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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섯명은 너무 많잖아요 (84)화 (84/156)
  • 83화. 에르셈프와 함께(2)

    지금까지 말이 없던 샐라임은 상황을 정확하게 파악하고 있던 모양이었다.

    나지막한 목소리가 내 귓가에 들려왔다.

    “저 주황 머리, 아닌 척하고 있지만 오른팔을 심하게 다쳤어.”

    “…어떻게 안 거죠?”

    “한 손 검을 쓰는데 두 손을 모두 쓰고 있어. 게다가 오른손잡이인 주제에 왼손이 먼저 나가고 있고.”

    “…그러고 보니 그렇네요. 보통 오른손잡이면 오른손을 앞에 놓죠.”

    “그리고 저 배신자 자식은 공격력이 터무니없이 약해. 사용하는 마법은 꽤 위협적인 것 같지만 적중률이 너무 낮아. 아까부터 네 뒤에 있었는데 한 번을 못 맞추더군.”

    샐라임의 말에 나는 정령을 불러 곧장 주황 머리의 팔을 향해 공격하도록 지시했다.

    카사는 이미 정령계로 돌아간 지 오래였고, 남은 건 샐러맨더 하나였다.

    샐러맨더는 공중에서 주황 머리의 공격을 쏙쏙 피하며 자유롭게 화염을 내뿜었다.

    “좋았어. 그렇게만 하면 돼.”

    몸통을 향해 공격을 내뿜었던 샐러맨더가 갑자기 팔을 향해 각도를 바꾸자 주황 머리가 눈에 띄게 당황하는 것이 느껴졌다.

    그는 몸의 각도를 틀어 최대한 오른팔을 보호했고, 나는 그걸 놓치지 않고 볼 수 있었다.

    샐러맨더가 주황 머리를 상대할 동안, 내가 해야 할 일은 저 망할 팀원을 처리하는 거였다.

    대체 배신을 해서 얻는 게 뭔지 모르겠지만 그건 지금 생각할 일이 아니었다.

    나를 기절시켜서 저택 안으로 끌고 갈 생각이었다고? 그렇게 될 순 없지.

    나는 검을 집어넣은 뒤, 겐트에게로 돌진했다.

    겐트는 확실히 공격력이 약한 건지 당황한 표정으로 나를 마주할 뿐이었다.

    퍽!

    내가 그의 면상을 후려갈겼다.

    “장난하냐? 이럴 거였으면서 대기실에서 입은 왜 턴 건데?”

    퍽!

    겐트의 얼굴이 왼쪽으로 돌아갔다.

    “놈이 얼마나 눈치가 빠른지 알아? 나도 그딴 3 왕자 놈한테 빌빌 기는 거 엿 같다고!”

    그는 분명 ‘3 왕자’라고 했다.

    그러면 이 녀석들이 노리는 게 에르셈프란 거잖아? 대체 어째서?

    나는 알 수 없는 표정으로 그를 더 추궁했다.

    “왜 에르셈프를 노리는 거지? 날 인질로 삼을 셈이었던 건가?”

    “이제 알았나? 어서 날 탈락시켜. 이미 끝났으니까.”

    그는 얄미운 표정을 하며 나에게 입을 놀렸다.

    나는 고개를 뒤로 돌려 샐러맨더와 주황 머리의 싸움을 힐끗 바라보았다.

    샐러맨더의 약세였다.

    저렇게 놔뒀다간 또 강제로 정령계로 돌아갈 게 뻔해.

    지익.

    나는 겐트의 이름표를 떼어 냈다.

    무조건 상대편이 이름표를 떼어 내란 조건은 없었잖아?

    “‘히토리움 겐트’ 탈락. ‘히토리움 겐트’ 탈락. 1분 안에 자동 워프가 진행됩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겐트는 그 자리에서 사라졌다.

    탈락하면 저렇게 강제로 워프되는 시스템인 모양이었다.

    나는 겐트의 이름표를 내 가슴팍에 붙이며 주황 머리에게로 다가갔다.

    “샐러맨더, 이제 그만해도 좋아.”

    샐러맨더가 많이 지친 것 같았다.

    싸움이 길어질 것 같은 예감에 샐러맨더를 잠시 쉬도록 하는 게 좋을 것 같았다.

    “순순히 끌려가 주면 얼마나 좋아. 다치지도 않고.”

    주황 머리가 나를 향해 내뱉었다.

    “너희의 계략이 뭐지?”

    주황 머리는 내 물음을 무시하며 검에 시퍼런 오러를 두르더니 나를 향해 휘둘렀다.

    하얀빛으로 보이는 공격이 나를 향해 순식간에 도달했고, 나는 그것을 피하며 주황 머리에게로 달려갔다.

    그리고, 그의 오른팔을 노리기 시작했다.

    “눈치챈 모양이군.”

    집중적으로 오른손을 노리자 주황 머리가 말했다.

    하지만 그의 실력은 실로 대단했다. 내가 아무리 오른팔을 노리려고 해도 잽싸게 몸을 피하며 검을 자유자재로 쓰는 것이다.

    그때, 샐라임의 목소리가 한 번 더 들려왔다.

    “오른손이 안 되면 왼손을 노려. 왼손이 불능 상태가 되면 저놈은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어질 거야.”

    샐라임의 말에 내가 오른팔을 노리는 척을 하다가 빙글, 몸을 돌렸다.

    당연히 오른팔을 공격할 줄 알았던 놈이 왼쪽 손으로 든 검을 앞으로 내밀었고, 나는 미세하게 각도를 바꾸어 그의 왼팔을 칼등으로 내리쳤다.

    “아악!”

    그의 팔을 자를 순 없으니 칼등으로 내리칠 수밖에.

    뼈가 부러지는 소리가 나며 그는 엄청난 비명을 질렀다.

    “으윽…….”

    그는 왼팔을 부여잡으며 자리에 주저앉았고, 나는 그에게 다가갔다.

    “말해. 왜 우리 팀 사람들을 매수한 건지.”

    “퉤!”

    내 질문에 주황 머리가 침을 탁! 뱉었다.

    그는 말할 생각이 없어 보였다.

    다른 전투였다면 검을 뽑아 협박이라도 했을 텐데, 비무 대회에서는 생명에 위협이 가면 안 된다는 전제가 있기에 불가능했다.

    그리고 그때, 주황 머리가 스스로 자신의 이름표를 떼어 냈다.

    떼어 낸 이름표는 바닥에 떨어졌다.

    “인질로 삼기엔 꽤 센 상대였군. 얕봤다가 일을 그르쳤어.”

    “‘펜토니 에이트’ 탈락, ‘펜토니 에이트’ 탈락.”

    안내 방송이 흘러나왔고, 그는 비릿한 미소를 흘리다 이내 자취를 감추었다.

    “젠장. 왜 이딴 일이 벌어진 거지.”

    싸움을 하다 보니 정원 안쪽까지 들어온 탓에 나는 풀을 헤치고 바깥으로 나가야만 했다.

    그리고 커다란 정원의 정중앙에 있는 분수대에 다다르자, 바로 앞에 저택의 문이 보였다.

    겐트가 다들 저택 안에 모여 있다고 하니 나도 저 안으로 들어가야만 했다.

    “에르셈프는 대체 어디에 있는 거야.”

    시합이 시작되자마자 자신을 찾으라고 했던 에르셈프의 말이 무색할 만큼 그는 코빼기도 보이지 않았다.

    어쩔 수 없이 저택의 거대한 문 앞으로 걸어갔다.

    굳게 닫혀 있는 문.

    이 안으로 들어가면 어떤 광경이 펼쳐질지 알 수 없었다.

    마치 괴물의 입으로 자진해서 들어가는 기분이었지만, 이름표를 떼야만 했다.

    “이름표 떼기 게임이 이렇게 살벌하게 진행될 줄이야.”

    끼이익-

    나는 심호흡을 한 뒤 거대한 문을 당겨 안으로 들어갔다.

    * * *

    저택 안으로 들어가자 어둑어둑하고 허름한 중앙 홀이 나왔다.

    상대편 팀이 바로 등장할 것이라고 예상한 나는 인기척도 없이 고요한 분위기에 숨을 죽였다.

    거대한 저택에는 수십 개의 방이 있을 것이었다. 그 방 중 어디에 그 사람들이 모여 있는지는 알 수 없었다.

    “방 하나하나 찾아보는 수밖에.”

    나는 중앙 홀의 계단을 올라 2층으로 올라갔다.

    폐저택답게 계단을 오를 때마다 나무가 끼익, 거리는 기분 나쁜 소리를 냈으며 곧 있으면 부서질 것처럼 아슬아슬한 느낌을 주었다.

    첫 번째 방.

    문이 닫혀 있었다.

    나는 긴장되는 마음에 심호흡을 한 번 내쉰 뒤 문고리를 잡았다.

    철컥.

    문고리를 돌리고 조심스럽게 문을 열었다.

    만약에 놈들이 안에 있다면 순식간에 공격이 날아올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벽 뒤에 숨어 안쪽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어두워서 잘 보이지 않는 침실이 나올 뿐, 아무도 없는 것 같았다.

    “아오. 진짜 폐허 탐험 같잖아.”

    그리고 다음은 두 번째 방이었다.

    똑같이 문 앞에 바싹 붙어 안에서 소리가 나나 귀를 기울이고 있었는데,

    “펜토니 그 새끼는 왜 벌써 탈락하고 지랄이야. 그나마 3 왕자 놈을 상대할 수 있을 텐데. 대체 누가 탈락시킨 거지?”

    복도의 반대편 쪽에서 두 사람이 문을 열고 나오며 대화를 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헉!

    나는 문고리를 잡았던 문을 잽싸게 열고 들어가 숨을 죽였다.

    그런데 그때,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더불어 사람의 인기척과 몸의 단단한 느낌까지도.

    “날 찾으랬더니 이렇게 찾아올 줄은 몰랐군.”

    문을 열고 들어가자마자 마주친 사람은 에르셈프였다.

    거리가 너무 가까워 순식간에 나는 그의 품에 안기고 말았다.

    “여, 여기에 있었어요!?”

    내가 당황한 얼굴로 그에게서 빠져나오며 물었다.

    “응. 이 방에 떨어졌거든. 상황을 보려고 계속 여기에 있었어.”

    두 번째 방은 물건을 임시로 보관하는 작은 비품실 같은 방이었다. 그만큼 공간이 좁아 에르셈프와 딱 붙어 있을 수밖에 없었다.

    내가 벽 쪽으로 몸을 최대한 붙이며 그와 멀리 떨어지려 하자 그가 말했다.

    “좁잖아.”

    “…….”

    “괜히 소리 내서 눈치채게 하지 말고 이쪽으로 오는 게 좋겠어. 왜 귀는 빨개진 거지?”

    어두운 방에서도 내 귀가 붉어진 게 눈에 띈 건가. 그런데 굳이 언급해야 할 이유가 있냐고!

    “긴장하면 귀가 빨개져요. 원래.”

    능청스러운 목소리로 대답했다.

    “루나, 팀원 두 명이 우릴 배신했어.”

    “알고 있어요. 저도 저택 바깥에서 한바탕하고 왔으니까.”

    “벌써 알고 있었다니. 문제없겠군.”

    “뭐, 계획이라도 있는 거예요?”

    “계획?”

    “상대는 넷에 우리는 둘이잖아요. 이길 방법을 생각해 보았냐구요.”

    “응.”

    “뭔데요?”

    “나가서 공격하기.”

    “네?”

    “나가서 공격하면 되잖아. 더 대단한 계획이 필요한가?”

    에르셈프가 내 귀에 대고 저음으로 속삭였다.

    나는 한숨을 내쉬며 대꾸했다.

    “아니, 그래도 혹시 모르잖아요. 독이 발린 화살이라도 날아오면 어쩔 거예요. 정신계 공격으로 잠재워 버린다거나.”

    이 남자는 대책이 없는 거야, 아니면 진짜 말도 안 되게 센 거야?

    예전에 암살자 앞에서 에르셈프의 실력을 잠깐 보긴 했지만 제대로 알 수는 없었다.

    너무 순간이기도 했고, 정신이 없어서 기억이 잘 나지 않는 탓이었다.

    저번에 말했던 ‘왕국에서 자길 이길 자가 없다’는 말은 허세인 건가, 진짜인 건가?

    진실을 알 수는 없었지만, 이 상황에서도 덤덤한 표정을 유지하는 에르셈프를 보니 무언가 믿는 구석은 있는 것 같기도 했다.

    “넌 나오지 마. 다치면, 아니, 이름표를 뺏기면 곤란하니까.”

    “혼자서 어떻게 넷을 상대해요.”

    내가 대꾸하자 갑자기 에르셈프가 나에게 고개를 휙 들이밀었다.

    순식간에 그의 얼굴이 내 앞에 다가왔다.

    그는 허리를 굽혀 나와 눈을 마주쳤고, 나는 나도 모르게 숨을 멈추었다.

    “뭐, 뭐 하는 거예요.”

    살짝 감긴 눈꺼풀과 보라색 눈동자가 지그시 나를 바라보았다.

    그는 잠시 동안 내 눈을 보더니, 나지막이 입을 열었다.

    “잠자코 여기 있어.”

    그의 말에 나는 잠시 할 말을 잃었다.

    무슨 말을 하지 못하고 입술만 달싹이고 있었는데, 에르셈프가 나를 바라보며 얕게 입꼬리를 올렸다.

    “알겠지?”

    그가 나에게 확인 사살을 하자 나는 어쩔 수 없이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그래, 에르셈프가 가서 먼저 공격하다가, 상황이 안 좋아지면 내가 뒤에서 나타나는 것도 좋은 방법일 테니까.

    말을 끝마친 뒤에도 나를 가만히 바라보던 그가 이내 허리를 펴더니 문고리를 잡았다.

    “잠깐만요, 에르셈프.”

    “응?”

    내가 그를 다시 붙잡았다.

    “다시 생각해도 아닌 거 같아요. 그들은 살의를 가지고 있어요. 에르셈프를 어떻게 해 버리려는 생각을 하고 있다고요.”

    “그런 것 따위는 중요하지 않아.”

    “…….”

    “살면서 수없이 당해 온 게 살해 협박이야. 아마도 정치적 견제의 일환일 테니까.”

    “정치적 견제의 일환……? 에르셈프는 이 상황이 안 무서워요?”

    내가 입술을 꼭 깨물며 그에게 물었다.

    그러자 그의 눈동자가 잘게 흔들렸다.

    “걱정해 주는 건가, 지금?”

    “아뇨. 걱정은 아니고요. 제가 꼭 이겨야 해서요.”

    “…그렇군. 나도 딱히 널 걱정하는 건 아니야.”

    에르셈프는 그 말을 끝으로 문을 열었다.

    밖으로 나간 그가 성큼성큼 걸어가 그들이 모여 있는 것으로 추정되는 방 앞에 섰다.

    나는 문을 조금 열고 그를 지켜봤고, 그는 내 쪽을 힐끔 쳐다봤다.

    그리고.

    쾅!

    그가 시원한 발길질로 순식간에 문을 박살 내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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