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다섯명은 너무 많잖아요 (86)화 (86/156)
  • 85화. 에르셈프와 함께(4)

    “그냥 여기서 얘 죽이고 실격패 당하면 안 되는 거지?”

    에르셈프의 목소리가 작게 떨렸다.

    끓어오르는 분노를 참으려고 애쓰는 모습 같았다.

    비무 대회는 옛날에 비해 의미가 퇴색되었다고 해도 친선 경기임은 변하지 않았다.

    상대편을 죽이거나 생명에 큰 지장을 줄 경우에는 개인적인 감정이 섞였다는 판단하에 실격패를 주었다.

    오늘 우리와 맞붙은 상대편은 에르셈프를 처치하러 온 것이 목적이니 실격패를 당하든 말든 상관이 없었겠지만, 우리는 달랐다.

    아니, 나는 달랐다. 오성석을 위해서 절대 실격패를 당할 수 없었다.

    “절대 안 돼요, 에르셈프! 실격패라뇨, 말도 안 되는……!”

    “저놈이 내 부모를 욕보였어. 밖에서는 바로 목이 날아가도 아무런 문제가 없을 상황이야. 그런데 지금 이 경기라는 상황을 무기 삼아 이 녀석은 세 치 혀를 놀리고 있는 거라고. 이래도 내가 참아야 해?”

    에르셈프가 이렇게 길게 말하는 걸 처음 보았다고 해도 무방할 정도로 그는 할 말이 많아 보였다.

    “에르셈프의 마음이 어떤지 잘 알 수는 없어요. 하지만 여기서 그를 죽인다고 해서 달라지는 건 없을 거예요. 고작 이런 사람에게 휘둘리는 건 바보 같은 짓이라고요!”

    “…….”

    내 외침에 에르셈프는 잠시 말이 없었다.

    원래 같았으면 왕족 모독죄로 에르셈프 마음대로 처리할 수 있었을 거다.

    믿는 구석이 있는 건지, 단지 이 상황을 무기 삼는 건지 에이브 녀석은 비틀린 미소를 지으며 에르셈프를 쏘아보고 있었다.

    “루나, 나는…….”

    “…에르셈프.”

    에르셈프는 하고 싶은 말이 있는 듯했다.

    아까보다 분노는 사그라졌지만 이상하게도 무언가 다른 기운이 그를 감싼 것 같았다. 아래로 내리꽂은 시선을 보니 마치 그는 깊은 우울감을 느끼는 것 같았고, 오래전부터 앓았던 상처가 결국 곪아서 터지는 느낌이 들었다.

    “…알았어. 이 경기는 무조건 이기도록 하지.”

    에르셈프는 그 말을 마지막으로 뱉더니,

    쉭-!

    순식간에 몸을 움직였다.

    “커헉!”

    그리고 금세 길리안의 앞으로 몸을 움직이더니, 그의 목덜미를 부여잡았다.

    쾅!

    있는 힘껏 벽에 밀치며 그를 제압한 에르셈프는 길리안의 손목을 꺾어 그의 손에서 칼을 떨어뜨렸다.

    칼이 바닥을 구르는 소리만이 욕실에 퍼졌고, 나는 말없이 뒤에서 에르셈프만을 쳐다볼 뿐이었다.

    내가 나설 수 있는 상황이 아니라는 건 충분히 알았다.

    지금으로선, 그에게 모든 것을 맡기고 싶었다.

    “형이 무어라 전하라고 했는지 말해.”

    에르셈프가 으르렁거리는 목소리로 길리안에게 말했다.

    “곧 있으면 왕위 계승이 이루어질 겁니다. 팔렌티움 왕자님이 왕관을 쓰실 것이 분명하죠. 왕세자님은 이미 끝을 다 하신 것이나 다름없으니까요.”

    “그게 무슨……?”

    “지난번에 쓰러지시고 난 뒤부터 시름시름 앓고 계십니다. 의원마저도 살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고 하고 있죠. 그렇게 몸이 약하실 줄은 몰랐습니다.”

    길리안이 한쪽 입꼬리를 올리며 살짝 미소를 지었다.

    에르셈프는 처음 듣는 이야기라는 듯 표정을 굳혔다.

    궁에서 배척받는 상황이라더니, 이런 이야기조차 전달받지 못하는 것 같았다.

    “결국 팔렌티움이 왕좌에 오른다는 건가…….”

    “예정된 사실이지요. 그 전에 당부의 말씀을 드리고자 제가 이곳에 온 것입니다, 팔렌티움 왕자님께서는 이렇게 전하라 하셨습니다.”

    “…….”

    “궁 안에서 죽어서 왕실에 괜한 망신을 주지 말고, 알아서 타국으로 나가 쥐도 새도 모르게 살다 죽으라고요.”

    “이런 미친 새끼가 건방지게……!”

    에르셈프가 자신도 모르게 칼을 뽑아 길리안의 목에 겨눴다.

    “에르셈프!”

    내가 그의 이름을 부르자 에르셈프의 몸이 멈추었다.

    길리안 저 새끼도 단단히 미친 것 같았다.

    왕족을 상대로 저렇게 말할 수 있다니, 뒤에 엄청난 세력을 둔 것이 아니면 불가능할 것이었다.

    “언제나 백성을 생각하시는 팔렌티움 왕자님만 한 재목이 어디 있겠습니까.”

    “…….”

    “전설의 보검마저 잃어버리신 3 왕자님과는 비교가 안 될 정도니까요.”

    “그건 잃어버린 게 아니야……!”

    에르셈프가 이제는 질렸다는 듯이 내뱉었다.

    “그것이 중요한 게 아닙니다. 어찌 되었든 확실한 건 3 왕자님께서 왕자로서의 자격을 갖추시지 못했다는 것이죠.”

    나 또한 비젠티아 왕실에 대해서 빠삭하게 아는 편이 아니기 때문에 2 왕자가 어떤 사람인지 알 수 없었다.

    언제나 백성을 생각하는 사람이라고……? 그런 사람이 이런 짓을 벌인단 말이야?

    그때, 에르셈프가 칼을 아래로 거두더니, 낮은 목소리로 내뱉었다.

    “형한테 가서 전해.”

    “…….”

    “아버지의 인정을 받기 전까지, 절대 궁을 떠날 생각 없다고.”

    “그 말인즉슨…….”

    에르셈프의 말에 길리안이 무어라 말하려던 찰나, 에르셈프가 손을 움직였다.

    지익.

    왼손으로 길리안의 이름표를 잡아떼어 낸 것이다.

    더 이상 그와 대화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한 모양이었다.

    “이만 꺼져.”

    에르셈프는 그의 멱살을 놓은 뒤 미련 없이 뒤를 돌았고, 길리안은 알 수 없는 표정으로 시선을 거둘 뿐이었다.

    “‘길리안 네이토르’ 탈락. ‘길리안 네이토르’ 탈락. 1분 안에 자동 워프가 진행됩니다.”

    이어 탈락을 진행하는 안내 방송이 들려왔다.

    “7팀의 승리입니다. 소요 시간 2시간 56분. 7팀의 모든 인원은 본선 2차 토너먼트에 진출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안내 방송을 들으며 나는 에르셈프에게로 다가갔다.

    그의 얼굴은 창백하게 질려 있었고, 상태가 좋지 않아 보였다.

    “괜찮은 거예요, 에르셈프?”

    “루나, 나는…….”

    “…….”

    그는 무슨 말을 하려는 듯 계속해서 입술을 달싹였다.

    한참을 망설이던 그가 말을 내뱉었다.

    “나는 어머니를 죽이지 않았어. 정말이야.”

    순간적으로 그의 말을 듣고 할 말을 잃었지만, 나는 이내 대답했다.

    “물론이죠. 에르셈프.”

    “……?”

    “당신 같은 사람이 왜 그런 짓을 하겠어요.”

    내 말에 어둡게 물들어 있던 그의 눈동자가 크게 흔들렸다.

    “정말… 정말로… 그렇게 생각해?”

    “에르셈프같이 강한 사람이 그런 짓을 할 리가 없잖아요.”

    나는 희미한 미소를 지으며 그에게 말해 주었다.

    “에르셈프는 냉정하기도 하고, 딱딱하기도 하고, 때로는 좀 괴팍하기도 하지만 따뜻하고 다정한 사람이잖아요.”

    “…지금 욕하는 거 아니지?”

    “여관에서 느꼈어요. 저를 걱정해 주고, 사소한 말 한마디에 신경을 쓰는 에르셈프의 모습은 그 누구보다 다정하다는 걸요.”

    “…….”

    “그런 사람이 어머니를 죽일 리가 없잖아요.”

    에르셈프는 내 말에 감동이라도 받은 건지 시선을 아래로 내린 채 아무 말이 없는 상태였다.

    꾹 다문 그의 입술에서 그가 감정을 억제하고 있다는 것이 느껴졌다.

    “5년 전이었어. 어머니가 돌아가신 건.”

    잠자코 있던 에르셈프가 낮은 음성으로 말을 꺼냈다.

    “베라일 공국의 습격 사건 때문이었지. 왕실은 힘을 지키기 위해 어머니가 지병 때문에 돌아가신 거라고 포장했지만 사실은 달라.”

    내가 5년 전 사건을 알 리는 만무했다. 하지만 모든 사람들이 아는 사건인 것 같으니 나는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나 또한 에르셈프가 무슨 사건을 겪은 건지 궁금했다.

    편하게만 살 것이라고 생각했던 싹수없는 왕족이 형제에게 살해 협박을 받는 삶을 산다니.

    비극적인 일이었다.

    에르셈프는 말을 이었다.

    말을 길게 꺼내지 않는 평소의 에르셈프와는 전혀 다른 모습이었다.

    “습격 당시, 정신없는 와중에 내가 형을 본 건 왕비궁 쪽에서 나오고 있는 모습이었어. 형은 자신이 백성들을 지킬 테니 나에게 어머니를 부탁한다며 당부하고는 급하게 떠났지.”

    “그래서 어떻게 되었죠……?”

    “하지만 내가 왕비궁에 도착했을 때는 어머니가 이미… 돌아가신 후였어.”

    “설마 그래서… 어머니를 죽였다는 오해를 받는 건가요?”

    “…나도 이해는 돼. 내가 제대로 보호하지 못한 탓이니까. 내가 어머니를 지켰어야 했는데, 그러지 못했으니까. 내 책임이 맞지.”

    “그게 어떻게 에르셈프 책임이에요! 열세 살의 어린아이에게는 버거운 일이라고요!”

    하지만 에르셈프는 고개를 작게 저었다.

    “믿을 수가 없었어. 어머니가 죽었다는 것과 왕실이 이렇게 쉽게 공격받는다는 것. 내가 사는 곳이 언제든지 죽을 수도 있는 공간이라는 것까지. 그래서 변명을 제대로 하지 못했어.”

    “…….”

    “아버지는 내가 미웠나 봐. 어머니를 너무 사랑하셨기 때문이겠지.”

    에르셈프는 자조적인 웃음을 지으며 허탈하게 털어놓았다.

    그의 눈빛은 어느새 우울하게 젖어 있었다.

    왕국에서 가장 강한 사람이라는 게 무색해질 만큼, 약하고 여린 모습이었다.

    왠지 모르게 그를 위로해 주지 않으면 안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만큼, 그가 외로워 보였다.

    나는 에르셈프의 손을 살며시 잡았다.

    “……!”

    너무나도 외로워 보이는 사람에게, 건넬 수 있는 최소한의 위로라고 생각했다.

    내가 그 어떤 말을 하더라도 그에게는 와닿지 않을 것이기에.

    [호감도가 5% 상승했습니다.]

    호감도가 오를 것이라고 예상은 했다.

    그걸 알면서도 손을 잡은 것이다.

    랜덤 카드가 있으니 괜찮다는 생각과, 호감도가 오르더라도 그를 인간적으로 위로해 주고 싶다는 마음 때문이었다.

    +

    이름: 에르셈프 카이센 비젠티아

    나이: 18

    직위: 라인하르트 왕국의 제3 왕자

    호감도: 49%

    +

    에르셈프는 놀란 눈빛으로 꼭 잡은 내 손을 내려다보았다.

    커다란 에르셈프의 손과 내 손이 꼭 붙잡은 상태였다.

    거칠고 상처가 가득한 손이었지만 그 어떤 것보다 따뜻하고 부드러웠다.

    * * *

    나는 시합이 끝나자 나를 축하해 주려 몰려온 남주인공들에게 양해를 구하고 기숙사로 돌아왔다.

    폐저택에서 잔뜩 긴장한 탓인지 피곤해 죽을 것 같아 말을 받아 줄 힘도 없었기 때문이다.

    남주인공들에게 치일 동안 줄곧 말이 없던 샐라임은 기숙사에 돌아오자마자 나에게 말을 걸었다.

    “축하한다, 꼬마. 오성석에 한 걸음 더 다가가게 되었구나.”

    심드렁한 목소리로 말하는 것이, 무언가 불만이 있는 건가 싶었다.

    “왜 그래요, 샐라임. 무슨 문제 있어요?”

    내가 의아한 목소리로 묻자 샐라임의 대답이 흘러나왔다.

    “아니? 아무 문제 없는데?”

    “…….”

    저거 저거, 뭐 있는 것 같은데. 말투에서 무언가가 느껴진다.

    “뭔데요, 왜. 왜 그러는데.”

    “아무것도 아니라니까?”

    “에이, 말해 줘요. 뭔데.”

    “…….”

    내 말에 잠시 대답이 없던 샐라임은 이내 힘겹게 입을 열었다.

    “그냥, 이건 단지 걱정일 뿐이야.”

    “네.”

    “내 앞에서 안 그러면 몰라, 계속 눈에 보이니까 말하는 거야.”

    “네. 뭔데요.”

    “왜 자꾸 그 왕자 놈이랑 붙어먹는 거야?”

    “에?!”

    뜻밖의 소리에 눈을 동그랗게 뜨자 샐라임이 이때를 기다린 사람처럼 줄줄 말을 쏟아 냈다.

    “내가 저번에 여관에서부터 말했잖아. 걔 이상하다니까? 그런 남자 잘못 만나면 큰일 난다고. 보니까 완전 여우더구먼.”

    “여…우……?”

    “그래! 네가 둔탱이라 모르는 거야. 요새 남자들이 얼마나 꼬리를 잘 치는지 모르지?”

    “꼬리…라……. 에르셈프가 꼬리를 친다고요……?”

    내가 턱을 쓰다듬으며 당황스러운 말투로 말하자 그가 오히려 목소리를 높였다.

    거의 성질을 내는 수준이었다.

    “아주 백 단이야! 난 네가 그런 녀석한테 넘어가는 꼴 못 본다.”

    샐라임은 나와 함께 지내더니 아빠와 같은 마음이라도 지니게 된 걸까……?

    저번에 레크리드 때부터 계속 신경을 쓰는 것 같더니 이제는 대놓고 욕을 하잖아?

    나는 땀을 삐질 흘리며 수습했다.

    “에르셈프는 제가 피해야 할 남자 주인공이라고요. 어차피 시스템을 파괴하면 더는 볼 일도…….”

    “끝나면, 끝나면 어쩔 건데?”

    “네?”

    “시스템이 파괴되고 난 뒤에, 그 왕자 놈이 결혼이라도 하자고 하면 어쩔 거냐고.”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