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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섯명은 너무 많잖아요 (85)화 (85/156)

84화. 에르셈프와 함께(3)

에르셈프는 큰 키와 긴 다리를 뽐내며 방 안을 여유롭게 쳐다보았다.

그에게는 두려움이나 무서움 같은 것은 전혀 존재하지 않았다.

“우리 왕자님은 등장 한번 요란하시군.”

“찾아오길 기다렸는데, 왜 이렇게 늦게 나타난 거야?”

안에 있는 녀석들이 건방진 태도로 에르셈프를 쳐다보며 입을 놀렸다.

“삼십 초 줄게. 이름표 내놔.”

“왕자님.”

“왕자의 명령을 거절하나? 좋은 말로 할 때 내놔.”

“왕자님이 아무리 왕국에서 제일가는 기사라고 해도, 저희 넷을 상대하는 건 어려울 겁니다.”

“헛소리 들을 시간 없다.”

“자신감이 넘치십니다. 3 왕자님다워요. 그 자신감이 언제까지 갈진 모르겠지만.”

“누가 보냈나? 둘째 형? 그렇겠지. 이딴 짓을 할 사람은 팔렌티움밖에 없겠지.”

에르셈프가 비릿한 미소를 지으며 그들을 내려다보았다.

그리고 그가 천천히 방 안으로 입성했다.

상대편 팀원 3명과, 에이브 자식이 있었다.

‘대기실에서 그렇게 입을 놀릴 때 알아봤어야 했는데, 형이 보낸 사람일 줄이야.’

에르셈프는 고개를 가볍게 돌리며 상황을 파악했다.

네 명은 모두 손에 하나같이 무기를 들고는 에르셈프를 죽일 듯이 쳐다보고 있었다.

저건 정말로 자신을 죽이려는 눈빛이다.

에르셈프가 어렸을 때부터 수없이 겪어 왔던 그 눈빛.

에르셈프는 검집에서 롱 소드를 꺼냈다.

찬란한 검신이 빛났고, 그는 한 손으로 칼을 쥐었다.

꽤 무거운 무게임에도 불구하고 에르셈프는 검을 한 손으로 드는 것을 선호했다.

그것이 훨씬 한 번에 많은 사람을 처치하기 쉬우니까.

“그냥 죽여 버리면 빠르게 끝날 텐데, 오히려 귀찮아졌네?”

에르셈프 기준에서는 상대가 죽지 않도록 약한 강도의 공격만을 사용해야 했고, 다른 한편으로는 민첩하게 이름표까지 떼어 내야만 하는 것이다.

죽이는 것이 안 되면, 기절시키면 된다.

에르셈프는 몸속에서 흐르는 마나를 모아 검으로 집중했다.

“당장 뒈져!”

“내 손으로 왕족을 죽여 보는 날이 오다니!”

네 명의 남자는 득달같이 에르셈프에게 달려들었다.

에르셈프는 유연하게 그들의 공격을 피하며 검에만 정신을 모았다.

“우습구나. 나를 상대하려는 것이.”

“뭐야?!”

그들의 움직임은 너무나도 느렸다. 게다가 앞으로 어떻게 움직일지도 눈에 훤히 보이는 느낌이었다.

“내가 왕궁에서 실력을 내보이지 않은 지가 오래되었나 보군. 이 정도 애송이들을 보내는 걸 보면 말이야.”

왕궁에서는 자신에게 관심을 갖는 사람이 없기에 예전에 본 실력으로 에르셈프를 판단한 건지, 달려오는 네 명의 능력은 처참하기 그지없었다.

에르셈프는 아까부터 모아 왔던 마나를 검으로 흘려보내, 거대한 크기의 오러를 형성했다.

싸움이 시작된 지 채 몇 분이 되지 않았을 때였다.

칼의 세 배나 될 정도로 두꺼워진 오러는 형형하게 빛났고, 에르셈프의 검이 네 명을 향해 가로 방향으로 허공을 갈랐다.

그러자 검에서 뿜어져 나오는 오러가 거대한 반달 모양으로 퍼져 나가 동시에 네 명의 몸에 처박혔다.

“크헉!”

“아악!”

“윽…….”

벽 뒤로 나가떨어진 적들을 보며 에르셈프는 여유로운 몸짓으로 그들을 하나하나 살폈다.

그런데, 이상한 점이 있었다.

네 명 중 마지막 한 명인 ‘길리안 네이토르’라는 사내의 상태였다.

에르셈프가 눈살을 찌푸렸다.

이건…….

“환영?”

그리고 길리안의 모습이 점차 흐물거리기 시작했다.

“뭐지? 환영술을 쓸 수 있는 사람이 있었단 말인가?”

에르셈프는 칼끝으로 길리안의 환영을 주욱 베었다.

그러자 환영은 물거품이 사라지듯이 서서히 자취를 감추었다.

“젠장, 한 마리는 어디 있는 거야?”

길리안이 이 방에 있지 않다는 것이 에르셈프를 불안하게 했다. 자칫하면 혼자 있는 루나에게 접근할 수도 있기 때문이었다.

에르셈프는 빠르게 나머지 세 명의 이름표를 떼어 냈다.

곧이어 세 명이 탈락했다는 안내 방송이 나왔고, 에르셈프는 빠르게 방 밖을 나섰다.

나오자마자 보이는 건 복도 반대편에서 문을 살짝 열고 고개를 빼꼼 내밀고 있는 루나의 모습이었다.

“후우……. 다행이군.”

혹시라도 길리안이 루나에게 달려들었을까 봐 걱정했던 에르셈프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루나, 이쪽으로 와. 아직 한 마리가 남아 있어.”

* * *

문을 부수고 들어간 방 안에서 에르셈프가 어떻게 그들을 처치한 건지는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아주 빠른 시간 안에 그들이 나가떨어졌다는 건 알 수 있었다.

큰 소리와 함께 상대편 놈들의 신음 소리가 들린 후, 바로 탈락했다는 안내 방송이 나왔기 때문이다.

역시 에르셈프의 실력은 허세가 아닌 건가?

몇 분 안 되어 처치하고 나온 에르셈프는 나에게 밖으로 나오라고 말했다.

“한 마리가 남아 있다뇨?”

“뭔가 이상하다 했는데 한 명이 환영술을 쓴 거였어. 본체는 이 저택 안에 숨어 있을 거야.”

내가 천천히 걸어 나오며 묻자 그가 대답했다.

“혼자 있으면 위험할 수 있으니까……. 같이 다니는 게 나을 것 같아.”

“알겠어요.”

그렇게 나와 에르셈프는 저택을 탐험하기로 했다.

촛대 하나 없는 저택 내부는 너무 어두웠다. 샐러맨더를 이용해 밝게 불꽃을 피우긴 했지만 여기저기 망가진 탓에 자칫하면 넘어지기 일쑤였다.

“우왓!”

앞쪽 바닥이 무너져서 전부 파여 있던 걸 보지 못한 나는 발을 빠뜨리고 말았다.

“이런!”

다행히 에르셈프가 내 허리를 잡아 주어 넘어지지 않고 무사히 빠져나올 수 있었다.

하지만 그게 끝이 아니었다.

오르던 계단이 무너지기도 하고, 기둥을 손으로 잡았는데 쓰러지기도 했다.

“열악하기 짝이 없군.”

“이러다가 저택이 무너져서 먼저 죽는 건 아닐까요…….”

아슬아슬한 상황이 계속해서 반복되자, 이내 에르셈프는 나에게 손을 내밀었다.

“…….”

내가 의아한 얼굴로 쳐다보자 그가 괜히 인상을 쓰며 말했다.

“손, 잡으라고.”

멀뚱멀뚱한 얼굴로 그의 손을 내려다보았다.

그러자 그의 손이 약간 떨리는 것이 느껴졌다.

“아까부터 넘어질 뻔한 게 한두 번이 아니었어. 아니면… 혹시, 아직도 내가 무섭나?”

괜히 시선을 돌리며 나에게 말하는 에르셈프의 모습에 잠시 웃음이 터질 뻔했지만, 애써 참았다.

그리고 나는 살며시 그의 손을 잡았다.

[호감도가 3% 상승했습니다.]

예전에 여관에서 에르셈프가 내 손을 결박했을 때를 제외하면 이렇게 손을 맞대는 것은 처음이었다.

커다랗고 따뜻한 손이 내 손을 감싸자 왠지 모르게 긴장이 풀리는 것 같았다.

호감도가 오르는 건 안타까웠지만, 그래도 이런 상황에서 의지할 수 있는 사람이 있다는 것이 다행스럽게 여겨졌다.

“가자.”

에르셈프는 내 손을 잡은 채 나를 이끌었다.

훅, 당기는 힘에 종종걸음으로 그를 따라갈 수밖에 없었다.

“처, 천천히 가요.”

이제 남은 이름표는 단 하나.

그리고 에르셈프와 함께라면 그 이름표를 얻는 것에는 전혀 어려울 것이 없어 보였다.

처음에는 에르셈프를 노리고 들어온 사람들이라고 해서 크게 걱정이 되었지만…….

“이쪽으로 가 보자.”

그의 실력을 보니 걱정할 필요가 없다는 걸 알게 되었다.

삐걱삐걱.

불쾌한 소리가 이어졌다.

벌써 저택의 삼 층이었다.

남은 한 놈은 어찌나 잘 숨었는지 꼼꼼히 뒤졌지만 코빼기도 보이지 않았다.

나와 에르셈프는 놈이 눈치채지 못하도록 살금살금 걸었고, 여전히 손은 맞잡은 상태였다.

꼭 붙잡은 손에서는 축축하게 땀이 났지만 우리는 손을 놓지 않았다.

오히려 에르셈프는 중간중간 힘주어 내 손을 꽉 쥘 때가 있었다.

에르셈프도… 긴장한 건가?

그가 나보다 앞서서 걸었기 때문에 그의 얼굴을 확인할 수 없었다.

“잠깐만요, 에르셈프. 욕실 안쪽도 확인해 봐요.”

복도 끝에 있는 욕실을 한번 훑고 나가려고 했던 에르셈프에게 내가 말했다.

욕조 바깥으로 샤워 커튼이 쳐져 있었고, 왠지 모르게 무언가 안에 있을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리고, 나는 보았다.

욕실 거울을 통해 낯선 사내의 모습이 비치는 것을.

사내는 반쯤 쳐 놓은 커튼 안쪽에 몸을 구기고 숨어서 우리를 향해 칼을 겨누고 있었다.

“에르셈프!”

그리고 순식간이었다.

내가 거울을 통해 사내와 눈이 마주친 것과, 내가 소리친 것.

그리고 사내가 칼을 들고 에르셈프를 향해 달려든 것은.

부욱-!

커튼이 찢어지며 사내의 날카로운 단검이 드러났고, 에르셈프는 나를 자신의 뒤쪽으로 숨겼다.

그리고 동시에 사내의 손목을 부여잡았다.

단검을 쥐고 있는 사내의 손목이 파들파들 떨렸고, 에르셈프는 부서질 듯이 더욱 힘을 주었다.

“여기 있었군. 쥐새끼같이.”

하지만 그때였다.

사내의 몸이 수욱-하는 소리와 함께 흩어지듯이 사라지며 어둠 속으로 자취를 감추었다.

“!!”

“길리안 네이토르? 암술가인가?”

사내의 이름표를 확인한 내가 중얼거렸다.

세이먼이 말해 준 상대편의 암술가 한 명이 이놈이었나 보다.

어둠을 매개로 하여 몸을 숨기는 능력.

자신과 똑같은 형체를 만들어 내는 환영술.

전부 다 암술가가 쓰는 스킬들이었다.

암술가는 어둠 속에서 물 만난 물고기처럼 움직일 수 있다고 들었다. 다른 적성을 가진 사람들에 비해 월등한 동체 시력을 가지고 있었고, 대부분의 스킬들이 어둠을 이용하기 때문이었다.

그때, 그림자처럼 자신을 감추었던 길리안이 욕실 문 쪽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그러고는 다시금 단검을 쥔 채 에르셈프를 향해 돌진했다.

“단검에 무언가 묻어 있어요!”

칼끝에 묻은 보라색 액체는 독인 것 같았다.

한 번이라도 저 칼을 맞을 시, 목숨을 잃을 것 같았다.

“알고 있어, 루나.”

휙!

길리안이 단검을 휘둘렀고, 에르셈프가 가볍게 피하며 자세를 바꾸었다.

“나는 모든 독에 내성이 있어. 형이 그걸 모르지 않을 텐데?”

“이번엔 다를 겁니다. 왕자님을 위해 특별히 공수해 온 것이니까요.”

“나는 정계에 아무런 관심이 없다고 누누이 말했어. 그런데도 이렇게까지 하는 이유가 뭐지? 그렇게 내가 겁이 나나?”

휙! 휙!

길리안이 계속해서 단검을 휘둘렀고, 에르셈프는 가뿐하게 피할 뿐이었다.

“라인하르트 왕국의 어머니를 죽이신 분의 말을 어떻게 믿겠습니까? 왕자님.”

“…지금 뭐라고 했지?”

길리안의 말에 갑자기 에르셈프의 분위기가 바뀌었다.

지금까지 수비만을 일관하며 공격을 하지 않던 그에게서 살기가 느껴지는 것이다.

왕국의 어머니라면… 에르셈프의 엄마를 말하는 것일 텐데. 무슨 일이 있었던 건가?

“애초에 반역죄로 목이 날아가셨어야 했을 분이 아직까지 살아 계신 건 폐하의 넓은 아량 덕분이시지요. 그러니 처음부터…….”

“너 말이야.”

“…….”

“방금 네가 한 말. 목숨을 걸고 보장할 수 있나?”

에르셈프의 등이 잘게 떨리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그는 참을 수 없는 화를 느끼고 있는 것 같았다.

하지만 길리안 놈은 입을 멈출 생각이 없었다.

“요새 국왕 폐하의 정신이 이상하신 건 알고 계십니까? 전부 다 왕비님을 그리워하다가 미친 것이라는 소문이 파다한데, 그것에 대한 죄책감은 전혀 없으신지요?”

“…….”

길리안은 마치 에르셈프를 분노하게 만들려고 작정한 사람 같았다.

게임 설정상 에르셈프에게 복잡한 과거가 있을 것이라 생각은 했지만 이 정도로 파급력을 가질 줄은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대체 어떤 일이 있었길래, 에르셈프는 살아온 내내 살해 협박을 당하는 걸까.

그리고 그때, 에르셈프가 나를 향해 입을 열었다.

“루나.”

“…….”

“이 경기, 꼭 이겨야 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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