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0화. 토너먼트전(1)
세이먼은 나를 보며 미소를 짓고 있었다.
들꽃처럼 싱그럽지만 한편으론 어딘가 서늘함을 가지고 있는 얼굴.
그 위에 올려진 미소는 세이먼의 음험함을 보여 주기 충분했다.
“그럼요. 토너먼트전에서 만나자고 약속했잖아요.”
나 또한 자신감 넘치는 얼굴로 대답하자 세이먼이 예쁜 미소로 응답했다.
“미리 말해 두죠.”
그의 목소리는 사근사근했다. 나는 그가 무슨 말을 하려는지 궁금해 귀를 기울였다.
“저는 공격은 하지 않을 거예요.”
“그게 무슨 말이죠? 공격을 하지 않겠다니.”
“말 그대로예요.”
“분명 서로 봐주지 않겠다고 약속했을 텐데요.”
내가 인상을 찌푸리며 묻자 세이먼은 잠시 놀란 것 같았다.
“봐주는 게 아니에요.”
“그럼 뭐죠? 일대일 대결에서 공격을 하지 않겠다니.”
그의 말에 자존심이 상했다.
나를 약하게 보는 거야 뭐야. 져 주겠다는 것도 아니고.
“저는 루나가 다치는 게 싫어요. 죽어도 안 다치게 할 거예요.”
“…….”
진지한 그의 목소리에 나는 할 말을 잃었다.
내가 다치는 게 싫어서 공격을 하지 않는다고? 그러면 대체 어떻게 나를 이기겠다는 거지?
“세이먼, 대결을 이기는 방법은 하나가 더 있죠.”
그는 나에게 져 주겠다는 건 아닌 것 같았다. 나는 그의 말에 하나의 제안을 제시했다.
“우리 내기할까요?”
“무슨 내기를 말하는 거죠?”
“간단하게, 지는 사람이 소원을 들어주는 거로요. 그래야 서로 봐주는 게 없을 테니까.”
나는 이 싸움에서 무슨 짓을 해서라도 이길 것이고, 위로 올라갈 것이다.
그 과정에서 세이먼의 소원권까지 따내면 일석이조다. 호감도가 치솟는 상황이라든가, 나에게 집착을 퍼붓는 상황에서 그를 제지할 수 있는 권한이 생기니까.
“제가 루나한테 무슨 짓을 시킬 줄 알고요?”
“벌써부터 이긴 것처럼 말씀하시네요?”
“하하, 좋아요. 내기하죠. 재미있네요.”
세이먼은 꽤 승부욕이 있는 타입이었지.
그는 이어서 말했다.
“오늘 재미있을 거예요.”
흔쾌히 내 제안을 받아들이는 그의 모습에 나는 더욱 긴장이 올라오는 느낌을 받았다.
저 남자는 자신감으로 똘똘 뭉쳐져 있는 것 같았고, 자신이 질 것이라는 생각은 전혀 하지 않는 것만 같았다.
그리고 그때 안내 방송이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곧이어 비무 대회 본선 2차 개인 토너먼트전이 시작됩니다. 16강전 A조의 경기부터 시작하겠습니다.”
“…….”
나와 세이먼 사이에는 정적이 흘렀다. 우리 사이를 낭랑한 안내 방송 음성만이 채울 뿐이었다.
“참가자는 검법과 3학년인 세이먼 유리츠와 정령술과 1학년인 루이아나 윌리어스입니다. 해당 학생들은 경기장 앞쪽으로 나와 주시기 바랍니다.”
나는 심호흡을 크게 들이쉰 채, 발걸음을 옮겼다.
* * *
학교는 비무 대회가 한창이었기에 어수선하기 짝이 없었다.
이 틈을 타 아카데미 귀족 학생들의 사물함을 터는 도둑들도 있었고, 선생님의 눈을 피해 학생들 간의 싸움이 일어나는 일도 비일비재했다.
그런 일을 막기 위해 학교 내부를 순찰하라고 명령 받은 기사 그레이브는 이곳저곳을 돌아다니고 있었다.
그레이브뿐만 아니라 서너 명 정도 되는 기사들이 학교 내부와 외부를 꼼꼼히 순찰했다.
그러던 중 그레이브가 무언가 이상함을 감지했다.
본관 뒤편, 땅에는 네모난 철문 하나가 붙어 있었는데, 그 문은 아무도 쓰지 않아서 녹이 슨 지 오래인 것 같았다.
그런데 그 철문 앞에서 어떤 학생 하나가 서성거리고 있었다.
“학생, 지금 여기서 뭐 하는 거지?”
그레이브가 묻자 학생이 눈에 띄게 깜짝 놀랐다.
그레이브는 그런 학생의 모습에 더욱 이상한 낌새를 느꼈다.
“아, 아무것도 아닙니다. 그냥 잠시 밖에 나와 있던 거예요.”
“그런데 이 문은 뭡니까?”
“그냥 저희 동아리가 활동하는 곳이에요.”
“무슨 동아리가 지하에 본부를 둡니까? 게다가 비무 대회 때는 모든 동아리 활동이 중단되었다고 들었습니다만.”
“그게… 잠깐 모인 것뿐이에요. 아무것도 아니라고요.”
학생은 안절부절못하며 그레이브의 눈을 마주치지 못하고 있었고, 무언가가 찔리는 사람처럼 굴고 있었다.
그레이브는 무슨 일이 벌어진 게 아니기 때문에 그냥 지나치려 했지만 계속 이상한 기분이 들어 학생에게 다시금 정중하게 물었다.
“내부를 확인해 봐도 되겠습니까?”
“네?! 네?!”
말을 더듬는 것이 너무나도 수상해 보였다.
‘나 이상한 사람이니 여기 좀 수색해 주세요.’라고 말하는 것 같은 행동이란 말이다.
그레이브가 학생을 지나쳐 철문을 열기 위해 문으로 다가가자 학생이 급하게 그의 몸짓을 막았다.
“학생회장님의 허락도 받았고, 정식으로 허가된 동아리예요. 이렇게 무단으로 침입하는 건 아닌 것 같습니다.”
학생은 그레이브를 노려보며 똑바로 말했다.
“학생회장의 허락을 받았다는 말씀이십니까?”
“그렇다니까요!”
이쯤에서 그레이브가 물러날 줄 알았던 학생은 얼굴이 하얗게 질릴 수밖에 없었다.
“그래도 수색을 해 봐야겠습니다. 저는 램클리프 소속 1사단 기사로서, 수상한 곳을 탐색할 권한이 있습니다.”
“아니 진짜……!”
학생은 도저히 안 되겠다는 생각을 했는지 작게 욕지거리를 내뱉었다
그러고는 갑자기 철문으로 다가가 발로 철문을 꽝꽝꽝! 하고 세 번 찼다.
그 모습에 그레이브는 무시무시한 얼굴을 하며 학생에게 다가갔다.
“더 이상 방해하면 문제가 커질 겁니다.”
그때였다.
학생이 그레이브를 향해 지팡이를 겨눴다.
“……!”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었고, 일개 학생이 기사인 자신에게 무기를 휘두른다는 것은 상상할 수도 없는 일인지라 그레이브는 적잖이 당황했다.
“당장 내려놓으십시오.”
하지만 학생의 눈빛은 점점 더 이상해져만 갔다.
“어차피 다 끝났어. 오늘로써 다 끝이라고!”
알 수 없는 말을 지껄이는 학생을 앞에 두고 그레이브는 칼을 뽑기 위해 허리춤에 손을 갖다 대었다.
피융!
지팡이에서 위협적인 빛이 쏘아짐과 동시에 그레이브가 칼을 뽑았다.
* * *
“1회전 상대 학생들은 서로를 마주 보고 인사를 나누시길 바랍니다.”
원형으로 이루어진 경기 구역 중앙에서 나와 세이먼은 서로를 보고 서 있었다.
직사각형 모양의 경기장 테두리에는 빽빽하게 앉은 관객들이 우리를 실시간으로 직관하고 있었다.
게다가 첫 출전자가 학생회장이자 수석을 유지하던 세이먼인지라, 사람들은 기대로 가득 차 있는 것 같았다.
“와아아아!!”
우리가 인사를 나누자 관객들의 함성이 경기장 내부를 메웠다.
“자, 드디어 막이 열린 16강의 첫 경기는 작년 준우승자 세이먼 유리츠가 장식해 주었는데요, 올해도 강력한 우승 후보죠! 아, 루이아나 윌리어스 학생은 안타깝습니다! 1회전 상대를 아주 잘못 만났군요. 하지만 혹시 모릅니다! 아무도 실력을 모르는 1학년의 저력을 보여 줄지요!”
이번엔 사회자가 있었고, 옆에서 신명나게 우리를 가지고 떠들기 시작했다.
“고작 저런 것 때문에 정신이 흩뜨려지는 건 아니겠죠, 루나?”
그때 세이먼이 낮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여전히 얼굴에 미소를 띠운 채였다.
나를 가소롭게 생각하는 것이 너무 잘 느껴졌다.
“물론이죠. 세이먼이야말로 부담되어서 실력 발휘나 잘할지 모르겠는걸요.”
“하하, 루나가 걱정해 주니 몸 둘 바를 모르겠네요.”
그리고 그때, 사회자의 목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자, 카운트다운 시작하겠습니다! 5, 4, 3, 2, 1! 시작!”
사회자의 카운트다운이 끝나자마자 우리는 멀리 거리를 벌렸다.
관중들이 우릴 보고 있는 경기장은 천장이 막혀 있는 거대한 직사각형 공간이었고, 대결이 이루어지는 경기 구역은 경기장 한가운데에 커다란 원이 그려진 곳이었다.
“두 명 중 한 명이 전투 불능이 되거나, 장외로 실격이 되는 경우에 싸움이 종료됩니다.”
세이먼은 근접전에 강하다.
검을 쓰는 만큼 나에게 가까이 오게 해선 안 돼. 아무리 베탄에게 검술을 배웠다고 한들 어렸을 때부터 수련한 세이먼에게는 전혀 상대도 되지 않을 거야. 최대한 정령을 이용해서 원거리로 공격을 해야 해.
“샐러맨더, 카사.”
정령을 소환한 나는 그들을 향해 명령했다.
샐러맨더는 금세 불꽃 칼날로 변했고, 카사는 곧장 세이먼에게로 달려가 화염 공격을 하기 시작했다.
그때였다.
세이먼이 말도 안 되는 속도로 나에게 접근했다.
본선 1차 팀전에서 만난 주황 머리보다 세 배는 더 빠른 것 같았다.
“항상 뒤를 조심해야죠, 루나.”
순식간에 내 뒤로 다가온 세이먼에 내가 곧바로 몸을 돌려 그에게 칼을 겨누었다.
캉!
그러자 세이먼이 롱 소드로 내 공격을 막았다.
내가 그를 향해 무차별적인 공격을 퍼부어댔고, 세이먼은 전혀 통하지 않는다는 듯 여유롭게 막아낼 뿐이었다.
캉! 캉! 캉! 캉!
새하얀 검신 두 개가 거세게 맞부딪치자 불꽃이라도 이는 듯한 환영이 보였다.
세이먼은 마치 나의 다음 공격을 다 알고 있다는 듯 움직였다.
나는 단 한 번의 틈을 노린다는 듯이, 두 눈을 부릅뜨고 그를 공격했다.
한 번의 공격만 허용하면 된다.
본선 2차 개인 토너먼트는 1차 팀전과 다르게 부상의 위험을 떠안아야 하는 게임이었다.
1차 팀전에서는 단지 이름표를 떼는 게임이었지만 2차 토너먼트전은 한 명을 굴복시킬 때까지 게임이 이어지기 때문이다.
“오, 공격 패턴이 좋은데요?”
“다 알고 있으면서 모르는 척하지 마요.”
이미 내 수를 다 읽고 있는 것 같은 세이먼에게 톡 쏘아붙였다.
그는 내 공격에 뒷걸음질을 치며 무어라 중얼거렸다.
나는 공격에 정신이 팔려 그의 목소리를 듣지 못했다.
“허억……!”
계속되는 공격에 내가 숨을 세게 몰아 쉬자 잠시 세이먼이 멈칫, 하는 것이 느껴졌다.
나는 그 틈을 타 바로 뒤쪽으로 거리를 벌렸다.
동시에 샐러맨더와 카사에게 명령했다.
“공격해!”
재빠르게 날아간 샐러맨더와 카사는 세이먼의 몸 위에서 시뻘건 화염을 쏟아 내기 시작했다.
하지만 세이먼은 민첩성 또한 탁월했다.
느린 속도의 화염 공격을 피하는 것이란 세이먼에겐 식은 죽 먹기 같았다.
세이먼은 화염을 피하며 양손으로 롱 소드의 손잡이를 꽉 쥐었다.
그러고는 샐러맨더와 카사를 향해 가로로 참격을 날렸다.
오러가 담긴 초승달 모양의 일격이 샐러맨더와 카사를 향해 날아갔고, 샐러맨더와 카사는 빠른 속도의 일격에 어쩔 수 없이 그 공격을 맞고야 말았다.
하지만 아직까지는 괜찮은 건지, 그들은 정령계로 돌아가지 않고 그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좋았어! 연계 공격으로 가자.”
샐러맨더와 카사가 화염 공격으로 그의 집중력을 분산시킬 때 근접전으로 가서 그의 목을 노리는 거다.
나는 빠르게 세이먼에게로 돌진했다.
그런데 그때, 오른손에 쥐고 있던 칼에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루나, 이상한 기운의 마력이 감지된다. 아주 어둡고 강력한 기운이야.”
마력의 기운?
세이먼과 싸우느라 그런 건 전혀 느끼지 못하고 있었다.
그리고 지금도, 샐라임에게 대답할 시간 따위 없었다.
금세 나를 위해 친히 마중을 나와 주신 세이먼께서 순식간에 검을 내 허리춤에 가져다 댔고, 다른 한쪽 손으로 나의 칼을 잡았다.
“……!”
그것도, 맨손으로 말이다.
숏 소드를 맨손으로 잡자 칼날이 세이먼의 살을 파고들며 피가 뚝뚝 흐르기 시작했다.
“지금 뭐 하는……!”
나는 세이먼이 더 심하게 다칠까 봐 움직이지도 못하고 가만히 얼어붙어 있었다. 그러자 세이먼은 이깟 피가 뭐가 중요하냐는 듯한 표정으로 내 귓가에 속삭였다.
“정말 이 칼로 나를 어떻게 하려 했어요?”
나는 그 말에 할 말을 잃었다.
“여기까지 와서 이게 무슨 말이에요.”
“나를 해치기라도 하려 했냐고요. 그건 절대 못 참는데. 새가 주인을 물면 되나요, 그쵸?”
그의 왼손에선 여전히 새빨간 선혈이 그의 팔목을 타고 흐르고 있었다.
“…….”
“이것 봐요. 당신이 휘두른 칼 때문에 내 손이 이렇게 다쳤잖아. 난 당신을 위해 내가 짜 둔 계획까지 바꿨는데.”
그는 고저 없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심상치 않은 분위기에, 나는 갑자기 세이먼이 공격이라도 할 것 같은 걱정이 들어 그의 검을 슬며시 아래로 내려다봤다.
“……!”
그런데 나를 향한 세이먼의 칼날이 사실은 칼등이었다는 것을 알았다.
지금까지 칼날을 반대로 한 채 나와 싸웠던 건가?
진짜로 나를 해치고 싶지 않아서?
대체 이 남자가 무슨 생각을, 어디까지 하고 있는 건지 가늠이 되지 않았다.
“우와, 이 정도면 당분간 왼손은 못 쓰겠는걸요. 검사한테 손은 생명인데.”
“미친, 진짜 대체 무슨 말을 하는 거예요!”
자기가 먼저 맨손으로 칼을 잡아 놓고 나를 가르치려 들다니.
듣다 못한 내가 소리치자 그가 칼에서 손을 뗐다.
찢어진 부위를 지혈하기 위해 그가 주먹을 꽉 쥐었다.
아픔도 느끼지 않는 건지, 표정엔 전혀 변화가 없었다.
그리고 세이먼은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하지만 괜찮아요. 나는 이해심이 넓은 주인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