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다섯명은 너무 많잖아요 (94)화 (94/156)

93화. 그의 과거

“세이먼……?”

금발의 남자는 숨을 고르는 것조차 힘겨워 보였다.

내가 다가가자 그가 내 얼굴을 보았다.

팔과 다리에서 흘리고 있는 피가 상당한데도 그는 내 얼굴을 보자 미소를 지었다.

“루나.”

마치 다가온 사람이 나일 것을 알고 있었다는 사람처럼 말이다.

“대체 무슨 일이에요! 아까 그렇게 뛰쳐나가더니, 왜 이렇게 다친 거냐구요!”

내가 금세 다가가 그의 팔과 다리를 살폈다.

마물의 공격이 아니라, 확연하게 칼로 그어진 자국들이 눈에 들어왔다.

싸움 중에 다쳤다기보다는 일방적으로 공격을 당한 것 같았다.

“일단 이곳을 피해요! 여기는 너무 위험해요. 곧 있으면 저 미친 마물이 냄새를 맡고 이쪽으로 올 거예요.”

내가 오지 않았으면 세이먼이 꼼짝없이 마물에게 당했을 것을 상상하자 온몸에 소름이 끼쳤다.

“일어날 수 있죠?”

내가 그의 겨드랑이에 팔을 넣어 그를 일으켜 세웠다.

“허억…….”

그는 신음을 냈지만 잘 참고 일어나 나에게 몸을 기댔다.

장신에 듬직한 몸인지라 내가 그를 받는 것은 버거운 일이었지만 최대한 힘을 끌어모아 그가 나에게 지탱하도록 했다.

절뚝절뚝, 움직이며 우리는 경기장 바깥으로 향하는 통로를 지났다.

긴 복도를 지날 동안 우리는 아무 말이 없었다.

그저 우리가 피할 수 있는 안전한 곳이 어딘지 생각할 뿐이었다.

경기장 밖을 나오자, 나는 벌어진 입을 다물 수가 없었다.

학교는 초토화되어 있었다.

강의동들은 처참하게 무너진 지 오래였고, 그나마 본관이 금이 간 채 아슬아슬하게 남아 있었다.

건물들의 잔해가 떨어지며 만들어 내는 먼지들이 뿌옇게 공기 중에 일었고, 곳곳에서 쿵쿵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마물들의 발소리인 것 같았다.

믿을 수가 없었다. 불과 어제까지만 해도 저 안에서 수업을 듣고, 생활하고, 밥을 먹었었다. 아니, 단 한 시간 전까지만 해도 멀쩡하던 학교였다.

“…세이먼, 당신이 한 일이죠?”

확신에 찬 말투로 물었다.

정황상 알 수 있었다.

그가 변절자라는 것과, 학교를 무너뜨리는 것에 일조하고 있다는 것을.

그런데 대체 왜?

아버지가 학장인 이 학교를 왜 무너뜨리고 싶어 하는 건가.

“루나, 이건 내 평생의 숙원이었어요.”

“……!”

나는 눈을 크게 떴다.

그가 내뱉은 말이 믿기지 않았다.

숙원이라니. 한순간에 난장판이 된 학교의 꼴을 보고도 그런 말이 나온단 말인가?

그에게 어떤 사정이 있는지는 모르지만, 나는 분명히 아까 수많은 사람들이 다치는 것을 보았다.

죄 없는 사람들이 아무 이유 없이 심하게 다쳤는데 그런 말이 나올 수 있다니, 이해가 되지 않았다.

“세이먼… 대체 무슨 말인지 모르겠지만, 일단 이야기는 천천히 하도록 하죠. 다친 곳도 심상치 않은 것 같으니까.”

나와 세이먼은 숲속으로 들어가 건물의 잔해를 걷은 뒤 안전해 보이는 곳을 찾았다.

최대한 바깥에서 찾을 수 없는 곳이었다.

이 사태가 끝날 때까지는 잠자코 숨어 있는 것이 맞는 것 같았다.

나는 바닥 구석에 세이먼을 앉힌 뒤 건물의 잔해로 우리가 보이지 않도록 벽을 쌓았다.

이것도 어차피 마물의 발차기 한 번이면 날아가 버릴 곳이지만, 그래도 겉으로는 보이지 않으니 들키지 않을 수 있다.

끙끙거리며 커다란 조각으로 앞을 막자, 우리는 작은 공간에 고립된 사람들처럼 갇힌 상태가 되었다.

이쯤 되면 안전하다는 생각에 나는 세이먼을 쳐다보았다.

“상처 좀 봐 봐요. 피가 계속 흐르는데.”

내가 희미한 빛에 의지해 치마 끝을 찢어 그의 상처를 묶었다.

“크…윽…….”

상처가 깊었다.

피가 계속해서 뿜어져 나오는 것이, 이 정도의 응급 처치로 지혈이 될지 안 될지도 알 수 없었다.

하지만 할 수 있는 게 이것밖에 없었다.

“참아요. 다 업보니까.”

“저 미워서 그러는 거 아니죠?”

“…미워요. 왜 이런 일을 벌인 거야.”

마찬가지로 팔도 묶어 준 뒤 나는 세이먼 옆에 털썩 앉았다.

“원래는 이렇게 급하게 진행하려 하지 않았어요. 하나하나 천천히 무너뜨리며 그의 절망하는 모습을 지켜보려 했는데……. 하지만 모든 것은 루나 때문에 바뀌었죠. 전부 다 해치워 버리고 아무 걱정 없이 루나와 함께 지내고 싶었으니까……. 그래서 그들과 협력한 거예요.”

“그러니까 대체 왜……!”

“우리 학교 안엔 ‘케이오스’라는 무리가 있어요. 일종의 종교 집단이죠.”

나는 그의 말에 그제야 학장이 말했던 변절자 무리가 이 집단이었다는 것을 알았다.

“케이오스……?”

“학장이 시키지 않던가요? 케이오스에 대해 알아 오라고요.”

“어, 어떻게 알았죠?”

“당신을 F반에 넣었을 때부터 짐작했어요. 어차피 곧 적성 테스트라 반이 의미 없는데, 굳이 인원이 모자란 다른 반을 놔두고 F반에 넣을 리가 없다고 생각했으니까요. 하지만 다행이에요. 루나가 눈치채지 못해서요.”

학장과 정령술과 시험을 다시 보게 해 달라고 거래를 할 때, 나는 변절자에 대해 알아 오겠다는 약속을 했었다.

하지만 학장이 어려운 퀘스트 등으로 알게 모르게 나에게 압박을 한 것에 비해 나는 딱히 관련된 증거를 찾지 못했고, 비무 대회가 끝나면 본격적으로 그것에 대해 파헤칠 작정이었다.

그런데 학장이 우려하던 일이 바로 비무 대회 때 일어나고 만 것이다.

이 일이 일어나게 되어 사람이 다친 것에 내 책임이 따른다는 것을 깨닫자 마음이 무거워졌다.

“제가 미리 알아냈더라면 이런 일은 벌어지지 않았을까요?”

“아뇨. 전혀 문제가 되지 않았을 거예요. 우리가 만든 마법진은 오래전부터 완성되어 있었으니까요. 학장이 막았다고 하더라도 마법진은 발동했을 겁니다. 마물들은 당연히 이곳에 내려왔을 거고요.”

나는 더욱이 이해가 되지 않았다.

“‘케이오스’가 무슨 집단이죠?”

“마물을 숭배하는 집단이에요. 흑마법의 힘이 이 세계를 살릴 열쇠라고 생각하는 곳이죠. 생각보다 규모는 커요. 실제 본거지는 레인타운에 있고, 이 아카데미에 있는 학생들은 극히 일부일 뿐이니까요. 한마디로 사이비 종교에 미친 집단이라는 거죠.”

“그런데 세이먼은 왜……!”

그러자 세이먼은 진지한 얼굴을 하며 대답했다.

“그들의 목적은 바로 비젠티아 아카데미를 시작으로, 각국의 아카데미를 부수며 이 세상에 ‘케이오스’의 존재감을 알리는 것. 그리고 제 목적은 이 아카데미를 무너뜨리는 것이죠. 목적이 같았어요.”

“그러니까 어째서 이 아카데미를 무너뜨리려 한 것이냐고요! 이렇게 많은 사람들을 다치게 하면서!”

내 목소리가 고립된 공간을 가득 메웠다.

세이먼은 이상하게도 아픈 웃음을 지었다.

그의 얼굴에 떠오른 표정에서는, 금방이라도 눈물이 흘러도 이상하지 않을 것 같았다.

“저는…….”

그는 입을 여러 번 열었다가 다물며 뜸을 들였다.

세이먼의 이런 모습은 처음 보는지라 꽤 낯설기 그지없었다.

“이 아카데미는 아버지의 모든 것이에요. 그리고 저는 그걸 없애고 싶었어요. 다른 사람이 다치더라도요.”

“…….”

“저는 아버지를 증오하니까요.”

그는 입술을 꼭 깨물었다. 무슨 말부터 시작해야 할지 고민하는 것 같았다.

그리고, 잠시 후 그는 입을 열기 시작했다.

그가 태어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의 이야기부터였다.

* * *

왕국의 수도와는 멀리 떨어진 레이트빈 영지에서 태어난 세이먼은 아주 어렸을 적부터 부모님의 온갖 기대를 받으며 자랐다.

유리츠 가문은 검술로 나름 이름을 알린 집안이었는데, 필립 유리츠가 검술 학업에 대한 공을 세워 비젠티아 아카데미의 학장 자리를 받으며 유리츠 가문을 확실하게 명문가로 자리매김하게 만들었다.

그러던 중 세이먼이 다섯 남매 중 가장 막내로 태어났으며, 세 살 때부터 위의 형제자매들과는 다르게 뛰어난 검술 실력을 보였다.

그때부터 모든 일이 시작되었다.

“다른 놈들은 하나같이 쓸모가 없어! 여덟 살이 되도록 검 하나를 제대로 쥐지 못하다니. 어찌 된 게 아비의 피를 하나도 물려받지 못한 거냐! 이러고서 어찌 학장의 자식이라고 해!”

형과 누나들 앞에서 대놓고 편애를 받은 것은 물론이었다.

필립은 세이먼에 대한 기대를 더욱 심어 주기 위해, 어린 세이먼의 앞에서 마찬가지로 어린 다른 형과 누나들을 더욱 매몰차게 혼을 내곤 했다.

언제 한번은, 아버지에게 검을 휘두르는 연습을 하라는 명령을 받은 둘째 누나가 세이먼에게 주눅이 들어 집중을 제대로 하지 못하자 그녀를 데리고 와서 거칠게 회초리를 때렸다.

종아리 살이 찢어져 피가 줄줄 흐를 때까지 혼찌검을 냈고, 필립은 세이먼을 데려와 그 모습을 똑똑히 지켜보도록 했다.

재능이 없는 자는, 죽어라 연습하지 않는 자는 이렇게 된다는 것을 손수 보여 준 것이다.

그것이 세이먼에게는 엄청난 충격이었다.

그는 울음을 터뜨리며 회초리를 들고 있는 아버지에게 달려가 그를 막았지만, 아버지는 오히려 세이먼을 내동댕이칠 뿐이었다.

“못난 녀석. 그렇게 마음이 약해서야 검을 익힐 수 있겠느냐? 검술의 길이란 아주 험난하고 거친 길이다! 네까짓 놈처럼 약하디약한 심성으로는 최고가 될 수 없단 말이다!”

그는 아직도 기억한다. 그렇게 말하는 아버지 앞에서 시뻘건 얼굴을 한 채 눈물을 참던 누나의 모습을.

그 이후로 가장 친했던 둘째 누나는 자신에게 말을 걸지 않았고, 곧 다른 형제자매들도 마찬가지였다.

“누나! 이것 좀 봐 봐.”

“…….”

그렇게, 세이먼은 고립되어 갔다.

하루하루 거칠어지는 필립이 만든 교육 방식의 끝자락을 힘겹게 따라가며, 그의 기대에 부응했다.

자신이 열심히 하면, 아버지의 기대를 충족하면, 다른 형과 누나들은 건들지 않을 거고, 그럼 전처럼 친하게 지낼 수 있을 거라는 믿음 때문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첫째 누나가 유독 아버지에게 힐난을 받던 날이었다.

“그런 실력으로는 어디 가서 비젠티아 학장의 자식이라고 말도 하고 다니지 말거라!”

빼꼼 열린 문으로 세이먼은 그 모습을 지켜보았다.

고작 다섯 살밖에 되지 않았던 세이먼은 손톱을 물어뜯으며 덜덜 떨었고, 그 순간,

“……!”

아버지에게 얻어맞고 있던 누나와, 자신의 눈이 마주쳤다.

그녀는 자신이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다는 것을 알았던 것이다.

“헙!”

세이먼은 빠르게 벽 뒤로 숨으며 인기척을 감추었지만 그녀는 이미 자신을 본 것 같았다.

이미 열 살이 훌쩍 넘은 그녀는 자신을 볼 때마다 심하게 인상을 구기곤 했다.

그리고 그 방에서 누나가 나올 때였다.

세이먼은 잔뜩 물어뜯어 엉망이 된 손톱을 만지작거리며 누나에게 말을 걸었다.

“누나, 괜찮아……?”

“…세이먼.”

“응.”

“나는 네가 죽도록 싫어.”

“……!”

“너만 태어나지 않았더라면, 이런 일은 없었을 텐데. 네까짓 게 왜 태어나서는.”

“그게, 그게 무슨…….”

“없어졌으면 좋겠어. 네가.”

그녀의 화살은 온전히 세이먼을 향하고 있었다.

자신에게 말을 걸진 않더라도, 자신의 말은 무시하더라도 내 편일 것이라 생각했던 형과 누나들은 온전히 자신을 적대적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

아무 말도 하지 못하던 세이먼의 손톱은 끝이 떨어져, 피가 흘렀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였다.

첫째 누나가 아버지에게 얻어맞은 뒤로, 시름시름 앓기 시작했다.

심하게 몸을 떨며, 열이 오르락내리락하던 누나의 얼굴은 하얗게 질려 있었다.

어린 세이먼은 누나의 방조차 들어가지 못하고, 문밖에서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자신을 미워하니까. 모든 것이 자신의 잘못인 것 같으니까.

병의 원인은 알 수 없었다. 의원조차 병명을 알 수 없다고 했고, 제대로 된 약조차 처방해 줄 수 없었다.

그리고 누나는 열흘을 버티지 못하고, 죽어 버렸다.

누군가의 죽음을 코앞에서 목격한 세이먼은 마음에 금이 가는 것을 느꼈다.

“으어어……. 허억…….”

그는 방 안에 틀어박혀 며칠이고 눈물을 흘렸다.

균열이 생긴 마음은 산산이 부서져 내렸고, 그렇게 그는 마음이란 것을 닫아 버렸다.

그 이후로도 줄곧 이어진 아버지의 학대와 기대를 부응하기 위한 자신의 노력, 그것들 전부가 너무나도 토악질 나오게 느껴지기 시작했다.

무너뜨리고 싶은 것을 무너뜨릴 수 없다는 것이 자신을 너무나도 절망하게 했다.

세이먼은 머리가 커 가면서, 다짐을 했다.

언젠가 때가 되면, 이 모든 것의 원인인 아버지를 꺾을 것이라고.

아버지의 모든 것을 산산조각 내어 버릴 것이라고.

그리고 드디어, 때가 왔다.

십 년을 넘게 기다려 왔던 순간이다.

아버지의 전부를 쌓아 올린 아카데미가 무너진다면 아버지는 어떤 표정을 지을까.

회초리를 맞던 둘째 누나와 같은 얼굴을 할까. 아니면 그녀를 지켜보며 덜덜 떨던 자신과 같은 얼굴을 할까.

궁금했다.

지금쯤 누군가에게 쫓기듯이 바쁘게 상황을 정리하고자 온갖 애를 쓰고 있을 아버지를 생각하니 절로 입꼬리가 올라갔다.

“하, 하하…….”

마물들이 쏟아지기 시작하던 때에, 그는 새어 나오는 웃음을 참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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