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다섯명은 너무 많잖아요 (110)화 (110/156)
  • 109화. 정령국(4)

    여자인지 남자인지 알 수 없는 비명이었다. 얇지도, 그렇다고 두껍지도 않은 오묘한 목소리로 길게 소리를 지르는데, 굉장히 고통스러워 보이는 듯한 몸부림도 쳤다.

    “괘, 괜찮은 건가.”

    나는 내가 들어온 몬스터의 몸속을 찔렀다는 생각이 들었다. 퀘스트에서는 분명 무기를 이용해서 처치하고 남주인공들을 구하라고 했으니 몬스터를 상대하라는 건 맞는 것 같았다.

    “꺄아악-!”

    비명은 메아리처럼 위장 전체를 울렸다. 귀를 막고 그것을 듣던 나는 무언가 이상한 기분에 귀를 막고 있던 손을 잠시 뗐다.

    “저쪽인가……?”

    찢어질 듯한 소리는 어딘가에서부터 흘러나오고 있었다. 확실한 건 이 위장은 아니었고, 조금 멀리 떨어진 장소인 것 같았다.

    나는 소리를 따라 발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도착한 곳은 좀 전에 보았던 반투명한 막으로 가려져 있던 통로였다.

    “왠지… 이 칼이라면 뚫릴지도 몰라.”

    퀘스트를 위해 지급된 것이니 가능할지도 몰랐다.

    하지만 기회는 단 세 번뿐. 게다가 아까 한 번을 썼으니 지금은 두 번의 기회밖에 남아 있지 않았다.

    시야의 오른 상단에는 칼 모양의 작은 그림이 두 개 남아 있었다. 아까 점막을 찌른 것으로 한 번이 사라진 것이었다.

    “…음.”

    나는 몇 초 동안 고민에 빠졌다. 이걸 찔러야 하는 것인가, 아니면 다른 방법을 강구해야 하는 것인가?

    하지만 나는 이내 결론을 내렸다.

    “비명 소리가 이곳에서 나오는데 여길 안 가 볼 수 있겠어?”

    혼잣말을 중얼거린 나는 칼 손잡이를 두 손으로 쥔 채 있는 힘껏 공중으로 쳐들었다.

    칼을 찔렀는데 자칫 힘이 부족해서 통로가 뚫리지 않는다면 낭패 중의 낭패 아닌가. 나는 있는 힘껏 칼끝으로 통로를 쑤셔 버렸다.

    푸욱!

    내 예상이 맞았다. 아까 내 숏 소드로 찔렀을 때 강철처럼 내 검을 튕겨 냈던 것에 비해 이번엔 너무나도 쉽게 공격을 허용해 주었다.

    막이 갈라지듯 허무하게 찢어져 버렸고, 나는 입구를 바라보았다. 밑으로는 긴 통로가 이어지고 있었다.

    “내려가 보자.”

    나는 좁은 통로에 몸을 욱여 넣었고, 한 번에 길게 점프하며 밑으로 뛰어내렸다.

    “헉!”

    생각보다 높이가 있던 터라 나는 쿵! 하고 떨어지고 말았다. 그런데 중요한 건 높이가 아니었다. 내가 떨어진 곳은… 위장과는 전혀 다른 생김새의 공간이었다.

    “이, 이, 이게 뭐야.”

    나는 눈을 가리고 기겁할 수밖에 없었다. 통로의 사방에서는 징그럽다 못해 소름 끼칠 정도의 촉수들이 꿀렁거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마치 문어의 다리처럼 오돌토돌한 외피를 가진 촉수는 내 움직임을 감지하는 것인지 나를 향해 천천히 다가오기 시작했다.

    왠지 저 촉수에 잡히면 흔적도 없이 잡아먹혀 버릴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으윽.”

    주저앉아 있던 나는 급하게 몸을 일으켜 앞으로 향하는 길 위에서 뛰기 시작했다. 아니나 다를까, 대여섯 개의 촉수들은 내가 뛰기 시작하자 갑자기 방향을 바꾸며 나를 향해 움직였다.

    “악! 저리 가!”

    자칫 잘못하면 발이라도 붙잡힐 것 같았다. 순식간에 저 정체불명의 것들에게 쫓기게 된 나는 필사적으로 뜀박질을 했다. 하지만 이번엔 통로 자체가 울렁거리기 시작했다. 통로 전체가 수축하듯이 오므라들었고, 내 발이 갈 곳이 점점 좁아지면서 나는 넘어질 것 같은 지경에 이르렀다.

    최대한 중심을 잡으며, 뒤에서 쫓아오는 촉수들로부터 도망치고 있을 때였다.

    “꺅!”

    이번엔 뒤가 아닌 옆과 앞쪽에서도 촉수들이 다가오기 시작했다. 나는 기회가 한 번 남은 칼을 쓰면 퀘스트에 실패한다는 생각에 팔꿈치로 그것들을 막아 냈다.

    “젠장, 칼도 못 쓰게 만들잖아?!”

    양손에 롱 소드를 들고 있던 터라 숏 소드를 꺼낼 수도 없었다.

    탁 탁 탁 탁!

    둔탁한 발걸음 소리를 내며 통로를 뛰고 있을 때였다. 어떤 공간에 가까워지고 있는 것 같았다. 그리고 나는 저 멀리서부터 내 눈에 들어오던 광경을 보고는 입을 한 번 더 벌릴 수밖에 없었다.

    “사, 사람……?”

    멀리서 봐도 사람 같은 형태의 것들이 잔뜩 바닥에 쌓여 있는 것이 보였다.

    “저, 저, 저게 뭐야…….”

    시체들이었다. 하나같이 얼굴이 하얗다 못해 보라색으로 질린 사람들은 미동도 없이 죽은 채 누워 있었다. 시체는 핏기가 없을 뿐 썩지는 않아서 냄새가 나지도 않았다.

    그런데 한 가지 이상한 점은…….

    “왜 남자들만 있는 거지?”

    족히 백 구는 될 법한 시체들은 전부 남자들뿐이었다. 그것도 신체 건강해 보이는 건장한 남자들 말이다.

    나는 시체 더미들이 가까워지자 마치 유령의 집을 통과하는 것처럼 아찔한 기분이 들었다. 그래도 무언가 단서가 있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에 두 눈을 똑바로 뜨고 시체들을 유심히 쳐다보면서 뛰었다.

    에르셈프 정도의 건장한 사내들. 영혼과 기력을 모두 빼앗겨 죽은 것처럼 눈 밑은 새카맸고 볼은 쭉 들어가 있었다.

    생명체가 죽었다고 하면 죽은 이유를 알 수 있기 마련이었다. 칼에 찔려 죽었다든지, 마법에 걸려 죽었다든지. 그러나 이 시체들은 사인을 알 수 없게 그저 퀭한 얼굴만을 하고 있을 뿐이었다.

    대체 이곳엔 어떤 비밀이 숨겨져 있는 걸까.

    설마……. 에르셈프와 레크리드도 벌써 이렇게 시체가 되어 있는 건 아니겠지. 아냐, 아닐 거야. 그들이 그렇게 쉽게 죽을 리가 없을 거야.

    그렇게 나는 시체들을 지나 사방에서 뻗어 나오는 돌기에 붙잡힐 뻔한 것을 피하고, 통로에서 빠져나왔다.

    “헉…헉…….”

    아슬아슬한 타이밍에 숨을 몰아쉬며 새로 들어온 공간에 입성했다. 나는 줄줄 흐르는 땀을 닦으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

    나는 내 시야에 들어온 광경을 보고는 세 번째로 놀라고 말았다.

    “에, 에르셈프……?”

    에르셈프가 의식을 잃은 채 벽에 묶여 있었다. 그것도 촉수…에 붙잡혀서.

    “레크리드……?”

    레크리드 또한 마찬가지였다. 에르셈프가 묶여 있는 곳으로부터 약 이십 미터 정도 떨어진 곳에 레크리드 또한 벽에 고정되어 있었다.

    “하……. 이젠 촉수물이라도 찍는 거냐.”

    나는 충격적인 동시에 어이가 없는 마음에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그 마이너한 장르를 누가 본다고! 남주인공들을 촉수에 가둬 놔!

    둘은 무슨 이유에선지 모르겠지만 정신을 차리지 못한 채 눈을 감고 있었다. 내 목소리조차 전혀 들리지 않는 것 같았다.

    “일어나 봐요!! 제가 왔다고요!”

    그들을 향해 아무리 소리쳤지만 소용이 없었다. 정신을 차리지 못하는 특정한 이유가 있는 것 같았다.

    그런데 그들이 묶여 있는 곳을 다시 보니 아까 발견하지 못한 것이 있었다.

    에르셈프와 레크리드는 벽에서 뻗어 나온 촉수에 붙잡혀 있었는데, 그 촉수들에서부터 굵은 핏줄이 뻗어 나와 있었다. 에르셈프에게서 하나, 레크리드에게서 하나. 뻗어 나온 핏줄은 벽을 타고 위로 올라가 심장과도 같이 생긴 곳으로 이어졌다.

    그리고 검푸른색의 핏줄은 마치 그들의 에너지를 추출하는 것처럼 무언가를 계속해서 뽑아내고 있었다.

    “에르셈프와 레크리드의 생명력을 뽑고 있는 건가……?”

    그들의 얼굴은 아까 보았던 시체만큼은 아니었지만 점점 창백해지고 있는 것 같았다. 설마 아까 시체들도 이렇게 생명력을 빼앗겨 죽은 것일까?

    항상 생기 넘쳤던 그들의 얼굴이 실시간으로 퀭하게 변하고 있으니 너무나도 이질감이 컸다. 정말로 곧 있으면 죽어 버릴 것만 같았다.

    게다가 무언가……. 남자 주인공들이 저렇게 촉수에 묶여 있으니 왠지 기분이 묘했다. 아무런 태세조차 갖추지 못한 채 무방비 상태로 온몸이 결박당해 있으니 영화의 한 장면을 보는 것 같기도 했다.

    “어떻게 해야 하는 거지?!”

    돌발 퀘스트는 저렇게 붙잡힌 에르셈프와 레크리드를 구하라고 하는 것 같은데, 당최 감이 오지 않았다. 단 한 번 남은 일격으로 무엇을 어떻게 구해야 하는 건지 알 수가 없었단 말이다.

    게다가 에르셈프와 레크리드 두 명이 붙잡혀 있다 보니 대체 누구에게 한 번을 허용해야 하는 건지 고를 수도 없었다.

    “아냐, 둘 중 한 명을 고르라는 건 아닐 거야. 두 명을 모두 구하라고 했잖아?”

    나는 눈을 가늘게 뜬 채 그들을 유심히 살폈다. 에르셈프가 묶여 있는 촉수는 길지만 하나인 것 같았다. 레크리드 또한 마찬가지였다. 한 번만 촉수를 자르면 빠져나올 수 있을 것 같았다.

    “아니면 심장을 찔러야 하는 건가?”

    하지만 심장은 저 멀리 아득하게 높은 곳에 있었다. 내가 아무리 마나를 이용해서 점프를 한다고 한들 저기까지는 닿을 수 없을뿐더러, 이곳에서는 왠지 모르게 내 몸에 넘치는 마나의 흐름이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나는 급한 마음에 발을 동동 굴렀다. 그들의 얼굴은 점점 핼쑥해져 갔고, 에르셈프는 그나마 괜찮다고 하지만 레크리드의 얼굴은 정말 곤죽이 되어 가는 것만 같았다.

    “머리를 써! 머리를 쓰란 말이야, 루나!”

    나는 롱 소드를 쥔 채 천천히 그 공간을 걸어 다녔다. 무언가 알아낼 수 있는 게 있을지 모른다. 분명 단서가 있을 거야, 단서가.

    시야에는 딱 한 개의 칼 모양 하나가 남아 있었다. 한 방으로 내가 할 수 있는 건 과연 무엇일까.

    나는 마음 급하게 먹어서는 될 것도 안 된다는 생각을 하며 그들이 묶여 있는 벽으로 다가갔다.

    핑크빛 벽에 손을 대어 보니 마치 온기가 있는 것처럼 따스함이 느껴졌다. 정말로 이곳은 누군가의 몸속인 것 같았다.

    그때였다.

    “쿨럭! 쿨럭!”

    벽에 묶인 레크리드가 의식을 잃은 채 기침을 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새빨간 선혈이 그의 입에서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

    피는 터져 나와 그의 턱을 타고 줄줄 흘렀고, 밑으로 뚝뚝 떨어졌다.

    바닥에 핏방울이 그림을 그렸고, 순식간에 바닥은 그 핏방울을 삼키듯이 지워 버렸다.

    이 공간은 이들의 양기를 빼앗아 가고 있었다. 피조차 이 몬스터의 양분이 되는 것 같았다.

    “남자만 해당된다는 것이 어떤 단서가 되는 것일까… 아야!”

    혼잣말을 중얼거리며 정처 없이 걸어 다니던 나는 순식간에 아주 뾰족한 무언가에 내 살이 찔리는 것을 느꼈다.

    소리를 지르며 그 근원지를 살펴보자 바닥을 타고 올라와 있는 작은 가시가 있는 것이 보였다.

    “가시……?”

    내 다리가 가시에 찔려 얕게 찢어졌고, 피를 흘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나는 움직이던 모든 행동을 멈추었다. 똑똑 떨어지는 피를 유심히 쳐다보았다. 작은 핏방울이 바닥에 떨어지자…….

    “……!”

    레크리드의 피가 떨어졌을 때와는 반응이 달랐다. 나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가시에 내 다리를 좀 더 쑤셨다.

    “으윽…….”

    신음을 참으며 피를 더 흘렸고, 그리고 나는 그 피가 이 공간과 반응하는 것을 볼 수 있었다.

    공간이 요동치듯이 진동했다. 가시에 더 찔리지 않기 위해 옆으로 빠져나와 바닥에서 일어나고 있는 작은 반응을 눈에 담았다.

    “어째서……?”

    이유는 알 수 없었다. 그러나 내 피는 확실하게 이 공간과 어떤 관계가 있는 것 같았다.

    그리고 내 머릿속에는 낯선 생각 하나가 떠올랐다. 만약 이 반응이 진짜라면, 나는 저 둘을 구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 생각이 듦과 동시에, 나는 망설임 없이 칼을 들고는 내 팔을 향해 갖다 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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