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다섯명은 너무 많잖아요 (111)화 (111/156)
  • 110화. 정령국(5)

    스스로 내 팔을 긋는 것이란 쉬운 일이 아니었다. 눈을 질끈 감고 반대편 손을 움직이자 소름 끼치는 기분이 나를 찾아왔다.

    촤악!

    피가 사방으로 흩어졌고, 땅에 떨어진 핏방울들은 곧이어 바닥을 부식시키기 시작했다. 하얀 연기가 피어오르며 타들어 가더니 이상한 냄새마저 풍겨 왔다.

    “끄아악-!”

    내장이 비틀리며 사람의 비명 같은 것을 길게 내뱉었다. 찢어질 듯한 소리에 나는 손으로 귀를 틀어막았다.

    내 피가 내벽에 닿자 생겨나는 반응은 놀라웠다. 레크리드의 피를 빨아먹듯 쏙 흡수시킨 것과는 달리 내 피는 내벽을 파괴하기 시작한 것이다.

    얼마 지나지 않아서 마구 꿈틀거리던 내벽은 점점 더 거세게 요동쳐 왔고, 나는 시야 상단에 있던 칼 모양의 그림이 전부 사라진 것을 볼 수 있었다. 이제 남은 기회는 없다는 것이었다.

    “우욱- 우욱.”

    이상한 소리가 내장 안에 울려 퍼졌다. 나는 서서히 타들어 가고 있는 공간을 바라보며 우두커니 서 있었다.

    [제한 시간 카운트 다운이 시작됩니다.]

    [10, 9, 8, 7……]

    숫자가 무섭게 떨어지는 것과 동시에 내벽은 더욱 강하게 꿀렁거렸다. 나는 무게 중심조차 제대로 잡을 수 없어 이미 바닥에 엎어진 지 오래였다.

    [3, 2, 1……]

    “우욱!”

    숫자가 떨어지는 것과 동시에 우리는 엄청나게 요동치던 내장 안에서 마구 흔들리다가, 어딘가로 쏘아지듯이 발사되었다.

    “아악!”

    갑작스러운 움직임에 소리를 꽥 질렀는데, 얼마 되지 않아 순식간에 푸른 새벽이 내려와 있는 숲 안에 떨어졌다.

    그리고 내 옆엔 에르셈프와 레크리드도 같이 누워 있었다.

    온몸이 위액 범벅이라 다치진 않았지만, 그래도 기분 나쁘게 끈적거리는 느낌을 느끼며 그들의 몸을 흔들었다.

    “에르셈프! 레크리드! 일어나 봐요! 드디어 나왔다고요!”

    내가 거칠게 흔들자 에르셈프가 눈을 슬쩍 떴고, 곧이어 레크리드도 정신을 차렸다.

    “이…게 무슨 일이지?”

    잔뜩 잠긴 목소리로 에르셈프가 입을 열었다. 머리가 아픈 듯 이마를 짚은 채였다.

    “온몸에 힘이 하나도 없어요.”

    레크리드 또한 중얼거렸다. 그의 볼은 핼쑥하게 파여 있었다.

    “숲의 위장에 끌려갔었어요. 잘은 모르겠지만… 에르셈프와 레크리드의 에너지를 빨아먹으려고 한 것 같고요.”

    “뭐!? 루나 너는 괜찮은 거야?”

    “저는 무슨 이유에선지 모르겠지만 괜찮았어요. 아마… 남자의 기운만을 취급하는 것 같아요.”

    내 피가 어떻게 내벽을 녹일 수 있었는지는 알 수 없었다. 남자가 아닌 여자라서 그런 것인지, 넘치는 마력 때문인지, 그것도 아니면 나에게 무슨 이유가 있어서인지 전혀 가늠이 되지 않았다.

    “이제 곧 있으면 해가 뜨니 괜찮을 것 같아요. 휴식을 취한 뒤 빠르게 움직이죠.”

    그들은 내 말에 따라 텐트에서 잠시 몸을 진정시키기로 했다. 나는 텐트 밖에 나와 모닥불 앞에 앉아 곰곰이 생각에 잠겼다.

    “어째서 이런 일이 벌어진 거지……? 북쪽 숲이 위험한 이유가 이것 때문이었다는 건가? 혹은… 정령국으로 가는 것에 어떤 단서가 될 만한 일인가?”

    숲이 나에게 어떤 메시지를 던져 주는 것 같은 기분에 사로잡혔다. 물론 메시지를 던지는 거치고 동료를 둘이나 잃을 뻔했지만. 하지만 지금으로서는 증거가 없어 그 어떤 것도 파악할 수 없었다.

    “혼자 뭘 그렇게 중얼거리고 있는 거지? 나도 좀 알려 주면 좋겠는데.”

    그때 뒤에서 에르셈프의 목소리가 들렸다.

    몸 좀 눕히라고 한 내 말과는 다르게 금세 밖으로 나와 버린 것이다.

    “아무것도 아니에요. 몸은 좀 괜찮아요? 쓰러지면 큰일이라고요. 여기엔 아무도 에르셈프의 몸을 감당할 사람이…….”

    “내 몸 하나 정도는 내가 지켜. 그나저나 아까부터 본인 팔에서 나는 피는 모른 척할 건가? 옷이 잔뜩 젖었는데.”

    “아.”

    정신이 없는 까닭에 아예 잊고 있었다. 인지를 하니 이제야 아픈 것 같기도 했다.

    “아야야…….”

    상처가 꽤 깊었다. 생각보다 깊게 베인 탓이었다. 손을 갖다 대자 쓰라린 감각이 나를 찾아왔다.

    “줘 봐.”

    “네?”

    “팔 줘 보라고. 평소에 임무를 다닐 때도 이렇게 자기 몸은 생각 안 했나? 이 상처는 어쩌다가 생긴 거지?”

    왠지 모르게 날카로운 말투였다. 잘못한 것도 없는데 괜히 반성해야 할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아니 좀 착하게 말해 주면 어디가 덧나?!

    “칼에 베였어요.”

    “…….”

    내 팔을 내려다보던 에르셈프의 미간에 깊은 주름이 새겨졌다. 마치 엄마 앞에서 잘못을 저질러 기가 죽은 아이가 된 기분이 들었다. 내가 이렇게 안 했으면 당신들은 꼼짝없이 고래 밥이 되었을 거라고!

    내가 입술을 삐죽거리자 그가 내 얼굴로 시선을 향했다. 눈치라도 보는 거야, 뭐야.

    “악!”

    그가 엄지손가락으로 내 상처를 가볍게 눌렀다. 옷 위로 피가 베어 나왔고 나는 깜짝 놀란 탓에 소리를 꽥 질렀다.

    “뭐, 뭐 하는 거예요, 에르셈프!”

    “…….”

    에르셈프는 내 상처를 조심스럽게 어루만졌다. 그러고는 어떤 행동도 취하지 않은 채 가만히 상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상처 처음 보나, 왜 저러는 거지?

    “…붕대.”

    “……?”

    “감아 줘도 되나?”

    그는 왠지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게다가 엄청난 허락을 구하는 것 같은 표정을 하며 은근히 내 눈치를 보고 있었다. 나는 의아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요. 저야 감사하죠.”

    당연하다는 말투로 대답했더니 그의 표정이 얕게 피는 것이 보였다.

    “싫…을 수도 있으니까.”

    “아.”

    그제야 나는 깨달을 수 있었다. 예전에 레크리드의 상점에서 내가 에르셈프의 치료를 거절했다가 싸운 경험이 있었다는 것을. 그때는 호감도에 엄청나게 예민했던 때라 칼같이 잘라 냈었는데, 에르셈프가 그것 때문에 상처를 받았었다.

    뭐야, 설마 그걸 기억하고 있어서 멈칫한 거야? 은근 세심한 면이 있는걸.

    “고마워요.”

    내가 말하자 그의 얼굴이 굳는 것이 보였다. 아랫입술을 꾹 깨물며 시선을 이리저리 돌리더니, 이내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정말이지, 손이 많이 가는 여자군.”

    그러고는 자신의 가방에서 구급 약품들을 달그락거리며 꺼내기 시작했다. 붕대와 연고를 꺼낸 그는 능숙한 손길로 내 팔의 옷을 걷어 냈다.

    “손이 많이 가는 게 아니라 제가 마땅히 해야 했을 일…….”

    “마땅히 본인의 몸을 해쳐야 하는 일은 없어. 다른 방법은 없었던 거야?”

    “하지만 다른 방법은 전혀 생각나지 않았다고요. 제 피가 내벽을 부식시키는 힘이 있는 것 같기에 그렇게 했던 거고요.”

    변명을 하는 느낌으로 쏘아붙이자 에르셈프가 인상을 펴고 붕대를 둘둘 풀었다.

    “…앞으로 이렇게 하면 가만 안 둬.”

    “네?”

    저 남자 지금 뭐라고 한 거야? 내가 귀를 의심하며 되묻자 그가 내 시선을 피했다. 보랏빛 눈동자가 데구루루 굴러갔다.

    “너는 너무 너 자신을 생각하지 않는 경향이 있어. 임무든 뭐든, 뭐가 가장 중요한지 생각해 봐. 그리고… 나도 네가 다치는 게 신경 쓰인다고.”

    “그치만 후회하지 않아요. 어쨌든 둘을 구했잖아요? 조금만 늦었어도 제한 시간이, 아, 아파요!”

    “제한 시간?”

    “아무것도 아녜요. 그나저나 좀 살살 해 주면 안 돼요? 더럽게 아프네.”

    내가 고통을 참으며 말하자 그의 손길이 잠시 멈칫하는 것이 느껴졌다. 내 말에 그는 손가락에 힘을 푼 채 아주 조심스러운 손길로 연고를 발라 주었다.

    “…마을로 돌아가면 병원에 가지.”

    “…….”

    “같이.”

    “같이요? 왜요?”

    “왜라니, 그걸 질문이라고 하나?”

    “물음표 붙으면 다 질문이죠. 안 그래요? 뭐, 질문할 거리가 따로 있나?”

    내가 헛소리하듯 아무렇지 않게 받아치자 그가 내 손목을 툭 잡았다.

    “…루나, 그러지 마.”

    “…….”

    순식간에 그의 표정이 무시무시해졌다. 안 그래도 무표정이 기본값인 그의 얼굴이 굳자 나도 모르게 꺼내려던 말이 쏙 들어갔다.

    “내가 너 걱정하는 것 정도는 알잖아. 네가 이렇게 피를 흘리고 있으면…….”

    “있으면?”

    “아니야.”

    “말하다 말기 있어요? 사람 궁금하게.”

    내 말에 에르셈프가 표정을 풀었다. 굳은 얼굴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졌고, 어린아이를 걱정하는 듯한 눈빛으로 나와 시선을 맞추었다.

    “됐고, 이 일이 끝나면 내 전담 의원을 불러 줄게. 웬만하면 왼쪽 팔은 쓰지 마. 사람 걱정하게 하는 것도 유분수군.”

    “절 걱정했어요?”

    “몇 번이나 말하게 하는 건지 모르겠는데, 나는 시도 때도 없이 네가 어디에서…….”

    말을 중얼대던 그가 나와 눈이 마주치자마자 입을 다물었다. 내가 입꼬리를 올린 채 미소를 지으며 그를 쳐다보고 있었기 때문이다. 걱정을 받는다는 기분에 나도 모르게 얼굴에 웃음이 번진 것이다. 미소 지은 얼굴 때문인지 그의 눈동자가 잠시 떨리는 것이 보였다.

    “왜 갑자기 웃는 거지?”

    “웃는 것도 제 맘대로 안 되나요? 에르셈프 참 야박하네요.”

    “그렇게 웃으면…….”

    그가 잡고 있던 내 손목을 휙 끌어당겼다. 힘을 풀고 있었던 까닭에 나는 그의 품으로 이끌렸다.

    “……!”

    순식간에 얼굴이 가까워졌다. 훅 풍겨 오는 그의 살 내음이 코를 타고 들어왔다. 반대편 손으로 내 목덜미를 받친 그는 입이라도 맞출 기세로 내 얼굴에 자신의 고개를 들이밀었다.

    “에, 에르셈프. 지, 지금 뭐 하는 거죠.”

    이제는 그가 목을 받치고 있던 손을 떼고, 양손으로 내 볼을 부여잡았다. 볼이 찌부러지는 느낌에 내가 그의 손에서 벗어나려 했지만 그는 쉽게 나를 놓아주지 않았다.

    “하하.”

    “?!”

    그가 내 얼굴을 보고 웃었다. 깊게 파인 입꼬리가 쑥 올라갔고, 눈매가 예쁘게 접혔다. 아, 아니 이건 아니지. 지금 내 얼굴을 보고 웃는 거야?

    “귀여워.”

    “!!”

    나는 두 번째로 경악할 수밖에 없었다. 에르셈프가 저렇게 ‘웃음’이라고 부를 수 있을 정도로 웃은 게 처음이었을뿐더러, 내 얼굴을 보고 귀엽다고 했다!

    “에, 에르셈프 미친 거예요? 내장에 갔다 왔더니 사람이 회까닥 어떻게 되어 버린 건가?! 아니면 뇌 쪽에 무슨 문제라도……?”

    우스꽝스럽게 볼이 눌린 채 쭉 튀어나온 입술로 중얼거리자 그가 더욱 웃음을 참지 못했다. 아, 이거 놓으라고!

    내가 마구 버둥거리자 에르셈프가 나를 움직일 수 없게 고정하더니 내 쪽으로 고개를 훅 들이밀었다. 그의 오뚝한 코가 금세 내 앞으로 다가왔다.

    “너 말이야. 예전부터 궁금했는데.”

    “…….”

    갑자기 분위기를 잡는 에르셈프 탓에 내 입이 꾹 다물렸다. 그의 낮은 목소리가 귓가를 윙윙 맴도는 것만 같았고, 고개는 가까워도 너무 가까웠다. 금방이라도 입을 맞출 것만 같은 기분에 나는 얼굴을 붉혔지만, 그는 오히려 근사하게 입꼬리를 올릴 뿐이었다.

    “눈치가 없는 건가, 아니면…….”

    “…….”

    “눈치 없는 척을 하는 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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