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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섯명은 너무 많잖아요 (96)화 (96/156)
  • 95화. 비젠티아 아카데미(2)

    이리헴의 실력은 강했다. 순식간에 세이먼의 몸을 제압해 다리를 처참하게 부러뜨려 놓은 것이다.

    “허…억…….”

    세이먼은 이를 악물며 아픔을 참았다.

    그리고 생각했다.

    여기서 필립에게 잡히면 자신은 끝장이라고.

    그래서 세이먼은 뒤를 돌아 필사적으로 도망쳤다.

    뼈가 어긋나는 느낌이 들었고, 팔과 다리에선 피가 흘렀다.

    뒤에서는 필립의 냉정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내버려 둬라. 저런 정신머리로는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놈이야. 가문과 나의 명예를 실추하게 만드느니 차라리 마물에게 죽어 피해자라고 하는 게 낫지.”

    필립과 이리헴은 아마 세이먼이 저 상태로는 얼마 가지 못할 것이라고 판단한 것 같았다.

    하지만 그 틈을 타 세이먼은 몸을 숨겼고, 도망쳐 온 어딘가에 몸을 눕혔다.

    “허억…….”

    그렇게 땅바닥에 엎어져, 신음 소리만을 내고 있을 뿐이었는데, 운명처럼 누군가가 다가왔다.

    새하얀 은발을 가지고 있는 소녀, 루나였다.

    마치 천사처럼 다가온 그녀는 몸을 숨길 수 있게 도와주었다.

    세이먼에게 루나는 구원자였다.

    감격스러운 마음에 세이먼은 자신을 부축하고 있는 루나를 힐끗 바라보았다.

    그녀는 그저 비장한 얼굴로 앞만 보고 걸어갈 뿐이었다.

    그는 그녀가 마련해 준 공간에 앉아, 그녀에게 자신의 이야기를 털어놓았다.

    그녀에게만큼은 꼭 하고 싶었던 이야기이기도 했다.

    * * *

    세이먼의 이야기를 다 듣고 난 후, 나는 알 수 없는 우울감과 왠지 모를 동질감을 느꼈다.

    나 또한 아버지로부터 받은 학대에 대한 아픈 기억이 있는 사람이었다. 세상 그 누구보다 아빠가 미웠고, 나쁜 생각을 하기도 했다.

    게다가 지난번 잰퓨어도 그랬지만, 게임에서는 이런 남주인공의 배경 스토리가 등장하지 않아 전혀 몰랐던 사실이다.

    세이먼은 그저 엘리트 집안에서 엘리트 교육을 받고 자란 엄친아 아들이라는 이미지만 보여 줬고! 

    나는 우울에 젖은 목소리로 이야기를 털어놓던 세이먼의 얼굴을 보았다.

    그의 얼굴은 기쁜 것 같기도, 슬픈 것 같기도 한 일그러진 얼굴이었다.

    “괜찮은 거예요, 세이먼……?”

    “루나는 나를 이해할 수 있나요?”

    그가 갑작스럽게 물었다.

    나는 잠시 입술을 달싹이다가, 대답했다.

    “제가 이해하는 게 중요할까요? 세이먼은 세이먼이 옳다고 생각하는 일을 했잖아요. 그거면 됐어요. 물론 이렇게까지 학교를 박살 내 버린 건 좀… 생각해 봐야 할 문제지만.”

    나는 그를 힐난하고 싶지 않았다.

    그도 가정 폭력에 의한 엄연한 피해자였고, 나는 그걸 공감할 수 있었다.

    아버지를 향한 처절한 복수. 인생을 통틀어 그것만을 위해 살아왔을 텐데, 지금 이 순간을 얼마나 기다려 왔을까.

    “고마워요, 고마워요. 루나. 당신의 인정을 받으니 세상을 다 가진 것만 같아요.”

    [호감도가 5% 상승했습니다!]

    나는 순간적으로 오르는 호감도에 당황을 했지만 금세 괜찮아질 수 있었다.

    지금 내 주머니 안에 오성석이 있으니 말이다.

    곧 있으면 이 망할 시스템도 안녕이다.

    “하지만, 이 일에 대한 파문은 면치 못할 거예요. 어떻게 할 작정이죠? 주동자를 찾을 것이 뻔한데.”

    나는 걱정스러운 눈으로 물었다.

    그새 정이라도 들었던 탓일까. 세이먼이 잡혀가거나 재판을 받는 일은 원치 않았다.

    그래. 물론 세이먼이 죄 없는 사람들을 다치게 하긴 했다. 그리고 나라에서 금지됐다고 하는 흑마법을 사용하는 걸 적극적으로 도와주었고. 분명히 잘못한 게 맞다.

    하지만 내가 이 세계에 환생하고 나서부터는 나에게 정의나, 옳은 일의 기준은 매번 다르게 적용된다.

    그저 내가 살아갈 수 있는 길, 살아갈 수 있는 방법만을 찾기 위해 기준을 바꾼다.

    그렇기에 세이먼의 사정을 들은 지금, 세이먼이 이런 짓을 벌여도 내 딴에는 괜찮을 수 있었다.

    물론 내가 살아가야 할 기숙사가 무너져 내렸다면 말이 달라지지만.

    나는 쌓아 올린 벽의 잔해들 틈 사이로 바깥을 바라보았다.

    기숙사가 있는 방향이었는데, 거리가 멀어서 잘 보이지 않았다.

    그런데 아까부터 주위가 조용했다.

    “쿵쿵거리는 소리가 들리지 않아.”

    마물들은 제압된 건가?

    그리고 그때였다.

    “거기, 사람이 있습니까?”

    바깥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였다.

    피해자들을 구하러 와 준 구조대원 같았다.

    나는 쌓아 올린 벽을 무너뜨리고는 바깥을 마주했다.

    갑자기 들어오는 환한 빛에 눈을 찌푸렸다.

    “여기에 계셨군요. 이리로 나오십시오. 부상자가 있습니까?”

    하얀색 옷을 차려입고 들것을 가진 사람들이었다.

    “마물들은 처리된 건가요……?”

    “그렇습니다. 더는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그의 말에 나는 세이먼이 있는 쪽을 힐끗 돌아보았다.

    벌써 제압되었다니. 생각보다 빠른 속도였다. 세이먼은 이 정도로 만족할까? 학교를 난장판 만든 것만으로도 아버지에 대한 복수라고 여길 수 있을까?

    알 수는 없었지만 세이먼의 표정을 보니 짐작할 수 있었다.

    절대 실패한 것은 아니라는 표정. 이것까지 예상한 것일까? 나름대로 만족스러워하는 얼굴이었다.

    “여기 부상자가 있어요.”

    내 말에 구조대원들은 들것을 가져와 세이먼을 실었다.

    “이쪽으로 와 주시기 바랍니다. 학생들을 위한 텐트를 설치해 두었습니다. 부상자는 바로 병원으로 이동할 것이고, 학생은 대원의 안내에 따라 동남쪽에 있는 텐트로 향하시길 바랍니다.”

    “가, 같이…….”

    세이먼에게 ‘같이 가 줄까요?’라는 말이 목 끝까지 나왔지만 이내 집어삼켰다. 내가 굳이 그와 함께 있어야 할 이유는 없었다.

    그는 어린애도 아니고, 내가 그와 어떤 관계를 맺은 것도 아니다.

    그런데 왜 이렇게 걱정이 되는 거지?

    세이먼이 지금까지 나를 위해 해 준 것들이 정말 많아서 그런 것일까.

    반대로 그가 위험에 처하니 나도 모르게 마음이 동했다.

    그래, 이건 은혜를 갚으려는 마음인 것뿐이야.

    “루나. 나는 괜찮아요. 어서 사람들이 있는 곳으로 가 봐요.”

    세이먼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건지, 자신만의 계획이 다 있는 건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나를 보내는 걸 보니 그래도 믿는 구석은 있는 건가, 싶어서 고개를 끄덕였다.

    “조심히… 가요.”

    내가 작은 목소리로 말하자 세이먼의 눈이 동그랗게 떠졌다.

    눈동자가 약간은 흔들리는 것 같기도 하더니, 이내 그는 미소를 지었다.

    포물선을 그린 입꼬리가 말했다.

    “고마워요.”

    [호감도가 3% 상승했습니다!]

    * * *

    학교는 빠르게 정리되었다.

    왕실 측 기사단이 투입되었고, 램클리프 마법협회에서도 급히 게이트를 타고 가담했다.

    마법협회는 남아 있던 작은 마물들을 마저 처리하고, 뒤탈이 나지 않도록 계속해서 주의 깊게 경계하는 일을 했다.

    왕실 기사단은 ‘케이오스’에 대해 빠르게 파악하고, 추후에 이런 일이 더 벌어지지 않도록 조치하는 일을 할 것이라고 했다.

    또한 주동자들을 제보받는다는 종이를 곳곳에 뿌렸다.

    그리고, 마구잡이로 학교를 무너뜨렸던 거대한 마물들의 대부분을 제압한 것은 에르셈프였다고 했다.

    나는 그제야 자신을 이길 자는 왕국에 없다고 말한 그의 말을 믿을 수 있었다.

    지금까지 안 믿은 건 아니었지만… 진짜였다는 생각에 나는 놀란 마음을 감출 수 없었다.

    텐트에 가니 잰퓨어, 레크리드를 만날 수 있었고, 그들은 걱정에 가득 찬 눈빛으로 나를 맞이해 주었다.

    “루나! 괜찮은 거야? 다친 곳은? 대체 어디에 있다가 이제야 나타난 거야! 경기장에서부터 널 찾았는데 도저히 눈에 보이지 않았다고!”

    잰퓨어는 잔뜩 미간을 찌푸린 채 나를 폭 안았다.

    이렇게 화가 난 것 같은 잰퓨어의 얼굴은 처음이었다.

    임무에 나가서 다쳤을 때도 이렇게까지 언성을 높이진 않았는데……. 정말 많이 걱정한 건가 싶었다.

    “루이아나 씨……. 정말 괜찮은 거 맞죠. 제가 얼마나, 얼마나 걱정을 했는데에…….”

    레크리드는 눈물이 그렁그렁한 얼굴로 나에게 말했다.

    “……!”

    그러고는 내 두 손을 덥석 잡더니 잰퓨어에게서 나를 떼어 냈다.

    “이리 와 봐요. 얼굴에 생채기가 많이 났잖아. 흉이라도 지면 안 될 텐데…….”

    예전의 레크리드보다 훨씬 애틋해진 느낌이었다.

    그는 조심스러운 손길로 내 얼굴을 어루만졌다.

    상황이 상황인지라 그런 것일까?

    잰퓨어와 레크리드는 모두 다 나를 보호하는 것에 혈안이 되어 있었다.

    “기숙사로 돌아가게 해 줘요.”

    잰퓨어가 텐트를 지키는 대원에게 가서 말했다.

    “조금만 기다리시면 보내 드리겠습니다. 기숙사에 남은 마법진이 없는지 확인하는 작업을 진행 중입니다.”

    잰퓨어는 이쪽으로 돌아와 잔뜩 화를 냈다.

    “대체 어떤 자식들이 이런 짓을 벌인 거야. 간땡이가 부어도 잔뜩 부었나 보지? 왕실이 개입한 이상 주동자가 잡히는 건 시간문제일 거야. 적어도 …….”

    “처분은 어떻게 될까요?”

    내가 묻자, 잰퓨어가 대답했다.

    “처형감이겠지. 흑마법을 사용했다는 것 자체부터 헌법을 위반하는 행위니까.”

    “이럴 수가…….”

    나는 흔들리는 눈동자로 바닥을 응시했다.

    세이먼은 이미 병원으로 갔다. 다리는 스스로 움직일 수 없을 만큼 다친 상태다. 자신은 이 일과 관련이 없다고 주장할 수 있게 손을 써 두었을까?

    세이먼이라면 그랬을 수도 있다. 충분히 똑똑한 사람이니까.

    하지만 만약 그렇지 않다면, 그가 처형을 당한다면…….

    나는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어차피 곧 있으면 시스템을 파괴해 나와 관련이 없어질 사람이었다.

    지금까지 함께 한 시간이 있다고는 하지만…….

    “…아니야.”

    아니야. 죽으면 안 돼. 아무리 사이코 같은 사람이라고 하지만, 죽는 건 원치 않아.

    복잡한 기분에 나는 고개를 푹 숙였다. 잰퓨어와 레크리드가 내 상태를 살폈다.

    “어서 기숙사로 데려다줄게. 필요한 거 있어? 물이라도 좀 갖다줄까?”

    “괜찮아.”

    나는 바닥에 엉덩이를 깔고 앉았다.

    세이먼이 죽을 수도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자 자연스럽게 베탄의 생각까지 떠올랐다.

    그 또한 죽음에 가까워진 상태였다.

    지금쯤이면… 눈을 떴을까? 아니면 아직도 사경을 헤매고 있을까.

    만약에… 둘 다 죽어 버리면 어떡하지?

    알 수 없었다. 그들을 사랑하는 것도 아닌데, 왜 이렇게 마음이 안 좋은지는 이유를 알 수 없는 노릇이었다.

    그저 나와 가까운 주변 사람이 죽는 것은 당연히 좋지 않은 일이라서 그런 것일까.

    걱정되는 건 세이먼뿐만이 아니었다.

    에르셈프는, 그는 괜찮은 걸까?

    마물들을 대부분 해치웠다고 들었는데, 다친 건 아닐까.

    그는 강하니까 괜찮겠지. 무슨 일이 있어도 꿋꿋하게 이겨 내는 전사처럼, 자리를 지키겠지.

    나는 잰퓨어와 레크리드를 돌아보았다.

    그리고 동시에 주머니에 손을 넣어 오성석을 꽉 쥐었다.

    곧 있으면, 나는 시스템에서 벗어날 수 있다.

    샐라임에게 이 오성석을 활성화하는 방법을 알아내서 실행하기만 하면, 나를 괴롭히는 이 지긋지긋한 게임에서 나갈 수 있다는 거다.

    그런데 그렇게 되면, 남은 다섯 명의 남주인공들은 나에게서 멀어지는 걸까?

    아니면 아예 나에 대한 기억이 사라질 수도 있다.

    그토록 바랐던 일인데, 실제로 일어난다고 하니 마음이 이상했다.

    같잖은 정이라도 쌓여서 그런 건가.

    괜히 감성적인 생각이 드는 나 자신이 웃겼다.

    그렇게 잠시 있었을까.

    “……!”

    텐트 안에 있던 모든 학생들이 일제히 한곳을 바라보며 눈을 크게 뜨는 것을 볼 수 있었다.

    “?”

    나는 고개를 들어 같은 방향을 바라보았다.

    그곳에는.

    “에르셈프……?”

    온몸이 피투성이가 되어서는, 한 손에 칼을 질질 끌며 나타난 에르셈프가 있었다.

    그는 툭 치면 쓰러질 것처럼 피곤해 보이는 얼굴이었지만, 동시에 아직까지 불타오르는 살기가 느껴졌다.

    그는 거침없이 텐트 안으로 들어오더니, 성큼성큼 발을 옮겼다.

    “루나.”

    에르셈프는 내 앞으로 다가왔다.

    내가 동그란 눈으로 그를 마주하자 그가 내 손목을 잡았다.

    그러고는 나를 끌고 텐트 밖으로 나갔는데, 주변에 아무도 없는 것을 확인한 그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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