊겨 있었다. 미니 맵을 봐도 여기까지가 안내 경로인 것 같았다. 여기서 어디로 가야 하는 거지?
의아한 마음으로 고개를 갸웃거리고 있을 때, 무언가를 느낀 건지 샐라임이 입을 열었다.
“여기서부턴 내가 찾을 수 있을 것 같아. 정령의 향기가 나거든.”
“그래요?”
“좀 더 오른쪽으로 가 봐. 거기 밑에. 아니, 거기 말고.”
그리고 샐라임은 나를 이끌더니 얼마 지나지 않아 손쉽게 입구를 찾아내었다.
“여기다. 분명해. 에너지의 흐름이 확연히 달라.”
“제가 뭘 해야 할까요?”
“그냥 가만히 있어.”
그렇게 중얼거린 샐라임은 심호흡을 몇 번 했다.
“후…하…후…하…….”
“…….”
“문 열어라, 이놈들아!!”
그러고는 소리쳤는데, 기차 화통을 삶아 먹은 건지 내가 풀쩍 뛸 만큼 커다란 소리가 났지만 에르셈프와 레크리드에게는 전혀 들리지 않는 것 같았다.
“아후, 깜짝아.”
샐라임이 소리치자마자, 무언가 반응이 일어나는 것이 보였다. 방금까지 앞은 낭떠러지뿐이었는데, 허공이 갈라지듯 찢어지기 시작한 것이다.
“역시나군.”
샐라임은 만족스러운 듯이 중얼거렸고, 곧이어 갈라진 틈 사이에서 작은 바람 모양의 정령 하나가 모습을 드러냈다. 토네이도 모양으로 휘몰아치는 듯한 형상을 띤 정령이었는데, 내 얼굴 정도 되는 크기여서 그런지 아주 귀여웠다. 정령은 동공이 확장되고 입은 떡 벌린 채로 소리쳤다.
“허, 허, 헉! 샐라임 님?!”
일면식이 있는 건지 샐라임은 정령을 보자 익숙한 듯 굴었다.
“너 아직도 여기서 문지기 노릇이나 하고 있냐?”
“아, 아직 몇백 년 안 되었다구요!”
“그러니까 내가 진작에 공부 열심히 하랬잖아.”
“샐, 샐라임 님이야말로 여기에 어떻게 오신 거죠?! 분명 형기가 남아 있을 텐데……!”
형기?
“조기 석방시켜 달라고 손수, 직접, 내 발로 찾아왔다. 더 이상 살 수가 있어야 말이지.”
“그런 법이 어디 있습니까!! 정령왕님이 아시면 크게 노하실……!”
“야, 네가 알 바야? 정령왕은 내가 알아서 구워삶을 테니까 잔말 말고 문이나 열어.”
“…그건 어렵지 않지만…… 이 인간들은 뭐죠? 여긴 또 어떻게 찾아낸 거고요!”
문지기 정령은 잔뜩 당황스러운 눈빛으로 우리를 훑었다. 하긴, 인간들 사이에서 정령국은 전설처럼 취급된댔지. 이렇게 쉽게 찾은 것도 신기할 따름이야.
“날 도와준 사람들이야. 여기까지 올 수 있도록 해 주었다고. 같이 들어갈 거야. 문 열어.”
“그치만……!”
문지기 정령이 자꾸만 출입을 방해하자 샐라임은 무시무시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당장 안 열어?”
“하지만……!”
“…알겠어. 그러면 이 인간들은 여기에 두고 갈게.”
“진작에 그러셨어야죠!”
“그런데 얘는 안 돼. 얘가 있어야 내가 말을 할 수 있거든.”
나를 가리키는 것 같았다. 샐라임은 현재 검에 갇혀 있는 상태이기에 내가 주변에 있을 때만 에고를 표출할 수 있었다.
“말도 안 되는 말씀하지 마세요. 어떻게 신성한 정령국에 하찮은 인간을…….”
“루나, 그냥 비집고 들어가. 어차피 쟤 아무것도 못 하는 놈이야.”
“예, 예, 예?”
내가 잘 들은 게 맞나 싶어 되묻자 샐라임이 아무렇지도 않게 덧붙였다.
“인간이 찾을 수도 없는 곳에 인간을 거르라고 문지기를 하라고 보낸 것부터가 말 다 한 셈이지. 아버지도 참 잔인하시지. 새파랗게 어린 애를 여기에 유배 보내 놓다니.”
아버지?
설마…….
“그, 그럼 제가 뭘 하면 되는 거예요?”
“저 틈 보이지? 내가 뛰라고 하면 저기로 뛰는 거야. 숨도 쉬지 말고 달려. 괜히 붙잡히면 골치 아파지니까. 그리고 저 남자 두 놈들은 밖에다 놔둬. 데리고 갈 수는 없을 것 같아.”
“…네.”
왠지 평소보다 훨씬 위협적인 존재감을 드러내는 샐라임 탓에 나는 그저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이, 이게 상급 정령이라는 건가?
“에르셈프, 레크리드. 여기서 좀만 기다려줄 수 있나요? 정령국에 도착한 것 같은데, 모두 다는 들어갈 수 없을 것 같아요. 금방 나올게요.”
“그래요, 루이아나 씨. 여기서 왕자님과 기다리고 있을게요.”
“루나, 안 오는 건 아니겠지?”
“그럼요. 둘 다 아직 몸이 성치 않으니 텐트를 치고 쉬고 있으면 좋을 거예요. 저 안쪽에서 무슨 일이 일어날지도 모르니까요.”
“…알겠어.”
그렇게 나는 떨떠름해하는 에르셈프와, 자기는 걱정하지 말라는 레크리드를 뒤로 한 채 샐라임의 신호를 기다렸다. 문지기 정령이 경계 태세를 갖춘 채 나를 유심히 쳐다보았다.
“아니, 샐라임 님. 오랜만에 오셨으면 일단 저랑 이야기부터 나누시죠. 저 여기서 정령이랑 대화한 지 이백 년이 넘어 이젠 입에 거미줄이 쳐질 지경…….”
그리고 문지기 정령이 안심했는지 등을 보이며 뒤를 돌았을 때였다. 정령의 말은 귓등으로도 듣지 않고 있던 샐라임이 나에게 급하게 소리쳤다.
“루나, 뛰어!”
“헉!”
나는 그의 신호에 다급하게 틈 속으로 뛰어들었다. 거리는 가까웠고, 절벽을 향해 뛰어야 하는 일이었지만 절대 죽을 리는 없을 것 같다는 생각에 시도할 수 있었다.
“우왓!”
나는 온몸을 슬라이딩하며 틈 속으로 들어갔다. 도착한 곳에서 바로 보이는 건 신성한 분위기를 물씬 풍기는 긴 복도였다.
나는 의아한 표정으로 샐라임에게 물었다.
“여기서 어떻게 정령왕을 찾아갈 수 있는 거죠……?”
“그냥 가만히 있으면 알아서 찾아올 거야.”
“?”
그리고 정말 몇 분 지나지 않아, 누군가의 기운이 느껴졌다.
하지만, 그건 정령왕이 아니었다……. 우리를 찾아온 것은 포승줄을 손에 든 병사 정령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