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1화. 세계의 틈(2)
베탄은 환자복을 입은 채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움직임이 자유로운 것을 보니 이제 몸은 괜찮은 것 같았다.
뭐가 되었든 다행이라는 생각에 얼굴에 흐른 눈물을 슥슥 닦았다.
“어, 어떻게 거기 있는 거죠?”
“어떻게 있긴, 다 나았으니까 이렇게 똑바로 서 있지. 방금 산책도 다녀오는 길이었어.”
나는 그제야 내가 다른 사람의 침대를 붙잡고 있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리고 갑자기 시체를 덮고 있던 흰 시트가 휙 걷히면서 안에서 사람이 나왔다.
“아가씨는 누구야? 왜 내 잠을 방해하는 거지?”
“아, 아니 이불을 끝까지 덮고 계시길래…….”
“내 잠버릇인데 뭐가 불만인가? 응?”
시트 속에서 나온 덩치 큰 아저씨는 볼멘소리로 내뱉었다.
내가 자신의 잠을 방해해서 잔뜩 짜증이 난 것 같았다.
“죄, 죄송합니다.”
나는 고개를 꾸벅 숙이며 사과의 인사를 전했고, 아저씨는 다시금 이불을 머리끝까지 덮었다.
나는 민망한 기분에 얼굴을 긁었다. 그러자 베탄이 나를 이끌었다.
“이리 와. 이상한 곳에 있지 말고.”
그러고는 자신의 침대 쪽으로 데려왔다.
“몸은 좀 어때요?”
“의사 말로는 심각한 독은 다 제거되었다고 말하더군. 잔여 독이 남아 있을 수 있지만 생활엔 전혀 무리가 없을 정도라고 했고.”
나는 그의 말에 안도의 숨을 푹 내쉬었다.
“다행이다……. 정말 다행이야…….”
그러자 베탄이 나를 무거운 눈빛으로 쳐다보았다.
“걱정… 한 건가?”
“그럼요! 제가 얼마나 마음을 졸였다구요. 영영 못 깨어나면 어쩌나, 아예 죽어 버리면 어쩌나 별생각을 다 했다니까요? 마치 저 때문에 다친 것 같아서 마음이 정말…….”
“…….”
내가 소리치자 베탄의 표정이 묘하게 바뀌었다. 눈빛이 흔들리는 것 같기도 했다.
뭐야, 이런 거에 감동 받은 거야?
당연히 나를 구하려다가 다쳤는데, 걱정을 안 할 리가 있겠어?
“히드라를 처치할 때 너를 보호한다고 말했던 건 바로 나야. 나는 내 할 일을 했을 뿐이고. 네가 죄책감을 가질 필요는 전혀 없다.”
베탄이 시선을 창밖으로 돌리며 말했다. 자신도 그런 말을 하는 게 민망한 건지 어색한 표정을 띤 채였다.
나는 그제야 내가 이곳에 온 목적을 꺼냈다. 그가 괜찮은지 보러 온 것도 맞지만… 나는 ‘세계의 틈’이 무엇인지 알아내기 위해 온 것이었다.
“베탄. 혹시 ‘세계의 틈’에 대해 알아요?”
나는 사뭇 진지한 목소리로 물었다. 어서 빨리 이 게임을 끝내고 싶은 마음 때문이었다.
내 물음에 베탄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 붉은색 홍채가 또렷하게 빛났다.
“‘세계의 틈’……?”
“네.”
그는 무언가 퍼뜩 생각난 것이라도 있는지 얼굴을 굳혔다. 뾰족한 답이라도 나올 것 같다는 생각에 나는 기대감을 안은 채 그를 쳐다보았다.
그는 잠시 대답을 머뭇거렸다. 대체 뭐길래 그러는 거지?
“나를 따라와.”
짧게 말한 그는 나를 병실 밖으로 이끌었다. 본인이 아는 장소라도 있는 걸까? 바로 데려다준다니.
그는 병원의 후문을 열고는 뒤쪽의 산책로를 걸어갔다.
그러고는 산책로 중간쯤에서 멈추었다.
“내가 아까 산책을 하다가 발견한 게 있는데 말이야.”
“…….”
“흙 속에서 개미집을 발견했어.”
“그게 무슨 말씀이죠?”
베탄은 땅 한쪽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개미집이란 개미만의 세계가 있다는 걸 의미해. 세계와 세계의 틈이 있다면 바로 그곳이 아닐까?”
예상보다 엉뚱한 대답에 나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뭐, 곰곰이 생각해 보니 그럴싸한 말 같기도 하고…….
“그, 그런가요…….”
“대답이 되었나?”
개미집에 어떤 사연이라도 담겨 있는 것 같은 그는 쪼그려 앉아 진지한 눈빛으로 가만히 개미집을 쳐다보았다.
“고마워요. 이 정도면 충분한 것 같아요.”
나는 그에게 감사의 인사를 전한 뒤, 그를 돌려보냈다.
“몸조심하고요! 또 들를게요.”
당부를 전하는 것 또한 잊지 않았다.
베탄을 보낸 나는 주머니에서 종이를 꺼내 지금까지 적어 놓은 ‘세계의 틈’의 단서를 빤히 들여다보았다.
세이먼을 제외한 네 명의 남주인공들에게 받은 대답은 바로 그리핀 산맥, 마물이 내려왔던 학교 경기장 안, 게이트, 개미집이었다.
“으음……. 어디가 가장 가능성이 높으려나?”
그때, 샐라임이 끼어들었다.
“너에게 부여된 ‘세계의 틈’이니까 네가 가 보지 않은 장소는 아닐 거야.”
“어, 정말요? 그럼 그리핀 산맥은 안 가 봐도 되겠네요!”
‘세계의 틈’ 후보가 하나 줄어든 것에 기뻐하며 종이에 쓰인 그리핀 산맥이라는 글자 위에 줄을 직직 그었다.
하지만 ‘세계의 틈’ 후보가 줄어들었음에도 최대한 효율적으로 처리할 방법을 고민하던 나는 뾰족한 대답을 찾지 못했다. 다만 한 가지 확실한 건 개미집은 전혀 아닐 것 같다는 생각이었다.
그리하여, 나는 그리핀 산맥을 제외하고 남주인공들이 말한 세 군데의 장소를 차례대로 방문하기로 결정했다.
* * *
첫 번째는 마물이 내려왔던 곳이었다.
마물이 나온 학교 경기장은 아직 경비가 삼엄해 들어가기가 어려웠지만 몰래 망을 본 끝에 발을 들일 수 있었다.
기억상 마물이 쏟아져 내려왔던 장소 밑으로 간 나는 샐라임에게 그다음 과정을 물어봤다.
“그 장소에 서서, 오성석을 어깨 뒤로 던지면 돼.”
샐라임의 말에 나는 비장한 얼굴로 주머니에서 오성석을 꺼냈다.
다섯 개의 별이 박힌 채 붉게 빛나는 돌. 이곳에서 보니 더욱 빛이 발하는 듯했다.
“괜히 떨리네.”
돌을 꼬옥 쥐고 있던 내 주먹이 잠시 떨렸다. 그리고 눈을 꽉 감은 채 돌을 어깨 뒤로 던졌다.
휙!
뒤에선 돌이 땅을 구르는 소리가 들려왔고, 나는 눈을 뜨지 못한 채 무언가 일이 일어나기를 가만히 기다렸다.
“……?”
한쪽 눈을 뜨며 상황을 파악했지만.
“뭐야!”
“여기가 아닌가 보군.”
그 어떤 것도 일어나지 않았다. 돌은 땅 위에 툭 떨어져 있었고, 세상은 고요하기만 했다.
“다, 다른 곳에서도 해 보죠.”
나는 이리저리 장소를 옮겨 가며 돌을 던져 댔다.
여전히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다음 장소.”
항상 테일러 마을로 돌아오던 게이트로 향한 나는 게이트의 빛나는 입구 앞에서 돌을 던졌다.
“…….”
“여기도 아닌가 봐.”
“다른 게이트면 어쩌죠? 이 나라에는 게이트가 여러 개 있잖아요.”
“글쎄다. 네가 아는 곳일 텐데, 네가 가 보지도 않은 장소일 리는 없을 것 같아.”
“…그건 그렇군요.”
괜찮아. 마지막으로 남은 장소가 있잖아?
그곳은 바로 개미집이었다.
절대 아닐 것 같다는 생각에 개미집 앞에서도 그저 무시하고 그리핀 산맥으로 향한 건데…….
진작에 던져 보고 올 걸 그랬다는 생각이 머리를 지배했다.
하지만 시간은 넉넉했다. 다시 돌아가서 던져 보면 알 일이었다.
다시 게이트에서 병원으로 향한 나는 곧장 산책로로 향했다.
“베탄이 말한 곳이… 여기였죠?”
워낙 눈에 띄지 않아 잘 보이지도 않는 곳이었다.
베탄은 대체 이런 곳을 어떻게 발견한 거야?
뭐 땅만 살피면서 걸어 다닌 건가?
그가 가리켰던 작은 개미집을 찾은 나는 그곳을 빤히 들여다보았다.
개미들이 바삐 움직이며 집의 입구를 드나들고 있었다.
“여기에 돌을 던져라, 이 말이죠.”
나는 지체할 것 없이 개미집을 뒤로 한 채 오성석을 던졌다.
툭.
개미집에 정확히 떨어진 돌은 옆으로 굴러갔고, 깜짝 놀란 개미들이 우왕좌왕했다.
그리고, 나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는 걸 느꼈다.
“젠장. 여기도 아니란 말이야?”
“유감이구나. 다섯 남주인공한테서 단서를 찾을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는데.”
나는 개미집을 주변으로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며 돌을 던졌지만 여전히 아무것도 바뀌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았다.
“…….”
나는 세상을 다 잃은 표정으로 병원 밖으로 나와 화단 앞에 걸터앉았다.
“젠장 할, 그럼 세이먼한테라도 물어보러 가야 하는 거야, 뭐야. 세이먼이 어디에 있는 줄 알고? 정말 너무한 거 아냐?!”
나는 하늘을 향해 욕지거리를 뇌까렸다. 진심으로 시스템이 너무하다고 느껴졌다. 그리고 그 생각은 곧, 오성석에 대한 의심으로 이어졌다.
“샐라임, 이 돌, 정말 소원을 이루어 줄 수 있는 돌 맞아요?”
“당연하지. 내가 직접 눈으로 봤대도.”
“하지만 샐라임은 신이 되었다는 자가 어디에서 돌을 던졌는지도 기억하지 못하잖아요. 잘못 기억하고 있는 것 아녜요?”
“무슨 소리냐! 절대 아니야. 물론 장소를 기억하지 못하는 건 내 잘못이 맞지만… 그가 신이 되던 장면은 내가 평생토록 잊지 못하는 기억 중에 하나란 말이다.”
“…다른 단서는 없어요?! 뭐, 돌을 가지고 어떤 의식을 해야 한다든가, 제가 무슨 준비물을 가지고 돌을 던져야 했다든가!”
“…미안하지만 내 기억에는 아무것도 없구나. 그나저나 괜찮은 거냐? 루나. 표정이 아주 똥빛이야.”
“…….”
샐라임 앞에서 티를 내고 싶진 않았지만 절망스러운 기색을 감추는 건 너무나도 어려웠다. 이날만을 위해서 살아왔는데, 오성석을 얻기 위해서 얼마나 노력했는데!
나는 화단에 앉아 텅 빈 눈빛으로 거리를 훑어보았다.
순식간에 괜한 감상에 잠기는 것을 느꼈다.
내가 처음에 이 세계에 떨어졌을 때, 세이먼이 나를 구해주고 밀리센트가 저택으로 데려다주던 일, 그 지옥 같은 저택에서 살아남아 도망친 일, 그리고 아카데미에 들어오기까지…….
세이먼이 내 목에 칼을 들이댔던 일도 있었지. 에르셈프는 내가 달걀을 대신 맞아 줬는데도 나를 경멸하듯이 쳐다봤었고. 생각해 보니 완전 어이없네? 그땐 완전 싸가지였잖아? 지금은 양반이 된 셈이군.
잰퓨어는 처음 보자마자 나에게 수작을 걸었고, 레크리드는 에르셈프랑 싸우는 나를 보며 호감도를 올렸었지. 그것도 진짜 이상해! 대체 머릿속에 뭔 생각을 가지고 있는 거야?
그러고 보니 베탄도 날 처음 볼 때 칼을 던져 위협했었어. 루나, 정말 다이내믹하게 살았구나. 남주인공에게 죽지 않은 게 다행일 정도야…….
하, 다섯 명이랑 엮여서 호감도가 오르면 난 죽는 건데, 성격까지 저 난리였다니.
퀘스트만 아니었으면 볼일도 없고, 호감도도 안 오르고, 죽을 일도 없잖아!
“아, 진짜 시스템 없애야 하는데.”
“…….”
나는 혼잣말을 중얼거렸고, 샐라임은 아무 말이 없었다.
“설마 시스템 못 없애는 거 아냐? 나… 죽는 건 아닐까?”
지금까지 나에게 일어났던 일련의 사건들을 떠올리며 시스템을 향한 분노를 표출하고 있던 참이었다.
나의 감상을 깨 버리는 누군가의 목소리가 내 귓가를 파고들었다.
“거기! 너.”
“네?”
화려한 드레스를 차려입은 세 명의 여자 무리였다.
굉장히 심심해서 무슨 일이라도 일어나길 바라는 사람 같은 표정을 한 그들은 나를 향해 삿대질을 했다.
“너 말이야. 이리 와 봐.”
순간 당황한 눈빛으로 그들을 쳐다보았다. 뭐, 뭐지? 왜 나를 부르는 거지?
그들은 나보고 이리 오라고 했으면서 자신들이 나에게 다가왔다.
그러고는 나를 둘러싸더니, 입을 놀렸다.
“너 말이야. 예전에 걔 맞지?”
“네? 그게 무슨 말이죠?”
갑자기 초면에 반말을 하는 그들에게 순간 거부감이 들었지만 나는 빨리 이 상황을 모면하고 싶은 마음에 성질을 죽였다.
“왜 있잖아. 너네, 은발 머리 보면 생각나는 거 없어?”
“아, 설마 메리텔?”
“그래. 그 이복동생 아니냐고. 그때 우리를 완전 쪽 줬던 그년 말이야!”
그들은 자기들끼리 이야기를 수군거렸다.
그 말을 들으며 나는 금세 그들의 정체가 누구인지 알아챌 수 있었다.
예전에 세이먼이 나를 구해 주기 전, 길거리에서 나를 메리텔의 이복동생이라며 시비를 걸었던 악녀 셋 무리였다.
그리고 그 기억이 떠오름과 동시에, 나는 머리에 번개가 치듯 무언가 생각이 지나가는 것을 느꼈다.
그리고 난 악녀 셋이 있는 것도 상관하지 않은 채, 크게 소리쳤다.
“이제야 알겠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