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다섯명은 너무 많잖아요 (109)화 (109/156)
  • 108화. 정령국(3)

    “……?!”

    생전 느껴 보지 못했던 묘한 기척에 감았던 눈을 번쩍 떴다.

    “원래 이게 여기에 있었나……?”

    졸린 눈을 떠 보니 잎사귀 하나가 붙은 나뭇가지가 눈앞에 놓여 있었다. 미동도 없이 가만히 놓여 있는 나뭇가지를 조심스레 들어 올렸다.

    아까 분명 텐트를 칠 때 이런 것들은 다 치웠던 것 같은데…….

    “바람에 날려 들어온 건가.”

    별생각 없이 나뭇가지를 텐트 바깥으로 던진 나는 다시 자리를 잡고 누웠다.

    그리고 얼마가 지났을까. 몸을 뒤척거리다가 반대편으로 누운 나는 소스라치게 놀라며 몸을 일으킬 수밖에 없었다.

    아까 텐트 밖으로 던졌던 나뭇가지와 비슷하게 생긴 나무줄기가 내 코앞까지 다가와 있었다.

    “……?”

    이것 또한 아무런 움직임 없이 가만히 놓여 있었긴 했지만 아까와는 다르게 큰 이질감이 느껴졌다. 여기에 있어서는 안 될 것이라는 직감때문이었을까, 보면 안 될 것이라도 본 것처럼 나는 나뭇가지로부터 멀찍이 떨어졌다.

    “레크리드, 일어나서 이것 좀 봐요! 아까도 이런 게 있었어요?”

    내가 레크리드를 향해 묻자 누워 있던 그가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그의 얼굴이 평소보다 창백한 것 같았다. 그러고 그가 무언가 하나를 들어 올렸는데, 예쁘게 피어 있는 붉은 꽃 한 송이였다.

    “제 주변에도 있어요. 이런 게 언제 들어온 거죠?”

    알 수 없는 기분에 사로잡히는 것과 동시에 오싹한 느낌이 들었다. 나는 바깥에 있는 에르셈프에게 이 기묘한 상황을 전하기 위해 텐트의 문을 벌컥 열어 걷었다.

    “에르셈프?!”

    하지만 에르셈프가 눈에 보이지 않았다. 좀 전까지만 해도 그의 인기척이 들렸었는데, 지금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진 것이다.

    “요 앞을 순찰하러 간 것일 수도 있으니, 좀만 기다려 보죠.”

    레크리드의 말에 나는 께름칙한 기분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한참을 기다려도 에르셈프는 돌아올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그가 피워 놓았던 모닥불만이 작게 타오르고 있을 뿐, 에르셈프의 기척은 그 어딘가에서도 느껴지지 않았다.

    “무언가 일이 벌어진 게 분명해요. 저만 이상한 걸 느끼는 게 아닌 거죠?”

    “…아무래도 그런 것 같네요. 루나, 떨어지지 말고 함께 에르셈프를 찾아 보도록 해요.”

    “이쪽에 발자국이 있어요.”

    우리는 희미한 달빛에만 의지하여 에르셈프의 것으로 보이는 큰 발자국을 따라 숲속으로 들어갔다. 이것 말고 다른 발자국이 없어서 가는 것이긴 했지만, 그 발자국은 마치 우리보고 숲 깊숙한 곳으로 따라 들어오라고 안내하는 것만 같았다.

    “루이아나 씨, 저게 뭐죠?”

    그때였다. 레크리드가 손가락으로 어딘가를 가리키며 내 시선을 집중시켰다.

    그가 가리킨 곳에는 커다란 나무가 하나 자리하고 있었는데, 굵은 기둥에 이상한 검은색 점이 있었다.

    “저건…….”

    나는 시야가 명확하지 않은 어둠 속에서 검은 점을 살피기 위해 눈을 찌푸린 채 유심히 바라보았다.

    “정령이라도 소환할까요?”

    답답한 마음에 레크리드를 향해 묻자 그가 단호하게 대답했다.

    “숲속에서는 빛이 보이면 위험해서 안 돼요. 이곳에 시선이 집중되었다간 큰일이 날 수도 있고요. 신중하게 움직여야 해요.”

    말을 마친 레크리드가 내 앞길을 가로막았다.

    “제가 가서 살펴볼게요.”

    비장하게 말을 내뱉은 그는 나를 뒤로 한 채 천천히 발걸음을 옮겼다.

    저벅저벅. 고요한 숲속에서는 풀밭을 밟는 레크리드의 발소리만이 울려 퍼졌다. 나는 괜스레 긴장이 되는 탓에 침을 꿀꺽 삼켰다.

    그리고 레크리드가 수상한 나무 가까이로 다가갔을 때였다.

    “어어……?”

    나무 기둥의 검은색 점이 점점 일렁이면서 크기를 키우는 것이 보였다.

    그리고 순식간이었다. 검은색 점에 손을 갖다 댄 그의 몸이 그 안으로 쑤욱- 빨려 들어갔다.

    “악!”

    “레크리드!”

    나는 믿을 수 없는 광경에 눈을 터질 듯이 크게 떴다. 벌어진 입은 다물어질 줄을 몰랐고, 손이 파르르 떨려왔다.

    곧 그의 손끝만 보이더니, 그의 자취가 눈 깜짝할 사이에 사라지고 말았다. 마치 이 숲에 처음 들어올 때부터 없었던 사람처럼,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말았다.

    한순간에 적막한 분위기가 나를 휘감았다. 차가운 밤공기만이 내 살갗을 스치고 지나갔고, 이 주변에 아무도 없다는 것이 너무나도 잘 느껴졌다.

    “이, 이게 대체 무슨 일이야……?”

    혼잣말을 중얼거린 나는 그제야 텐트 안에 샐라임을 두고 왔다는 생각이 들었다. 급하게 텐트 안으로 들어간 나는 바닥에 놓여 있는 칼부터 찾았다.

    “샐라임. 지금 이상한 일이 벌어지고 있어요. 에르셈프와 레크리드가 없어졌다구요!”

    그러자 샐라임은 이미 눈치를 챘다는 듯 침착한 목소리로 내뱉었다.

    “아까부터 느꼈지만 이 숲의 낌새가 너무 이상해. 그들은 어디로 사라진 거지?”

    “저 나무요.”

    나는 텐트 바깥으로 나가 나무 앞으로 달려갔다.

    나무는 무슨 일이라도 있었냐는 듯 그 어떤 반응도 없이 고요하게 자리하고 있었다.

    “저 검은 점 안으로 빨려 들어갔어요. 에르셈프도 저 안으로 사라진 것이 분명해요.”

    “…….”

    나는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여전히 숲속은 너무 어두워 눈에 제대로 보이는 것이 없었다. 나는 빛이 보이면 위험하다는 레크리드의 말이 생각나긴 했지만, 지금으로선 나무를 제대로 탐색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생각에 정령을 소환했다.

    “샐러맨더.”

    붉은색 도마뱀 정령이 금세 모습을 드러냈고, 나는 샐러맨더를 불빛 삼아 나무 주위를 살폈다.

    이 숲에서 어떤 일이 일어나고 있는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다행히도 나를 제외하면 이 주변엔 수상한 무언가가 있는 것 같지는 않았다.

    “이상한 것이라고 한다면 이것밖엔 없어요.”

    “들어가 보자.”

    “네?!”

    “별수 없잖아. 레크리드도 이쪽으로 사라졌다고 했고.”

    “그건 그렇지만…….”

    “널 도와주러 온 사람들을 죽게끔 가만히 놔둘 수만은 없는 노릇이잖냐.”

    “…….”

    그의 말에 손톱을 깨물며 고민한 나는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어요. 설마 죽기야 하겠어요?”

    몰려오는 두려움을 애써 무시한 채 손바닥을 천천히 나무 가까이로 가져다 댔다.

    손이 가까워지자 검은색 점은 아까와 같이 일렁이면서 크기를 키우는 것이 보였다.

    “…흡.”

    눈을 꽉 감은 채 나무 기둥에 손이 닿은 나는 순식간에 내 몸 전체가 빨려 들어가는 것을 느꼈다.

    “아악!”

    나 또한 짧은 비명만을 남겼다. 마치 진공청소기로 나를 흡입하는 듯한 기분에 눈을 가까스로 뜨자 기묘한 형상들이 눈앞에 나타나며 어딘가로 이동되었다.

    “허억!”

    3초 남짓이었을까. 나는 작은 구멍에서 내뱉어지듯이 튀어나오는 속도감과 함께 몸이 허공에서 떨어지는 것을 느꼈다.

    우당탕!

    바닥에 떨어지자마자 고개를 돌려 주변을 살폈다.

    긴 통로를 지나 내가 빠져나온 곳은…….

    “위장……?”

    분홍빛 점막으로 이루어진 이 커다란 공간은 마치 위장과도 같은 생김새를 하고 있었다.

    점막은 내가 들어오자 소화 운동을 하는 듯이 느릿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왠지 곧 있으면 위액이라도 분출될 것 같은 느낌이었다.

    “대체 이게 어디야……? 나 몬스터의 몸 안에라도 들어온 거야?”

    하지만 내가 들어온 곳은 분명히 나무의 기둥이었다. 몬스터에게 잡아먹힌 것이 아니란 말이다.

    아니면 혹시…….

    “나무가 괴물이었다는 건가? 검은색 점이 막, 입 같은 거여서 나를 위장으로 보내려는 통로였던 거고?”

    “아무리 봐도 이건 몬스터의 몸속인 것 같다. 루나, 그런데 레크리드와 에르셈프는 어디로 간 거지?”

    “레크리드! 에르셈프!”

    나는 주변을 돌아다니며 그들의 이름을 불렀지만 커다란 공간에서는 내 목소리만 울려 퍼질 뿐 그 어떤 대답도 돌아오지 않았다. 게다가 몬스터의 몸속으로 들어와서인지, 샐러맨더 또한 소환이 해제되고 사라진 상태였다.

    “일단 이곳을 탐색해 보는 것으로 하자.”

    샐라임의 말에 동의한 나는 칼을 빼든 채 위장 안을 걸어 다녔다. 사방이 울퉁불퉁하고 물렁거리는지라 발을 움직이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우왓!”

    게다가 점막에 쭈글쭈글한 주름이 많아 사이사이에 틈이 있어 자칫하면 발이 빠지기 십상이었다. 잽싸게 몸을 움직이며 주변을 살핀 나는 구석에 하나의 통로가 있는 것을 발견할 수 있었다.

    “…막혀 있어.”

    하지만 통로는 반투명한 막으로 가로막혀 있었다. 칼로 거세게 찔러 보았지만 쉽게 찢어질 것 같은 외관과는 달리 강철처럼 내 칼을 튕겨 내었다.

    “흐음……. 왠지 억지로 열 수 있는 문이 아닌 것 같아요. 저절로 열리기를 기다려야 할 것 같은데.”

    통로를 가만히 바라보며 혼자 중얼거리고 있을 때였다. 시야에 낯선 무언가가 잡히는 것이 느껴졌다.

    스믈스믈-

    노란색 액체가 점막 사이에서 천천히 흘러나오고 있었다. 한 군데에서만 나오는 것이 아니라 온 사방에서 흘러나오자 노란 액체는 바닥에 고이며 내 발을 침범하기 시작했다.

    “…이게 뭐야!”

    쉬이익- 

    액체는 내 발에 닿자마자 신발을 부식시키기 시작했다. 아주 빠른 속도로 가죽을 벗겨 내더니, 이내 내 발이 보일 정도가 되었다.

    “위액?”

    이곳이 위장이니 여기서 흘러나오는 액체는 위액이 맞는 것 같았다. 나는 위액을 피해 이리저리 도망쳤지만 전부 피하는 것은 역부족이었다.

    옷에 구멍이 나기 시작했고, 신발이 타 들어갔으며, 머리카락도 뚝뚝 끊어졌다.

    “젠장! 어떻게 하란 말이야!”

    이러다가는 꼼짝없이 위액에 잠식되어 흔적도 없이 사라질 것만 같았다. 설마 에르셈프와 레크리드도 그렇게 해서 이미 저세상으로 떠나 버린 건 아니겠지……?

    불길한 생각을 애써 지우며 나는 이 상황을 타파할 방법을 찾았다.

    그리고 이 급박한 시점에, 반가운 듯, 반갑지 않은 소리가 나를 찾아왔다.

    [퀘스트가 도착하였습니다!]

    [열람하시겠습니까?]

    [자동으로 열람됩니다. 3…2…1…….]

    +

    # 돌발 퀘스트!

    제목: ‘남주인공을 구하라!’

    내용: 숲의 위장에 빠져 죽을 위기에 처한 남주인공 둘을 구하시오. (조건: 주어진 무기를 사용하여 단 세 번의 기회 안에 처치하시오.)

    제한 시간: 1시간

    보상: 위장 탈출

    페널티: 사망

    +

    저절로 열람된 퀘스트를 읽고 있을 때였다. 허공에서 빛무리가 떠오르기 시작했다.

    그것은 곧 천천히 나에게 다가오더니, 내 손 앞에서 멈추었다.

    “?”

    나는 그것이 나에게 안착하도록 손바닥을 폈다.

    “이게 뭐야……?”

    하얗게 발하는 그것에서 점점 빛이 사라지더니, 긴 검신의 롱 소드가 모습을 드러내었다.

    빛나다 못해 눈부시게 밝은 검신이 괴물의 위장 안에서 유유히 떠올랐고, 나는 그것을 두 손으로 잡아 쥐었다.

    양손 검은 처음인데도 불구하고 마치 처음부터 나를 위해 만들어졌던 것처럼 아주 안정감 있게 내 손을 휘감아 왔다.

    “그런데 대체 이걸로 뭘 처치하라는 거야……?”

    내 주변에는 그 어떤 몬스터도 없었다. 나를 위협하는 것이라고는 점점 발밑에 차오르고 있는 노란 액체일 뿐이었다.

    “액체를 처치할 수도 없는 노릇이잖아!”

    답답한 마음에 혼자 소리친 나는 머리를 싸맸다. 기회는 단 세 번이라고 했던 퀘스트의 내용처럼, 시야의 오른쪽 상단에는 칼 모양의 작은 그림이 세 개가 떠 있었다. 마치 게임 속 캐릭터의 목숨처럼, 한 번 시도할 때마다 그림이 지워질 것만 같았다.

    “일단 뭐라도 찔러 봐……?”

    당최 단서를 찾을 수 없는 탓에 나는 검을 쥐어 아무 곳이나 쑤셔 보자는 생각을 했다.

    “하앗!”

    그리고 내가 있는 힘껏 내 옆에서 꿀렁거리고 있는 점막을 향해 칼을 내리찍었을 때였다.

    귀를 찢을 듯이 날카로운 비명이 들려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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