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다섯명은 너무 많잖아요 (108)화 (108/156)
  • 107화. 정령국(2)

    왕자의 권한으로 정당하게(?) 정비 부대에서 빠져나온 에르셈프는 그렇게 나와 함께 북쪽 숲으로 가는 파티에 함께 하게 되었다.

    내일 아침에 출발할 것이라고 전한 나는 에르셈프에게 인사를 한 뒤, 다음 타자를 향해 갈 준비를 했다.

    북쪽 숲에 갈 두 번째 파티원은 바로…….

    “안에 있어요?”

    똑똑, 나무 문을 두드렸다. 그러자 안쪽에서 “네.” 하는 소리가 들리더니, 이내 순한 인상의 남자가 얼굴을 내보였다.

    “루이아나 씨?!”

    레크리드는 그 어느 때보다 밝은 웃음을 지으며 나를 맞이해 주었다. 남의 집을 함부로 찾아가는 것은 예의가 아니었지만 그를 만나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었다. 다행히도 레크리드 또한 기분이 나쁜 것 같지는 않았다.

    “들어와요.”

    자연스럽게 그의 집에 들어간 나는 소파에 앉아 그가 내주는 차를 받았다.

    “어쩐 일이죠? 루이아나 씨가 이렇게 먼저 저를 찾아오다니요. 저야 물론 좋지만, 안 좋은 소식이라도 있는 건지 걱정되네요.”

    그는 다정한 목소리로 나에게 말했다. 나는 그의 눈을 잠시 쳐다보다가, 침을 꿀꺽 삼킨 뒤 입을 열었다.

    “레크리드, 나는 정령국에 갈 거예요.”

    “!”

    “저번에 키베리아 씨가 말해 준 북쪽 숲을 지나갈 겁니다. 그래서 말인데…….”

    “네.”

    “저와 같이 가 줄 수 있나요?”

    그의 눈동자가 크게 확장되었다. 내 제안이 전혀 예상치 못할 법했기 때문이겠지.

    “저…요?”

    그는 왜 자신을 선택했는지 묻는 것 같았다. 사실 레크리드는 다른 남주인공들에 비해 싸움을 잘할 것 같지도 않았다. 기사와 정령술사인 그들과는 다르게 레크리드는 상인이니까.

    “네. 함께 가고 싶어요. 북쪽 숲은 아주 위험한 곳이라고 들었어요. 저 혼자 갔다가는 뼈도 못추릴지 몰라요. 하지만 레크리드와 함께 간다면 분명 전력에 큰 도움이 될 거예요.”

    “하지만 저는 칼을 다룰 줄 안다거나, 마법을 사용할 줄도 모르는걸요.”

    “괜찮아요. 레크리드는 좋은 물품들을 가지고 있잖아요. 그것만으로도 제 여정에 큰 도움이 될 거예요.”

    “어, 지금 제 물건 공짜로 쓰시겠다는 거예요?”

    “공짜라뇨! 그런 의도로 한 말이!”

    “하하, 장난이에요.”

    그는 가볍게 내 팔을 잡으며 웃었다.

    레크리드에게는 물건 때문에 그를 고른 것이라고 말했지만 사실 내가 레크리드를 택한 이유는 따로 있었다.

    그건 바로…….

    호감도를 100%까지 채우고 난 뒤 사망 엔딩까지의 시간이 에르셈프 다음으로 길었기 때문이다.

    정령국에 가서 샐라임의 봉인을 해제하는 큰 목적이 있긴 하지만 나 또한 최종 퀘스트의 내용을 무시하고만 있을 수는 없었다.

    이 시스템을 기필코 빠져나가는 것이 목적이니까. 나는 그 목적을 잊지 않고 앞으로 나아갈 거다. 그러기 위해서는 에르셈프, 레크리드와 함께 붙어 지내며 호감도를 올리는 것이 중요했다.

    “좋아요. 루이아나 씨의 부탁이라면 무엇이든지 들어줄 수 있어요. 출발은 언제죠?”

    레크리드는 언제든지 떠날 준비가 되어 있는 사람처럼 벌떡 일어났다.

    “내일 아침이에요. 혹시 북쪽 숲에 관한 정보를 얻는다면 꼭 알려 줘요.”

    “그럼요. 그곳은 관련된 정보가 거의 존재하지 않지만 최대한 알아볼게요.”

    “고마워요, 레크리드.”

    그의 배웅을 받으며 나는 집 밖을 나섰다. 레크리드 또한 흔쾌히 수락해 주어서 아주 다행이었다.

    무사히 에르셈프와 레크리드를 설득한 나는 기숙사로 돌아와 내일 북쪽 숲으로 향할 준비를 시작했다.

    * * *

    다음날이 밝고, 우리는 모이기로 한 장소에서 만날 수 있었다.

    “왕자님을 뵙습니다.”

    “그래.”

    에르셈프를 본 레크리드가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평소 같았으면 고개만 끄덕였을 에르셈프는 웬일인지 대꾸를 해 주었다.

    “한 명이 더 있을 줄은 몰랐군.”

    그러고는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나는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을 지으며 시치미를 뚝 뗐다. 나 혼자만 간다고 말한 적은 없잖아?

    “게이트를 타면 북쪽 숲 근처에 도착할 수 있어요. 어서 가죠.”

    나는 자연스럽게 그들을 이끌었다. 게이트를 타는 것까지는 문제가 없었지만 북쪽 숲 근처에 도착하고 나서는 아마 에르셈프의 도움을 받아야 할 거다. 난 그쪽 지형에 대해 아는 바가 전혀 없으니까.

    슈우우-

    금세 게이트를 탄 우리는 어지러운 기분과 함께 북쪽 숲 게이트에 도착할 수 있었다.

    “북쪽 숲은 크기가 가늠이 안 될 정도로 넓어. 하지만 모험가들이 나다니는 경로는 딱 한 가지 정해져 있어. 숲을 가로지르는 지름길인데, 그 길을 통하면 믿을 수 없는 속도로 빠르게 올 수 있지. 나 또한 그 길을 따랐고.”

    “그 외의 길은 가 본 적이 없는 건가요?”

    “그래. 다른 길에 대해서는 관련된 정보를 찾는 게 힘들 거야. 오랜 시간 동안 사람들은 한 가지 길만을 이용했고, 숲의 나머지 곳들은 들어가지 않는 것으로 통용되고 있어. 함부로 들어갔다간 흔적도 없이 사라질지도 모르는 곳이야.”

    에르셈프는 겁을 주려는 생각은 전혀 없는 것 같아 보였지만 나와 레크리드는 순식간에 두려움에 사로잡혀 버리고 말았다.

    그렇게 무시무시한 곳이었단 말이야?

    사색이 된 내가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있자 에르셈프가 그제야 수습했다.

    “하지만 내가 있으니 걱정하지 마. 그래 봤자 몬스터들일 거니까.”

    나는 고개를 돌려 북쪽 숲의 초입을 바라보았다. 에르셈프의 말대로 길이 하나 나 있는 것이 보였고, 화살표가 붙어 있었다.

    그리고 그 뒤에는 울창한 숲이 우거져 있었다. 키가 큰 나무들이 빽빽하게 자리하고 있었고, 왠지 모르게 한기가 드는 것 같았다.

    “추, 출발하죠.”

    나는 애써 겁난 티를 숨기며 발걸음을 뗐다. 나, 여기 잘 온 것 맞겠지?

    그때, 내 손에 무언가 낯선 감촉이 닿는 것이 느껴졌다.

    “무서우면 제가 손을 잡아 줄게요.”

    옆을 보자 레크리드가 예쁜 눈웃음을 지으며 내 손을 꼬옥 쥐고 있었다.

    “레크리드. 나는 괜.”

    어정쩡한 표정으로 그의 손길을 거절하려고 했다. 아니 옆에 에르셈프도 있는데 어떻게 둘이서만 손을 꼭 잡고 걸어!

    그런데 옆에 있던 에르셈프가 우리를 쳐다보는 시선이 느껴졌다.

    “…….”

    그는 빤히 우리가 맞잡은 손을 바라보고 있었는데, 내가 본 에르셈프의 어떤 눈빛보다 사납고 무섭게 번뜩였다.

    나는 그제야 아차,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남주인공 두 명을 데리고 왔다는 건… 그것에 대한 대가를 감내해야 한다는 것.

    젠장, 이 둘 사이에 껴서 온갖 수모를 당하는 건 아니겠지.

    벌써부터 둘의 신경전이 이어지는 것 같은 가운데 나는 어색한 웃음을 지으며 슬며시 레크리드의 손에서 내 손을 빼냈다.

    “저는 아무렇지도 않아요! 자자, 빨리 갑시다. 이러다간 해가 져서 몬스터의 밥이 되게 생겼어요.”

    그리고 우리는 <북쪽 숲에 오신 걸 환영합니다.> 라고 붙어 있는 표지판 앞으로 갔다.

    글씨가 다 벗겨져 있고 곳곳이 낡아서 부서져 있는 것이 공포 영화에나 나올 법한 생김새였다.

    “후우…….”

    큰 숨을 들이쉬며 나는 앞장서서 북쪽 숲의 입구를 들어갔다. 그런데 그때, 내 귀에 시스템의 음성이 들려왔다.

    [서브 퀘스트가 도착했습니다!]

    [열람하시겠습니까?]

    나는 잘만 걷던 발걸음을 우뚝, 하고 멈추었다. 서, 서브 퀘스트……? 최종 퀘스트가 마지막 퀘스트인 것 아니었어? 왜 갑자기 서브라는 이름을 붙여서 새롭게 등장하는 건데!

    나는 입술을 질끈 깨물며 떨리는 마음으로 퀘스트를 열람했다.

    제발, 제발 이상한 퀘스트만 아니어라!

    +

    # 제1 서브 퀘스트

    제목: ‘정령국으로 가는 길’

    내용: 맵에 나타난 길을 따라가 정령국으로 향하시오.

    제한 시간: 없음

    보상: 없음

    페널티: 없음

    +

    찌푸린 눈으로 퀘스트를 확인한 나는 안도의 숨을 내쉴 수 있었다. 다행히 괴상망측한 퀘스트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나저나, 정령국으로 가는 길을 알려 준다고……? 가는 길을 전혀 몰랐는데 완전 다행이잖아?!

    나는 퀘스트를 닫은 다음에 앞을 바라보았다. 그러자 시야에 분홍색 선이 길을 따라 쫙, 하고 펼쳐지는 것을 볼 수 있었다.

    “!”

    그리고 오른쪽 하단에는 미니 맵이 떠올랐다. 현재 우리의 위치와 정령국의 위치, 그리고 경로가 표시되어 있었다.

    “대박.”

    나는 놀라운 마음을 감추지 못하며 샐라임을 향해 작게 속삭였다.

    “샐라임, 정령국으로 가는 길을 알아냈어요!”

    “뭐?! 어떻게 말이냐?!”

    “퀘스트가 알려 줬어요! 제가 정령국으로 가려는 걸 알고 도와주려나 봐요. 원래 이렇게 착한 녀석이 아닌데 갑자기 왜 이러지? 무슨 꿍꿍이가 있나?”

    “루나, 뭐라고 혼자 중얼거리는 거지?”

    “아, 아니에요. 제가 길을 알 것 같아요. 저를 따라오시면 돼요.”

    나는 분홍색 선이 그어진 곳을 향해 그들을 이끌었다. 모험가들이 다닌다는 큰길과는 벗어난, 길조차 나 있지 않은 숲속이었다.

    그러자 에르셈프가 발걸음을 멈추며 나에게 물었다.

    “이곳으로… 가겠다고? 길을 벗어나면 위험해질 수 있어.”

    “괜찮아요. 문제없어요.”

    “루나 네가 길을 어떻게… 안다는 거지?”

    “어…….”

    나는 마땅한 대답을 찾지 못해 뜸을 들였다. 에르셈프와 레크리드 모두 내 얼굴만을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여, 여자의 촉이랄까요? 하하!”

    내가 머쓱하게 웃으며 대답하자 에르셈프가 얼굴빛을 바꾸며 입을 열었다. 왠지 엄청나게 잔소리를 할 것 같은 느낌……!

    “루나 네가 아는 게 있다면 우리를 이끌어도 좋아. 하지만 함부로 앞장을 서지는 마. 언제 어디서 무언가가 튀어나올지 모르니까.”

    그는 딱딱함 80%, 다정함 20%가 섞인 오묘한 말투로 나에게 말했다. 이게 걱정해 주는 건지, 훈계하는 건지 당최 알 수가 없었다.

    “네, 알겠어요. 나란히 가죠.”

    그렇게 우리는 큰길을 벗어나 풀을 헤치며 깊은 숲속으로 들어가기 시작했다.

    그렇게 몇 시간이 흘렀을까.

    미니 맵에 나와 있는 경로는 짧아 보였지만 막상 걸으니 절대 짧은 거리가 아니었다.

    “후……. 조금 쉬었다 갈까요?”

    아직은 낮이었다. 그러니 분명 머리 위에서 햇볕이 내리쬐고 있을 텐데, 우리는 울창한 나무들에 가려 그늘 속에 갇혀 있을 수밖에 없었다.

    “생각보다 전혀 안 위험한데요?”

    레크리드가 다행스럽다는 말투로 말했다.

    몇 시간 내리 걷는 동안 몬스터 한 번 나오지 않았고, 께름칙한 낌새 또한 보이지 않았다.

    사람은 한 명도 보이지 않았지만 무언가가 튀어나올 것 같은 느낌은 전혀 들지 않았다.

    “북쪽 숲에 관한 정보가 없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그건…….”

    내 말에 레크리드가 바로 입을 열었다.

    “북쪽 숲에 함부로 들어간 사람은 살아 나오지 못하기 때문이죠.”

    “네, 네?!”

    나는 화들짝 놀라고 말았다. 아, 아니 이걸 지금 알려 준단 말이야? 나는 절로 헛웃음이 나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하긴, 숲이 보통 넓어야지. 가늠이 안 될 정도로 넓으니 길을 잃을 법도 하겠어. 다들 길을 못 찾아서 못 빠져나온 것일 거야. 지금처럼 몬스터의 흔적 같은 건 하나도 없잖아?

    손톱을 질겅질겅 깨물며 속으로 생각했다. 그리고 나는, 그렇게 속 편한 생각을 한 나 자신을 원망할 줄은 꿈에도 몰랐다…….

    “숲은 금방 밤이 찾아와. 어느 정도까지 왔지?”

    “아직 3분의 1밖에 못 왔어요.”

    “서두르지.”

    밤은 생각보다 빠르게 찾아왔다. 이 세계에는 밤이 되면 낮과는 다르게 위험한 것들이 나타나는 경우가 왕왕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주변을 조심하면서 텐트를 치고 있었다. 나는 더욱 조심하기 위해 샐러맨더를 보내 주변을 정찰하고 오라고 했지만 몬스터의 흔적은 전혀 발견할 수 없다고 했다.

    “아무런 기척도 느껴지지 않아.”

    우리 셋은 전부 답답한 표정을 지으며 서로를 쳐다보았다. 아무것도 알 수 있는 게 없었다.

    긴장감 속에서 계속 대기하느니 차라리 돌아가면서 불침번을 서기로 한 우리는 잘 준비를 마친 채 텐트 안으로 들어갔다.

    “이만 잘까요?”

    그리고 사건은, 우리가 눈을 감았을 때 벌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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