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7화. 히드라의 언덕(2)
베탄의 낮은 음성이 내 귓가를 맴돌았다. 작게 떨리는 목소리는 그의 긴장 상태를 대변해 주고 있는 것 같았다.
“네가 어떻게…….”
그는 똑같은 말을 되풀이하고 있었다. 동시에 일그러진 그의 표정은 흔들림 없이 나를 쳐다보았다.
그 시선엔 대답을 하라는 무언의 압박이 포함되어 있었다.
이제는 베탄이 내 양팔을 덥석 잡았다.
“……!”
내가 작게 놀랐지만 그는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그러고는 추궁하기 시작했다.
“다시 말해 봐. 누구에게서 들은 거야? 무슨 뜻으로 한 말이지?”
자칫 말 한마디라도 잘못 뱉었다간 목이 날아갈 것처럼 살벌한 분위기가 풍겨져 나왔다.
나는 애써 표정을 풀며 억지웃음을 지은 뒤,
“유, 유명한 말 아닌가요? 어디서 본 글귀 같은데요?”
재빠르게 머리를 굴려 그에게 대답했다.
그에겐 엄청나게 충격적인 발언인 것 같은데, 나는 전혀 속사정을 모른다고!
“…글귀…라고?”
베탄이 미간을 잔뜩 찌푸리며 말했다.
거짓을 추궁하는 심판관처럼 그의 눈빛에서는 날카로움이 묻어져 나왔다.
“그럼요. 하하. 아마 어디서 유행한 말일걸요?”
내가 분위기를 수습하며 내뱉자 굳어 있던 그의 눈동자가 크게 흔들렸다.
본인도 혼란스러운 것 같았다.
표정을 숨기지 못한 채 감정을 그대로 드러내고 있는 얼굴은 평소의 베탄과는 백팔십도 달랐다.
“그게 무슨 소리야! 대체 그런 말이 어디서 유행한다고……!”
그가 언성을 높이며 나에게 소리쳤다. 하지만 본인도 절대 확신하지는 못하는 것 같았다.
“정말이에요. 책에서 봤단 말이에요. 책 안 읽으세요?”
“…….”
“나중에 책 찾으면 빌려드릴게요. 좀 읽으세요.”
내 말에 베탄이 입을 다물며 시선을 아래로 내렸다.
그러고는 꽉 잡고 있던 팔을 놔주었다. 세게 잡았던지라 팔뚝이 다 아팠다.
“…내가 잠시 착각했나 보군.”
베탄은 짧게 중얼거리며 몸을 돌렸다.
그의 넓은 등과 까만 뒤통수가 눈에 들어왔다.
나, 뭐 잘못한 걸까?
일단은 잘 넘겼다는 생각에 나는 속으로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요새 들어 정신이 나간 모양이야.”
그는 혼잣말을 하며 두 손으로 얼굴을 쓸어내렸다.
마른세수를 하는 그의 손등에는 굵은 핏줄이 도드라져 있었다.
“이만 가요.”
내 충격적인 발언에 발걸음을 멈췄던 우리 둘은 다시 걷기 시작했다.
왠지 모르게 아까보다 발걸음이 훨씬 무거워진 기분이었다.
그의 표정에는 근심과 걱정이 가득 담겨 있었고, 나는 그걸 굳이 깨뜨릴 생각이 없었다.
가만히 놔두는 게 제일 나을 것 같았다.
그런데…….
갑자기 내가 불편해져서 수련을 도와주지 않는다고 하면 어쩌지?
아니야. 설령 그런 일이 생기더라도 괜찮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껏 많이 배워 놨으니까.
단기간이었지만 베탄의 가르침 덕에 내 검술 실력은 일취월장으로 성장할 수 있었다.
배울 만큼 배웠으니 이제 와서 날 피한다고 해도 괜찮다 이거다!
너무 단물만 빼먹나 싶은 생각이 들긴 했지만 냉정하게 생각해 보면 전혀 아니었다. 나와 베탄은 철저히 계약 관계로 이루어진 사이였으니까.
처음엔 날 죽이고 감시하러 온 사람이었잖아. 맞아, 따지면 내 편은 아니야.
어느새 우리는 게이트에 도착했고, 금세 테일러 마을로 돌아올 수 있었다.
그리고 베탄과 헤어지기 전, 내가 입을 열었다.
항상 수련이 끝나고 헤어지기 전에 베탄이 내일은 어디서 어떻게 보자고 약속을 잡았는데, 오늘은 아무 말이 없었다.
그대로 집으로 가 버릴 것 같은 베탄의 모습에 결국 내가 먼저 물었다.
“오늘은 좀 일찍 끝난 것 같은데……. 내일도 똑같은 시간에 여기서 볼까요?”
그러자 그가 수심 가득한 얼굴로 나를 마주했다.
“…미안하지만 내일은 일이 있어서 곤란할 것 같군.”
그의 말에 나는 잠시 놀랐다.
베탄은 지금까지 하루도 빠짐없이 나의 수련을 도와줬었다. 비가 오든, 바람이 불든 매일같이 나를 불렀다.
별안간 일이 있다고 거절한 적도 전혀 없었는데…….
나는 온갖 생각이 다 들었다.
하긴, 베탄도 직업이 있는 사람이고, 사적인 볼일도 있을 수 있어. 설마 내 말 한마디가 이렇게 영향을 끼치진 않았을 거야.
하지만… 혹시 몰라. 기분이 엄청 나빴던 것 같기도 하니까…….
그렇다면.
“그럼 그다음 날은요?”
그러자 베탄이 갑자기 시선을 돌리며 내 눈을 피했다.
아주 찔리는 듯한 얼굴을 하는 것이, 수상하기 짝이 없어 보였다.
“그날도 일이 있어.”
뭐야, 진짜 피하는 거야?
“하지만 내일모레는 히드라를 잡기로 한 날인걸요.”
내 말에 베탄의 얼굴이 눈에 띄게 달라졌다. 잊고 있던 게 생각난 모양인가.
“…….”
“혼자 잡을까요? 선생님이 바쁘시면 어쩔 수 없.”
“아니.”
“?”
“될 것 같아. 시간을 내 볼 테니 같이 가지.”
말을 하는 베탄의 표정이 이상했다.
평소에 전혀 볼 수 없던 얼굴이어서 그런지 아주 이질감이 들었다.
설마 호감도가 5% 올라서 그런 건가?
“내일은 혼자 연습하도록 해. 그 정도는 할 수 있지?”
“네, 그럼요.”
내가 가뿐하게 대답하자 베탄이 알겠다며 고개를 작게 끄덕였다.
“안녕히 가세요.”
내가 인사를 하자 베탄은 말없이 뒤를 돌아 제 갈 길을 갔다.
베탄이 가고 나서야, 나는 드디어 긴장을 쫙 풀 수 있었다.
아까 부릅뜬 눈동자로 나를 쳐다볼 때는 정말이지 심장이 멎는 줄 알았다.
이 망할 시스템은 대체 나한테 무슨 말을 시킨 거야.
나를 곤경에 빠뜨린 시스템이 미워서 한 대 때리고 싶은 심정이었다.
나는 차근차근 상황을 정리했다.
‘유일하게 따뜻함을 느낄 수 있는 계절’이라는 말, 앞뒤 상황과, 예전에 베탄이 달콤하게 속삭이며 말한 ‘그렇게 바랐는데 이제야 왔네.’ 등 모두를 조합해 보면 단 하나의 답밖에 나오지 않았다.
“애인인가.”
이건 누가 봐도 헤어진 애인을 생각하는 것 같았다.
물론 아닐 수도 있지만 일단은 그럴 가능성이 크다는 거다.
“잠깐만, 그러면 지금 시스템은 나한테 애인이 했던 말을 시킨 거잖아.”
미친 거 아냐? 그리고 그 말에 베탄은 깜짝 놀라며 알 수 없는 표정을 지었었다.
아직도 그 연인을 잊지 못한 사람처럼 말이다.
그리고 그렇게 부동의 0%를 자랑하던 베탄의 호감도가 올랐다.
“젠장, 이건 그냥 시스템이 베탄의 호감도를 오르게 하려고 강제한 셈이잖아.”
제한 시간이 1분에 페널티가 무려 본선 2차 출전 불가였다.
“베탄의 호감도가 안 오르는 게 그렇게 답답하셨나? 오죽하면 그런 퀘스트까지 내리고?”
나는 나를 어딘가에서 보고 있을 시스템을 향해 중얼거렸다.
무언가 불안했다.
베탄의 호감도가 오른 것이, 이대로 끝나지 않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호감도 상승의 시작과도 같은 기분이 드는 건 착각이겠지……!
하아.
나는 한숨을 크게 내쉬었다.
이게 모두 다 시스템의 농간 탓이다.
요즘 들어 잠잠하다 싶었더니 이런 폭탄을 안겨 주다니!
그의 흔들리는 눈빛이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이 났다.
절망스러운 기분에 나는 아까의 베탄처럼 두 손으로 얼굴을 쓸어내렸다.
* * *
히드라를 잡기로 한 당일이 다가왔다.
어제 하루 종일 수련을 한 탓에 온몸이 쑤셔 왔다.
사실 수련을 시작하고 몸이 쑤시지 않은 날이 없긴 했다.
다섯 끼까지는 아니지만 잘 챙겨 먹으며 꾸준히 수련을 하니 어느 정도 근육이 붙고, 몸이 다부지게 된 것 같았다.
이 정도 속도면 전생의 몸이 되는 건 시간문제일 것 같은데?
“루나.”
그때 내 뒤에서 낯선 소리가 들려왔다.
아니, 낯선 소리는 아니었다. 그런데 무언가가 이상했다.
나는 분명 히드라의 언덕에 가기 위해 게이트 앞에서 기다리고 있었고, 곧 있으면 베탄이 나타날 예정이었다.
그러면 베탄이 나에게 말을 걸어야 하는 것이 정상인데,
“네…에……?”
내가 어정쩡한 얼굴로 뒤를 돌아보자 베탄이 나를 보며 서 있었다.
베탄이 맞긴 했다. 맞긴 한데…….
루나?!!
내가 입을 떡 벌렸다.
나를 언제부터 애칭으로 불렀다고 루나라고 하는 거야?!
항상 모래 사막마냥 건조하게 ‘루이아나.’라고 불렀던 것에 비하면 오늘은 아주 오아시스같이 촉촉한 음성이었다.
고작 두 글자였지만 그저께의 베탄처럼 충격을 먹은 나는 입을 다물 수가 없었다.
“뭐가… 문젠가?”
눈을 부릅뜬 내 표정에 베탄이 아무렇지 않게 대꾸했다.
“문제는 없는데요, 없는데.”
“그럼 잔말 말고 얼른 가지. 드디어 히드라를 잡는 날이잖아.”
그는 나를 앞서가며 빨리 오라며 재촉했고, 나는 떨떠름한 표정을 한 채 그를 따라갈 수밖에 없었다.
우리는 히드라의 서식지에 도착했다.
초입부터 뿌연 안개가 껴 있고, ‘쉬이익’과 같은 소름끼치는 괴성이 들리는 것이, 벌써 음산한 분위기를 주었다.
“제가 과연 잡을 수 있을까요?”
새끼 히드라는 C등급의 몬스터였다.
저번에 마주했던 웨어울프가 B등급이라는 것에 비하면 양호한 수준이긴 하지만 겁이 나는 건 어쩔 수 없었다.
게다가 히드라는 자칫하면 생명에 무리가 갈 정도의 맹독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주의해야 할 필요가 있었다.
아무리 새끼 히드라를 처치한다고 해도 독에 노출되면 이 세계 생활은 쫑나는 것이니, 정신 똑바로 차리고 임해야 했다.
“대진표는 나왔나? 첫 상대는?”
어떤 히드라를 잡는 것이 가장 적합할지 물색하고 있던 참에, 그가 물었다.
아, 대진표. 그것은 여러모로 정말 중요한 것이었다. 본선 2차는 개인전이니까, 누구와 어떤 순서에 붙는지에 따라 운명이 좌지우지될 수 있는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내 운명은…….
“첫 상대가 세이먼이에요.”
운도 드럽게 없었다.
작년 비무 대회의 2등이자, 학교에서 쭉 수석을 담당하고 있는 세이먼이 1회전의 상대라니.
계속 올라가다 보면 언젠가 붙을 상대였다고 생각이 들면서도, 내 운이 좋아서 세이먼과 에르셈프가 만나 둘 중 하나가 떨어지길 바랐다.
그런데 세이먼을 가장 처음으로 붙여 준다니, 젠장.
“세이먼? 그 금발 머리를 말하는 건가?”
“맞아요. 작년에 2등을 했었대요.”
“1회전부터 쉽지 않은 상대가 걸렸군.”
그는 혼자 말하듯이 중얼거리며 바위 뒤로 천천히 걸어갔다.
“…그러니까요. 하지만 괜찮아요. 제가 이길 거니까.”
나는 주먹을 꽉 쥐어 보이며 당차게 말했다.
벌써부터 기죽을 필요는 없다.
뭐든지 붙어 봐야 아는 거니까.
그때, 베탄이 바위 뒤에 몸을 숨기며 손짓했다.
“이리 와, 루나.”
처치할 히드라를 보여 줄 셈인 것 같았다.
그런데 ‘루나’라는 말……. 저 사람이 하는 건 왜 이렇게 적응이 안 되는 거지.
“네.”
내가 그의 옆에 쪼그려 앉으며 바위 위로 눈을 내놓고 바라보았다.
“저기 혼자 놀고 있는 히드라를 죽이는 거야. 머리가 세 개뿐이니 그리 어렵지 않을 거다.”
그는 저 멀리 히드라를 바라보다가, 다시 고개를 내리며 나와 눈을 맞추었다.
“할 수 있지?”
“네.”
“전혀 위험하지 않을 거야. 자칫하다 실수해도 내가 있으니까.”
워, 원래 이 남자가 이런 말을 하는 사람이었나?
나는 히드라에게 출발하기 전, 재빨리 그의 호감도를 확인했다.
+
이름: 베탄 오스가르드
나이: 21
직위: 램클리프 마법협회의 총기사단장
호감도: 18%
+
뭐야! 왜 18%가 되어있는 거야!
분명 어제 5%가 올랐다고 하지 않았어!?
집에 가고 나서 나를 떠올리며 호감도를 올린 건가 설마……?
말도 안 돼!! 나는 왜 떠올려!! 사기 아냐?
나는 어이가 없는 나머지 정신 줄을 놓고는 다른 생각에 빠져 있었다.
그때, 내 집중력을 흩뜨려 놓은 당사자인 베탄이 나를 향해 입을 열었다.
“가라, 루나.”
내가 뭐 포X몬이야?
나는 그의 말에 따라 쪼그렸던 무릎을 펴고, 손을 탈탈 털었다.
히드라에게 돌진하기 직전, 내가 베탄을 향해 말했다.
“죽으면 책임지세요.”
“…뭐?”
내 말에 놀란 건지, 그가 인상을 찌푸리며 되물었다.
“저 죽으면 선생님 잘못이니까 책임지시라구요. 장례식도 잘 치러 주시고.”
“…무슨 그런 소릴 해.”
갑자기 낮게 가라앉은 그의 목소리에 내가 입을 다물었다.
그리고, 그가 날카로운 눈빛으로 나를 쏘아보며, 입을 열었다.
[호감도가 3% 상승했습니다!]
“너는 절대 죽을 일 없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