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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섯명은 너무 많잖아요 (99)화 (99/156)

98화. 혼자 사는 남자(3)

레크리드의 목소리에 눈동자를 한 번 굴린 나는 문고리를 열었다.

그러자 레크리드가 갑자기 웃음을 팡 터트렸다.

“하하하…….”

“뭐, 뭐예요.”

나는 그제야 그가 내 옷차림을 보고 웃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너무 잘 어울리는데요.”

“놀리지 마요.”

“진심이에요. 제가 본 루이아나 씨 모습 중에 제일이에요.”

“이렇게 자루를 뒤집어쓴 거 같은 모습이요?”

내가 입술을 삐죽거리자 그가 진짜라며 다시 한번 덧붙였다.

그는 한 손에 이불을 든 채 서 있었다.

“추울까 봐 하나 더 가져다주려고요. 커튼도 닫아 줄 겸.”

자연스럽게 방 안으로 들어온 그가 침대에 이불을 곱게 펴 주었다.

그러고는 창문 가까이 다가가 묶여 있던 커튼을 풀기 시작했다.

“커튼이 두꺼우니 한결 따뜻해질 거예요. 아, 불편한 점 있어요?”

“아뇨. 딱히 없어요.”

짧게 대답하자 그가 나를 빤히 쳐다보며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너무 귀여워서 저만 보는 게 아까울 정도예요. 아니지, 나만 봐야지.”

“…….”

“재워야 하는 게 아쉽다.”

아쉬운 듯 내뱉은 그가 등을 돌려 방문을 향해 걸어갔다.

나는 그 와중에도 어떻게 하면 퀘스트를 성공할 수 있을지 머리를 굴리고 있었다.

여기서 레크리드를 붙잡아야 하나?

아니면 좀 있다 그가 자고 있을 때 그의 방문을 두드려야 하나?

완전 어색할 것 같아!

지금도 무어라 말을 못 하겠는데! 어쩌지?

발이라도 동동 구르고 싶은 마음에 안절부절못하고 있는데, 그가 미련 없이 문을 나가려고 했다.

나는 그를 내보내면 일이 더 어려워지겠다는 생각에 충동적으로 그를 붙잡았다.

“자, 잠깐만요!”

“……?”

그가 의아한 눈빛으로 뒤를 돌아봤고, 나는 무슨 말을 내뱉을지 필사적으로 생각해 냈다.

“그…….”

“그?”

“너, 너무…….”

“너무?”

그러고는 꽥 소리쳤다. 순간적으로 나온 말이라 나도 내 목소리가 이렇게 클 줄 몰랐다.

“너무 무서워요!”

“……?”

곧이어 그의 얼굴에 물음표가 떠올랐고, 이내 그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설마… 천둥이요?”

“네, 네!”

바깥에는 무섭도록 번개가 번쩍이고 천둥이 치고 있었다.

음산하게 떨어지는 비에 이 방에 혼자 있으면 무서울… 것 같다는 것이 내가 쥐어 짜낸 생각이었다!

그러자 레크리드는 포근한 웃음을 지었다.

“이리 와요.”

말과는 반대로 자신이 다가온 그가 내 어깨를 감싸 안았다.

“……!”

내 눈이 동그랗게 떠졌지만, 그가 알 리는 만무했다.

“괜찮아요, 괜찮으니까 걱정하지 말아요.”

“…….”

“곧 있으면 멎을 거예요. 커튼을 쳤으니 소리도 덜 들릴 거구요.”

나를 안은 그의 품이 따스했다. 보기보다 넓은 어깨에 내가 쏙 들어갔고, 그가 팔로 가볍게 내 등을 감쌌다.

그의 어깨에 코가 묻힌 나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이내 그가 몸을 떼어 낸 후 팔을 톡톡 쳤다.

“나가 볼게요.”

그러고는 바로 밖으로 나가려고 하는 게 아닌가! 이게 아닌데!

나는 급한 마음에 그의 옷깃을 붙잡았다.

“……?”

“그… 저…….”

할 말을 생각도 하지 않은 채 붙잡은 것이라 나는 입만 뻐끔거릴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그때, 그가 묘한 미소를 지었다.

“내 방으로 갈래요?”

나직한 음성이 귓가를 맴돌았고, 나는 그저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 * *

레크리드의 방은 훨씬 넓었다. 커다란 침대가 방 한가운데를 차지하고 있었으며 포근해 보이는 쿠션과 베개 여러 개가 위에 올려져 있었다.

협탁에는 예쁜 프리지어가 담긴 꽃병이 있었다. 방 전체에 꽃향기가 은은하게 맴도는 것 같았다.

나는 쭈뼛거리는 걸음으로 방 안에 입성했다.

그가 침대에 걸터앉아 톡톡 두드리며 이쪽으로 오라는 표시를 보였다.

조심스러운 걸음으로 다가가 그의 침대에 앉았다.

첫날밤을 치르는 것도 아닌데 왜 이렇게 마음이 떨리는 건지 알 수 없는 노릇이었다.

아까부터 심장이 쿵쾅쿵쾅 뛰고 손발을 주체할 수 없는 기분이었다.

에르셈프와 여관에서 잔 적도 있고, 잰퓨어와는 바깥이었지만 단둘이서 잔 적이 있다. 베탄이랑도 같이 잔 건 아니지만 그의 방에서 밤을 보낸 적도 있고.

그런데 레크리드의 방은 그것과는 차원이 다른 느낌을 주었다.

분명 레크리드는 나에게 위협적인 존재가 아닌데, 지금의 그는 마치 오늘을 벼르고 벼르던 늑대 같아 보였고, 나는 그의 방이라는 함정에 순진하게 갇혀 버린 먹잇감처럼 느껴졌다.

‘그냥 기분 탓이겠지. 뭐가 됐든 퀘스트 페널티로 죽는 거보단 낫잖아.’

하지만 왜인지 불길한 예감이 계속 들었다.

레크리드의 침실은 어두웠기에 작은 전등이 뿜어내는 노란 불빛만을 의지할 수밖에 없었다.

“긴장했어요?”

“네? 아뇨?”

내가 아닌 척 대답하자 그가 빙긋 웃었다.

“긴장해도 되는데. 그래야 좀 더 재밌잖아요.”

이 상황을 즐기고 있는 건지, 레크리드의 표정과 목소리는 여유에 가득 차 있었다.

그때, 레크리드가 침대 위쪽으로 올라가 자리를 잡고 누웠다.

“이쪽으로 와요.”

때마침 번개가 치며 번쩍거리는 불빛이 방 안을 타고 지나갔다.

곧이어 무서운 천둥소리가 이어졌고, 나는 겁에 질린 콘셉트 유지를 위해 입술을 꾹 깨문 채 그의 옆으로 기어들어 갔다.

내가 옆에 살포시 눕자 그가 옆으로 누워 한쪽 팔로 자신의 머리를 기댄 채, 나를 바라보았다.

어두운 침실 아래, 그가 나를 빤히 응시하자 묘한 분위기가 형성되었다.

“루이아나 씨.”

“네?”

“사실 아까부터 하고 싶었던 말이 있었어요.”

갑자기 소름이 쫙 끼쳤다. 불길한 예감이 맞았던 걸까? 나는 한 침대에 누워서 하고 싶은 말이 대체 무엇인지 물어보기로 했다.

“뭔데요?”

잠시 입맛을 다신 레크리드는 이내 입을 열었다.

“루이아나 씨를 처음 봤을 때의 이야기예요. 음, 처음엔 에르셈프 왕자님께 화를 내는 모습을 보고 굉장히 흥미롭다고 여겼어요.”

“…….”

쑥스럽다는 듯 웃으면서 첫 만남을 이야기하는 레크리드를 보니 맥이 탁 풀렸다.

레크리드는 역시 레크리드인데, 너무 오버해서 생각했나 보다.

긴장이 풀리니 아까보다 훨씬 편해진 기분이었다.

“그리고 ‘깨진 우정의 펜던트’를 팔러 왔을 때도, 사실 그 펜던트가 어떤 건지 알고 있었어요. 그런데도 꺼낸 건…….”

“알고 있었다고요?!”

“놀리고 싶었어요. 그땐 그냥 가벼운 마음이었어요. 이 펜던트를 지니고 있는 상대를 보면 어떻게 되는지 아니까, 루이아나 씨가 저를 좋아하게 되면 어떨지 궁금했거든요.”

“이런, 말도 안 되는……. 제가 레크리드를 좋아하는 걸 알고 있었단 말이에요?”

“어느 정도는요. 펜던트의 효과를 아니까요. 저를 볼 때나 제가 나뭇잎을 떼어 줄 때 얼굴을 붉히던 걸 보고 그저 재미있다고 생각했어요. 귀엽다고도 느꼈고요.”

“어떻게 알면서 그렇게 시치미를 뚝……!”

“그땐 그게 다였어요. 그냥 호기심이 가는 정도였죠. 그래서 짓궂은 장난을 친 거예요.”

“…….”

“그런데 지금은 달라졌어요.”

말을 대변하듯, 그는 표정을 달리했다. 순한 인상이 순식간에 진지하게 변하더니, 눈빛이 깊어졌다.

나는 잠자코 그의 말을 기다렸다.

잠시 뜸을 들인 그는 곧이어 낮은 음성으로 읊조렸다.

“루이아나 씨가 진심으로 좋아요.”

“……!”

“이렇게 눈을 마주하고 있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벅차고 떨려요.”

“레크리드…….”

“당황스러울 것 알아요. 그것까지 모두 예상했으니까. 하지만 제 마음을 표현하고 싶었어요.”

그는 솔직하게 고백했다.

자신이 느끼고 있는 감정을 허물없이 털어놓았다.

하지만…….

나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레크리드의 고백을 받아 줄 수 없어서가 아니었다.

그의 마음이 부담스러웠다거나, 상황적으로 여유가 없어서도 아니었다.

내가 아무 말도 할 수 없는 이유는…….

우리가 어차피 곧 있으면 시스템 파괴로 인해 사라질 관계였기 때문이다.

나를 지배하고 있는 이 게임이 사라지면 다섯 남주인공들이 어떻게 될지는 알 수 없었다.

하지만 다섯 남주인공 모두 게임 시스템 때문에 나를 좋아하고 있는 건 사실이었다.

자연적으로 나에게 마음이 끌려서, 나를 알아 가고 싶고, 더욱 깊은 마음을 품게 되는 그런 진짜 사랑의 감정이 아니었다.

그저… 시스템의 농간으로 나를 좋아하게 된 것뿐이란 말이다.

그걸 알고 있는 내가 어떻게 그의 고백을 듣고 기뻐할 수 있을까.

곧 있으면 남주인공들이 나를 싹 잊어버릴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괜스레 마음이 이상해졌다.

그렇게도 벗어나고 싶었던 게임 시스템인데, 막상 나와 관계가 끊어진다는 생각을 하니 마음 한편이 아픈 것이다.

시스템이 파괴되어서 나를 남 보듯이 대한다면 그때 내 마음은 어떨까?

감정을 공유했던 기억은 오로지 나만 가지고 살아가야 하는 건가.

그들은 나를 좋아했던 기억을 모두 잃고 아무렇지 않게 살아가는 걸까.

나는 괜스레 울적해지는 것을 느꼈다.

“왜… 그래요……? 제 고백이 그렇게 별로였어요?”

내 표정이 심상치 않자 레크리드가 얼굴을 들이밀며 나에게 물었다.

갑자기 현실로 돌아오며 나는 정신을 차렸다.

“아녜요. 그냥, 당황스러워서.”

“그럴 만해요. 미안해요.”

나는 더 이상 말을 꺼내지 않았다. 그저 입을 다물고 천장을 바라볼 뿐이었다.

그러자 레크리드가 조심스럽게 손을 갖다 대었다.

“……!”

내 머리를 귀 뒤로 쓸어 넘겨 주는 것이다.

사르륵, 부드럽게 만져 주며 그는 나를 그윽하게 바라보았다.

딱히 하지 말라고는 하지 않았다. 나도 그냥 이 손길을 느끼고 싶었다.

지금까지 시스템의 농간에 놀아난 건 난데, 왜 이런 묘한 감정을 겪어야 하는 것도 난지. 전혀 알 수 없었다.

* * *

그렇게 레크리드가 쓰다듬어 주는 손길을 가만히 받은 지 십여 분쯤 됐을까.

어느 정도 마음이 진정되자 다시 오성석의 존재가 고마워지기 시작했다.

전에 생각했듯이, 오성석을 이용해 시스템을 파괴하기 전까지는 나도 한 번쯤 마음을 놓고 그들의 품에 안길 수 있는 것이 아닐까?

그 생각이 들자마자 레크리드 쪽을 향해 몸을 돌려 누웠다.

차분하게 가라앉은 갈색 머리와 새까만 흑안, 언제라도 안기면 무슨 일 있냐며 내 등을 쓰다듬어 줄 것 같은 다정한 생김새.

하필 레크리드여서일까.

집착하는 세이먼이나, 냉정한 에르셈프, 장난기 많은 잰퓨어, 아직 선생님일 뿐인 베탄이었다면 지금 내 행동은 달랐을 것이다.

내 응석이라면 모두 받아 줄 것 같은 레크리드여서, 나는 그의 분위기에 심취해 버렸는지도 모른다.

내가 알 수 없는 표정과 함께 레크리드를 바라보며 몸을 움직이자 그가 기다렸다는 듯이 내 몸을 안아 주었다.

역시나 따뜻한 그의 몸에 내가 파묻혔고, 그의 살 내음과 은은한 향기가 내 코를 타고 들어왔다.

나는 나도 모르게 머리를 그의 가슴팍에 비볐다.

“괜찮아요, 괜찮아…….”

아무것도 알지 못하면서 그는 나를 위로해 주었다.

레크리드는 한쪽 손으로 내 등을 토닥토닥 두드려 주며 나를 안았다.

내가 스스로 남주인공의 품에 들어갈 줄은 꿈에도 몰랐다. 하긴, 지금 이 순간의 나는 이 세계에 떨어져 고생한 나 자신을 위로 받고 싶었다.

그 상대가 레크리드가 될 줄은 몰랐지만… 말이다.

따스한 레크리드의 품에 안겨 있는데, 문득 어떤 생각이 들었다.

아무리 남자들이 나를 좋아한 것이 시스템의 탓이라지만, 그들의 마음이 궁금했다.

어떤 생각으로 나를 좋아하는 건지, 계기는 무엇인지, 얼마나 깊게 나를 생각하고 있는 건지.

그래서 나는 그의 가슴에서 고개를 들며 물었다.

“내가 왜 좋아요?”

어느새 내 뒤통수를 온전히 감싸고 있던 그가 내 움직임을 느꼈는지 시선을 아래로 내렸다.

눈이 마주치자 금방이라도 입을 맞출 것 같은 분위기가 형성되었다.

레크리드의 얼굴이 점점 나를 향해 다가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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