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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섯명은 너무 많잖아요 (95)화 (95/156)
  • 94화. 비젠티아 아카데미(1)

    책에서만 보던 마물들이 실제로 하늘에서 쏟아져 내렸다.

    도마뱀의 형상을 한 네 발 달린 것부터, 날개를 가진 채 하늘을 날아다니는 새의 모습까지.

    이 모든 것이 아버지를 무너뜨릴 도구들이다.

    세이먼은 자신이 이렇게까지 일을 벌일 수 있을 것이라고는 전혀 생각하지 못했다.

    아버지 앞에만 서면 목소리조차 제대로 나오지 않는 어린아이 같은 모습뿐이었으니까.

    “됐어……. 됐다고. 이 정도 타격이면 충분해. 어차피 전부 소멸시킬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하지도 않았어. 같잖은 종교 집단의 힘은 얼마 가지 못할 거야. 곧 있으면 군대도 투입될 거고.”

    왕국의 유일한 왕립 아카데미로서, 언제까지나 굳건할 줄만 알았던 이 학교가 공격을 받을 줄이라고는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을 것이다. 기껏해야 비리 장부 정도나 폭로할 줄 알았겠지.

    그 점이 바로 아버지를 공격할 수 있었던 지점이다.

    국왕이 아버지에게 내리는 무한한 신뢰에 금이 가게끔 만드는 것.

    왕실이 한순간에 자신을 외면해 버리는 상실감.

    그리고 일생을 바쳐 수십 년을 지켜온 아카데미 학장의 자리에서 내려올 수도 있다는 불안감.

    마지막으로 이 일을 만든 장본인이 바로 자신의 아들이라는 점.

    그것 정도면 충분했다.

    얼마나 배신감에 치를 떨까.

    설마 뒤통수를 칠 놈이 자기 자식이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겠지.

    “더 부수어라. 더.”

    마물들이 활개를 치자 세이먼이 작게 읊조렸다.

    그런데, 이상한 점이 하나 있었다.

    정해진 시각보다 일이 일찍 시작되었다는 점.

    미리 정보를 전해 듣지 못한 건가?

    세이먼은 ‘케이오스’의 본거지에 갔다가, 여섯 개의 마법진이 있는 곳으로 향하기 위해 다시 발걸음을 돌렸다.

    그리고 얼마 가지 않아, ‘케이오스’의 일원 한 명을 만날 수 있었다.

    “램클리프의 기사 한 놈이 눈치를 채서 생각보다 일찍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지금 중앙 마법진이 매우 불안해요. 마물들이 정해진 수보다 많이 내려온 것도 그 이유고요. 학생회장님이 어서 가서 상황을 봐 주실 수 있는지…….”

    “알겠습니다. 하지만 언제나 말했듯이 저는 이 일이 무탈하게 끝나도록 도움을 주는 사람일 뿐, 관여한 것은 전혀 아닙니다. 나중에 주동자 색출이 일어날 때도, 저는 빠져나갈 것임을 미리 말씀드립니다.”

    “알고 있죠. 학생회장님은 ‘케이오스’와 아무런 관련이 없다는 사실을요.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저희가 여기까지 오게 된 것만으로도 학생회장님의 도움이 큽니다. 만약 학생회장님이 없었더라면 몇 년은 더 걸렸을지도 모릅니다. 무한한 감사를 표하며, 학생회장님에 대해서 새어 나가는 일은 절대 없을 것임을 약속드립니다.”

    그는 세이먼에게 아주 정중한 말투로 말했다.

    세이먼이 집단 내에서 얼마큼의 위치를 가지고 있는지 알 수 있는 면모였다.

    세이먼은 고개를 끄덕이며 속으로 웃음을 자아냈다.

    ‘멍청한 녀석들. 이렇게 흑마법을 이용해 마물을 소환한 정도의 중죄면 무조건 감옥행을 면할 수 없을 거야. 뒷일은 생각하고 일을 벌이는 건가? 뭐, 나야 상관할 바는 아니지만.’

    신념을 위해서 본인의 신변까지 제물로 바치는 그들이 우스웠다. 대단한 건지, 어디가 부족한 건지. 당최 알 수 없는 노릇이었다.

    세이먼은 무표정한 얼굴로 뒤를 돌며 중앙 마법진으로 향했다.

    중앙 마법진은 아카데미 운동장의 뒤쪽, 서쪽 숲에 위치해 있었다.

    긴 다리로 저벅저벅 걸어가고 있을 때였다.

    “유리츠 님.”

    숲속 언저리에서 누군가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가 들렸다.

    아군인지 적군인지, 그리고 어디에서 튀어나올지도 모르는 탓에, 세이먼은 재빠르게 경계 태세를 갖추었다.

    검집에 손을 갖다 대었고, 날카로운 눈빛으로 소리의 근원지를 찾아내었다.

    그리고 순식간에, 사방에서 갑옷을 입은 기사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세 명? 다섯 명? 일곱 명? 아니다.

    열 명이 되는 기사들이었다.

    그리고 그 가운데에서 또 한 명 새롭게 모습을 드러낸 건…….

    “이리헴 경.”

    왕국에서 손꼽힐 정도로 제일가는 기사인 이리헴 경이었다.

    세이먼은 코웃음을 쳤다.

    아버지가 보낸 사람인가? 이제야 눈치를 채다니, 꽤 느리신데. 하긴, 증거 없는 의심으로 나까지 도달하기엔 저지른 게 많아서 적도 많았겠지.

    그나저나 이리헴 경을 보낼 정도면 단단히 이를 가셨군.

    * * *

    이리헴은 검을 빼 들고 세이먼을 향해 다가왔다.

    “무슨 일이시죠? 이리헴 경.”

    세이먼이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묻자, 이리헴은 진지한 눈빛을 유지했다.

    “학장님의 명을 받고 왔습니다. 순순히 무기를 버리고 저희를 따라오신다면 아무 문제 없을 겁니다.”

    “아버지의 말? 아버지가 무슨 일로 나를 부르셨지? 늙은이가 제대로 된 명을 내릴 리가 없을 텐데.”

    “장난은 사양하겠습니다. 어서 그 무기를 버리고 저를.”

    스르릉.

    이리헴의 말에 세이먼이 오히려 검을 빼 들었다. 새하얀 검신이 숲속의 그늘 속에서도 찬란하게 빛났다.

    “이리헴 경과 붙어보는 날이 올 줄이야, 상상도 못 했습니다. 정말 영광인 걸요.”

    세이먼이 입가에 미소를 띠며 말했다.

    “어쩔 수 없죠. 제압하는 수밖에.”

    고동색 머리를 단정하게 넘긴 이리헴은 겪어 보지 않아도 그 실력을 보여 주는 듯한 엄청난 몸집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그것에 겁을 먹을 세이먼이 아니었다.

    오히려 그는 이 상황을 예상했다는 듯이 여유로운 자세였다.

    “하아앗!”

    이리헴은 일격으로 단숨에 상대방을 제압하는 실력을 가진 최고의 기사였다.

    진검의 날카로운 칼날이 세이먼을 향해 다가왔고, 세이먼은 맞서기 위해 칼을 휘둘렀다.

    캉!

    단단한 검이 허공에서 맞부딪쳤고, 빛이 튀는 듯한 착각을 주었다.

    하지만 세이먼이 아무리 타고난 재능을 가지고 있고, 비젠티아 아카데미의 수석을 유지하고 있다고 해도 이리헴과 맞붙기에는 무리가 있었다.

    세이먼도 그것을 알고 있는지 이리헴의 검을 막으면서도 자조적인 웃음을 흘렸다.

    “경의 실력은 익히 들어 알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의외인데요. 에르셈프 왕자님보다는 현저하게 떨어지는군요.”

    “유리츠 님.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습니다. 저에게 공격을 해 오신다는 것은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는 것과 같습니다.”

    이리헴은 세이먼의 도발이 먹히지 않는다는 말투로 대답했다.

    캉! 캉!

    세이먼은 힘겹게 이리헴을 막아 냈다. 이리헴의 검은 생각보다 훨씬 빨랐고, 동시에 묵직했다.

    “크읏……!”

    허리춤에서 가까스로 검을 막아 낸 세이먼의 입가에서 소리가 흘러나왔다.

    그리고 그때였다. 허리에서 한 번 검이 막힌 이리헴이 순식간에 각도를 비틀어 세이먼의 다리를 향해 휘둘렀다.

    “크억!”

    한 번에 제압하는 것보다 세이먼의 다리를 공격해 움직임에 무리를 주려는 방식이었던 것이다.

    순식간에 세이먼의 바지가 찢어지고, 그 사이에서 피가 빨갛게 물들어 나오기 시작했다.

    “젠장…….”

    휘익!

    “아직 안 끝났습니다.”

    이리헴은 한 번 더 검을 휘둘렀다. 이번엔 세이먼의 팔이었다.

    팔뚝을 세게 그어진 세이먼이 힘겹게 손으로 상처를 붙잡았다.

    마찬가지로 피가 뚝뚝 배어 나왔고, 그의 손을 타고 밑으로 흘러내렸다.

    “제 상대가 되지 않는다는 건 이미 알고 계실 텐데요. 질 싸움을 거시다니, 유리츠 님답지 않으십니다.”

    “날 유리츠라고 부르지 마십시오.”

    “…….”

    “거지 같은 아버지의 성으로 부르지 말란 말입니다.”

    고개를 푹 숙인 세이먼이 낮은 목소리로 읊조렸다.

    숲속에는 이리헴을 제외한 열 명의 기사들이 진을 치고 있었고, 그 누구도 이리헴과 세이먼의 싸움에 끼어들지 않고 있었다.

    세이먼의 말에 잠시 아무도 대답이 없었고, 바람만이 휘잉, 하는 소리를 남긴 채 지나갔다.

    그리고.

    “언제부터 네가 내 자식임을 부정했느냐?”

    왼쪽 나무 뒤에서 세이먼에게는 너무나도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낮으면서도 쇳소리가 섞인 소름 끼치는 음성.

    세이먼은 어렸을 때부터 이 목소리를 치가 떨리도록 싫어했다.

    저 목소리로 그를 부를 때면 수없이 생각나는 어두운 기억과 함께 절로 손이 떨려 오곤 했으니까.

    하지만, 세이먼은 그때의 세이먼이 아니다.

    이렇게까지 아버지에게 타격을 줄 수 있을 정도의 힘을 가졌다. 언제까지고 아버지 밑에서 눈물만 죽죽 흘리던 그가 아니란 말이다.

    “왜 이딴 짓을 벌인 거냐.”

    필립 유리츠의 고저 없는 목소리가 숲속을 메웠다.

    세이먼은 속으로 작게 놀랐다.

    그가 생각했을 때 이건 유도신문이 아니었다. 이 일을 세이먼이 일으켰을 것이라고 필립 유리츠는 굳게 확신하고 있었다.

    자신은 이 일에 연루되지 않으려고 온갖 꼬리는 다 잘라 놨으며, 증거조차 인멸해 놓았는데, 대체 어떻게 안 거지?

    세이먼은 평소와 같이 온화한 표정을 지으며 필립이 있는 쪽을 바라보았다.

    여느 때와 같이 아버지를 대할 때 드러내던 가식적인 표정이었다.

    “이유를 모르시지 않을 텐데요. 돌이켜 생각해 보십시오. 왜 이런 사달이 나게 되었는지. 이게 필연적인 결과임은 아닐는지.”

    세이먼의 말에는 날카로운 뼈가 숨겨져 있는 듯했다.

    빙 둘러서 말했지만 아버지는 한 번에 알아듣는 듯 표정을 달리했다.

    주변에는 총 열한 명의 기사가 있었지만, 세이먼과 필립을 제외한 그 누구도 숨소리 하나 낼 수 없었다.

    “네까짓 게……. 나에게 반기라도 들 셈인 거냐?”

    “글쎄요, 저는 단지 아버지를 위해 소소한 파티를 열어본 건데.”

    “…….”

    “어떠셨나요, 맘에는 좀 드십니까?”

    그들 사이에는 보이지 않는 칼이 교차하고 있는 것 같았다.

    세이먼은 부정하고 싶겠지만, 둘은 비슷한 점이 많았다.

    이런 상황에서도 전혀 동요하지 않는 모습부터, 차가운 목소리를 내며 냉혈한처럼 행동하는 것까지.

    세이먼이 그토록 부정하고 싶었던 아버지의 모습이 그에게서 드러나고 있었다.

    “그래 봤자 넌 내 피를 물려받은 자식일 뿐이야. 나를 결코 거역할 수 없어.”

    필립의 말에 세이먼이 코웃음을 쳤다.

    “맘 같아선 이 피를 모두 뽑아내 버리고 싶은 심정입니다. 당신의 아들이라는 게 치가 떨릴 정도로 수치스러우니까.”

    “무엇이 불만인 게냐. 못난 자식들 중에서 너만은 내가 온 힘을 다해 키웠건만. 이렇게 아비의 뒤통수를 치느냐?”

    “모르는 척하지 마십시오. 당신 때문에 내 인생이 얼마나 비참했는데. 나는 이제야 빚을 갚은 느낌이야. 당신만 아니었어도……!”

    “설마 지겨운 그레이스 이야기를 하려는 거냐?”

    “뭐……? 지겨워……?”

    그레이스 유리츠. 잊을 수 없는 첫째 누나의 이름이었다.

    “네가 왜 이런 짓을 벌였는지 이제야 알겠구나. 자식이 철이 안 들으면 아비가 고생하는 법이지. 이 일은 내가 알아서 마무리할 거야. 너는 가문에 먹칠이나 하지 말고 조용히 입이나 다물고 있도록 해. 이리헴 경, 이 녀석을 당장.”

    “…죽었으면 좋겠어. 당신이.”

    “…뭐?”

    “당신이 이 세상에서 가장 고통스럽게 죽었으면 좋겠다고. 그래야 그레이스 누나에게 조금이라도 속죄하는 길일 테니까.”

    세이먼은 푹 숙인 고개를 들지 않았다.

    울분에 가득 찬 얼굴을 아버지에게 들키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안 그래……? 양심이라도 있으면 날 자식이라고 부르지 마.”

    세이먼은 아버지를 죽도록 증오했다.

    그래서 이날만을 기다려 왔다. 아버지의 모든 것이 무너지고, 아버지의 얼굴이 일그러지는 날을.

    그런데 어째서인지 아버지는 아무렇지도 않아 보였다.

    그런 척을 하는 건지, 실제로 괜찮은 건지는 알 수 없었지만, 그것이 세이먼을 더욱 분노하게 했다.

    ‘독을 쓰든 암술가를 쓰든 직접 죽였어야 했나?’

    평소에는 그토록 이성적인 세이먼이, 지금은 손을 덜덜 떨고 있었다.

    “이리헴 경.”

    잠자코 세이먼의 말을 듣고 있던 필립은 나지막이 이리헴의 이름을 불렀다.

    “예, 학장님.”

    이리헴이 고개를 숙이며 예를 표하자 필립은 아무렇지도 않은 말투로 내뱉었다.

    “자식이 말을 안 들으면 매가 답인 법이지.”

    “…….”

    “다리라도 하나 분질러 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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