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1화. 다섯 남자(2)
다섯 남자가 주는 정신적 압박은 생각보다 컸다.
그들 사이에 둘러싸여 오고 가는 이야기를 들으려니 정신이 다 없는 것이다!
세이먼을 한 번 봤다가, 에르셈프에게 눈이 갔고, 잰퓨어의 말을 들었다가, 레크리드에게 대답을 했으며, 베탄의 눈치를 봤다.
게다가 다들 키는 왜 이렇게 큰 거야, 목 아프게!
나는 남자들을 이리저리 바라보며 어떻게 빠져나가야 하나 궁리를 하고 있었다.
왜 이런 구도가 형성되어서 나를 곤란하게 만드는 거냐고…….
다섯 명 사이에서 힘들어하는 나를 아는 건지, 때마침 퀘스트가 내려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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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9 호감도 퀘스트
제목: ‘선택은 하나’
내용: 다섯 남자 주인공들 중 단 한 명의 요청을 받아 함께 시간을 보내시오.
제한 시간: 없음
보상: 랜덤 카드 1장
페널티: 본선 1차 팀전 출전 불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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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주인공들 중 한 명의 요청을 받아 시간을 보내라고?
무슨 요청?
그렇게 의아해하고 있었는데, 귀신 같게도 그들이 말을 꺼내 왔다.
“루이아나 씨, 제 마음이에요. 행운석이랍니다.”
그가 수줍은 듯한 표정으로 연분홍빛이 도는 작은 돌을 나에게 건넸다.
“레크리드……. 어쩜 이런…….”
그는 볼을 약간 붉힌 채 시선을 이리저리 굴렸다.
“별이 두 개인 이성석이에요. 이성석은 보통 행운의 의미로들 주니까요.”
나는 그가 준 연분홍색 돌을 자세히 들여다보았다.
신성석은 처음 본지라 놀랍기도 했고, 생각보다 평범해서 신기하기도 했다.
작은 별이 두 개 박혀 있는 돌을 손에 꼭 쥐자 왠지 모르게 행운이 나에게 깃드는 것 같았다.
“이거 귀한 것 아닌가요?”
내가 묻자 레크리드가 배시시 웃으며 대답했다.
“이성석까지는 구할 수 있어요. 그 위부터는 거의 불가능하지만요.”
나는 레크리드를 사랑스러운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그도 멋쩍은 웃음을 지으며 나를 바라보았는데, 그 모습이 참 강아지 같아 머리라도 쓰다듬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잘생기고 귀엽고 센스 있고 다 한다, 다 해…….
레크리드의 선물에 뜻밖의 감동을 받고 있는데, 불쑥 다른 목소리가 끼어들어 왔다.
“괜히 부정 타면 어떡해, 루나?”
이 목소리는 잰퓨어의 목소리다.
그리고 이런 말을 할 사람도 잰퓨어밖에 없지.
“무슨 소리야. 선물 주신 분 앞에서 예의가 아니지.”
내가 따끔하게 한마디를 하자 잰퓨어가 입을 삐죽거렸다.
“행운석 같은 미신이 언제 적 이야긴데……. 우리 할머니도 안 믿겠는걸. 난 또 사성석이라도 되는 줄 알았네.”
잰퓨어 말대로 일성석이나 이성석은 효과가 미미해 믿는 사람들이 거의 없다고 하긴 했다.
하지만 그러면 뭐 어떠한가. 마음이 예쁜 거지.
“성의가 중요한 거잖아.”
“그건 그렇고, 루나. 나랑 뒤쪽 숲에 가지 않을래?”
잰퓨어가 해맑은 표정으로 나에게 묻자, 갑자기 세이먼이 그와 내 사이를 가로막으며 앞에 나타났다.
“제가 경기에 대한 팁을 알려 줄게요. 같이 학생회실로 가요.”
그런데 세이먼의 말이 끝나자마자 에르셈프가 나를 향해 몸을 돌렸다.
“루나, 잊었나? 내가 너와 같은 팀이라는 걸.”
“작년 비무 대회에 출전해 본 경험이 있는 건 저뿐일 텐데요.”
“루나, 너에게 강요할 생각은 없어. 하지만 팀워크가 가장 중요하다는 걸 모르는 건 아니겠지?”
세이먼이 침착하게 대답하자 에르셈프가 오히려 나를 보며 물었다.
지금 뭐 하자는 거야, 다들.
내가 당황스러운 표정을 짓자,
“루나, 네 공격 패턴은 내가 가장 잘 알잖아. 운디네를 이용해서 수련을 도와줄게.”
잰퓨어가 내 머리를 쓰다듬었다. 고민할 것 없이 자신에게 오라는 듯한 표정이었다.
“루이아나 씨. 행운석뿐만 아니라 다른 물건들도 필요할 테니 저와 상점에 가는 건 어때요? 같이 구경하면 재미있을 텐데.”
레크리드 또한 지지 않았다.
“물건이 필요하긴 하죠…….”
“수련도 중요하지만 휴식도 중요하고, 또 철저한 준비를 하는 것도 필요하잖아요? 어서 저와 가요. 이번에 새로 들어온 물건도 많고…….”
이게 뭔데 대체.
나는 이 상황에서 오로지 나를 붙잡지 않는 남자를 흘끗 쳐다보았다.
무려 호감도 0%의 남자.
그는 내가 난처하다는 걸 눈치챈 듯 작게 코웃음을 지었다.
젠장, 나도 이 상황이 웃긴 거 알아. 그렇게 대놓고 웃을 필요는 없잖아.
그는 한쪽 입꼬리를 올린 채 상황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고는, 조용하게 내 귀에 대고 속삭였다.
“뭐 해, 수련하러 안 갈 거야?”
그의 말에 나는 정신을 차렸다.
그래, 수련이 가장 중요하지.
잠시 망설이던 나는 결국 그의 말에 베탄에게로 다가갔다.
“…루나.”
“…유감이군, 루나.”
“다시 생각해 봐, 루나.”
“루이아나 씨…….”
다들 내 이름 좀 그만 불러.
나는 애써 네 명의 시선을 무시하며 베탄을 쳐다보았다.
딱히 베탄이 더 좋아서 그런 건 아니었다.
좋은 걸로 따지면 레크리드가 제일이고, 나머지는… 고를 수가 없었다.
다 잘생기고, 다 멋있고, 각자의 매력이 너무 다르단 말이야. 이렇게 많은 선택지를 주는 건 너무 어렵다고.
오성석을 손에 넣으면 호감도가 올라도 상관이 없다는 사실을 깨달은 후부터 나는 이런 상황에 전전긍긍하지 않아도 되었다.
그러니까 한마디로, 다섯 남자 중에서 좋은 상대를 이리저리 고를 수 있게 되었다는 거다.
하하, 내 인생에 이런 일이…….
나는 묘하게 흐뭇한 마음으로 베탄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그래, 오늘은 베탄, 너다.
나는 나머지 네 명의 남자들에게 깔끔히 인사를 했다.
“저는 따로 수련해야 하는 일이 있어서요.”
“…….”
“내일부터 바로 다른 팀의 경기가 시작되니 시간이 없네요.”
그러고는 베탄을 따라 자리를 뜨기 위해 발걸음을 뗐다.
[‘선택은 하나’ 퀘스트에 성공했습니다!]
[보상으로 랜덤 카드 1장이 제공됩니다…….]
시스템의 음성과 동시에 베탄이 나지막하게 말했다.
“잘 생각했어.”
* * *
베탄과 함께 수련하기 전, 나는 랜덤 카드가 무엇인지 확인해 보기 위해 기숙사에 들렀다.
[랜덤 카드 1장을 확인하시겠습니까?]
내가 ‘예’ 선택지를 고르자 눈앞에 카드 정보가 나열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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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카드 1
남자 주인공 한 명의 호감도를 5% 낮출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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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와!”
정보를 확인한 내가 탄성을 질렀다. 내가 따로 노력하지 않아도 호감도를 낮출 수 있는 방법이 주어지다니.
지금은 그리 중요해 보이지 않아도, 언젠가 위급한 상황에서는 아주 도움이 될 것만 같은 카드였다.
이어서 나는 두 번째 랜덤 카드를 확인했다.
[랜덤 카드 1장을 확인하시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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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카드 2
남자 주인공 한 명과 24시간 같이 있을 수 있다.
+
“뭐야!”
첫 번째 카드와 완전히 상반되는 카드였다.
24시간 같이 있는 짓을 왜 한다는 말인가. 이제는 조금 즐겨도 된다고 하지만, 24시간이나 붙어 있는 건 분명 위험할 것이었다.
랜덤 카드라고 하더니, 다 쓸모 있는 카드가 나오는 건 아니다, 이건가.
나는 시야에 펼쳐지는 두 개의 카드를 훑어보았다.
“보상이 랜덤 카드로 나온다는 것은…….”
카드를 적재적소에 쓰는 것이 앞으로 중요할 것이라 말해 주는 것 같았다.
“게임이 더 복잡해지는 건 아니겠지.”
혼자 중얼거린 나는 랜덤 카드를 아이템창에 쏙 넣어 놓은 뒤, 기다리고 있을 베탄에게 가기 위해 방에서 나왔다.
밖을 나서자마자 보이는 건 언덕 위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는 베탄의 모습이었다.
“이제 왔나?”
내가 나오는 소리에 뒤를 돈 베탄이 낮은 음성으로 물었다.
“좀 늦었죠? 죄송해요.”
내가 멋쩍은 얼굴로 말하며 그에게 다가갔다.
이르게 물든 빨간 단풍나무 아래에 서 있는 베탄의 모습은 안 어울리는 것 같으면서도 묘하게 어울렸다.
“많이 기다렸어요?”
“…….”
내 물음에 그는 대답이 없었다.
때마침 여름이 끝나 선선해진 가을바람이 살랑살랑 불어왔고, 내 머리가 그에 맞춰 가볍게 흩날렸다.
부드러운 은발이 흔들리자 햇빛이 반사되며 아름답게 빛이 났다.
그리고 이상하게도 베탄은 나를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왜…요? 뭐 묻었나요?”
시선을 느낀 내가 물었다. 그의 붉은 눈동자에, 갈 곳 없이 사로잡힌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베탄은 얼굴을 휙 돌리며 발걸음을 뗐다.
“아무것도 아니야. 가지.”
뭐야, 싱겁게.
어제 내가 한 짓을 추궁하려는 건 아니겠지?
나는 보폭이 큰 그의 걸음을 맞추기 위해 뒤에서 쫓아가며, 그에게 말했다.
약간은 찔리는 얼굴로.
“오늘은 이상한 짓 안 할게요.”
* * *
본선 1차 팀전의 막은 내일 열린다.
하지만 나는 네 개의 경기 중 네 번째 순서라서, 가장 마지막 날에 시합을 하게 되었다.
그러니 나에게는 아직 나흘의 기간이 남아 있다는 것이다.
아직 미숙한 ‘찔러 베기’를 완성해야 했고, 검술을 연습하느라 잠시 소홀했던 정령술도 다시금 감을 잡아야 했다.
그 때문에 나는 앞선 경기를 관람하는 것을 포기하고, 연습에만 몰두했다.
공정한 시합을 위해 경기가 시작되고 나서는 팀원끼리의 모임을 막는다. 이른 순서로 시합하게 될 팀들이 뒤쪽에 있는 팀들보다 불리하기 때문이다.
대체 어떻게 아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팀원들끼리 따로 모임을 형성할 경우 자동 탈락이 된다고 단단히 경고 공지가 되어 있었다.
경기를 보면 괜히 긴장이 될 것 같아 원래도 볼 생각이 없었던 나는 겸사겸사 잘 되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제, 드디어 대망의 날인 네 번째 경기 날이 다가왔다.
화살표 방향을 따라 선수 대기실에 들어가자, 미리 와 있던 에르셈프가 눈에 들어왔다.
“앞선 경기를 보러 오지 않았던데……. 무슨 일이 있었던 건가?”
“그냥 수련에 몰두하고 싶어서요. 계속 연습만 하다 왔어요. 그나저나 무슨 게임이죠?”
아직 경기 룰을 알지 못하는 나에게 에르셈프가 친절하게 설명해 주었다.
“‘이름표 떼기’ 게임이야. 상대 팀의 이름표 4개를 모두 획득하면 성공. 이름표가 떼어지면 탈락인 거지.”
“간단하네요. 제한 시간은요?”
“따로 없어. 승부가 날 때까지 진행될 거야.”
생명에 위협이 가지 않아야 한다는 암묵적인 룰이 존재할 뿐, 그 밖의 룰은 따로 존재하지 않는다고 했다.
사실상 가슴팍에 붙어 있는 이름표만 떼어 내면 되는 것이기에 강한 공격력보다는 민첩성 위주의 능력이 필요한 게임이었다.
그렇게 에르셈프와 대화를 하고 있는데, 벌컥 문이 열리며 두 명의 사람들이 들어왔다.
“에이브입니다.”
“겐트라고 합니다.”
나머지 팀원들이었다.
같이 들어온 것도 그렇고, 친근해 보이는 것이, 서로 아는 사이인 것 같았다.
서글서글한 인상을 가지고 있는 에이브와 겐트는 사람 좋게 말을 걸었다.
“라인하르트 왕국의 왕자님을 뵙습니다. 이렇게 뵐 수 있다니, 정말 영광입니다.”
에르셈프가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며 인사를 받았고, 에이브와 겐트가 말을 이었다.
“그쪽은 루이아나 윌리어스 씨 맞으시죠? 예선전 때 아주 인상 깊게 보았습니다.”
“세이프 라인 앞에서의 싸움은 정말 훌륭했어요. 그때 상대하던 마법사 한 명은 꽤 까다로운 녀석인데 말이에요.”
두 사람은 사회성이 좋은 건지 아주 친근하게 다가왔다.
에르셈프는 이런 일이 낯설지 않은 건지 대충 대꾸를 하며 상대해 주었다.
나는 왠지 부담스러운 마음에 말이 편하게 나오지는 않았지만 최대한 성의 있게 대답해 주려 노력했다.
그래도 같은 팀인데 친해지는 것도 중요하겠지.
시합은 약 삼십 분이 남은 상태.
우리는 각자의 적성과 능력을 밝히기로 했다. 전력을 다하기 위해서 서로를 알아야 하는 것이 중요하니까.
“저와 겐트는 둘 다 마법A반입니다. 운이 좋게도 저희 팀은 실력자들만 모였네요. 하하.”
“이기는 건 식은 죽 먹기겠어요. 저희 실력은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그러자 에르셈프가 무표정한 얼굴로 그들에게 물었다.
“주로 사용하는 능력이 무엇이지?”
쓸데없는 말은 됐고, 핵심만 말하라는 말투였다.
겐트가 입을 열려는 에이브를 저지하며 말했다.
“에이브는 스턴 능력을, 저는 새로 변신하는 능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새로 변신?”
“그렇죠. 시합이 시작되면 제가 먼저 정찰을 나가는 것도 괜찮을 겁니다. 경기장이 만만치 않게 넓을 테니까요.”
원래라면 내가 샐러맨더로 정찰을 보냈을 텐데, 겐트가 새로 변신할 수 있다면 겐트를 보내는 게 나았다.
샐러맨더와는 구체적인 소통을 할 수 없으니 말이다.
“경기마다 장소가 바뀌니 예상이 가지 않는군. 이번 경기에는 어떤 곳이 나오려나.”
“장소가 바뀌어요?”
내가 에르셈프에게 물었다.
“공정하게 하기 위해 각 시합마다 경기장이 바뀌어. 첫 번째 경기는 숲속이었고, 두 번째 경기는 사막, 세 번째는 해안가였지.”
“네 번째 경기장은 무엇일까요?”
에이브가 질문을 던졌지만 아무도 대답하지 않았다.
나 또한 전혀 예상이 되지 않았다. 지금까지 나온 장소로 봐서는 면적이 넓은 곳인 것 같은데, 딱히 떠오르는 것은 없었다.
“사막이었던 두 번째 경기가 정말 장관이었죠. 모래 폭풍이 몰아치는 상황에서 발은 푹푹 빠지고, 시간이 길어질수록 체력은 고갈되고, 아주 볼만했어요. 화면에 소리가 안 나오는 게 너무 아쉽더라니까요. 거기 팀 참가자 중 한 명인 마법사가 저희와 같은 반이었는데, 지금 몸져누웠어요.”
겐트는 말이 많은 편인지 계속해서 주절주절 입을 나불거렸다.
경기 시작 시간이 가까워지자 나는 긴장이 되어 말수가 점점 적어졌고, 입은 바싹 말라 가는 것 같았다.
쓸 수 있는 스킬이나 예상되는 상황들을 머릿속으로 떠올려 보려 했지만 겐트가 하도 떠들어서 통 집중이 되지 않아 그만두었다.
슬쩍 에르셈프를 쳐다보자 그는 검지로 책상을 톡톡 두드리고 있었다. 아까부터 계속하는 것이, 버릇인 것 같았다.
그때, 안내 방송이 흘러나왔다.
“경기 시작까지 5분 남았습니다. 참가자들은 모두 경기장 입구로 나와 주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