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다섯명은 너무 많잖아요 (98)화 (98/156)

97화. 혼자 사는 남자(2)

레크리드의 말대로 그의 집은 멀지 않았다. 학교에서 빠져나와, 시장가를 지나 주거지가 모인 공간으로 갔다.

여러 집이 모여 있었지만 유일하게 레크리드의 집만이 동떨어져 있었다.

잔디가 깔린 넓은 마당이 있었으며, 왼편에는 커다란 나무 한 그루가 자리하고 있었다.

“저기예요. 아담하죠?”

“집이 참 예쁘네요. 아늑할 것 같아요.”

갈색 지붕에 목재로 이루어진 집은 내 생각보다 더 작았다.

저기에 한 가족이 다 같이 사는 건가?

집 앞에 다다라 그가 열쇠로 문을 땄고, 자연스럽게 나부터 들어가도록 인도했다.

내부는 깨끗하고 깔끔했다. 한쪽에는 벽난로가 자리하고 있었고, 거실에는 큰 창문이 붙어 있었다.

집 곳곳에는 책과 마법 물품들이 놓여 있었는데, 보기만 해도 신비로운 분위기를 풍겼다.

따로 연구를 하는 것이 있는 건지, 한쪽에는 분홍색 액체가 유리관에 담겨 있었고, 스포이트가 올려져 있었다.

전체적으로 집에는 이런저런 물건이 많았지만 천장에 달린 주황색 전등이 조화로운 분위기를 형성해 주었다.

“편하게 구경해요. 옷을 갈아입고 올 테니까.”

“네.”

소파에 털썩 앉아 주변을 찬찬히 살펴보고 있었는데, 레크리드가 편한 옷차림으로 방에서 나왔다.

커다란 하얀색 니트에 회색 바지를 걸친 모습이 한 마리의 사모예드를 연상시키는 것 같았다.

그는 갈색 머리를 쓸어 넘기며 나에게 물었다.

“배고프죠? 밥 먹을까요, 우리?”

“밥이요?”

그와 식사를 할 것이라고는 생각을 하지 못해 순간 되묻자 그가 싱긋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런데… 다른 가족분들은 다 어디 가신 거예요?”

나는 의아한 마음으로 물었다. 인사라도 드려야 하는 게 먼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다른 가족 없는데?”

“네?”

“저 혼자 살아요, 루이아나 씨.”

나는 그의 말에 눈이 동그랗게 떠졌다. 베탄의 집에 갔었을 때처럼 당연히 레크리드 또한 가족과 함께 살 것이라고 예상했었다.

베탄은 귀족 가문이기에 커다란 저택에서 산다고 생각했고, 레크리드는 상인이니까 이런 주거 지역에서 산다고 생각했는데.

완전 착각이었잖아!

뭐야, 그럼 나 지금 자취하는 남자 방에 온 거야?

전생에도 못 가본 남자 자취방?

“오, 이런…….”

순간적으로 이 공간에 나와 레크리드만이 단둘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인지했다.

게다가 다른 집들과는 동떨어져 있었기 때문에, 여기서 무슨 일이 일어나도 아무도 모를 것만 같은 집이었다.

괜히 오버하는 건가 싶으면서도 이상하게 표정이 굳었다.

“몰랐어요. 당연히 가족과 함께 살 거라고 생각했는데.”

“그러면 제가 왜 루이아나 씨를 데리고 왔겠어요.”

응? 그게 무슨 의미지?

내가 그의 말에 마땅한 대답을 하지 못하자 그가 푸흣, 하고 웃었다.

“장난이에요. 밥 뭐 먹을래요? 뭐 좋아해요?”

나는 소파에 앉아 무릎을 모은 채 손을 올려 두었다.

자취방이라는 생각이 들어서인지 나도 모르게 조신해지는 것이다.

그런 내 모습을 레크리드가 여유로운 눈길로 쳐다보더니, 찬장에서 당근 하나를 꺼냈다.

“당근 스튜 좋아해요?”

“네, 저 뭐든지 잘 먹어요.”

“좋아요. 그럼 제가 오늘 실력 발휘 한 번 해 볼게요.”

“요리할 줄 아는 거예요?”

“혼자 살다 보니 이것저것 만들 줄 알게 되었어요. 편하게 있어요. 얼른 만들 테니까.”

그는 니트 소매를 걷어붙이며 능숙하게 칼을 잡았다.

나는 부엌에 서서 칼질을 하는 레크리드의 뒷모습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딱딱한 당근을 써는 소리가 들렸고, 그는 물컵에 물을 받아 냄비에 주르륵 따랐다.

“뭐라도 도와줄게요.”

가만히 앉아 있으면 안 되겠다는 생각에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그에게 성큼성큼 다가가자 그가 힐끗 뒤를 돌아보았다.

“괜찮아요. 정말 가만히 있어도 돼요.”

“어떻게 가만히 있어요. 아무 거나 시켜요. 다 잘 할 수 있으니까!”

내가 크게 소리치자 그가 작게 웃었다.

아까부터 입가에서 미소가 떠나질 않는 것이 기분이 매우 좋아 보였다.

“그러면…….”

“네.”

“이리 와서 저랑 이야기나 해 줘요. 제 옆에서.”

그 말에 내가 몸을 멈칫하자, 그가 자기 옆으로 오라고 눈짓을 했다.

“따, 딱히 할 얘기 없는데…….”

“저는 루이아나 씨가 궁금해요. 어떤 사람이고, 어떻게 살아왔는지.”

“그걸 저 혼자 떠들으라고요?”

내가 묻자 레크리드가 손질한 야채를 냄비에 집어넣으며 대답했다.

“하하, 아뇨. 제가 하나씩 물을게요.”

“아……. 네.”

내가 머쓱한 얼굴로 그의 옆에 어정쩡하게 서 있자, 그가 계속해서 웃음을 흘렸다.

지금 이 순간을 되게 즐기고 있는 것 같은데.

“루이아나 씨.”

그가 내 이름을 부를 때마다 괜히 긴장이 되었다.

“네.”

“그 이름, 가명이죠?”

그의 말에 내가 눈에 띄게 놀랐다. 이 남자는 예전에 샐라임의 칼을 알아봤을 때도 그랬지만 눈치가 정말 빨랐다.

아니, 이건 눈치의 정도가 아닌 것 같은데. 대체 어떻게 알아낸 거지?

“어떻게 알았어요?”

“맨입으론 못 말하죠.”

“에에?”

그가 개구쟁이처럼 키득거리며 대답했다. 웃을 때마다 눈 밑에 보조개가 들어가는 것이, 아이처럼 귀여웠다.

“궁금한데……. 제가 뭘 해줘야 해요?”

왠지 그의 페이스에 휘말리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내가 순진한 얼굴로 묻자, 그가 찬장에서 유리병 하나를 꺼내더니, 숟가락에 쪼르륵 따랐다.

레몬색을 띠는 반투명한 액체였다.

“이거 먹어 봐요.”

“그럼 알려 줄 거예요?”

“네.”

나는 미심쩍다는 얼굴로 그를 한 번 쳐다본 뒤, 그가 든 숟가락에 입술을 갖다 대었다.

호로롭, 하고 마시자 순식간에 기침이 나왔다.

“우왓! 셔!”

온갖 인상을 찌푸리며 혀를 내밀자 그가 큰 소리를 내며 호탕하게 웃었다.

“하하하……. 그렇게 셔요? 그 정도 아닐 텐데.”

“으으……. 이게 대체 뭐예요?”

“황금 레몬즙에 허브를 넣고 숙성시킨 향신료예요. 이걸 여기에 넣으면… 감칠맛이 아주 좋아진답니다.”

그가 내 입에 갖다 댔던 숟가락을 냄비 안으로 넣으며 말했다.

“지금 장난친 거죠. 저 골탕 먹이려고.”

내가 한 방 당했다는 생각에 그에게 눈을 흘기자 그가 눈웃음을 지으며 손사래를 쳤다.

“아니에요. 방금 표정, 완전 귀여웠어요.”

“…….”

그에 말에 괜히 볼이 약간 붉어진 나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지금 나보고 귀엽다고 한 건가.

혼자서 그 말을 곱씹고 있자 그가 팔꿈치로 나를 톡, 건드렸다.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해요. 귀엽다는 말 처음 들어봐요?”

내가 그 말에 한 번 더 흠칫, 놀라자 그가 동그란 눈으로 나를 쳐다봤다.

“설마 정말이에요? 한 번도 안 들어 봤어요?”

“네. 왜요? 귀엽다는 말이 흔한 말인가요?”

무안해진 내가 뾰족하게 묻자 그가 고개를 돌려 나를 빤히 바라보더니, 대답했다.

“아뇨, 제가 처음으로 말해 준 사람이라는 게 좋아서요.”

그의 까만 눈동자가 나를 곧게 응시하자 나도 모르게 빠져들 것 같은 기분을 느꼈다.

“남자도 별로 안 만나 봤고, 또 관심도 없었고. 귀엽다는 말을 해 줄 부모님도 없었고. 그게 다예요.”

내가 허심탄회하게 털어놓자 그가 흥미로운 눈빛을 하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기뻐요. 제가 루나에게 처음이 되었다는 거잖아요.”

“뭐, 말이 그렇게 되나…….”

“그럼요.”

“그런데 제 이름이 가명이라는 건 어떻게 안 거예요?”

레크리드는 내 질문에 아무렇지 않게 대답했다.

“이 동네를 속속들이 알지만 윌리어스 가문이라는 곳은 들어 본 적이 없거든요. 게다가 이 학교에 다니는 학생들은 집안의 기대를 받고 있는 자제들인데, 마물이 쳐들어온 비상사태에 본가에 돌아갈 수 없을 리도 없고요. 그래서 신분을 감추고 있는 건가, 싶었어요.”

“…완전 소름 돋네요. 이걸 알아채다니.”

나는 얼떨떨한 얼굴이 되어 입을 벌렸다.

그러자 레크리드는 빙긋, 웃더니 보글보글 끓는 냄비의 뚜껑을 닫았다.

그러고는 내 팔을 잡고는 자신 쪽으로 당겼다.

“……!”

“이리 와요. 스튜 다 될 때까지, 저랑 이야기해요. 알고 싶은 게 산더미니까.”

그러고는 소파로 나를 이끌었다.

* * *

스튜가 만들어질 때까지는 한 시간이 걸렸고, 그동안 우리는 별 이야기를 다 나눴다.

바로 옆에 딱 붙어 있어서 처음엔 부담스러웠지만, 레크리드는 대화를 나누기에 아주 편안한 상대였고, 리액션이나 공감 능력이 좋아 말할 맛이 나게 해 주었다.

“그래서 그 이블린이라는 자가 루이아나 씨를 민 거예요?”

“아뇨, 그런 줄 알았는데 아니었어요. 범인은 제가 아까 말했던 같은 반이었다던 여자애였는데…….”

‘내가 왜 이런 이야기까지 하고 있지?’ 싶을 정도로 나는 수다를 떨고 있었다.

레크리드는 얼굴에 예쁜 보조개를 띄우며 잘도 웃어 주었고, 크게 웃다가 가끔 내 허벅지를 툭툭 건들기도 했다.

나는 그럴 때마다 다리를 모으곤 했지만 그는 전혀 신경 쓰지 않는 것 같았다.

“이제 밥 먹을까요?”

내가 식탁에 숟가락과 포크를 올려놓았고, 그가 그릇에 덜어 낸 스튜를 가지고 왔다.

“한번 먹어 봐요.”

레크리드가 턱을 괴고는 내가 스튜를 먹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금세 레크리드와 가까워진 것 같은 나는 빙긋 웃으며 숟가락을 입에 넣었다.

“우와, 완전 맛있어요.”

“정말이에요?”

“진짜, 제가 먹어 본 스튜 중에 제일 맛있어요.”

“영광인데요.”

내 반응을 보고는 만족스러웠는지 그 또한 숟가락을 들었다.

“루이아나 씨가 옆에 있어서 긴장했는데, 잘 만들었나 보네요.”

“긴장한 거였어요? 전혀 티 안 났는데.”

“저 아까부터 엄청 떨었어요. 이것 봐요. 티 나죠?”

그가 손가락에 베인 상처를 보여 주며 말했다. 아까 요리를 하다가 다친 것 같았다.

“다쳤군요! 이런.”

그는 다친 손가락을 접어 주먹을 쥐더니 마저 스튜를 먹었다. 신경 쓰지 않아도 된다는 제스처 같았다.

그래도 상처가 작아 다행인 것 같았다. 나는 괜히 호들갑을 떨지 말자는 생각에, 입을 다물고 스튜를 먹었다.

식사 시간이 끝나자, 창밖은 벌써 어둑어둑해져 있었다. 어느새 비도 주룩주룩 내리고 있었다.

애초에 저녁을 먹은 시간이 늦었던지라, 시간이 많이 흘렀던 것이다.

그동안 나는 처음에 이 집에 들어올 때 긴장했던 것에 비해 꽤 적응을 잘하고 있었다.

그런데 밤이 되고, 또 비가 오니 느낌이 달라지는 것을 느꼈다.

바깥이 새까매지고, 불빛이라곤 저 멀리 점처럼 보이는 것이 다였다. 가끔가다 번개도 치는 것 같았다.

외딴곳에서 레크리드와 단둘이 고립되었다는 생각이 들자, 이상하게도 레크리드가 다르게 보이는 효과를 낳았다.

원래도 ‘깨진 우정의 펜던트’ 때문에 설레는 기분을 느꼈던 남자였다.

다섯 명 중 그래도 가장 좋다고 생각했던 남자였던지라, 나도 모르게 감정이 몽글몽글 올라오는 것 같았다.

지금 내 앞에 앉아 긴 다리를 꼬고 있는 레크리드가 이렇게 섹시해 보일 수 없었기 때문이다.

하……. 미쳤어, 루나. 정신 똑바로 차려.

스스로 마음을 다잡으며 고개를 젓고 있는데, 레크리드가 말을 건넸다.

“이만 자러 갈까요? 방을 안내해 줄게요.”

“네.”

그를 따라 계단을 타고 올라가자 두 개의 방이 나왔다.

하나는 레크리드의 방인 것 같았고, 나머지는 남는 방인 것 같았다.

오른쪽에 있는 곳으로 나를 이끈 그는 방문을 열어 주며 말했다.

“여자 옷이 없어서 제 옷을 갖다 놓기는 했는데… 많이 클 거예요. 그래도 지금 옷은 불편하니까 갈아입어요.”

“…고마워요.”

그가 문을 닫아 주었고, 나는 침대 위에 곱게 개어 놓은 옷을 들어 올렸다.

흰색 티셔츠와 반바지였다. 아무래도 전투복을 입고 있던지라 아까부터 불편했던 건 사실이었다.

꾸물대며 옷을 갈아입고 방 한편에 있던 거울을 보자 웃음이 나왔다.

옷을 입고 있는 게 아니라 옷이 나를 뒤집어쓰고 있는 것 같았다. 반바지 또한 다리를 이렇게 드러내 본 적이 없어서 어색하기 그지없었다.

하지만 지금은 이런 게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지금으로선…….

“퀘스트를 깨야 해.”

‘레크리드 니엘과 단둘이, 한 침대에서 하룻밤을 보내시오.’라는 퀘스트의 내용.

무조건 한 침대여야 한다는 것이었다.

나는 눈을 감고 머리를 굴렸다.

대체 어떻게 하면 한 침대에서 하룻밤을 보낼 수 있지?

나보고 유혹이라도 하라는 거야 뭐야.

코앞까지 다가온 퀘스트 내용에 나는 헛웃음이 절로 나왔다.

우르릉 꽝꽝!

바깥에서는 거세게 천둥이 휘몰아치고 있었다.

동떨어진 이 작은 집에서, 나는 어떻게 레크리드와 함께 잘 수 있을까.

그렇게 열심히 고민을 하고 있던 참이었다.

똑똑.

방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내가 뒤를 휙 돌아보았다.

바깥에선 레크리드의 목소리가 나직하게 들려왔다.

부드럽고, 낮은 음성이었다.

“들어가도 돼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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