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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섯명은 너무 많잖아요 (92)화 (92/156)
  • 91화. 토너먼트전(2)

    나는 정신을 똑바로 차리기 위해 눈을 부릅떴다.

    왼손에서 피를 뚝뚝 흘린 채 내 앞에 서 있는 그를 보자니 내가 다 미쳐 버리는 것 같았다.

    세이먼의 정신 나간 소리를 들어줄 의향 따윈 없었다.

    내가 뭐라고 하든 그는 자기 좋을 대로만 들을 테니까.

    이런 상황에서 내가 할 수 있는 건 하나뿐이다.

    “세이먼, 이상한 소리하지 말고 경기나 끝내죠!”

    소리친 내가 그를 향해 칼을 휘둘렀다.

    그는 공격을 막으며 계속해서 뒷걸음질을 쳤다.

    세이먼이 계속해서 뒷걸음질을 친 탓에 어느새 우리는 경기 구역 라인 근처까지 와 있었다.

    하얀색으로 그어진 라인이 눈에 들어왔다.

    그런데, 계속해서 이어지는 내 공격을 막던 세이먼이 갑자기 몸의 움직임을 바꾸었다.

    “항상 뒤를 조심해야 한다고요, 루나.”

    허리를 깊게 숙여 순식간에 내 뒤로 몸을 움직인 그가 나를 라인 바깥을 향해 밀었다.

    “젠장!”

    내가 필사적으로 힘을 주어 가까스로 라인을 밟지 않은 채 아슬아슬하게 몸을 멈추었다.

    “처음부터 이럴 작정이었던 거죠?”

    “이제 알았어요?”

    나를 공격하지 않고 이길 수 있는 다른 방법.

    그건 바로 나를 장외로 내보내서 실격시키는 방법이었다.

    하지만 그렇게 쉽게 당할 생각은 없다!

    “불꽃 칼날!”

    칼날로 변한 샐러맨더가 세이먼의 목덜미를 향했고, 세이먼은 나를 밀던 손을 놓을 수밖에 없었다.

    그 틈을 타 다시금 경기 구역 안으로 깊숙이 들어온 나는 비로소 안심할 수 있었다.

    정신없이 이어지는 싸움에 숨을 고르는 사이 샐러맨더와 카사는 세이먼과 싸우고 있었다.

    “채찍.”

    채찍을 꺼내 정령들을 향해 때리자 그들이 더 붉게 불타오르며 세이먼을 더 위협적으로 공격했다.

    세이먼은 나를 공격하지 않겠다고 했지, 정령을 공격하지 않겠다고는 하지 않았다.

    그는 아까의 공격처럼 초승달 모양의 일격을 샐러맨더와 카사를 향해 날렸다.

    하지만 이번엔 샐러맨더와 카사가 더 빨랐다. 정령술의 레벨을 중급에 가깝게 올린 보람이 있었다.

    잽싸게 피한 정령들이 세이먼이 붙잡을 수 없는 공중으로 올라가 그에게 화염 공격을 퍼부었다.

    세이먼은 가까스로 그들의 공격을 피했다.

    그런데 이상했다.

    “…크읏!”

    아까보다 세이먼이 훨씬 지친 것 같았다.

    아니, 지쳤다기보다는 집중을 잘하지 못하는 것 같았다.

    벌써 집중력이 흩뜨려진 건가?

    그럴 리가 없을 텐데.

    세이먼은 계속해서 시선을 다른 곳으로 돌리다가, 급하게 샐러맨더와 카사를 막고 있었다.

    무슨 일인진 모르겠지만 이 틈이라면 세이먼에게 공격을 가할 수 있어.

    나는 곧장 세이먼에게 달려갔다.

    “붉은 낫.”

    붉게 피어오른 빛이 세이먼을 향해 날아갔고, 강한 바람이 일었다.

    먼지가 뿌옇게 올라오며 잠시 앞이 보이지 않았지만 금방 시야가 개었다.

    그런데 세이먼이 보이지 않았다. 그리고 동시에 땅이 쿠구궁, 하고 울리기 시작했다.

    뭐지?

    마치 지진이라도 난 것처럼 진동이 나며 움직이는 땅은 사람들을 놀라게 하기 충분했다.

    “진정하세요! 이곳은 안전합니다! 대결 중에 땅이 잠시 흔들린 것뿐일 겁니다.”

    사회자는 관중들을 향해 외쳤고, 나는 급하게 세이먼을 찾았다.

    양옆을 둘러보니 저쪽에서 세이먼이 무거운 표정으로 시선을 한 곳에 꽂고 있는 것이 보였다.

    그의 시선을 따라가 보니, 그곳은 바로 경기장 문이었다.

    남은 진동의 여파인 건지 땅이 작게 계속 울렸다.

    “설마 벌써 진행된 건가?”

    세이먼이 중얼거렸다.

    “세이먼, …무슨 일을 벌이려는 거죠?”

    내가 세이먼을 향해 외쳤다.

    그러자 세이먼이 날카로운 눈빛을 거두고는 나를 향해 부드러운 미소를 지었다.

    “미안해요, 루나.”

    “……?”

    그 말을 끝으로 세이먼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가 움직인 방향은 내 쪽도 아니었고, 정령들 근처도 아니었다.

    세이먼이 향한 곳은…….

    “루나가 이겼어요.”

    경기 구역 라인이었다.

    그는 자신의 발로 직접 라인 밖으로 나갔다. 한 치의 망설임 없이 발걸음을 옮기는 그의 모습은 더 이상 이 대결에 미련이 없는 사람 같았다.

    “……!”

    어이없는 마음에 벌린 입이 다물어지지 않았다.

    곧이어 사회자의 목소리가 나오기 시작했다.

    “자, 이게 무슨 일이죠? 세이먼 유리츠가 스스로 경기장 밖을 나가 버렸습니다! 여기까지 올라온 보람이 한순간에 사라져 버렸는데요! 과연 이유가 뭘까요? 이번 경기는 허무하게도 정령술과 1학년인 루이아나 윌리어스가 승리하게 되었습니다! 전혀 예상하지 못한 결과인데요…….”

    그리고 세이먼은 사회자를 향해 가볍게 인사를 한 뒤, 바로 경기장 문을 향해 뛰어갔다.

    밖에 급한 일이라도 있는 사람처럼 말이다.

    * * *

    세이먼은 급하게 경기장 밖으로 뛰쳐나갔다.

    그가 스스로 기권을 하고 경기장을 나가자 관객들은 크게 술렁였지만 그는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그의 예감이 좋지 않았기 때문이다.

    무언가 일이 잘못되어 가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는 일주일 전, 한 사람을 만났다.

    “일은 어떻게 진행되어 가고 있죠?”

    그가 만난 사람은, 다름 아닌 1학년 F반의 담임이었던 코발트였다.

    “전혀 문제없어. 2차 토너먼트가 진행되고, 가장 열기가 뜨거울 시간대인 다섯 시에 터뜨릴 거야.”

    “여섯 개의 마법진은 전부 다 준비되었겠죠?”

    “물론이지. 계획대로 완성되어 가고 있어. 그나저나, 세이먼 너는 후회하지 않겠나? 아버지의 학교인데.”

    세이먼은 단호한 얼굴로 대답했다.

    “여러 번 말씀드렸다시피 상관없습니다. 이건 제가 오랫동안 원해 왔던 일입니다. 제 인생에 있어서 이뤄야 할 가장 큰 숙원이었으니까요. 그러니 그 건에 대해서 다시는 언급하지 말아 주셨으면 좋겠군요.”

    “예민하긴. 나도 알아. 네가 우리의 사상을 지지하지 않고 있다는 것은. 그저 목적이 같기 때문에 잠시 발을 담근 것일 뿐이잖아. 이 아카데미를 부수기 위해.”

    코발트는 여유로운 목소리로 대꾸했다.

    “…맞습니다. 저는 이 아카데미만 무너뜨릴 수 있다면 그 어떤 것도 개의치 않아 할 겁니다.”

    “잔인한 녀석.”

    그들은 대화를 하며 학생회실 안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코발트는 자연스럽게 학생회실 바닥에 있는 카펫을 걷었다.

    그러자 나온 것은 바로 작은 철문이었다.

    “들어가지.”

    문을 열자 끼익- 소리가 났고, 그들은 천장으로 이어진 계단을 통해 지하실로 들어갔다.

    “다들 모여 계셨군요.”

    지하실에는 약 스무 명 정도의 사람들이 있었다.

    지하실 곳곳에는 마물의 형상을 담은 조각상들과, 알 수 없는 글자가 써진 종이들이 마구 붙어 있었다.

    눈빛에 초점이 없는 그들은 학교를 배신한 변절자이자, 마물을 숭배하는 집단인 ‘케이오스’의 일원들이었다.

    “아주 조심스럽고, 은밀하게 진행되어야 합니다. 지금 상황을 학장님이 눈치채지 않았다는 보장이 없습니다. 만약 눈치를 챘다면 증거를 찾기 위해 아직까지 움직이지 않은 것이겠죠. 학장님은 아마 램클리프 기사단에게 도움을 요청 했을 겁니다. 모든 일이 마무리되기 전까지, 그 누구도 꼬리를 잡혀선 안 됩니다.”

    세이먼은 마치 자신이 지도자라도 되는 것처럼 앞으로 나서며 이야기를 했다.

    “따라서 내일, 본거지를 옮길 겁니다. 비무 대회가 열릴 때 본관을 자주 드나드는 것은 의심을 살 수 있습니다. 본관 뒤쪽 편에 땅으로 이어지는 철문이 하나 있으니, 그쪽을 이용하시면 됩니다.”

    “예, 알겠습니다.”

    세이먼의 말에 모두들 고개를 숙이며 대답했다.

    말을 마친 세이먼은 눈을 흘기며 사람들이 하는 말을 가만히 들었다.

    “그분들이 우리 하늘에서 내려오시는 그때가, 새로운 세상이 열리는 시점이야.”

    반쯤 미친 듯한 얼굴로 상대방에게 설파를 하고 있는 사람은 ‘케이오스’에 들어온 지 얼마 되지 않은 사람이었다.

    신념이 저렇게 쉽게 바뀌다니, 우습지도 않군.

    자신은 이런 마물을 숭배하는 종교를 믿을 생각은 추호도 없다.

    단지, 그의 목표는 아버지의 모든 것인 학교를 부수는 것일 뿐.

    자신의 힘을 보태기 위해 잠시 ‘케이오스’와 한패를 먹은 것이다.

    그들에게 장소를 제공해 주기 위해 학생회실의 지하를 내주었고, 아버지의 동향을 파악해 때때로 정보를 제공해 주는 일도 했다.

    지금까지는 별다른 문제가 없었다.

    아니, 아무 문제 없어야 했다.

    그런데, 경기장에서 개인전을 치르던 세이먼에게 불길한 예감이 찾아왔다.

    현재 시각은 한 시 반.

    예정되었던 ‘케이오스’의 작전 시간보다 한참이 더 빠르다.

    지금이라면 아직 완벽하게 마법진이 활성화되지 않았을 텐데.

    그는 경기장에서 밖으로 이어지는 긴 복도를 지나 본관 뒤편으로 빠르게 뛰어갔다.

    “……!”

    도착한 그는 작게 인상을 썼다.

    철문 앞에 약간의 핏자국이 얼룩져 있었다.

    무슨 일이 생긴 게 분명하다.

    그렇기에 작전대로 이루어지지 않은 것이다.

    땅이 흔들린 것도, 예상보다 일찍 진행된 것이 분명해.

    그는 반쯤 열린 철문 안으로 빠르게 걸어 내려갔다.

    하지만 그곳 안에는 아무도 없었고, 세이먼은 다시 나와, 여섯 개의 마법진이 있는 장소를 향해 달렸다.

    * * *

    “세이먼!!”

    나는 문밖으로 나간 세이먼을 따라서 나갈 생각이었다.

    그런데 누군가가 내 앞을 막았다.

    “2회전 진출자는 이쪽으로 오십시오. 경기장을 이탈하시면 안 됩니다.”

    시합을 관리하는 램클리프 기사단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나를 대기실로 이끌었고, 나는 꼼짝 없이 그 안에 갇혀 있을 수밖에 없었다.

    나는 이상하게 초조한 마음에 손톱을 깨물었다.

    “아! 샐라임, 아까 뭐라고 했죠?”

    “이상한 마력의 기운이 느껴진다고 했어. 아주 어둡고, 강력해. 이런 느낌은 흑마법을 쓸 때나 나오는 기운인데…….”

    샐라임의 말에, 내 머릿속을 어떤 생각이 탁, 치고 지나갔다.

    어쩌면… 내가 생각하는 그것과 연관이 있는 건가?

    나와의 경기에서 집중을 하지 못하는 세이먼의 모습과, 의미심장한 말, 그리고 스스로 기권패를 한 채 급하게 밖으로 나가는 모습까지.

    “정말로 세이먼이 변절자가 맞았단 말이야?”

    학장과 거래를 하려고 찍은 거였는데 진짜였다니!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였다. 아까와 같은 지진이 또 일어나기 시작했다.

    쿠구궁!

    대기실이 격하게 흔들렸고, 테이블 위에 있던 물건들이 전부 떨어졌다.

    “얼마나 격하게 싸우고 있는 거야?”

    “나처럼 빨리 끝낼 것이지. 기다리기 지루하게.”

    다른 학생들이 중얼거렸다.

    그저 대결하면서 영향을 받아 움직이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나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피, 피해야 해요.”

    감이 좋지 않았다.

    나는 답답한 마음에 대기실 밖을 나가려고 했지만 자리에 앉아 있으라는 말을 들을 뿐이었다.

    나는 그 말을 무시하며 소리쳤다.

    “당장 여기서 나가야 해요! 학생들을 대피시켜야 한다고요!”

    그리고 그때, 바닥을 울리는 진동이 벽을 타고 천장으로 이어지기 시작했다.

    콰과광!

    이제는 대기실 전체가 태풍 속에라도 들어온 것처럼 마구 흔들리기 시작했다.

    이상한 기운이 우리를 감쌌고, 동시에 촛대에 붙은 불꽃이 꺼져 버렸다.

    문을 막고 있던 사람들도 이상함을 느꼈는지 통신구를 꺼내 연락을 취하기 시작했다.

    쾅!

    하지만 이미 늦은 것 같았다.

    거센 진동에 천장이 부서져 내렸고, 그 위로 회색빛 하늘이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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