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다섯명은 너무 많잖아요 (87)화 (87/156)
  • 86화. 히드라의 언덕(1)

    샐라임의 목소리는 사뭇 진지했다.

    나를 걱정하는 것 같으면서도, 다그치는 듯한 말투였다.

    나는 평소답지 않은 샐라임의 모습에 손톱을 깨물었다.

    하지만 샐라임은 한번 시동이 걸린 입을 멈출 생각이 없어 보였다.

    “그럼 집착 어린 그놈은 어쩔 건데?”

    “네……?”

    “세이먼 유리츠 말이야. 지금도 너한테 집착을 하고 있는데 나중에 되면 더 심해지지 않겠어? 시스템이 없어진다고 해서 걔네들의 감정까지 없어진다는 보장은 없잖아.”

    샐라임의 말이 맞았다.

    나는 시스템을 파괴했지만, 다섯 남주인공들에게는 아무런 변화가 없을 수 있었다.

    “왕자 놈도 그래. 너한테 청혼이라도 하면 어쩔래?”

    샐라임은 마치 자신이 아빠라도 된 것처럼 나에게 타박을 주었다.

    딸에게 관심이 많은 아빠를 만나면 이런 기분이려나?

    “…….”

    내가 대답이 없자, 샐라임이 주절주절 말을 이어 나갔다.

    “잰퓨어도 있잖아. 걔는 너만 보면 좋아 죽으려고 하던데 어떻게 떼어 낼 거야? 그 예쁘장하게 생긴 레크리드 녀석도 그렇고, 빨간 눈깔도 마찬가지고. 뒷일을 생각하긴 한 거야? 응?”

    내가 질린다는 표정을 지으며 귀를 막았다.

    “저도 다 안다고요. 그러니까 잔소리는 제발 그만.”

    “그럼 어떻게 할 건지나 말해 봐.”

    이거 완전 과잉보호다.

    “그냥 친구 같은 사이로 남을 거예요. 그리고 지금은 시스템을 파괴하는 게 가장 최우선이니까 그것만 생각하기에도 시간이 모자란다구요.”

    오성석을 통해서 시스템을 파괴한다고 쳤을 때, 무슨 일이 일어날지는 아무도 모르는 일이었다.

    따라서 나는 어떻게 될지 모르는 미래를 예상하느니, 현재에 충실하겠다는 결론을 내렸다.

    그런데 그때, 샐라임의 작은 목소리가 들렸다.

    “그럼 나는?”

    “……?”

    내가 생각을 멈추고 목소리가 나오는 검을 바라보자, 그가 말을 이었다.

    “시스템이 파괴되면 나를 버릴 거야?”

    그의 말투는 담담했지만 어딘가에서 처량함이 느껴졌다.

    나라 하나를 불태워 봉인 당해 버린 뛰어난 불의 상급 정령. 하지만 삼백 년 동안 검 속에 갇혀, 누군가가 엄청난 노력을 통해 꺼내 주지 않으면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수동적인 삶을 살았다.

    샐라임은 그런 삶을 살면서 이젠 밖으로 나올 수 있다는 기대를 잃어버린 건지도 모른다.

    나는 잠시 입술을 달싹이다가 말했다.

    “버린다니요. 말을 왜 그렇게……. 그리고 그 전에 샐라임이 검에서 나올 수 있게 할 거예요. 그러니까 걱정하지 말아요.”

    나는 꼭 샐라임이 검에서 빠져나오도록 돕고 싶었다.

    함께 맞붙어서 지내 온 정도 있었고, 나를 열심히 가르쳐 준 스승이기도 했으며, 기분 나쁜 일이 있을 땐 옆에서 위로도 해 주던 친구이기도 했다.

    나는 작은 숏 소드를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한 나라를 불태웠다는 죄로, 300년을 넘게 갇혀 있었다.

    잘못을 저질렀다고는 하지만, 이 정도면 충분하지 않을까?

    이제는 형벌에서 벗어나, 샐라임의 힘을 좋은 곳에 쓰게 하는 게 더 나을 거 같았다.

    “비무 대회가 끝나면, 정령국으로 가요.”

    “뭐?!”

    “이젠 나올 때잖아요. 더 이상 여기에 갇혀 있는 건 너무 잔인한 일이라고요. 우선 검에서 나가 봐요. 나와서 착한 일로 속죄라도 하면 되죠!”

    나 또한 정령국이 어디 있는지, 갈 수는 있는 곳인지 알 수 없었다.

    봉인을 풀어 줄 수 있다고 백 퍼센트 장담은 못 하지만… 힘이 닿는 데까지 도전해야 하는 것이었다.

    “이제 본선 1차가 끝났으니, 일주일 후에 개인 토너먼트가 진행될 거예요. 토너먼트는 하루에 몰아서 진행하니 금방 끝날 거고요. 조금만 기다려요, 샐라임.”

    아카데미 수업 같은 건 안중에도 없었다.

    토너먼트가 끝나서 오성석을 손에 넣은 뒤, 정령국으로 출발하는 거다.

    “…그래, 알겠어.”

    나의 모든 계획은 순조롭게 진행되고 있었다.

    * * *

    베탄은 나를 죽기 직전까지 내모는 것을 좋아했다.

    물론 수련을 하는 동안 말이다.

    그는 나에게 마지막 미션을 주었는데, 정말 이 남자가 내 생명 따위는 생각하지 않는 건가, 싶은 생각이 들었다.

    “저기 보이는 새끼 히드라를 처치하는 거야.”

    히드라의 언덕에서, 히드라의 주 서식지로 나를 데리고 간 베탄이 말했다.

    그가 가리키는 손가락의 방향을 보자 머리 다섯 개가 달린 초록색의 새끼 히드라가 꿈틀대고 있었다.

    나는 히드라를 보자마자 어떻게 공격을 해야 할지 머릿속으로 그렸다.

    정령술의 레벨이 벌써 12였다. 샐러맨더와 카사를 이용하면 쉽게 히드라의 힘을 빼놓을 수 있을 터였다.

    “하지만 조건이 있어.”

    “뭔데요?”

    베탄이 몸을 돌려 내 쪽을 바라보았다.

    “내가 알려 준 ‘찔러 베기’만을 이용해서 처치하는 거야.”

    “?!”

    그가 한쪽 입꼬리를 올리며 말했다.

    “쉽지 않겠지. 너는 숙련도가 그리 높은 편이 아니니까. 게다가 히드라의 독에 당한다거나 피해를 입을 경우, 본선 토너먼트에 지장이 있을 거라는 점도 생각해야 할 거야.”

    “아니, 이런 미션을 줘도 되는 거예요? 제자가 죽어도 돼요?”

    내가 이런 법이 어딨냐는 말투로 묻자, 베탄이 어깨를 으쓱거렸다.

    “할 수 있어. 내가 본 너라면 가능할 거다.”

    그의 말에 나는 땅이 꺼질세라 한숨을 쉬었다.

    베탄을 바라보니 그가 아주 태연한 표정으로 나를 마주했다.

    “날짜는 내일모레. 기회는 단 한 번이다.”

    나는 마음을 가다듬었다.

    그래, 못 할 것도 없다. 오성석을 얻어야 하잖아, 루나!

    지금까지의 수련은 이 히드라를 처치하기 위한 과정이었던 거다.

    한 단계 발전하기 위해서는 도전을 할 필요가 있었다.

    그렇게 나는 ‘히드라 처치’ 작전 준비에 본격적으로 돌입했다.

    다시 언덕으로 돌아가 ‘찔러 베기’를 연습했고, 베탄이 옆에서 세세하게 움직임을 고쳐 주곤 했다.

    “루이아나, 너는 항상 허리 쪽이 비어. 상대방에게 죽여 달라고 부탁하는 건 아니지?”

    “…그럴 리가 있을까요.”

    “언제 봐도 저 허리는 못 봐 주겠어. 다섯 끼씩 먹으라고 한 건 지키고 있나?”

    “…아뇨.”

    “왜지?”

    “체할 것 같단 말이에요.”

    나는 내 허리를 은근슬쩍 팔로 가리며 대답했다.

    그러자 그가 어이가 없다는 듯 헛웃음을 흘렸다.

    하지만 나는 그런 베탄의 모습에 깜짝 놀랐다.

    저 남자가… 웃었어……?

    헛웃음이긴 했지만, 평소처럼 사악하거나 음험한 미소가 아니었다.

    매사 진지하고 매끄러운 얼굴에 탁, 하고 작은 웃음이 번졌다.

    “……?”

    내가 눈을 크게 뜬 채 그를 쳐다보자, 그가 시선을 느꼈는지 나를 돌아봤다.

    “웃는 거 처음 봐요.”

    그때였다. 나는 짧게 대답했을 뿐인데…….

    “뭐?”

    베탄의 얼굴이 순식간에 굳었다.

    예쁜 웃음에서 딱딱한 표정으로 얼어 버리는 것이다.

    “……?”

    몇 초 만에 얼굴을 굳힌 채 분위기를 백팔십도 바꾼 그 때문에 나 또한 덩달아 얼굴을 굳히고 말았다.

    대체 뭐야, 왜 이러는 건데?

    “저기, 제 말이 이상했나요?”

    웃는 것 처음 본다는 말이 그렇게 이상한가?

    단번에 표정이 망가질 정도로?

    나는 재빨리 베탄의 호감도를 확인했다.

    +

    이름: 베탄 오스가르드

    나이: 21

    직위: 램클리프 마법 협회의 총기사단장

    호감도: 0%

    +

    설마 여기서 마이너스로 떨어지는 건 아니겠지, 싶은 마음으로 확인했지만 여전히 0%였다.

    한편으론, 역시 베탄은 무슨 짓을 해도 호감도가 오르지 않는다는 생각을 하며 안도했다.

    그때, 그가 등을 휙 돌렸다. 그의 커다란 등이 나를 향하자 짙은 그림자가 졌다.

    그는 자신의 얼굴을 감춘 채 나지막하게 중얼거렸다.

    “가서 연습해.”

    갑자기 다른 사람이 된 것처럼 행동하는 그의 모습에 나는 영문을 알 수가 없었다.

    일단은 고개를 끄덕이며 그를 슬쩍 바라보자, 그가 가만히 땅을 응시하고 있는 것이 보였다.

    “…….”

    나는 이상한 기운을 애써 모른 척하며, 다시금 수련에 돌입했다.

    * * *

    어느새 밤이 찾아왔고, 시간은 그리 늦지 않았지만 어두컴컴한 하늘 아래 드넓은 벌판 위에서 나와 베탄만이 존재했다.

    베탄은 아까 내가 말한 ‘웃는 거 처음 봐요.’라는 말을 들은 이후부터 계속해서 분위기가 이상했다.

    아니, 말한 사람 무안하게 저래도 되는 거야?

    하지만 밖으로 말할 순 없으니 속으로만 중얼거리며 베탄에게 다가갔다.

    “선생님, 이만 가죠.”

    “어? 응. 그러지.”

    내가 가까이 다가가자 그가 작게 놀랐다.

    깊은 생각에 빠져 있던 사람이 현실로 돌아오는 듯한 반응이었다.

    평소처럼 칼같이 움직이지도 않았고, 어딘가 홀려 있는 사람처럼 눈이 풀려 있었다.

    하지만 본인도 그걸 자각했는지 정신을 차리려 노력하는 것 같았다.

    “루이아나, 대진표가 언제 나온댔지?”

    평소답지 않게 괜히 말을 꺼내면서 말이다.

    “내일이요.”

    우리는 게이트로 향하는 길을 나란히 걸어갔다.

    밤이 되니 차가워진 바람이 나와 베탄을 훑고 지나갔다.

    옷 안으로 파고드는 바람에 내가 로브 깃을 여몄다.

    “가을이 된 지 얼마나 지났다고, 곧 있으면 추워지겠네요. 나중에 눈도 오면 참 예쁘겠다. 그쵸?”

    어색한 분위기를 풀려는 생각은 아니었다.

    그저 생각난 말을 입 밖으로 꺼낸 것뿐이었다.

    한국과 달리 이 세계는 풍경이 참 자연적이고 아름다우니까.

    “아니, 난 겨울이 싫어.”

    그가 단호하게 대답하자 내가 반문했다.

    “왜요?”

    그러자 그가 또다시 침묵에 잠겼다.

    저벅저벅, 걷는 소리만이 귓가에 울려 퍼졌고, 나는 잠자코 그의 대답을 기다렸다.

    “그게 왜 궁금하지?”

    “궁금한 건 아니고, 그냥 물은 건데요.”

    “…….”

    “말하기 싫으면 말하지 마세요.”

    내가 아무렇지 않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진짜 궁금한 것도 아니었고, 스몰 토크일 뿐이었다.

    그리고 난 이미 게임을 통해서 베탄이 겨울을 싫어한다는 걸 알고 있었다.

    [‘베탄 오스가르드’에게 제안할 데이트 장소를 고르시오.] 에서 ‘눈꽃 축제’를 골랐다가 실패한 경험이 있으니까.

    ‘난 겨울이 싫어. 생명이 존재할 수 없는 곳 같잖아.’라고 대답했던 것 같은데.

    그럼에도 그에게 물은 까닭은 정말로 아무런 생각이 없었기 때문이다. 이 이상한 분위기에 적막까지 감돌면 더 견디기 어려울 거 같기도 했고.

    다행히 게이트가 점점 보이기 시작했다.

    어서 각자의 집으로 가는 것이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그때, 베탄이 입을 열었다.

    “넌 왜 겨울이 좋지?”

    낮은 목소리가 귓가를 맴돌았다.

    나는 그의 질문에 우뚝, 발걸음이 멈추었다.

    예상치 못한 타이밍에 나온 질문 때문이기도 했지만…….

    [퀘스트가 도착했습니다!]

    [자동으로 열람됩니다.]

    더욱더 알 수 없는 타이밍에 내려온 퀘스트 때문이었다.

    평소와 달리 자동으로 열람되는 퀘스트에, 강제로 내용을 확인할 수밖에 없었다.

    +

    # 제10 호감도 퀘스트

    제목: ‘겨울이 좋은 이유’

    내용: 겨울이 왜 좋냐고 물은 베탄에게 ‘유일하게 따뜻함을 느낄 수 있는 계절이잖아요.’라고 대답하시오.

    제한 시간: 1분

    보상: 없음

    페널티: 본선 2차 개인전 출전 불가

    +

    이…게 대체 뭐야?

    누군가가 실시간으로 나를 지켜보다가, 상황에 맞춰 행동을 지시한 것 같은 퀘스트였다.

    지금까지 시스템은 체크 포인트를 달성하면 자동으로 퀘스트가 지급되는 일종의 프로그램 같은 원리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이번엔 느낌이 달랐다.

    자아가 있는 무언가가 나를 조종하기 위해 능동적으로 내린 퀘스트 같은 느낌을 받았다.

    일단 찝찝한 기분은 제쳐 두고, 현실로 돌아왔다.

    이 이상한 퀘스트를 달성해야만 하기 때문이다.

    빌어먹을 시스템은 틈만 나면 비무 대회 출전 불가로 나를 협박한다.

    비무 대회가 나에게 소중한 기회라는 걸 알아서 그런 건가?

    나는 퀘스트 창에 떠올라 있는 문장을 한번 보았다가, 베탄을 슬쩍 바라보았다.

    내 대답을 기다리는 것 같지는 않았다.

    그저 묵묵하게 길을 걷는 것이, 그도 그냥 던져 본 말인 것 같았다.

    나는 퀘스트 창을 똑바로 쳐다보며 입을 열었다.

    “유일하게 따뜻함을 느낄 수 있는 계절이잖아요.”

    말하자마자 베탄의 발걸음이 우뚝, 멈추었다.

    어느새 고개를 푹 떨군 채였다.

    검은 머리칼에 눈이 가려져 무슨 눈빛을 하고 있는지 알 수 없었다.

    그때, 그가 천천히 고개를 돌려 나를 바라보았다.

    그의 붉은 눈동자에는 아주 많은 감정들이 넘실거리고 있었다.

    슬픈 것 같기도 했고, 억울한 것 같기도 했으며, 감동을 받은 것 같기도 했고, 무언가를 견디는 것 같기도 했다.

    미간을 잔뜩 찌푸린 채 감정을 억제하는 듯한 베탄은 이내 나지막이 내뱉었다.

    “네가 어떻게 그 말을……?”

    충격에 휩싸인 듯한 표정은 나에게도 이질감을 주었다.

    그리고, 이어서 내 귓가엔 시스템의 음성이 들려왔다.

    [호감도가 5% 상승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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