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다섯명은 너무 많잖아요 (106)화 (106/156)
  • 105화. 새로운 삶(3)

    애뮬릿을 얻으면서 죽지 않는 방법.

    남주인공들의 호감도를 100%까지 올리면서도 동시에 내 목숨이 날아가지 않는 법!

    드디어 알아낼 수 있었다.

    나는 잰퓨어에게 화장실에 갔다 온다고 하며 자리를 잠시 피했다.

    그러고는 공원 벤치에 들어가 자리를 잡고 앉았다. 잰퓨어가 기다리고 있으니 빠르게 생각을 마쳐야 했다.

    최종 퀘스트의 내용은 나에게 시스템에서 벗어나지 못할 것이라고 암시하는 것 같았다.

    하지만 의미심장한 퀘스트의 제목을 쓴 점, 모순적인 내용, 그리고 짧은 힌트를 두고 보았을 때 나는 하나의 내용을 추리할 수 있었다.

    주의 사항이 바로 ‘호감도가 100%에 달할 경우, 기존의 스토리대로 사망함’이었지.

    내가 퀘스트를 정상적으로 수행한다고 가정하면 내 미래는 기존의 스토리대로 흘러가게 될 것이다.

    그렇다면 기존의 스토리는 어떤 것인지 다시 되짚어 볼 필요가 있었다. 나는 눈을 감고 예전에 게임을 플레이했던 기억을 떠올렸다.

    엔딩을 기억해 내는 것이 중요했다. ‘가이즈 인 러브’의 엔딩은 여러 장면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처음에는 여주인공과 남주인공이 달콤하게 입을 맞추는 장면, 행복한 가정을 이루는 장면, 하지만 그다음에는 여주인공이 죽음을 당하는 장면이 등장했다.

    “아직도 잊지 못해……. 여주인공이 독살을 당해 입에서 피를 흘리는 장면을 넣은 게임이 세상에 또 어디 있겠냐고.”

    이 게임의 장르가 피폐물인가 싶을 정도로 어이가 없었기에 기억에 선명했다.

    여주인공이 죽임을 당한 뒤에는 장례식을 치르며 주변 사람들이 그녀를 보내 주는 장면, 그다음에는 슬퍼하는 남주인공에게 새로운 여주인공이 나타나면서 이야기는 끝이 난다.

    생각해 보니까 완전 재수 없잖아……?

    나를 이런 게임에 환생하게 한 존재를 향해 욕설을 뇌까렸다. 듣고 있으면 들으라지!

    그러고는 나는 엔딩 일러스트 장면 위에 떠오르던 글자들을 생각해 내기 위해 애를 썼다.

    길게 설명이 되는 터라 세세하게 기억할 순 없었지만… 기억을 더듬어 가장 중요한 포인트가 되는 것에 초점을 맞추었다.

    그건 바로 ‘시간’이었다.

    여주인공이 남주인공과 이어지고 나서, 죽임을 당하기 전까지엔 남은 시간이 존재한다. 그걸 기억해 내는 거다.

    예를 들어 세이먼 루트 같은 경우엔 이틀의 시간이 주어졌다.

    [세이먼을 너무나도 사랑했던 히아신스는 질투와 욕심에 눈이 멀어 루이아나를 죽이기로 결심했다. 그리고 이틀 뒤, 사건은 학생 식당에서 시작되었다. 그녀는 한 방울만 먹어도 치사에 이를 수 있는 독약을 준비해 루이아나의 식사에 타기로 했다…….]

    이렇게 세이먼과 여주인공이 이어지고 나서, 히아신스에게 죽기 직전까지의 시간을 알 수 있었다.

    하지만 한 가지 걸리는 점이 있었는데, 그건 히아신스가 이미 나에게 독살을 하려고 했던 적이 있었다는 것이었다.

    그렇다면 내가 세이먼과 맺어졌을 때 히아신스가 나를 독살하려는 상황이 똑같이 벌어질 수 있을까?

    알 수 없었다. 그렇지만 힌트가 ‘기존의 스토리대로’였기 때문에 상황은 어떻게 해서든 똑같이 흘러갈 것만 같았다.

    아니면 스토리 설명대로 독살은 당하되, 흐름이 다르게 이어질 수도 있는 노릇이었다.

    여기서 확실한 건 주어진 시간이 이틀뿐이라는 점이었다.

    “다음 타자.”

    나는 다음으로 잰퓨어 루트에 대해 생각했다.

    […을 빼앗아 간 잰퓨어를 죽이기 위해 흑마법사들은 계획을 세웠다. 잰퓨어와 루이아나가 사람들 앞에서 입을 맞추던 날, 잠입해 있던 흑마법사들은 잰퓨어에게 마법을 쏘았지만 비극적이게도 루이아나가 대신 맞고 말았다……]

    “당일이야. 호감도가 100%에 달해 여주인공이 잰퓨어와 이어지는 날.”

    시간대까지 기억해 내고 싶었지만 전혀 생각나지 않았다. 그 말은 즉, 내가 죽는 시점이 잰퓨어와 맺어지고 나서 불과 5분 뒤일 수도 있다는 말이 되었다.

    “하……. 다음은 레크리드 차례.”

    [그전부터 루이아나의 속을 앓게 만든 레크리드의 버릇은 쉽게 고쳐지지 않았다. 루이아나는 그를 사랑했기에 기다렸고, 또 기다렸지만 불과 나흘 만에 상사병이 걸리고 말았다. 평소에도 몸이 약했던 루이아나는 시름시름 앓다가……]

    “나흘인가? 레크리드와 엔딩을 보고 난 날부터 나흘 후?”

    허, 하고 헛웃음이 나왔다. 나흘 만에 상사병이 걸리는 사람이 어디 있냐고! 게임을 할 당시에는 그러려니 했지만 지금 와서 보니 어처구니가 없었다.

    “어, 나흘이 아닌가?”

    [평소에도 몸이 약했던 루이아나는 시름시름 앓다가 8일째가 되는 날, 숨을 거두었다……]

    “8일째였어. 하마터면 못 알아챌 뻔했군.”

    가까스로 생각해 낸 내가 다행스러운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시간을 정확히 기억해 내는 게 중요했다. 하나라도 잘못 기억한다면 낭패를 볼 게 분명했다.

    “다음은 베탄.”

    […이튿날 베탄은 항상 오르던 뒷산으로 향했고, 루이아나는 그 뒤를 쫓았다. 하지만 산은 그녀의 예상보다 험준하고 위험했다. 그녀는 베탄을 따라잡기 위해 …했지만 …했고, 발을 잘못 디뎌 바위에서 미끄러지고 말았다.]

    “바로 다음 날이군. 진짜 억지로 죽이려고 별짓을 다 써 놨네.”

    잰퓨어와 마찬가지로 시간이 빠듯했다. 하지만 시간을 기억하는 게 중요한 것이니 내용을 잊지 않았다는 것이 감사하게 느껴졌다.

    “이제 에르셈프만 남았나…….”

    […에르셈프는 전설의 보검을 들고는 전쟁터로 향했다. 그의 모습은 마치 …했다. 에르셈프가 걱정된 루이아나는 전쟁터의 의료진으로 봉사를 자청했고, 열흘째가 되던 날이었다. 몰래 잠입한 상대편 적의 움직임을……]

    “열흘째였군. 이렇게 보니 엔딩 장면들이 하나같이 시간을 알려 주고 있었네. 이 세계에 떨어지고 게임 플레이 장면을 꾸준히 생각해 봤었지만 그 부분이 특이한 점이란 걸 전혀 느끼지 못했어.”

    나는 단서를 찾아낸 탐정처럼 눈을 번뜩였다. 남주인공마다 해당된 날짜가 달랐으니, 이걸 순서대로 나열하기로 했다.

    “에르셈프가 10일로 가장 길고, 다음이 레크리드 8일, 세이먼이 2일, 베탄이 1일, 잰퓨어가 당일이군.”

    이제 호감도가 100%를 찍고 죽기까지의 남은 시간을 알아냈으니 다음은 그 시간 동안 무얼 할지를 정해야 했다.

    나는 퀘스트의 제목인 ‘진짜 남자 주인공은 누구?’를 계속해서 떠올렸다.

    “설마 다섯 남주인공 말고 다른 주인공도 있는 거 아니야?!”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내가 샐라임을 향해 소리쳤다.

    “샐라임! 혹시 저 좋아해요?!”

    “…얘가 드디어 미쳤나. 무슨 소리를 하는 거냐.”

    “죄송해요.”

    그런 게 아니라면 다섯 명 중 진짜 남주인공은 누구일까?

    시간이 가장 긴 에르셈프? 가장 짧은 잰퓨어? 아니면 아무런 관련이 없을까?

    퀘스트의 내용을 다시 살펴보니 ‘당신에게 해당된 남자 주인공의 ‘애뮬릿’을 얻으시오.’였다.

    “음…….”

    ‘해당된’이라는 말이 내게 주어진 다섯 명을 다 뜻하는 것인지, 진짜 남자 주인공 하나를 뜻하는 것인지 모호했다. 다섯 명 다라면 ‘남자 주인공들’이라는 표현을 썼을 것 같았지만 혹여나 아닐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계속 들었다.

    게다가…….

    “진짜 남주인공이 누구인지 모르는 상황에서 한 명에게 올인했다가는 큰일이 생겨.”

    그랬다. 만약 내가 레크리드가 진짜 남주인공이라고 생각했는데 사실은 베탄이면 어떡하지?

    그러면 난 꼼짝없이 아무런 희망 없이 상사병으로 죽는 엔딩에 처한다.

    “진짜 남주를 찾기 전까지는 다섯 명의 모든 호감도를 올려야 해.”

    모든 남주인공의 호감도를 90%대까지 올려 놓은 다음, 진짜 남주인공을 찾았을 때 그 사람에게 몰빵하면 되는 거다.

    그러면 리스크를 최소한으로 할 수 있겠지.

    설령 진짜 남주인공을 못 찾더라도 괜찮았다.

    “그럴 땐 그냥 다섯 명 다 확인하는 거야.”

    레크리드의 호감도를 100%로 찍었는데 그가 진짜 남주인공이 아니면 그다음은 세이먼의 호감도를 100%로 찍으면 된다. 만약 세이먼도 아니라면 에르셈프, 에르셈프도 아니라면 잰퓨어, 잰퓨어도 아니라면 베탄으로 가는 거다.

    “진짜 남주인공을 찾을 수밖에 없게 되는 거지.”

    그리고 여기서 중요한 것은, 내가 가장 오래 살 수 있는 순서대로 가야 한다는 것이었다.

    죽기까지의 시간이 가장 짧은 잰퓨어 루트를 가장 먼저 찍었을 경우엔 당일에 내가 죽어 버리니 다른 남주인공들에게 갈 시간이 생기지 않는다.

    그러니 처음엔 에르셈프 루트를 깨는 거다. 그러면 죽기 전까지 열흘이라는 시간이 생기니 그 안에 승부를 보면 된다.

    한마디로 말하면, 에르셈프, 레크리드, 세이먼, 베탄, 잰퓨어 순서대로 호감도를 100%로 올릴 때 나는 모든 남주인공들과 엔딩을 보며, 애뮬릿도 얻고, 이 퀘스트를 무조건 깰 수 있다는 것이다.

    “물론 그 전에 진짜 남주인공이 누구인지 알게 되는 것이 가장 좋겠지만.”

    다섯 명을 순서대로 공략하는 것은 가장 최악의 상황에 처했을 때의 방법이었다. 제일 좋은 방법은 단서를 찾아서 진짜 남주인공을 미리 찾아내는 것이었다.

    ‘가이즈 인 러브’ 게임에서는 진짜 남주인공을 찾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한 사람과의 루트를 타는 것이 목적이었으므로 원작 게임 스토리로부터는 더 이상 힌트를 얻을 수 없었다.

    나는 지금까지의 생각을 정리하며 벤치에서 일어섰다.

    “일단은 다시 잰퓨어에게로 돌아가자. 시간이 많이 흘렀어.”

    * * *

    잰퓨어가 있는 곳으로 다시 돌아가자 그가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날 기다리고 있는 것이 보였다.

    그는 날 보자마자 소리쳤다.

    “루나! 대체 어딜 갔었던 거야! 한참을 찾았어.”

    “화장실 가는 길이 복잡해서 잠시 헤맸어. 미안해.”

    “다행이다. 길을 잃은 줄 알고 찾으러 다녀야 하나 고민했어.”

    그는 안도하는 표정을 지으며 내 손을 꽉 잡았다.

    나는 잠시 놀랐지만 티를 내진 않았다. 어쨌든 호감도를 올려야 하는 게 맞으니까. 아니, 사실 따스한 손을 맞대니 좋은 것 같기도 했다.

    “어서 가자. 맛있는 디저트 집을 알아 놨어.”

    그의 손에 이끌려 도착한 곳은 고풍스러운 분위기를 물씬 풍기는 한 디저트 가게였다.

    크레페와 케이크, 홍차를 시킨 우리는 자리에 앉아 서로를 마주 보았다.

    “밖에서 보니까 느낌이 다른 것 같아.”

    “뭔 느낌인데?”

    “훨씬… 치명적인 느낌?”

    나는 그 말에 웃음이 풋, 하고 나왔다. 아무렇지도 않게 저런 말을 주절대는 잰퓨어가 웃길 따름이었다. 내가 웃자 기분이 좋아진 것인지 잰퓨어의 표정이 확 밝아졌다.

    “네가 내 앞에서만 웃었으면 좋겠다.”

    “안 그래도 친구 없는데 더 없어지라고?”

    “나만 있으면 되는 거 아니야?”

    “곧 떠나 버리면서 무슨.”

    그러나 그 표정엔 금세 아쉬운 기색이 올라왔다.

    “이런 애를 두고 내가 떠나야 한다니……. 정말 이렇게 가기 싫어질 줄은 몰랐는데.”

    “꼭 돌아가야 하는 거지?”

    “…….”

    잰퓨어는 잠시 입을 다물더니 대답이 없었다. 그리고 무언가 말을 고민하는 것처럼 입술을 달싹였다.

    “무슨 일이 있는 거야?”

    “사실은…….”

    “…….”

    뜸을 들이던 그는 이내 나에게 털어놓았다.

    “동생을 찾으러 가기로 했어.”

    “!”

    잰퓨어는 예전에 여동생을 잃어버렸다고 말한 적이 있었다. 어머니가 다르다는 이유로 할머니가 여동생을 타국으로 보내 버렸고, 자신은 그걸 막지 못했다고 했다. 그리고 여전히 여동생에 대한 죄책감을 본인이 지고 있는 것 같았다.

    “어디 있는지 모른다고 하지 않았어? 정보라도 구한 거야?”

    “응. 수소문 끝에 동생이 어디에 있는지 실마리를 알아냈어.”

    “…….”

    “루나, 나는 아리안 섬으로 갈 거야. 그곳에 동생이 있어. 그리고 동생을 데려간 몹쓸 놈들을 처치할 거야.”

    “동생을 데려갔다고……?”

    “에리피아는 그들에게 이용당하고 있어. 한시라도 빠르게 동생을 구해 내야 해. 그게 내 인생의 목표인 것이나 다름없어.”

    “데려간 사람들의 정체는? 알고 있어?”

    내 물음에 잰퓨어의 얼굴이 약하게 붉어졌다. 화를 애써 억누르고 있는 것 같았다.

    “‘케이오스’라는 집단이야. 옛날부터 어린 여자애를 몇 년간 세뇌한 다음에 제물로 바친다더라.”

    “……!”

    나는 내 귀를 의심했다. ‘케이오스’라면 얼마 전 아카데미를 박살 냈던 그 집단이 아닌가?

    마물의 힘을 숭배하면서 언젠가 마물이 이 세계를 지배할 것이라고 믿는 그런 종교 집단이라고 들었는데. 어린 여자애를 제물로 바친다고?

    마물들을 소환한 것부터 규모가 작은 집단이라고 생각하진 않았지만 이렇게 큰 세력이 있을 줄은 몰랐다.

    그저 미친 사이비 종교 집단인 줄로만 알았는데…….

    “잰퓨어, 사실 얼마 전에 아카데미에 마물들이 나타난 것 말이야.”

    “응.”

    “…….”

    나는 잠시 말을 멈추었다. 순간적으로 세이먼이 떠올랐다. 세이먼은 케이오스에 힘을 가담하여 그들의 계획이 이루어지도록 도왔다. 물론 아버지를 무너뜨리고 싶다는 다른 목적이 있었지만, 그들에게 힘을 보태 준 것은 맞는 사실이었다.

    그런데 잰퓨어에게 세이먼의 이야기를 해도 되는 것일까?

    어찌보면 세이먼은 잰퓨어의 적이라고 해도 다를 바가 없는데…….

    “루나, 말해 줘. 무슨 말을 하려고 한 거야?”

    내가 뜸을 들이자 잰퓨어가 대답을 하도록 보챘다.

    머릿속이 복잡했다. 잰퓨어에게 세이먼의 이야기를 했다가 자칫해서 세이먼이 위험에 처하게 되면 어떡하지?

    하지만 말을 하지 않고 있다가 나중에 잰퓨어가 알게 되었을 경우 나에게 엄청난 배신감을 느끼지 않을까?

    나에겐 진짜 남주인공을 찾아야 할 의무가 있었다. 그렇다면 누구의 편을 드는 것이 옳을까.

    세이먼과 잰퓨어 중 대체 누구를 도와야 할까?

    “루나.”

    “…….”

    “무언가 알고 있는 거지?”

    나는 날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는 잰퓨어를 향해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하던 생각을 멈추고는, 입을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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