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다섯명은 너무 많잖아요 (103)화 (103/156)
  • 102화. 세계의 틈(3)

    악녀들은 내 반응을 보고는 어처구니없는 표정을 지으며 나에게 다가왔다. 그리고 그중 한 명이 집게손가락을 들며 내 이마를 향해 뻗을 때였다.

    나는 내 머릿속을 지배하는 한 가지 생각에 그녀의 손길을 가뿐하게 피하고는 그들에게 소리쳤다.

    “죄송한데 제가 바빠서요!”

    “뭐야?!”

    주황색 드레스를 입은 한 여자는 나에게 험악한 표정을 지으며 위협을 하려 했지만 나에겐 전혀 먹히지 않았다.

    “안녕히 계세요!”

    그리고 그녀들의 어깨를 팍 밀치고는 그 사이를 빠져나왔다.

    “아야!”

    뒤에선 나를 붙잡으려는 소리가 들려왔지만 내 발걸음은 그 어느 때보다 빨랐다.

    “루나! 무슨 생각이라도 난 거냐?”

    샐라임이 나를 향해 물어 왔고, 나는 낭랑한 목소리로 외쳤다.

    “드디어 알았어요! ‘세계의 틈’이 뭔지, 그게 어디인지 알았다고요!”

    뛰는 수준으로 걸음을 빨리한 나는 하나의 장소를 향해 뛰었다.

    “뭐?! 그게 대체 어디인데?!”

    “기다려 봐요! 거의 다 도착했으니까!”

    그리고 금세 도착한 곳은 바로 시장가였다.

    대충 이쯤이겠거니, 싶은 곳에서 발걸음을 늦춘 나는 천천히 주위를 살피며 기억을 더듬었다.

    “가만 보자…….”

    이쯤인 것 같았다. 나는 적당한 곳에서 발을 멈추었다.

    “나에게만 온전히 해당하는 ‘세계의 틈’.”

    그리고 나만이 알 수 있는 그 유일무이한 장소.

    그곳은 그리핀 산맥도, 마물이 떨어진 장소도, 게이트도, 개미집도 아니었다.

    세계와 세계가 맞닿는 틈이자 그 사이. 그곳은 바로…….

    “내가 처음 떨어진 장소였어.”

    전생에 벤치 프레스를 하며 죽은 이후, 이 세계에 떨어진 바로 그날, 내가 떨어진 그 장소였다.

    이곳이야말로 내가 전에 살던 세계와 이 세계를 잇는 단 하나의 연결점일 것이다.

    “분명 여기였지.”

    나는 이 세계에 떨어지고 나서 처음으로 남에게 들었던 말을 기억한다. 환생하고 난 직후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을 때 나를 향해 소리친 어떤 자전거 탄 사내의 목소리.

    앞 좀 똑바로 보고 다니라며 짜증스러운 목소리로 외쳤었지.

    깜짝 놀랐기에 머리에 각인되어 있던 기억이었다. 그리고 그 말을 들은 장소는 바로 여기였다.

    “일리 있군. 난 네가 환생하고 나서 나중에 알았기 때문에 그런 장소일 것이라고는 전혀 생각하지 못했어.”

    “저도 저 악녀 무리들 아니었으면 생각하지 못했을 거예요.”

    샐라임에게 대답하며 나는 자리를 찾아 우두커니 섰다.

    그러고는 주머니에서 돌을 꺼내 쥐었다.

    “…….”

    이번엔 정말 무슨 일이라도 일어날 것만 같아 긴장이 올라왔다. 약간은 떨리는 손으로 나는 돌을 던지려는 자세를 취했다.

    “설령 여기가 아니더라도, 실망하지 말자.”

    혼잣말로 스스로에게 중얼거렸다. 몇 번이나 실패했으니 여기가 아닐 가능성도 있을 것이다. 그리고 내가 정확히 여기에 떨어진 게 아닐 수도 있지 않은가. 몇 개월이나 지났으니 내 기억이 틀렸을 수도 있다.

    그러니 아무 일이 안 일어나더라도 괜찮다. 다시 시도하면 되니까.

    마음을 다잡은 나는 돌을 쥔 주먹을 내 가슴팍에 대고는 심호흡을 했다.

    “후우…….”

    그러고는 망설임 없이, 어깨 너머로 돌을 던졌다.

    휙!

    이번엔 느낌이 무언가 달랐다. 던지는 순간부터, 내 팔을 감싸는 알 수 없는 힘이 느껴졌다. 오성석이 가지고 있는 고유의 힘인 것 같았다.

    그것은 내 팔을 타고 올라와 내 몸 전체로 퍼졌다. 마치 마나를 처음 느꼈을 때처럼, 강력한 자연의 무언가가 나를 휩싸는 듯하더니 내 몸 안에서 강하게 소용돌이쳤다.

    그리고 순식간에,

    내 눈앞의 풍경이 수직으로 뒤집히면서 내가 보고 있던 이 시장가가 단숨에 자취를 감추었다.

    마치 세계가 뒤집히듯 나 또한 중력을 잃고 다른 세계로 빨려들어 가는 느낌이 들었다. 이내 익숙했던 배경은 사라지고, 주위가 온통 흰색뿐인 알 수 없는 세계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러다 내 몸을 중심으로 나머지 배경이 서서히 갖추어지기 시작했다. 하지만 여전히 색은 없었다.

    희미한 빛을 뿜는 흰색 땅의 향연.

    “……!”

    나는 끝이 보이지 않을 만큼 저 멀리까지 펼쳐진 하얀색 땅 위에 멀쩡히 서 있었다.

    이, 이게 뭐야……!

    나는 입 밖으로 말을 꺼냈지만 아무 말이 나오지 않는 것을 깨달았다. 소리가 들리지 않는 게 아니라, 입을 아무리 뻐끔거려 보아도 목이 꽉 막힌 듯 아무런 소리도 흘러나오지 않는 것이다.

    당황한 내 눈앞에서 갑자기 무언가가 떠오르더니, 퍼즐 조각이 맞춰지듯 형상이 만들어지기 시작했다.

    작은 입자들이 모여 어떤 형체를 만들어 내더니, 그것은 아래쪽에서부터 사람의 다리모양을 형성하기 시작했다.

    다리밖에 없던 것은 이내 몸이 생기고, 그 위로 머리가 나타나 한 인간의 모습을 이루었다.

    “……?”

    사, 사람? 갑자기 여기서 사람이 왜 튀어나오지? 저 사람이 내 소원을 이루어 주는 신이라도 되는 건가? 신이 원래 저렇게 생겼나? 신이라고 하기에는…….

    너무 잘생겼잖아!

    내 눈앞에는 누가 봐도 미남이라고 불릴 듯한 조각 같은 남자가 서 있었다. 후광을 뿜어 내는 듯한 빛이 잘생겨서 나는 건지, 아니면 원래 존재 자체에서 빛이 나는 건지 알 수 없을 정도였다.

    그렇게 외모를 감상하고 있었을까, 온전하게 모습이 갖추어진 남자가 나를 보며 은은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당신이군요. 저를 불러낸 인간이.”

    나는 그의 말에 눈을 크게 뜨는 것 외에 아무런 반응도 할 수 없었다. 몸이 굳은 듯이 하나도 움직이지 않았고, 입에선 그 어떤 소리도 나오지 않았다.

    그때.

    “!”

    남자가 작은 손짓을 한번 하자 내 목에서 숨이 탁! 빠져나가는 듯한 느낌이 들더니 막힌 듯한 목소리가 뚫렸다.

    “아!”

    “오성석이 사용된 것도 몇백 년 만이군요.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잊혔을 이 돌을 가지고 저를 찾아올 줄이야, 상상도 하지 못했습니다.”

    그는 나를 향해 중저음의 목소리를 내뱉었다.

    “다, 당신은 누구죠?”

    내 목을 붙잡으며 다급하게 물었다. 그러자 남자는 나를 빤히 바라보았다.

    “…….”

    “제, 제 소원을 이루어 줄 수 있는 신인가요?”

    “따라오시죠.”

    남자는 표정 변화 하나 없이 나를 바라보더니 이내 등을 돌려 발걸음을 뗐다. 따라오라는 걸 보니 내 몸도 움직일 수 있게 바뀐 것 같았다.

    “어딜 가는 거죠!”

    “…….”

    내 말에 그는 대답 없이 천천히 걸어갔다.

    나는 어쩔 수 없이 뒤를 쫓을 수밖에 없었고, 그는 얼마 가지 않아 발을 멈추었다.

    탁!

    그러고는 손가락을 한 번 튕겼는데, 그 동작과 동시에 허공에서 작은 원형 테이블과 의자 두 개가 생겨났다.

    “앉으세요.”

    나는 의아한 눈빛으로 그의 말을 따랐고, 그 또한 자리에 착석했다.

    한번 원형 테이블을 훑어본 그가 한 번 더 손가락을 튕겼다. 그러자 칵테일 잔 하나가 생겨나며 그 안에 분홍빛 액체가 채워졌다.

    “한잔할래요?”

    그의 말에 나는 고개를 저었다.

    “저 미성년자예요.”

    “아아, 그렇군요.”

    그는 작게 고개를 끄덕이며 한 손으로 칵테일 잔을 잡고는 홀짝, 한 모금 들이켰다.

    누구보다 여유로워하며 내 질문에는 대답도 하지 않는 그에게 나는 다시 한번 물었다.

    “제 소원을 들어주려 나타나신 건가요?!”

    언성을 높이자 그가 나를 향해 힐끗, 눈짓을 보냈다. 신의 위력인 건지 아주 사소한 행동이었음에도 나는 흠칫 놀랄 수밖에 없었다.

    “무조건 들어줄 수 있다고 확언할 수는 없지만 일단 알고는 싶군요. 무슨 소원을 빌 겁니까?”

    나는 그의 태도에 어이가 없었지만 마음을 가다듬고 머리를 굴렸다.

    분명 소원을 말하라고 했다. 그 어느 때보다 신중해야 하는 때가 온 것이다. 이날만을 위해서 살아 왔고, 노력해 왔기에, 나는 쉽사리 말을 꺼낼 수 없었다.

    잠시 고민이 되었다.

    막상 소원을 말하라고 하니 생각해 왔던 소원이 과연 옳을 것인지 다시 되짚어 보게 되는 것이다.

    처음에 소원 후보는 셋이었다. 전생으로 돌아가게 해 달라고 빌어야 할까? 아니면 죽지 않게 해 달라고 해야 할까? 아니면 이 시스템을 없애 달라고 해야 할까?

    나는 입을 꾹 다문 채 머리를 굴렸다. 전생으로 돌아가는 것. 그 생각을 하지 않은 건 아니다.

    하지만……. 나에게 전생은 너무나도 끔찍한 기억이었다. 물론 게임을 할 때만큼은 행복을 느끼기는 했었다. 하지만 게임을 아무리 행복하게 해도 아버지로부터 받는 고통은 줄일 수 없었다.

    “너 같은 년은 이 세상에 태어나지 말았어야 해. 알아? 내 탄탄대로 같던 인생이 밑바닥 시궁창이 된 건 모두 다 네년 때문이야.”

    “저 멍청한 계집애가 내 딸이라니, 차라리 돼지 새끼가 자식이라고 하는 게 낫지. 내가 몸 다쳐 가며 일할 동안 자식 교육을 어떻게 시킨 거야? 매질을 해서라도 정신을 차리게 했어야지, 어찌 된 게 모녀가 하나같이 다 이러냐고.”

    다시는, 다시는 느끼고 싶지 않은 감정이다. 매일같이 벗어나고 싶었기에 게임을 시작했고, 운동을 시작했던 것이었다. 그리고 천운으로 그 세계를 벗어났는데 다시 돌아가고 싶을 리가 있겠는가.

    전생으로 돌아가게 해 달라는 소원은 취소다. 무엇이 되었든 아버지에게 다시 맞는 날들은 오지 않았으면 한다.

    이제 두 번째 후보. 이 소원은 ‘내가 가장 무서워하는 건 뭘까’ 하는 고민에서 나오게 되었다. 그건… 바로 죽는 것이었다. 나는 죽는 게 가장 싫었다. 그러니 죽지 않게 해 달라고 비는 것이 맞을까?

    하지만 그러면 죽지는 않되 이 빌어먹을 게임 시스템에게 계속해서 퀘스트를 받으며 놀아나야 할지도 모른다. 내가 하고 싶은 일이 생기면 그 일을 못 하게 페널티를 넣으면서 강제로 미션을 하게 만들 수도 있다.

    “…죽어도 싫어.”

    그렇다. 다시 생각해 봐도 내가 빌 소원은 정해져 있었다.

    소원을 이루어 줄 수 있는 오성석이 있다는 걸 알게 되었을 때부터 내가 염원해 왔던 것. 그건 바로,

    “절 지배하는 이 게임 시스템에서 벗어나게 해 주세요.”

    이 시스템을 파괴하는 것이었다.

    하나뿐인 소원이라, 강한 능력이나 재력을 잠깐 생각하기도 했었다. 하지만 능력이 없든, 돈이 없어서 쫄쫄 굶든 다 상관없었다. 다 좋으니까 이 시스템에서만 빠져나가면 좋겠다.

    “게임 시스템?”

    “네. 그게 제 소원이에요.”

    남자가 되묻자 내가 똑바로 그의 눈을 쳐다보며 말했다. 자고로 소원이란 아주 정확하게 말해야 하는 것. 그가 더 자세하게 물어본다면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머리를 굴리고 있을 때였다.

    남자는 묘한 표정으로 입을 다물고 있더니, 갑자기 ‘아!’하며 소리를 냈다.

    “당신, 마티스 소속의 소녀군요?”

    “네?”

    알 수 없는 말에 내가 이해하지 못하자 그가 혼자 고개를 끄덕였다.

    “저주스러운 삶에 내몰린 소녀가 여기까지 왔을 줄이야. 대단하네요.”

    “그게 무슨 소리죠? 마티스 소속이라뇨. 저는 처음 듣는 말인데…….”

    “아, 물론 당신은 알 필요가 없는 사실이긴 합니다. 한낱 인간에 불과한 당신이 이쪽 세계의 속사정을 이해할 수 있을 리가 없을 테니까요.”

    “아까부터 계속 무슨 말씀을……!”

    자꾸 알 수 없는 말만 지껄이는 이 남자 때문에 나는 속이 다 터질 지경이었다.

    당장 소원을 들어줄지 말지도 알 수 없는 마당에 괜히 저울질을 하는 느낌이 들었다.

    그런데 그때, 남자가 내 말을 끊고 입을 열었다.

    “그 소원, 이뤄 줄게요. 그런데 그렇게 되면, 한 가지 문제가 생긴답니다.”

    “문제……? 무슨 문제죠?”

    “당신은 관할 소속이 따로 있어서요. 제가 다른 소속의 반발을 감당할 자신이 없네요.”

    “……?”

    “그러니 제가 작은 선물 하나를 보내 놓을게요.”

    “네, 네?!”

    그러자 남자가 은은한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돌아가서 직접 확인해 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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