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다섯명은 너무 많잖아요 (100)화 (100/156)
  • 99화. 혼자 사는 남자(4)

    나를 향해 다가오던 레크리드의 얼굴이 코앞에서 멈추었다.

    그러고는 그윽한 시선이 나에게 꽂혔다.

    “루이아나 씨를 좋아하는 이유요?”

    내가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자 그가 잠시 뜸을 들였다.

    대체 무슨 말을 할지 궁금했다.

    그리고 이내, 그의 입이 열렸다.

    “루이아나 씨의 웃는 모습이 좋았어요. 계속해서 웃길 바랐고, 특히 저를 보며 웃길 바랐고요. 안 보면 생각나고, 또 항상 보고 싶었어요. 그때 느낀 거예요. 아, 내가 이 사람을 좋아하는구나.”

    그의 숨결이 느껴질 정도로 가까운 거리에서, 그는 솔직한 마음을 토해 냈다.

    그런데 나는 그 말을 들음과 동시에, 눈이 크게 떠질 수밖에 없었다.

    “……!”

    고백에 감명을 받은 줄 안 것인지, 레크리드가 포근한 미소를 지으며 내 머리를 쓰다듬었다.

    하지만 내가 놀란 이유는 따로 있었다.

    저 대답은 바로…….

    게임에서 레크리드가 여주에게 고백하던 대사와 일치하던 말이었기 때문이었다.

    “좀 대답이 되었어요?”

    “…….”

    순식간에 나는 김이 확 새는 것을 느꼈다. 어쩔 수 없이 이 남자도 게임 캐릭터였다는 것이 너무나도 잘 느껴졌다.

    시스템도 가혹하시지. 평소에는 그렇게 현실적으로 느껴지게 했으면서, 이런 상황에서 게임과 똑같은 대사를 내뱉도록 만들다니.

    나는 그의 말에 시선을 아래로 내렸다.

    당장이라도 키스할 것처럼 다가오던 그가 내 반응을 보더니 주춤했다.

    “루이아나 씨…….”

    나는 실망한 듯한 기색이 역력한 레크리드에게 애써 대답해 주었다.

    “괜찮아요. 좋았어요. 그래서 절 좋아했구나.”

    “…….”

    코앞에서 나를 바라보던 레크리드가 이내 고개를 뒤로 내빼었다.

    다시 머리를 받치고 옆에서 나를 쳐다보는 자세를 취한 그가 입을 열었다.

    “미안해요. 제가 부족해서.”

    그가 부족할 이유는 하나도 없었다. 그저 내가 진심으로 ‘진짜’ 사랑을 받고 있다고 착각한 것뿐이니까.

    “아니에요. 아니야. 그냥… 잠시 안 좋은 기억이 떠올라서 그랬어요.”

    내 말에 그의 얼굴에 근심 가득한 표정이 떠올랐다.

    “무슨 일이라도 있었던 거예요……? 말해 줘요.”

    내가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말할 수도, 말할 필요도 없는 것들이다.

    나는 다시 자세를 잡고 고쳐 누워 그와 눈을 마주했다.

    마음을 고쳐먹었다.

    그가 설정된 게임 캐릭터가 아니라 독립적인 사람일지도 모른다고 기대한 내가 바보같이 여겨졌다. 또한 내가 지금 할 수 있는 건 그냥 모든 사실을 받아들이는 수밖에 없다는 것도.

    아픈 미소를 짓고 있는 나를 향해 그의 손길이 조심스레 다가왔다.

    “……!”

    그의 손가락은 내 입가에 정착했다. 그러고는 살살, 내 입술을 부드럽게 어루만졌다.

    “입술이 참 예뻐요.”

    힘을 뺀 손가락이 내 입술을 톡톡 건들 듯이 훑고 지나가자 느낌이 아주 묘했다.

    마치 혀가 입술을 쓸어내리는 것처럼 부드러웠지만, 동시에 단단한 것 같기도 했다.

    만들어진 게임 캐릭터라는 걸 방금 다시 깨닫긴 했지만, 지금 느껴지는 손길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와 그가 실제로 존재하고 있다는 걸 알게 해 주었다.

    입술을 만지는 게 이렇게 야한 일인가 싶을 정도로 나는 그의 손길에 긴장이 바짝 들어갔다.

    입을 조금이라도 열면 금세 나를 잡아먹으려 할 것 같은 기세에 나는 옴짝달싹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자 그의 부드러운 손길이 턱을 타고 밑으로 내려갔다.

    턱, 목을 타고 내려간 그의 손가락은 내 쇄골 위에 머물렀다.

    큰 티셔츠를 입은지라 목이 훤히 드러나 있었기에, 그가 내 불거져 나온 뼈를 만지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살살 쓸어내리는 감각에 나는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간지러운 것 같으면서도 어딘가 모르게 안달 나는 기분이 들었다.

    내가 가만히 그의 손길을 받고 있는 것이 허락의 표시라도 되었다고 여긴 건지, 다시 한번 그의 얼굴이 나를 향해 다가왔다.

    “…흡.”

    그가 가까이 다가오자 달콤한 향이 훅 풍겨 왔다.

    나는 나도 모르게 눈을 질끈 감았다. 진짜든 설정이든 그가 다음 행동을 취하더라도 아무 상관이 없었다.

    그런데, 그때.

    콩.

    “아야.”

    그가 가볍게 내 이마를 콩 때렸다. 눈을 슬며시 떠보니 그의 얼굴은 이미 멀어진 뒤였다.

    “눈 함부로 감는 거 아니에요.”

    그가 한쪽 입꼬리를 올린 채 말했다. 그는 장난기 어린 표정을 짓고 있었다.

    “…왜…….”

    “왜라뇨. 제가 뭐라도 할 것 같았어요?”

    “그, 그건 아니지만!”

    “저 그렇게 몰상식한 사람 아닙니다.”

    말을 마친 그가 자리에 누웠다. 천장을 바라본 채 이불을 덮은 그는 입가엔 미소를 /띠/운 채로 눈을 감았다.

    “그럼, 그럼 왜.”

    “그럼 왜 뭐라도 할 듯이 굴었냐구요?”

    “…….”

    그러자 그가 눈꼬리를 휘며 대답했다.

    “반응이 귀여워서요.”

    이 상황이 몹시 즐거운 것처럼 느끼는 것 같았다.

    나는 두 번째로 김이 새는 것을 느끼며 등을 홱 돌려 누웠다.

    “뭐야, 루이아나 씨. 삐졌어요?”

    “제가 왜 삐져요. 그냥 자려고요.”

    뭔갈 바란 건 아니다. 하지만 행동이 주는 묘한 느낌이란 게 있지 않은가! 나는 그가 뭐라도 할 줄… 알았단 말이다.

    일순 나 혼자 이상한 생각을 한 내가 부끄러워지면서 얼굴이 달아오르는 것을 느꼈다.

    등을 돌리고 있는 것이 다행이라고 생각하면서, 나는 큰 숨을 내쉬었다.

    어찌 보면 다행이었다. 애초에 아무 일도 없길 바라지 않았는가. 순간 분위기에 휩쓸려 뭐라도 할 뻔… 했지만 뭐, 아니니 됐다.

    그런데 그때, 뒤에서 따스한 감각이 나를 찾아왔다.

    “……!”

    등에서 그의 가슴이 느껴졌다. 그는 뒤에서 나를 한 번 더 자신 쪽으로 끌어당겼다.

    그의 팔이 내 어깨를 감쌌고, 누워서 백 허그를 한 자세가 되었다.

    단숨에 틈도 없이 밀착해 버린 몸에 나는 얼굴을 굳혔지만, 그가 알 리는 만무했다.

    “이러고만 있게 해 줘요.”

    “…….”

    “괜찮죠?”

    나는 그의 말에 대꾸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내 머리의 움직임으로 의사를 알아들은 그가 내 목덜미에 자신의 고개를 비볐다.

    간질거리는 그의 머리카락이 목 뒤에 닿았고, 코까지 느껴지는 것 같았다.

    “잘 자요. 웬만하면 제 꿈 꾸고요.”

    “……네.”

    무어라 대답할지 모르겠어서 그냥 ‘네’라고 해 버렸다.

    그의 꿈을 꾸라고? 분명 템트의 환상처럼 이상한 꿈을 꿀 것이 분명하다.

    아직까지 그가 내 몸을 씻겨 주던 게 생생하게 기억이 나는데…….

    그런데 이상하게도, 긴장한 것과는 반대로 그의 포옹에서 어떤 안정감이 찾아왔다.

    불완전한 나를 온전히 품어 주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이대로도 괜찮다고, 아무 문제 없다고 말해 주는 것 같았다.

    그 감각에 나는 눈을 슬며시 감았다.

    이제는 정말로 잘 때가 된 것 같았다. 아무 일은 벌어지지 않았지만, 그가 뒤에서 나를 안고 있는 이 자체로도 행복했다.

    레크리드와 하룻밤을 보내게 된 것에 묘한 고마움을 느끼며, 나는 잠에 빠져들었다.

    * * *

    아침이 되었고, 눈을 뜨니 그는 없었다.

    옆이 텅 빈 침대를 바라보며 나는 눈을 비볐다.

    [‘동침’ 퀘스트에 성공하였습니다!]

    그때, 아침부터 퀘스트의 음성이 들려왔고, 정신이 번쩍 들 수 있었다.

    “…다행이다.”

    아직 자고 있는 나를 위해 커튼을 걷지 않은 건지 방 안은 아직 어두웠다.

    나는 비척비척 일어나 방 밖으로 나왔다.

    계단을 내려가니 그가 아침밥을 준비하고 있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이렇게 다정하고 가정적인 남자가 엔딩으로 이어지면 나를 상사병으로 죽게 만든다니. 어이가 없어도 너무 없었다.

    대체 어떻게 굴기에 상사병으로 죽는다는 건지 궁금해서 한 번 이어져 보고 싶기도 한 기분이었다.

    “으으.”

    하지만 죽는 건 사양이다. 상상으로 끝내련다.

    내가 내려온 걸 느꼈는지 그가 뒤를 돌았다. 한 손에는 숟가락을 든 채였다.

    “일어났어요?”

    “네……. 레크리드는 잘 잤어요?”

    “아뇨. 한숨도 못 잤어요.”

    그가 입을 삐죽거리며 말했다. 정말로 그의 얼굴엔 피곤한 기색이 어려 있는 것 같았다.

    “왜요?”

    “잠이 올 리가 있겠어요? 루이아나 씨가 떡하니 제 옆에 있는데.”

    “…….”

    뭐야, 어제는 뭐 자기는 몰상식한 사람이 아니라느니 뭐니 하더니 왜 갑자기 저런 말을 하는 거냐고.

    내가 당황한 나머지 어버버하며 아무 말도 하지 못하자 그가 빙긋 웃음을 지었다.

    “이리 와요. 밥 먹고 아카데미까지 데려다줄게요.”

    어느새 김이 모락모락 나는 식사를 준비한 그가 나를 식탁으로 앉기를 권유했다.

    아주 오래전 전생에, 아빠가 알코올 중독에 걸리기 전 화목하던 시절이 떠올랐다. 그때도 이렇게 엄마가 아침마다 밥을 해 주며 어서 오라고 했었는데…….

    그립지만 다신 오지 않을 일상을 떠올리며 나는 자리에 앉았다.

    여러모로 많은 감정을 느끼게 해 준 레크리드에게 감사하며, 나는 밥을 먹었다.

    밥을 먹고 차까지 내려 준 그 덕분에 여유롭게 티타임까지 즐길 수 있었다.

    점심 즈음에 느지막이 아카데미에 도착한 나와 레크리드는 여자 기숙사의 공사가 끝났다는 공지를 보고는 기뻐할 수 있었다.

    “루나가 기뻐하니 좋은데… 저는 아쉽네요. 공사가 안 끝나서 하루만 더 자게 해 달라고 하루 종일 빌었는데 말이죠.”

    나는 속으로 진심으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레크리드와의 하룻밤은 나름대로 즐거웠지만… 여러 가지 이유로 나는 기숙사에서 자는 게 훨씬 편하다는 게 결론이었다.

    그리고 이제 퀘스트가 끝났으니 오성석을 활성화하러 가야 하고 말이다.

    “들어가지 마요. 저랑 더 있어요.”

    “저랑 하루 종일 붙어 있었는데 질리지도 않아요?”

    “질리다뇨. 일 년이라도 붙어 있고 싶은데요. 매일같이 아침 해 줄게요. 오늘은 아침에 못 깨워 줬죠? 제가 달콤하게 깨워 줄 수 있는데. 원하면 입이라도 맞춰 줄 수 있고, 옷도 갈아입혀 줄 수 있어요. 루이아나 씨는 몸만 오면 돼요. 그러니까…….”

    “레크리드, 그만.”

    더 이상 들을 수 없다는 것으로 판단하여, 나는 그의 말을 가차 없이 잘랐다.

    그러자 그가 울상을 지었는데, 그게 너무나도 강아지 같아서 머리라도 쓰다듬고 싶은 심정이었다.

    하지만 이제는 가야 할 때다.

    “이만 가 볼게요. 하루 동안 너무 고마웠어요. 잘 지내요.”

    여자 기숙사 앞에 서서 나는 안녕을 고했다.

    이제 또 언제 볼 수 있을지… 알 수 없었다. 시스템이 파괴되면 영영 보지 못할 수도 있는 노릇이었다.

    “왜 더 이상 안 볼 사람처럼 말하는 거예요.”

    “아녜요. 그냥 잘 지내라는 거예요.”

    주인을 향해 꼬리를 흔드는 것 같은 착각이 드는 그의 앞에서 나는 등을 돌리기가 참으로 힘들었지만, 이내 발걸음을 돌렸다.

    “안녕, 레크리드.”

    그리고 나는 기숙사 방 안으로 들어올 수 있었다.

    들어오자마자 한 것은 허리춤에 차고 있던 샐라임을 검집 안에서 꺼내는 일이었다.

    “흥, 남자랑 잘 놀고 왔냐?”

    이상하게 뾰로통한 목소리였다. 질투하는 것 같기도 하고.

    “잘 놀고 왔냐뇨. 퀘스트를 해결하고 온 것뿐이라고요.”

    “즐기는 것 같던데?”

    “무슨 소리예요. 밤에는 방에 있느라 보지도 못했으면서.”

    “무, 무슨 일이라도 있었던 거냐!!”

    샐라임은 지난밤 내내 내 방에 있었던 터라 나와 레크리드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 수 없었다.

    언성을 높이는 그에게 나는 웃으며 대답했다.

    “아무 일도 없었어요. 걱정하지 마요.”

    정말 딸을 걱정하는 아빠와 함께 있는 기분이었다.

    잊어버린 아빠의 기분을 느끼게 해 주는 샐라임에게 고마움을 느끼며, 나는 입을 열었다.

    그 어느 때보다 비장하고, 또 무거운 목소리였다.

    “샐라임. 이제는 때가 되었어요.”

    “그래.”

    샐라임 또한 진지한 목소리를 한 채였다. 그도 여태까지 지금만을 기다린 사람 같았다.

    우리는 이제 떠날 차례였다.

    “이 게임을 끝내러 가자구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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