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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섯명은 너무 많잖아요 (81)화 (81/156)
  • 80화. 다섯 남자(1)

    당황한 내가 몸을 뒤로 물러섰다.

    그는 잠결이었던 건지 꿈을 꾸고 있었던 건지 나를 향해 달콤하게 속삭였다.

    마치 연인을 대하는 목소리로.

    “선생님……?”

    그러자 그가 희미하게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

    “그렇게 바랐는데 이제야 왔네. 내 품으로 와.”

    순간 내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평소엔 다정한 말은커녕 말 자체를 하지도 않는 사람이었다. 예외로 입을 열 때는 항상 퉁명스러운 눈빛과 딱딱한 말투뿐이었으며 나와 눈을 제대로 마주치지도 않았다.

    그런 그가 나를 향해 손을 뻗었다. 그러고는 내 손을 살며시 잡더니 자신의 품으로 끌고 갔다.

    “여기에만 있어……. 가지 마…….”

    다행히 잠결이라 손만 살짝 당기고 더 이상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나를 연인으로 착각한 모양일까? 아니면 보고 싶었던 존재가 그의 꿈에 나타난 것일까?

    내 손을 잡은 그의 손이 따스했다.

    “…….”

    나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손을 그에게 맡겨 놓을 수밖에 없었다.

    그는 다시 잠이 든 건지 반쯤 떴던 눈을 다시 감고는 새근새근 숨을 내뱉었다.

    “나, 날 다른 사람으로 착각한 건가.”

    그는 내 손을 꽉 잡고는 놔주지 않았다.

    이, 이거 놓으란 말이야.

    손을 빼내려고 했지만 그랬다가는 그가 깰 것 같았다. 하는 수 없이 그에게 한쪽 손을 준 채로 옆에 앉아 있을 수밖에 없었는데.

    “뭐야, 대체…….”

    그의 얼굴을 바라보며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다른 사람에게 관심이라고는 단 하나도 없을 것같이 차가운 남자가 이렇게 무방비한 상태로 다정한 말을 속삭이다니.

    이건 반칙이다.

    순간적으로 마음을 빼앗겨 버린 것처럼 가슴이 말랑말랑해졌다. 게다가 베탄이 엄청나게 잘생겨 보이는 효과까지 낳아 버렸다.

    이렇게 매력적인 사람이었어?

    고작 한두 마디로 사람을 홀릴 수 있는 사람이었냐고.

    “으음…….”

    그 와중에도 베탄은 잠에 푹 빠져 있었다.

    내 손을 꼭 껴안은 채로.

    소중한 것이라도 품은 마냥 자신의 품에 넣었다.

    나는 한쪽 손을 빼앗긴 어정쩡한 자세로 버틸 수밖에 없었다.

    손이 점점 저려 왔지만 억지로 깨우고 싶진 않았다.

    이 방에 몰래 들어온 것도 나니까.

    그렇게 나는 그가 일어나기만을 기다렸다.

    * * *

    “뭐, 뭐지, 지금?”

    잠에서 깬 베탄이 내 손을 꼭 부여잡고 있는 자신의 모습을 보며 적잖이 당황했다.

    나는 옆에서 꾸벅꾸벅 졸고 있다가 그의 목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뭐긴요, 제 손을 막 잡아끌고 가셨잖아요.”

    그러자 그가 내 손을 휙! 뿌리쳤다.

    “내가… 그랬다고……?”

    베탄은 믿기지 않는 눈빛으로 나를 쳐다보았다.

    마치 무슨 수작을 부리는 건 아니냐는 것처럼 쳐다보는 사람이었다.

    “아야야……. 피 안 통해서 죽는 줄 알았네.”

    내 손등에 나 있는 눌린 자국을 보여 주며 내가 아픈 시늉을 했다.

    그러자 그의 얼굴이 약간 달아오르는 것이 느껴졌다.

    이런 모습은 또 의외로 귀엽네?

    한 손으로 자신의 얼굴을 감싼 그가 입을 열었다.

    “왜, 내 방에 와 있는 거지? 지금은 몇 시고.”

    “아직 새벽 여섯 시예요. 선생님 찾으러 들어왔다가 손을 묶이고 말았답니다.”

    내가 능청스럽게 말하자 그가 당황한 얼굴로 시계를 확인했다.

    “이, 이상한 소리 안 했지?”

    베탄이 설마 하는 표정으로 나에게 물었고, 나는 그를 놀리고 싶다는 마음이 불쑥 솟아올랐다.

    “연인을 찾으시던데요? 선생님 애인 있어요?”

    그러자 그가 벌컥 화를 냈다.

    “그게 무슨 소리야. 내가 그런 말을 했어?”

    내 말에 순순히 넘어가는 그를 보자 웃음이 안 나올 수가 없었다.

    “너, 장난치는 거지?”

    내 웃음에 그가 눈치를 챈 듯 추궁했다.

    사실이긴 하지만, 그가 민망해할 것을 생각해 그냥 묻어 주기로 했다.

    “장난이에요. 아무 말도 안 했어요.”

    그러자 그가 순식간에 표정이 바뀌며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무언가 비밀을 감추고 있는 사람처럼.

    그에겐 마치 옛 연인의 기억이 있는 것 같았다. 아니면 자신을 떠나간 누군가를 그리워한다거나.

    이것 역시 게임에서는 없는 설정이었다. 하지만 그걸 들추는 것은 예의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어서 나가요. 들키기 전에.”

    내 말을 들은 베탄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바로 방과 이어진 드레스룸으로 향했다.

    그러고는…….

    “에엑?!”

    바로 상의를 탈의하는 것이다.

    등밖에 보이지 않았지만 그의 너른 어깨와 다부지게 잡힌 등 근육이 눈에 확 들어왔다.

    나는 깜짝 놀란 얼굴로 휙 등을 돌렸다.

    “뭐 하는 거예요!”

    “뭘 하다니? 옷을 갈아입어야 나갈 게 아닌가.”

    “말이라도 하고 벗어야지, 정말.”

    “뭐라고 구시렁대는 거지?”

    나는 그가 보이지 않는 곳으로 창가 쪽으로 자리를 옮겼다. 닫혀 있는 커튼을 보자 답답하다는 생각이 들어 커튼을 열었다.

    촤악.

    동시에 밝은 햇빛이 들어왔다. 그리고, 창문 밖에 있는 사람 한 명과 눈이 딱, 마주치고 말았다.

    “어…어……?”

    옷을 다 갈아입은 베탄이 드레스 룸에서 금세 나오더니 당황한 나와 함께 창문 밖을 바라보았다.

    “이런, 벨른이군. 어서 나가야겠어.”

    “누구죠?”

    “정원사야. 그리 문제 될 건 없지만 곧 있으면 다들 깰 거야. 여기 내 옷을 걸쳐.”

    그가 커다란 외투 하나를 내 어깨 위에 걸쳐 주었다.

    베탄은 옷에 달린 모자를 내 얼굴 위로 푹 씌워주며 나를 이끌었다.

    자연스럽게 내 어깨를 잡고 이끄는 것이…….

    이 남자 스킨십이 왜 이렇게 자연스러워?

    나는 약간 움찔했지만 아무렇지 않은 척 그의 방을 나섰다.

    다행히 바깥에는 메이드만 있을 뿐 다른 가족은 없었다. 그가 자신의 품에 넣고 한쪽 팔로 내 어깨를 감싼 채 빠르게 거실을 지나갔다.

    “다녀오세요, 도련님.”

    * * *

    다행히 우리는 아무 문제 없이 아카데미에 도착할 수 있었다.

    이른 아침인데도 불구하고 비무 대회 준비 때문인지 돌아다니는 사람들이 꽤 많았다.

    베탄 옆에 서서 걸어가니 학생들이 흘끗대며 쳐다보는 것이 느껴졌다. 하긴, 분위기가 좀 눈에 띄긴 하지.

    나 때문에 일찍 아카데미에 오게 된 베탄에게 내가 물었다.

    “대진표가 나왔을 텐데, 보러 가실래요?”

    내일이 바로 본선 1차 경연 날이니 오늘이 대진표가 나오는 날이다.

    “그러지. 네 경기 날이 언제인지도 중요하니까.”

    나와 그는 자연스럽게 교정을 걸어 본관으로 향했다.

    지나가는 길에 몇몇 아는 사람들이 걸어가는 것이 보였다.

    “어, 루나. 좋은 아침.”

    정령술과 클라우드 선배가 나를 보더니 활기차게 인사했다.

    그런데 곧이어 옆에 있는 베탄을 보고는,

    “누, 누구셔……?”

    라고 조심스럽게 속삭였다.

    검은색 기사복에 긴 칼을 차고, 화려한 얼굴을 뽐내는 그에게서는 어떤 아우라가 풍겨 왔다.

    나는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잠시 고민했다.

    램클리프의 총기사단장이라고 말하기에는 엄청난 사람을 옆에 두고 있는 것 같아서 좀 민망했고, 선생님이라고 하기엔 그것도 좀 애매했다.

    “으음……. 뭐라고 설명해야 하려나……?”

    내가 눈을 굴리며 베탄을 슬쩍 쳐다보자 그가 살벌한 눈동자로 나를 내려다보았다. 그러고는 입을 열었다.

    “루이아나를 가르치고 있다. 볼 일이 없으면 이만 지나가도록 하지.”

    듣는 상대방이 서운할 정도로 차갑게 내뱉은 베탄이 나를 이끌고는 클라우드 선배를 지나쳤다. 이 사람 진짜 정이라고는 하나도 없구나. 아니면 사회성이 결여된 건가.

    나는 성큼성큼 걸어가는 그의 뒤를 종종 따라가며 본관을 향해 걸었다.

    가는 길에 두 명이나 아는 선배를 만났지만 옆에 있는 베탄을 보고는 짧게 인사한 뒤에 지나쳤다.

    “선생님, 적어도 길가에서 사기는 안 당하겠어요.”

    어제 이후로 왠지 부쩍 친해진 느낌에 내가 장난을 쳤다.

    “그런 걸 왜 당하지?”

    그렇죠, 선생님 같은 사람을 누가 건드리겠어요. 내가 고개를 끄덕이며 그를 이끌었다.

    아침인데도 불구하고 본관 게시판에는 사람들이 우글우글 몰려 있었다.

    “어? 루나.”

    그때 나를 알아본 세이먼이 나를 향해 밝게 인사했다.

    큼큼, 방금까지 베탄이랑 좀 친하긴 했지만, 언제나 세이먼의 저 미소는 볼 때마다 황홀하단 말이야.

    어쩜 저렇게 예쁘게 웃을 수 있지?

    “세이먼. 간만이에요.”

    세이먼이 나에게 다가오다가 옆에 서 있는 베탄을 보더니 한쪽 눈을 치켜떴다.

    저번에 본 사람이라는 생각을 하고 있겠지.

    그때였다. 옆에서 누군가 내 어깨를 잡았다.

    “여기서 볼 줄은 몰랐는데, 루나.”

    에르셈프였다.

    에르셈프는 특유의 고고한 표정을 지으며 내 앞에 섰다. 오늘따라 보랏빛 눈동자가 영롱하게 반짝이는 것 같았다. 희미하게 미소를 짓는 것이 나를 보아 기분이 좋다는 걸 표현하는 듯했다.

    에르셈프는 워낙 감정 표현이 적어 저런 작은 반응에도 하나하나 눈길이 갔다.

    “또 뵙습니다, 에르셈프 카이센 비젠티아 왕자님.”

    베탄이 옆에서 먼저 인사를 했다.

    에르셈프는 여전한 얼굴로 손을 까딱거리며 인사를 받았다.

    “자네도 대진표를 보러 온 건가?”

    “맞습니다, 왕자님.”

    베탄은 에르셈프를 상대로도 말을 길게 꺼내지 않았다. 딱 필요한 말만 했고, 침묵을 두려워하지 않는 것 같았다.

    나와 세이먼, 에르셈프, 베탄은 하나같이 게시판을 바라보며 팀 배치를 확인했다.

    보자, 우와! 다행히 시합 날은 맨 마지막 날이고…….

    그리고 나는 눈을 크게 뜰 수밖에 없었다.

    “헉.”

    “같은 팀이군, 루나.”

    에르셈프가 왠지 모를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내게 말했다. 총 여덟 팀이나 되는데 그중에서 남주인공과 같은 팀이 될 줄이야.

    예상치 못한 것이었지만 에르셈프와 같은 팀이라면 이길 확률이 올라갈 것이라는 생각에 금세 마음이 놓였다.

    “잘 부탁드립니다, 에르셈프.”

    그러자 에르셈프가 나에게 손을 건넸고, 자연스럽게 악수를 나누었다. 길고 유려한 손가락이 내 손을 감쌌다.

    그때, 이번엔 뒤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뒤에서 봐도 어쩜 루나인 게 딱 보여?”

    이 능글거리는 목소리는 뒤를 돌아보지 않아도 알 수 있지.

    “루이아나 씨가 싫어할 말 하지 마세요.”

    “루나는 이런 말 좋아해. 항상 나를 보면서 웃어 준다구.”

    “그건 잰퓨어 씨만의 생각 아닐까요?”

    뒤를 돌아보니 익숙한 사람 두 명이 서 있었다.

    이게 대체 뭔 일이야.

    밝기만 다른 두 갈색 머리 남주인공, 잰퓨어와 레크리드가 어느새 친해진 친구처럼 이야기를 나누며 나에게 다가오고 있는 게 아닌가.

    “잰퓨어, 레크리드.”

    내가 그들의 이름을 부르자 그들이 차례대로 대답했다.

    “루나, 멀리서부터 너만 보이더라.”

    “루이아나 씨, 얼굴 까먹을 뻔했어요.”

    세이먼과 에르셈프는 그렇다 치고, 왜 본선에 출전하지도 않는 잰퓨어와 레크리드까지 여기에 온 거지?

    “루나가 붙는 팀의 약점을 알려 주려고 왔지!”

    “루이아나 씨가 무슨 팀인지 궁금해서 보러 왔답니다.”

    활기차게 말하는 둘의 모습에 대고 나는 굳은 얼굴로 하하, 웃을 수밖에 없었다.

    이게 무슨 광경이란 말인가.

    내 왼쪽에는 세이먼과 에르셈프, 오른쪽에는 베탄, 앞에는 잰퓨어와 레크리드가 서 있었다.

    내가 불러 모은 것도 아닌데 어떻게 이렇게 딱 맞춰서 모인 거야?! 

    그렇게 하라고 해도 힘들겠다! 나 지금 템트의 꿈이야?

    다섯 명의 남자는 아무 말도 하지 않는 나에게 말을 걸었다.

    누구 하나 질세라 동시에.

    “루나와 같은 팀이 되고 싶었는데, 대진표를 짠 사람이 누군지 알아봐야겠어요.”

    “괜히 다쳐서 곤란하게 하지 말고 내 뒤에 있어.”

    “나와 호흡을 맞췄더라면 좋았을 텐데. 다른 호흡도 괜찮구.”

    “루이아나 씨에게 행운석을 드릴게요. 이길 수 있을 거예요.”

    “수련할 수 있는 날이 늘어났군. 쉴 시간이 없다. 이리 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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