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8화. 히드라의 언덕(3)
히드라에게 달려가며 생각했다.
이건 진짜 죽으면 베탄 잘못이다.
왜냐고?
내 집중력을 모두 흩뜨려 놓았으니까!
하루 못 봤다고 갑자기 저렇게 오른 호감도는 뭐야?
게다가 날카로운 눈빛을 하면서 왜 호감도가 오르는 건데?
그리고 내가 절대 죽을 일이 없다는 건 어떻게 장담하는 건데?
젠장, 다른 생각하지 말자. 일단 히드라에게 집중하는 거야.
“쉬이익!”
생명체가 달려오는 걸 눈치챈 히드라가 내 쪽을 바라보며 혀를 내둘렀다.
크고 날카로운 송곳니 두 개가 번쩍였고, 초록색 액체가 입 안에 고여 있었다.
저 독을 맞으면 끝장이라는 거지?
나는 검을 손에 꽉 쥔 채 히드라의 몸을 찬찬히 머릿속에 넣었다.
어디부터 공략해야 할까? 가장 빠르게 처치할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일까?
“쉬익! 쉬익!”
히드라는 자신에게 다가오지 못하게 하려고 마구 머리를 흔들어 댔다.
총 세 개의 머리가 엉킬 듯이 마구 움직이는 모습은 게임에서 보던 것과 아주 흡사했다.
실제로 내가 마주하고 있다는 것이 정말 소름 돋는 사실이지만.
나는 숏 소드를 꽉 쥐었다.
숏 소드의 단점은 검신의 길이가 짧아 상대적으로 괴물과 가까이 접근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찔러 베기’는 급소를 찌른 뒤 가로로 베어 내는 기술이었다.
따라서 검의 손잡이를 제외한 모든 검신이 히드라의 몸에 박혀야만 쓸 수 있는 기술이다.
즉, 히드라 몸의 재질이 어떤지에 따라 이 싸움이 수월해질지, 까다로워질지 달려 있었다.
겉으로 보기에는 아주 거친 표면을 가지고 있었다. 유연하게 움직이는 걸 보면 단면은 쉽게 베어질 것 같긴 했지만 검이 닿기 전까지는 모르는 일이었다.
미리 ‘몬스터 정보 확인’으로 목이 급소라는 것을 알아낸 나는 총 세 개의 목을 노리기 위해 접근했다.
“하앗!”
첫 번째 시도였다.
두 손으로 손잡이를 부여잡은 채 히드라의 목을 향해 칼끝을 꽂아 넣었다.
수욱-
생각보다 연한 육질에 검이 빨려 들어갈 듯이 박혔다.
그리고 바로 옆으로 베어 내면 된다. 지금까지 수없이 연습해 왔던 그 스킬. 자다가도 움직일 수 있을 정도로 몸에 배게 만든 동작이다.
서걱!
그리고 시원한 소리와 함께 히드라의 첫 번째 목이 날아갔다.
“이렇게 쉽,”
다고 말하기도 전에, 나는 떨어지는 목을 피해야만 했다.
베인 상태로 땅에 떨어진 목은 마구 꿈틀대며 계속해서 혀를 내둘렀고, 초록색 액체를 뿜어 댔다.
“빠르게 처리하지 않으면 다시 목이 생겨 버려……!”
서둘러 두 번째 목을 쫓을 차례였다.
뒤에서 베탄은 잘 쳐다보고 있겠지?
나는 심호흡을 하며 두 번째 목을 향해 달려갔다.
그런데 두 번째 목이 갑자기 움직임을 달리하기 시작했다.
세 번째 목과 서로가 꼬아지며 두 머리가 하나처럼 모인 것이다.
“저게 뭐야! 왜 저래!”
두 개의 목이 따로 움직이는 것이 불리하다고 생각한 건지, 하나로 합쳐진 상태로 탈바꿈했다.
두껍게 꼬아진 목과 끝에서 꿈틀대는 두 개의 머리. 형형한 노란색 눈동자를 빛내며 나를 쳐다보는 히드라는 정말이지 소름 돋았고, 징그럽기 짝이 없었다.
“오히려 좋아. 한 번에 자를 수 있잖아.”
그 말을 마지막으로 나는 꼬인 두 개의 목을 향해 뛰어올랐다.
그리고 칼을 찔러 넣으려고 했는데.
“……!”
아까와 육질이 달랐다.
두 개의 목이 꼬인 상태의 히드라는 하나의 목보다 훨씬 단단한 표면을 유지하고 있었다.
하지만 나에게 다른 방법은 없었다.
오직 ‘찔러 베기’만을 통해 처치해야 하는 것이니.
나는 다시금 칼끝에 정신을 집중하며 파워를 올리고자 힘썼다.
숙련도가 올라가면 위력이 더 세진다. 두꺼운 표면도 꿰뚫을 수 있다는 것이다.
나는 온몸의 마나를 칼로 모은 뒤 다시 한번 돌진했다.
“하앗-!”
푸슉!
그리고 칼을 박아 넣었다.
더욱 예리해진 칼끝은 거칠게 표면을 꿰뚫었고, 그것을 옆으로 찢을 일만 남은 상태였다.
“거의 다 됐어!”
그런데, 두 개로 합쳐진 히드라는 결코 만만한 상대가 아니었다.
목을 노리는 내 위치가 그들의 머리보다 낮게 있다는 걸 활용하여, 초록색 독을 뚝뚝 흘리기 시작한 것이다.
“루나!”
뒤에서 베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저도 안다고요!
나는 잽싸게 독을 피하며 몸을 움직였다.
그 때문에 칼은 아직 히드라에 박혀 있는 상태였고, 나는 칼을 놓은 채 뒤로 물러설 수밖에 없었다.
“마지막이야. 다시……!”
한 번 더 도약했다.
초록색 독이 다시 생성되기 전에, 그어 버리는 거다.
나는 정확하게 칼이 박혀 있는 곳으로 뛰어오른 뒤, 오른손으로 손잡이를 잡았다.
그리고 마저 왼손을 오른손 위에 올리며 옆으로 찢었다.
“캬악!”
베이는 것이 아니라 찢기듯이, 히드라의 합쳐진 두 개의 목이 날아갔다.
세 개의 목이 전부 제거되었으니 다시 생성될 일은 없을 터였다.
“하아…….”
땅에 착지하며 숨을 내쉬었다.
그리 어려운 싸움은 아니었다.
꾸준히 수련한 보람이 있었던 건지, 나의 ‘찔러 베기’는 스킬이라 부를 수 있을 만큼 숙련도가 높아져 있었다.
C등급의 몬스터를 그리 어렵지 않게 물리쳤다는 생각에 나는 뿌듯함이 느껴졌다.
그렇게 등을 돌리고 베탄이 있는 곳으로 돌아가려던 찰나.
베탄의 목소리가 들렸다.
“루나! 뒤에!”
그리고 나는 뒤를 돌아보지 못했다.
너무나도 빠른 속도로 옆에 있던 바위에 처박혔기 때문이다.
쾅!
“아악!”
온몸이 부서질 것 같은 감각에 나는 눈을 뜨며 뒤를 돌아보았다.
“저, 저게 뭐야…….”
내 눈이 터질 듯이 커졌다.
내 눈에 들어온 것은, 머리가 일곱 개가 달린 채 짙은 초록색에 검은 점박이까지 그려진 거대 히드라였다.
히드라는 하늘을 향해 일곱 개의 목을 마구 치솟아 올리며 포효하고 있었다.
내가 물리친 게 자식이었던 건가?
거대 히드라는 무려 A등급의 몬스터였다.
저것을 내가 이길 수 있을 리는 만무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거대 히드라의 두 개의 목이 나를 향해 휘익! 다가왔다.
“으악!”
몸을 굴려 간신히 히드라의 목에 감기는 것을 피할 수 있었다.
하지만 높은 바위에서 떨어지며 땅에 한 번 더 처박혀야 했다.
“츄웁…춥…츄…….”
그때, 거대 히드라가 이상한 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뭐, 뭐 하는 거지?
나는 정신없는 눈동자로 거대 히드라를 바라보았다.
그것은 잠시 공격을 멈춘 상태였고, 소리를 따라가니 가장 가운데에 있는 머리가 눈에 들어왔다.
가장 가운데에 있는 것의 입에서는 부글부글 무언가가 끓고 있었다.
“도, 독을 생성하는 건가?”
저 독을 맞는다면 정말 저세상 신세를 지게 될 건 분명했다.
“허, 헉…….”
그리고 우물거리며 독을 생성하던 머리는 엄청난 속도로 빠르게 나를 찾았다.
기다란 목이 나를 향해 날아왔고, 나는 순간적으로 머리가 새하얘지는 것을 느꼈다.
샐러맨더, 샐러맨더라도 불러야 해.
“샐, 샐러맨.”
하지만 엄청난 공포 앞에서 나는 얼어붙을 수밖에 없었다.
무려 A등급의 몬스터가 혀를 내두르며 나를 파괴하려 하고 있었다.
이어서 그 머리는 내 코앞에서 주둥이를 벌렸다. 초록색 독은 빠르게 날아왔다.
게다가 양이 아주 많았고, 피해 봤자 사정거리 안에 있어 저 독을 모조리 뒤집어쓸 수밖에 없을 것 같았다.
움직여! 움직이라고!
당장 점프라도 해서 어떻게든지 조금이라도 피해 보란 말이야!
나는 나를 향해 답답함을 토해 내며 몸을 움직이려고 했다.
그런데 얼어붙은 몸은 초록색 독을 바라보고 있기만 했다.
촤악!
그리고 그때.
“루나!”
흑발의 사내가 온몸을 던지며 나를 품 안에 가두었다.
몸집이 어찌나 큰지 나는 그의 가슴팍 안에 쏙 들어가고야 말았다.
나를 감싸 안긴 했지만, 땅을 구르자 절로 신음 소리가 나왔다. 하지만 그 소리는 베탄의 가슴 안에 묻혀 사라졌다.
콰당탕! 하는 소리와 함께 그는 나를 덮쳤고, 나는 곧이어 베탄의 넓은 등짝을 볼 수 있었다.
“미, 미친…….”
욕설이 나올 수밖에 없었다.
나는 정신이 나간 상태로 그를 끌어 안았다.
그의 등엔 초록색 독이 범벅되어 있었고, ‘치이익-’ 하는 소리와 함께 옷이 타들어 가고 있었다.
“선생님!!”
“움직이지 마. 묻으면 안 돼.”
하지만 그는 그런 와중에도 내가 조금이라도 독에 닿을까 봐 걱정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는 나를 들어 올려 뒤쪽에 물러나게끔 했다.
“선생님…….”
“당분간 독을 못 쓸 거야. 그 틈을 타 내가 제거할 테니, 여기 가만히 있어.”
“괘, 괜찮은 거예요? 네?”
“넌 안 죽으니까 걱정하지 마.”
그는 담담하게 말한 뒤 나를 뒤로한 채 검을 뽑아 들었다.
그러고는 진정한 전사의 모습을 한 채로 거대 히드라에게 돌진했다.
푸슉, 서걱!
그는 ‘찔러 베기’를 이용하지 않았다.
그의 주요 스킬인 것 같은 검술로 몇 번의 공격을 가했다.
“쉬이이익!”
거대 히드라는 네 개의 머리가 날아간 뒤, 뒤를 돌아 꽁무니가 빠지게 도망가기 시작했다.
적수가 안 된다고 생각한 모양이었다.
그리고 그 자리엔, 베탄이 남았다.
그는 땅바닥에 쓰러진 채로 숨을 헐떡이고 있었다.
“허, 허억! 베탄! 아니, 선생님!”
내가 급하게 달려가 그의 뒤통수를 손으로 받쳤다.
그의 등은 처참하게 망가지고 있었다.
이미 옷은 다 타들어 간 지 오래였고, 오러를 써서 몸의 순환이 더 빨라졌는지 살마저 독에 감염되어 두꺼운 핏줄이 벌겋게 올라오고 있었다.
히드라의 독은 자칫하면 목숨을 잃을 정도라고 했으니…….
“선생님! 죽지 마세요! 죽지 마……!”
베탄은 온갖 인상을 쓴 채 간신히 눈을 떴다.
움직일 수 있을지도 미지수였다.
게다가 이 히드라의 서식지에서 게이트까지 갈 방법이 전혀 생각나지 않았다.
당장이라도 빠르게 병원에 데려가서 치료를 받아야 했다.
그러지 않으면 정말, 정말로 목숨을 잃을 수 있었다.
그런데 그때, 잠자코 있던 칼에서 불쑥 목소리가 나왔다.
“저 녀석이 죽으면, 너한텐 좋은 일인 거 아냐?”
정신없는 와중이었기에 나는 몇 초 뒤에야 그것이 샐라임의 목소리라는 걸 알 수 있었다.
“네……?”
제대로 알아듣지 못한 내가 되묻자 그가 차가운 목소리로 대답했다.
“남자 주인공 하나가 없어지면 오히려 더 좋은 거 아니냐고. 저 녀석이랑 이어지면 흑마법사한테 죽는다고 하지 않았어? 그 운명에서 벗어날 수 있는 거잖아.”
“그치만 어떻게 그런……!”
냉정하게 주절거리는 샐라임의 모습에 말을 더 이을 수 없었다.
아마도 샐라임은 오직 내가 안전하길 바라는 마음에서 하는 말인 것 같았다.
그는 베탄과 아무런 접점도 없었고, 그를 걱정해야 할 이유가 전혀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나는 달랐다.
아무리 벗어나야 할 남주인공이라고 해도, 나를 위해 온몸을 던진 사람을 앞에 두고 어떻게 그런 잔인한 생각을 할 수 있겠는가.
게다가 자꾸만 베탄의 얼굴이 머릿속에서 아른거렸다.
혹여나 내가 위험한 일이 생겨도, 자신이 있으니 괜찮다고 말하던 그 모습이었다.
나는 머리를 도리도리 저었다.
정신 차려, 루나!
지금 당장은 어떻게든 베탄을 병원으로 데려가는 것이 목표다! 그전까지 정신을 잃으면 안 되는데……!
“선생님, 정신 좀 차려 봐요. 눈 좀 떠 봐요. 네?”
“…….”
내가 그의 뺨을 부여잡았다.
흙먼지로 엉망이 된 내 손 때문에 그의 얼굴이 금세 더러워졌다.
“죽지 마요, 진짜 이렇게 죽으면 내가 얼마나…….”
죄책감에 시달리며 평생을 살아야 할 것 같았다.
그런 사람이 아까는 베탄에게 내가 죽으면 베탄 책임이라고 했다니. 모순이었다.
“…아직 안 죽었어…….”
“…….”
“…루나.”
이제 루나라고 해도 전혀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을 테니까 절대 죽지 말라고요.
“병원에 가야 해요. 이렇게 뒀다간 얼마 안 가서 죽을 거라고요!”
“진정해, 루나.”
“네?! 지금 이 상황에 어떻게 진정을 하겠어요!”
속 편한 소리를 하고 있으니 내가 다 속이 터질 지경이었다.
베탄은 그 와중에도 희미하게 입꼬리를 올렸다.
“날 걱정해 주는 건…….”
“……?”
“…밖에 없네…….”
지금 뭐라는 거야 이 양반이!!
나는 그의 어깨를 붙잡고 흔들었다.
눈을 감으면 금세 죽어 버릴 것 같은 기분에 등골이 오싹해졌다.
망할 눈 좀 감지 말란 말이야! 시뻘건 눈 좀 보여 달라고!!
나는 떨리는 손으로 누워 있는 그의 어깨를 잡아 앉히고, 이어서 허리를 잡고 일으켜 세웠다.
“난 내 눈앞에서 나와 관계있는 사람이 죽는 거 보고 싶지 않아. 무조건 살릴 거야. 그러니까…….”
그때였다.
베탄이 갑자기 내 손을 찾았다.
내 손을 잡은 두껍고 긴 손가락이 내 손가락 하나하나를 간질이며 깍지를 꼈다.
나는 어처구니없는 상황에 혀를 내두르며 소리쳤다.
“지금 뭐 하는 거예요, 진짜!”
하지만 베탄은 아랑곳하지 않고 내 손을 꼭 쥔 채 그 손을 그대로 자신의 가슴 안쪽으로 가져다 댔다.
그러고는, 무슨 말을 하려는 것처럼 힘겹게 입을 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