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다섯명은 너무 많잖아요 (105)화 (105/156)

104화. 새로운 삶(2)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던 건지, 내 말을 알아듣기라도 한 건지 기가 막힌 타이밍에 힌트가 도착했다.

튜토리얼 퀘스트 때 받은 탈출 힌트 이후로는 처음 받는 것이었다.

“진짜 달라고 하니까 주잖아……?”

얼떨떨한 기분으로 알림창을 가만히 쳐다보다가 ‘열람’ 버튼을 눌렀다.

그러자 짧은 글귀 하나가 등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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힌트:

‘기존의 스토리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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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

읽자마자 내 입에선 의문의 소리가 나왔다. 직관적으로 이해가 되지 않았다.

기존의 스토리대로? 기존의 스토리대로라면 호감도를 올리지 않거나 죽는 선택지밖에 없잖아!

기존의 스토리에서 벗어나려고 이 짓거리를 한 건데 결국엔 스토리대로 가게 된다 이 말이야?

나는 알 수 없는 기분으로 샐라임에게 이야기를 해 주었다. 그러자 샐라임 또한 무거운 침음을 내뱉었다.

샐라임 또한 뾰족한 답이 나오지 않는 것 같았다.

난 힌트를 짜 맞추기 위해 다시 퀘스트창을 열었다. 분명 하나씩 대조해 가다 보면 단서가 있을 거다.

일단 제목이 ‘진짜 남자 주인공은 있을까?’라는 것이 참 의미심장했다. 그러면 다섯 명 중에 한 명을 고르라는 것일까? ‘애뮬릿’을 얻으라는 건 그 한 명의 것을 말하는 건가? 하지만 그 한 명의 ‘애뮬릿’을 얻었을 때, 정해진 배드 엔딩으로 향한다는 건 변하지 않아.

나는 젖 먹던 힘까지 쥐어 짜내 머리를 굴려 추리했다. 대체 퀘스트가 말하고자 하는 명확한 바가 무엇인지.

하지만… 계속 생각을 해 봐도 마땅히 뾰족한 수는 떠오르지 않았다. 절망스러운 기분 때문에 평소의 판단력이 자꾸만 흐려졌다.

“게임처럼 생각하는 거야. 이건 추리 게임이다, 추리 게임…… 젠장.”

종국엔 난 이런 알 수 없는 말에 휘둘려 살다가 결국엔 시스템의 농간으로 꽥 죽어 버리는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하며, 나는 침대에 퍽 엎어졌다.

“그러지 말고 루나. 호감도가 100%가 되지만 않으면 죽는 건 아니잖아. 그러니 남주인공의 호감도를 조금씩 올려 가면서 생각해 보는 건 어떨까?”

나보다 훨씬 침착한 상태인 샐라임이 조심스럽게 권유해 왔다.

나는 그의 말에 처박았던 고개를 들며 물었다.

“아직 퀘스트의 뜻도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는걸요? 만일 호감도를 올린다고 해도 다섯 명 중 누구의 호감도를 올려야 하는 건지도 전혀 모르겠어요.”

“그거야…….”

“…….”

“네가 가장 좋아하는 사람이면 되는 거 아니냐?”

샐라임이 가뿐하게 결론을 지었다. 그의 말에 나는 눈이 동그랗게 떠졌다.

다섯 명 중에서 가장 좋아하는 사람?

“그런 사람이라뇨, 저는…….”

“그래도 지금까지 지내면서 정이 들었을 거 아니야. 물론 네가 다른 놈들이랑 시시덕대는 꼴은 보고 싶지 않지만, 한 명만 골라야 한다면 네 맘에 드는 놈으로 하나 고르는 게 맞는 것 같다.”

샐라임의 말을 듣자 나는 깊은 고민에 빠졌다. 정이 든 사람? 아니면 가장 마음이 가는 사람? 아니면 미래를 생각했을 때 가장 괜찮을 것 같은 사람?

“결혼할 것도 아닌데 미래는 무슨 미래야.”

나는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예전부터 다섯 명 중에서 가장 좋아하는 사람을 고르자면 나는 망설임 없이 레크리드를 골랐다.

어마어마한 펜던트의 효과 때문에 그를 볼 때마다 설레는 감정을 느끼곤 했으니까. 나중엔 펜던트를 가지고 있지 않았는데도, 그를 좋아하는 마음이 훅 사라지진 않았다.

하지만 그 감정은 확실하게 펜던트로 시작된 감정이었다. 그리고 그건 나를 상사병으로 이끌기 위한 게임의 꿍꿍이처럼 느껴졌다.

“레크리드를 고르는 건 그냥 게임의 스토리대로 흘러가 버리는 꼴 같아.”

목숨이 걸리니 내 마음 가는 대로 다섯 명 중에 하나를 고르는 것조차 어려운 일이 되어 버려서, 나는 숨이 답답하게 조여 오는 것을 느꼈다.

그렇다면 한 명씩 생각해 보아야 할까? 세이먼부터 베탄까지…….

“네가 남자 주인공들에게 어떻게 죽는다고 했지?”

“세이먼이랑 이어지면 히아신스에게 독살을 당하고, 에르셈프는 전쟁이 일어나요. 잰퓨어랑 잘 되면 흑마법사에게 죽고 레크리드와는 상사병, 베탄이랑은 실족사요.”

또한 퀘스트의 주의 사항이 말해 준 것처럼 호감도를 100%까지 올렸을 경우 기존 스토리대로 사망이 진행된다는 것은 자명한 사실이었다.

시스템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남주인공의 호감도를 100%까지 올려야 하는데, 그렇게 될 경우엔 죽게 된다니. 이걸 대체 어떻게 해야 하는 걸까.

한 명 한 명 머릿속에 떠올리며 남주인공과의 미래를 점쳐보고 있을 때였다.

익숙한 모습이 창문 밖에 드러났다.

“운디네?”

투명한 물의 정령이 내 방 창문을 어슬렁거리고 있었다.

나는 창문을 열고 운디네를 맞이해 주었다. 나도 물의 정령과 계약한 적이 있었기에 친근감을 표시하는 건 어렵지 않았다.

“무슨 일이야?”

내가 묻자 운디네는 나를 주위로 한 바퀴 빙 돌더니 손에서 쪽지 하나를 건넸다.

곱게 접힌 종이를 펴자 하나의 문장이 쓰여 있는 걸 볼 수 있었다.

[지금 여자 기숙사 앞으로 나와 줄 수 있어?]

무슨 일이라도 있는 걸까? 잰퓨어가 왜 갑자기 나를 부르는 거지?

의문스러운 마음에 나는 일단 운디네를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

“나간다고 전해 줘.”

그러자 운디네는 기분이 좋은 듯이 한 바퀴를 더 돌더니, 이내 내 방을 빠져나갔다.

나는 준비를 마치고 곧장 문을 나섰고, 여자 기숙사 앞으로 향했다.

건물 앞에는 키가 훤칠한 연갈색 머리의 사내가 서 있었다.

그는 나를 보자마자 그 커다란 초록빛 눈동자를 빛내며 나에게 달려왔다.

“루나! 보고 싶었어!”

그러고는 나를 와락 끌어안았다. 순식간의 그의 살 내음이 내 코끝을 타고 들어왔다.

“무슨 일이야, 잰퓨어.”

온몸으로 나를 감싸고 있던 잰퓨어가 내 말에 몸을 떼더니 나와 눈을 마주했다.

“할 말이 있어서 왔어.”

잰퓨어가 나에게 할 말? 전혀 예상되지 않았고 보나 마나 쓸데없는 이야기일 것 같았다.

“뭔데?”

나는 별 기대도 하지 않은 채 물었다. 너무 보고 싶었다, 안 보는 내내 계속해서 내 생각을 했다, 뭐 이런 거겠…….

“나 떠나.”

하지만 잰퓨어의 말은 짧고, 또 강력했다.

“떠난다니? 어딜?”

내가 바로 반문하자 그가 대답했다.

“원래 다니던 엔리에타 아카데미로 가야 해. 마물이 나타난 사건도 그렇고, 엔리에타에서는 어서 빨리 돌아오라고 하는 모양이야.”

“…….”

그의 말에 나는 무언가 묘한 감정을 느꼈다. 언제나 내 옆에 붙어 있을 것처럼 굴던 사람이 갑자기 떠난다고 하니… 약간 아쉬운 것 같기도 했다.

“그 전에 얼굴 보려고 왔어.”

왠지 담담한 듯한 그의 목소리가 아쉬움을 더 증폭해 주었다. 그는 미소를 지으며 사랑스러운 눈길로 나를 쳐다보고 있었는데, 나보다 덜 아쉬워하는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갑자기 왜 돌아오라고 하는 거지? 마물은 잘 처리되었잖아.”

“율리우스 제국이 황립이다 보니 학생 한 명 한 명의 안전이 염려되나 봐. 자칫하면 귀족들의 엄청난 반발을 살 수도 있으니 말이야.”

“…그렇구나.”

나는 힘없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세이먼도 그렇고, 잰퓨어도 여길 떠나는구나.

마주칠 때마다 애정 공세를 하던 잰퓨어가 막상 떠난다고 하니 나는 이 이상한 기분을 감출 수 없었다.

“그래서 말인데…….”

“?”

내가 궁금한 얼굴로 그를 쳐다보자 그가 대답했다.

“마지막으로 나와 데이트를 해 줄래?”

나를 마주하는 초록색 눈동자가 반짝거리며 빛이 났다. 언제 봐도 영롱한 저 눈동자는 바라만 봐도 다정함을 느끼게 하기 충분했다.

“데이트……?”

“응, 데이트. 오늘 백야제가 열리는 날이거든.”

잰퓨어는 은은한 미소를 지으며 대답을 기다렸고, 나는 잠시 머뭇거렸지만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이번엔 퀘스트를 떠나서 그와 시간을 보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도 내게는 너무나 좋은 사람이었고, 나를 위해 주는 사람이었다. 그간 맞부딪치며 정을 쌓은 것도 있고.

임무도 같이 나간 덕에 공유하는 추억 또한 많았다. 단둘이서 밥이라도 함께 먹으며 이야기하는 것도 나쁘지 않은 것 같았다.

“저녁에 맞춰서 데리러 갈게. 옷 따뜻하게 입어.”

오늘따라 잰퓨어는 왠지 모르게 성숙해진 것 같았다. 목소리도 그렇고 말투도 그렇고, 어딘가 무거움이 담겨 있었다.

“응. 고마워.”

고맙다는 말은 평소였으면 하지 않았을 말이었다. 하지만 지금까지 잰퓨어가 나에게 쏟은 관심이나 걱정을 생각해 보면 이 정도 예의는 당연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자기보다 나를 우선시하고, 항상 만날 때마다 애정을 표현해 주었다. 나는 매번 밀어 내기만 했는데도, 꿋꿋하게 다가오는 모습을 보면 한편으로는 대단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재미있었다.

그런 그가 떠난다니. 잘 믿어지지 않았다. 언제든지 나타나서는 ‘루나, 보고 싶었어.’라고 말하며 나를 안아 줄 것 같은데.

“그럼 이만 갈게.”

하지만 그는 막상 떠나게 되니 미련 같은 건 없어진 걸까. 휙 돌리는 그의 발걸음에서 무던함이 묻어나왔다.

나는 나를 등진 채 반대로 걸어가는 잰퓨어의 뒷모습을 가만히 지켜보았다.

* * *

저녁이 되었고 잰퓨어와 나는 백야제가 열리는 축제 거리로 나갈 수 있었다.

사람들이 어찌나 많은지 자칫하면 그를 놓칠 것 같은 기분에 그의 옷깃을 잡아야만 했다.

“손잡아.”

그러자 잰퓨어가 나에게 손을 내밀었다. 하얗고 예쁜 손가락이 내 눈에 들어왔다.

“…….”

물끄러미 그가 내민 손을 바라보고 있다가, 나는 나도 모르게 손을 맞잡았다.

어차피 호감도는 올라야 하는 것으로 바뀌었다. 그래야 ‘애뮬릿’을 얻을 수 있을 테니까. 애뮬릿을 얻는 과정에서 사망할 수밖에 없다는 모순은 이제부터 풀어야 할 문제였다.

어쨌든 한마디로 말하면 나에겐 남주인공들의 호감도를 낮춰야 하는 의무감이 사라졌다는 것이었다.

내가 잰퓨어의 손을 잡자 잰퓨어는 눈에 띄게 놀란 표정을 지었다.

“루나, 이제야 나를 받아 줄 수 있는 거야?”

그러고는 능글맞은 대사를 내뱉었는데, 나는 한 대 때리고 싶은 마음을 억눌러 참았다.

“너, 내가 너랑 이어지면 어떻게 되는지 모르지?”

무슨 생각이었을까. 그가 절대 이해하지 못할 거라는 생각에 나는 머릿속에 떠오르는 말을 내뱉어 버리고 말았다.

“이어지면? 엄청나게 행복하겠지. 내가 루나에게 줄 수 있는 건 행복밖에 없으니까.”

나는 그의 손을 잡고 있었지만 그에게 눈을 흘기며 말했다.

“이 바보야. 너랑 이어지면 난 흑마법사에게 죽는단 말이야.”

“응?”

잰퓨어는 아까부터 무슨 소리를 하냐는 듯한 표정으로 나를 쳐다보았다.

하긴, 이해할 수 있을 리가 없지. 오히려 미친 사람 취급 안 당하면 다행이야.

“됐어. 그냥 그런 게 있다구.”

재빨리 말을 꺼내 대화를 수습했다. 그러고는 괜히 주위를 둘러보는 척을 했는데, 고개를 돌리다 해가 지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산 너머로 보이는 빛나는 해는 점점 기울어져 자취를 감추려고 하고 있었다.

그때, 잰퓨어가 입을 열었다.

“흑마법사에게 잡힌다고 해도, 내가 널 구해 주면 되잖아.”

가뿐하지만, 진지한 목소리였다.

“…뭐?”

“네가 죽기 전에 내가 널 구할게.”

그리고 난 그의 말을 듣자마자 누구에게 얻어맞은 것처럼 멍한 기분을 느꼈다.

죽기 전에 날 구해 줘……?

[기존의 스토리대로]

그리고 힌트의 문장이 내 머리를 스치듯이 지나갔다.

하늘의 태양은 자취를 감추기 일보 직전인지라 주황빛 노을을 뿜어내고 있었다. 어느새 잰퓨어의 얼굴 또한 주황빛으로 물들어 있었다.

“그래! 기존의 스토리에서도 바로 죽진 않았어!”

하지만 태양은 강한 노을을 뿜어내다가, 다시금 위로 솟기 시작했다.

백야였다. 저녁임에도 환한 하늘에서 이질감이 느껴졌다.

그리고 내 머릿속에도 낯설고 새로운 생각이 떠올랐다.

“…이제야 알겠어. 내가 애뮬릿을 얻으면서 죽지 않는 방법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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