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다섯명은 너무 많잖아요 (97)화 (97/156)

96화. 혼자 사는 남자(1)

“알고 있는 걸 다 말해, 루나.”

에르셈프가 피곤한 기색이 역력한 얼굴로 말했다.

“무얼 말이죠?”

내가 시치미를 떼자, 에르셈프가 한숨을 한 번 쉬더니 다시 입을 열었다.

“세이먼과 마지막으로 같이 있던 사람이 바로 루나, 너야. 그의 상처가 심상치 않아. 구급대원들은 바로 치료에 들어갔지만 내가 보기엔 도저히 마물에게 당한 것이라고는 느껴지지도 않았어. 분명… 사람에게 당한 것 같았다.”

세이먼이 자신의 이야기가 비밀이라고 한 적은 없지만 밝혀서는 안 될 것 같다는 확신이 들었다.

게다가 세이먼이 이 일의 주동자로서 처벌을 받는 일은 원치 않았다. 그가 무사히 빠져나갔으면 했다.

“마지막으로 같이 있던 건 맞지만 딱히 들은 건 없어요. 제가 처음 세이먼을 발견했을 때부터 그는 다쳐 있었구요.”

나로서는 모른 척을 해 주는 게 가장 최선인 것 같았다.

“루나, 마물들이 내려오기 시작한 시점에 세이먼의 알리바이가 없어서 현재 그는 의심을 받고 있어.”

“…….”

“그 말은, 세이먼이 발견 된 후 마지막까지 함께 있던 네가 연루될 수도 있다는 뜻이야.”

에르셈프는 걱정 어린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혹여나 내가 이 일에 휘말릴까 봐 염려하는 것 같았다.

평소엔 싸가지 없고 냉정하기 짝이 없지만 이렇게 나를 걱정해 줄 때면 참 자상한 모습이 드러나곤 했다.

나를 생각해 주는 그가 참 고마웠지만, 나는 세이먼을 배신할 생각은 없었다.

“정말로 아는 게 없어요. 저는 단지 경기장에서 빠져나오다가 다친 세이먼을 구해 줬어요. 그뿐이에요.”

내가 마지막으로 아니라고 말하자 에르셈프가 가만히 내 얼굴을 바라보더니,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네가 아니라면 아닌 거겠지. 몸은…….”

“네?”

“…사람들이 많이 다쳤어.”

“그래서요?”

“넌 안 다친 거야?”

“아.”

나는 뒤늦게 그의 말을 알아들으며 대답했다. 다치진 않았냐고 바로 물어보지도 못하는 에르셈프의 얼굴이 퍽 귀여웠다.

“괜찮아요. 멀쩡해요.”

“…….”

“에르셈프는 괜찮은 거예요? 온몸이 피투성이에요. 마물 대부분을 처리한 게 에르셈프라면서요.”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이야. 빠르게 처리하려면 내가 나설 수밖에 없었어.”

에르셈프는 여느 때와 같은 포커페이스를 유지했다. 얼굴 곳곳에 묻어 있는 핏자국이 그의 날카로운 인상을 더욱 부각하는 것 같았다.

“아, 그리고 여자 기숙사 건물 곳곳이 파괴되었어. 정비하는 데 하루 정도는 걸릴 거야.”

“헉, 그러면 오늘 기숙사에서 잠을 잘 수 없다는 말인가요?”

“그런 것 같다. 다들 본가에 갈 수 있도록 안내를 할 거야.”

“…….”

나는 본가가 없었다.

아니, 있긴 하지만 들어갈 수 없는 집이었다.

당장 오늘만 해도 잘 곳이 없는 상황이 되어 버리자 나도 모르게 죽상이 되었다.

그러자 에르셈프가 시선을 다른 곳으로 돌리며 입을 열었다.

“괜찮다면 궁에 데려가 줄 수 있어. 그냥, 뭐, 손님용 방이 많으니까.”

에르셈프는 내 사정을 알고 있다. 그래서 이렇게 배려를 해 주는 거겠지. 하지만…….

나는 멋쩍은 얼굴로 거절했다.

“일단 잘 곳을 더 찾아볼게요.”

왕궁에 들어간다니, 생각만 해도 분명 무슨 일이 생겨서 내 삶이 다이내믹해 질 거 같아 부담스러웠다!

간다고 해도 잠을 제대로 잘 수 있을 것 같지도 않고.

“휴우…….”

여자인 친구 한 명이 없는 게 참 아쉬울 따름이었다.

“이제 다시 들어가 봐. 나는 마무리를 하러 가야 해.”

에르셈프가 나를 텐트 안으로 들여보냈다.

그는 현장에 있는 유일한 왕족이라 기사들을 이끌어 남아 있는 마물이 없는지, 아니면 작은 마물의 새끼가 싹을 틔우고 있는 건 아닌지 꼼꼼히 확인해야 한다고 했다.

“대단해……. 한 나라의 왕자라는 게 이런 건가.”

텐트로 들어가며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원래 있던 자리로 돌아가자, 잰퓨어와 레크리드가 나를 맞이해 주었다.

“무슨 일이었어?”

“아, 별거 아니었어. 그냥 마물에 관련해서 아는 것 없냐고 물어본 게 다야.”

“그걸 왜 너한테…….”

“내가 마물이랑 싸웠거든.”

나는 대충 둘러대며 에르셈프와 대화한 내용을 얼버무렸다.

그리고 다시 텐트에 앉아 시간을 보내고 있었는데, 학교 측의 공지가 내려왔다.

“여자 기숙사 건물의 윗부분이 파괴되어 수리 기간이 하루 정도 걸릴 예정입니다. 모든 학생은 본가로 귀가해야 하며, 당분간은 본가에서 지내기를 권하는 바입니다.”

나는 그 말을 듣자마자 숨이 턱 막히는 것을 느꼈다. 본가에서 지내기를 권한다니, 나 같은 학생은 어쩌라고!

하지만 생각해보면 나 같은 학생이 있을 리가 만무했다. 다들 귀족 집안의 자제니 수도에 저택 하나쯤은 가지고 있겠지.

“하아…….”

땅이 꺼져라 한숨을 푹 내쉬었다.

어쩔 수 없이 에르셈프에게 부탁을 해야 하나…….

그때, 옆에 있던 레크리드가 나에게 말을 걸었다.

“루나, 잘 곳이 없는 거죠?”

“어, 어떻게 알았어요?”

“얼굴에 다 써 있어요.”

“그런가요……. 네, 사실 갈 곳이 없어서 난처한 상황이에요. 이런 일이 벌어질 줄은 몰랐는데…….”

내가 작은 목소리로 중얼댔다. 그러자 레크리드가 눈을 크게 뜨고 눈동자를 이리저리 굴리더니, 집게손가락을 턱에 갖다 대었다.

“저희 집에서 잠시 묵을래요?”

“네?”

내가 되묻자 레크리드가 예쁘게 눈꼬리를 휘며 대답했다.

“물론 루나만 괜찮다면요. 방이 하나 남는 게 있거든요.”

“음…….”

에르셈프도 그렇고, 두 번째 제안이 들어왔다.

다들 자기네 집에서 자라는 말이었는데, 암만 생각해도 선택하기가 어려웠다.

호감도가 오르는 것은 문제 되지 않았다. 어차피 내 손엔 오성석이 있고, 곧 있으면 샐라임과 함께 이것을 활성화할 거다.

그러면 이 지긋지긋한 시스템에서도 벗어날 테니 아무런 상관이 없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본능이 자꾸만 거부하는 것 같았다.

나… 생각보다 유교걸인 건가.

전생에서도 제대로 남자를 사귀어 본 적도 없으니, 겁이 날 만도 했다.

에르셈프와 여관에서 잘 때도 엄청나게 긴장했었으니까.

물론 그 뒤에 푹 잔 건 예상 밖이었지만.

아무튼 남자와 별짓(?)거리를 안 해 본 사람의 입장으로서는 남자의 집에 들어간다는 게 어색한 일이긴 했다.

으……. 어떡하지.

그렇게 고민하고 있는데, 때마침 귓가에 익숙한 소리가 들렸다.

[퀘스트가 도착하였습니다!]

[열람하시겠습니까?]

오, 이런. 이런 타이밍에 내려오는 퀘스트는 항상 심상치 않았는데.

나는 떨리는 마음으로 ‘예’를 골랐고, 퀘스트를 볼 수 있었다.

+

# 제 11호감도 퀘스트

제목: ‘동침’

내용: ‘레크리드 니엘’과 단둘이, 한 침대에서 하룻밤을 보내시오.

제한 시간: 하루

보상: 없음

페널티: 사망

+

“미, 미친…….”

나는 입에서 나오는 욕설을 참을 수 없었다.

사실 내가 그렇게 내뱉고 있는 줄도 몰랐다.

아니, 퀘스트 내용이 미쳤잖아! 한 침대에서 하룻밤을 보내라고? 그렇고, 그런, 짓을 하, 하라는 건 아니겠지? 아냐, 그저 같이 밤을 보내라는 것뿐일 거야.

그때 나는 순간적으로 템트의 환상이 떠올랐다.

내 옷을 벗겨 주고, 몸을 씻겨 주던 레크리드의 손길.

마치 당연하다는 것처럼 자연스럽게 내 온몸을 매만졌지. 촉촉한 물기를 머금은 손가락이 내 몸을 가지고 놀 듯이 간지럽히기도 했고.

그땐 그냥 환상 속에서 허우적대고 있어서, 나는 그 손길을 온전히 느꼈고, 즐겼으며, 더 해 주길 원했었다.

“…….”

나는 얼굴이 저절로 붉어지는 것을 느꼈다.

단숨에 열이 올라오는 바람에 나는 레크리드에게 새빨간 얼굴을 들킬 수밖에 없었다.

“어, 루나. 얼굴이 빨개요. 어디 아파요?”

하지만 레크리드가 자신의 양손으로 내 볼을 감싸며 열을 체크할 줄은… 몰랐다.

나는 화들짝 놀란 나머지 몸을 펄쩍 뛰었다.

“아뇨! 괜찮아요! 정말! 약간 덥네요!”

괜히 오버하며 등을 돌린 뒤 얼굴을 식혔다. 레크리드는 고개를 갸웃하며 내 반응을 살폈다.

그런 이상한 상상을 하고 있는데 갑자기 얼굴에 손을 대면 어떡하냐고!

나는 입술을 질끈 깨물며 다시금 퀘스트 창을 바라보았다.

제목부터 ‘동침’이다.

내용은 아무리 쳐다봐도 바뀌지 않았고, 페널티 또한 마찬가지였다.

젠장 할……. 오늘이라도 당장 오성석을 활성화해 시스템을 파괴해 버릴 작정이었는데, 망할 퀘스트가 이때 나타나서! 

게다가 페널티를 사망으로 걸다니. 너무한 거 아냐?

나는 괜히 하늘을 째릿 쳐다보았다. 타이밍이 야속했다. 제한 시간과 페널티만 아니었어도 안 해도 되는 퀘스트인데.

그래, 내가 마지막으로 너네들 손에 놀아나 준다.

자포자기한 심정으로 나는 레크리드를 향해 입을 열었다.

“정말 미안하지만… 그래 줄 수 있어요? 오늘 하루 잘 곳이 없어서요.”

내가 그렇게 말하자 주변의 반응은 놀라웠다.

잰퓨어의 눈이 터질 듯이 커진 것은 물론이요, 레크리드 또한 놀란 얼굴을 감추지 못했다.

내가 당연히 거절할 것이라고 생각한 거겠지.

잰퓨어는 옆에서 말을 더듬었다.

“루, 루, 루나. 제, 제정신이야? 얘네 집에서 자겠다고?”

“응.”

“아, 아니, 차라리 나랑 여관에서 같이 자. 그편이 더 낫잖아? 쟤보단 내가 훨씬 안전할 거라고!”

“됐어. 남자 기숙사는 괜찮으니 너는 거기서 자. 나는 잠시 신세 좀 져야겠으니까.”

“오, 이런…….”

잰퓨어는 자신의 머리를 감쌌다. 옆에 있던 레크리드는 실실 웃음을 흘리고 있었다.

기분이 좋은가?

“좋아요. 제집은 학교에서 멀지 않으니 마차를 타지 않아도 돼요. 당장 출발하죠.”

청량하고 싱그러운 미소는 레크리드만의 매력이었다. 그는 그 얼굴을 뽐내며 나에게 가까이 들이밀었다.

“어서 가자구요. 어서.”

그러고는 내 등을 밀며 더욱 보챘다. 그는 이 기회를 삼아 빨리 나를 여기서 데리고 나올 셈이었지만, 나에겐 해야 할 일이 하나 있었다.

“잠시만요, 레크리드.”

텐트를 떠나기 전, 세이먼을 한번 찾아가고 싶었다.

병원에 있을 테니 찾아가는 건 쉽지 않을 터다.

지금쯤이면 치료가 끝났으려나?

에르셈프의 말이 신경 쓰여 세이먼과 나, 둘 다 걱정이 되는 마음에 계속해서 세이먼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잠깐 갔다 올 곳이 있어요. 여기서 조금만 기다려 줘요.”

레크리드에게 말한 뒤 나는 텐트에서 나와 발걸음을 돌렸다.

병원은 가까웠고, 나는 금세 그 안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다친 사람들로 인해 병원 내부는 아주 북적거렸고, 들것에 실려 오는 사람들도 몇몇 보였다.

세이먼의 경우는 꽤 심하게 다친 편이니 침대를 따로 받았을 것 같았다.

나는 간호사에게 다가갔다.

“세이먼 유리츠는 치료가 끝났나요? 병실이 어딘가요?”

“오른쪽으로 쭉 가셔서 가장 끝에 있는 방입니다.”

나는 간호사가 가리키는 방향을 바라보며 그곳으로 향했다.

그리고 세이먼 유리츠라는 이름이 적힌 병실 앞에 선 뒤, 문에 붙어 있는 작은 창문으로 내부를 바라보았다.

그런데…….

“뭐야.”

드르륵.

미닫이문을 열고 병실 안으로 들어갔다.

“……?”

그런데 방 안에는 아무도 존재하지 않았다.

침대 위를 만져 보니 좀 전까지 있었던 것처럼 온기가 남아 있었다.

그 다리로는 제대로 움직이기조차 힘들 텐데, 어떻게 된 거지?

알 수 없는 마음에 이리저리 둘러보았다.

그러자 침대 옆 협탁에 작은 쪽지 하나가 놓여 있는 것을 발견할 수 있었다.

나는 그 쪽지를 집어서 펴 보았다.

[걱정하지 말아요.]

누구를 향한 메시지인지 알 수 없었다. 왜 이런 쪽지를 두고 떠난 걸까.

꼬리가 잡힐까 봐, 의심을 받고 있는 상황이니 몸을 숨긴 건가?

진작에 어떻게 할 것인지 물어나 볼걸, 이라는 생각도 들었지만 이미 지나간 일이니 어쩔 수 없었다.

나는 쪽지를 한 손에 든 채 커다란 창문 밖을 바라보았다.

창문은 열려 있었고, 간간이 들어오는 바람에 커튼이 작게 휘날렸다.

“대체 무슨 생각인 거야…….”

나는 혼잣말을 중얼거린 뒤 한참을 가만히 서 있다가, 병원을 나왔다.

그리고 그가 위험에 빠지지 않고 제대로 도망쳤기를 빌었다. 그러다가 괜히 머쓱해져, 볼을 긁기도 했다.

그때, 오랫동안 말이 없었던 샐라임이 입을 열었다.

“루나, 괜히 오지랖은.”

나는 그의 말에 작게 놀랐지만, 이내 헛기침을 했다.

“흠흠! 저도 얽혀 있는 일이라 그런 것뿐이에요.”

“그나저나……. 정말 그 자식 집에 가서 잘 거냐?”

“뭐야, 샐라임도 저한테 뭐라 하는 거예요? 퀘스트라 어쩔 수 없잖아요. 실패하면 사망이라구요, 사망.”

내가 단호하게 말하자 샐라임이 틱틱거리는 말투로 내뱉었다.

“뭐라 하는 게 아니고 걱정되어서 그런 거야, 바보야. 대신 무슨 일이라도 생기기만 해 봐. 내가 옆에서 소리라도 꽥꽥 지를 거니까……!”

“설마… 별일 없겠죠?”

“당연히 그래야지! 마음 단단히 먹어!”

“알겠어요.”

샐라임의 말대로 나에겐 남을 신경 쓸 시간은 없었다. 당장 내 앞에 떨어진 불똥부터 해결해야 할 판이니까.

이제는 나에게 주어진 퀘스트를 행해야 할 때였다.

그것도 마지막 퀘스트다.

레크리드와의 하룻밤.

비록 퀘스트이긴 하지만 내가 좋아하는 사람과의 단둘이서 보내는 시간이다.

텐트에 도착하자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레크리드가 나를 반겨 주었다.

“이제 왔어요? 어서 가자.”

그러고는 자신의 집으로 이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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