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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섯명은 너무 많잖아요 (80)화 (80/156)

79화. 적안의 남자(5)

베탄은 경계심이 아주 깊었다.

그 누구도 믿지 않았으며, 자신에게 다가오는 모든 것을 의심했다. 게다가 그의 직위는 총기사단장. 전투가 잦은 만큼 원한을 산 사람이 그의 집을 습격할 수도 있고, 가족을 공격할 수도 있었다.

그러니 그가 사는 곳이나 가족에 대해서는 절대 밝히지 않는 것이었다.

충분히 이해가 갔다. 나 같아도 쉽게 밝히지 않을 테지.

그런 그에게서 정보를 얻어 내는 것은 불가능이나 마찬가지였다.

그것도 처음 본 지 얼마 되지 않은 사람에겐 더욱더.

유도 신문을 통해 그에게서 답을 받아 내는 것은 이미 틀린 것 같다.

처음 물었을 때 실패했으니 두 번째로 또 물어보는 것은 정말로 큰 의심을 살 것 같았다.

만일 그렇게 되어서 베탄이 가 버린다면 내 노력은 물거품이 되어 버린다.

비무 대회에 나갈 수 없다는 거다.

“후우…….”

내가 한숨을 내쉬었다.

머릿속에 떠오른 생각은 있지만, 이걸 실행할 용기가 있는지는 잘 모르겠다.

한번 미친 척하고 해 봐?

미친년 소리를 듣게 될 것 같긴 한데, 지금으로선 매우 절박했다.

시스템은 마치 내가 이렇게 고난을 겪을 걸 알고 있던 것처럼 그런 퀘스트를 내려 준 것 같았다.

“내 인생아…….”

시간이 잠시 흘렀을까, 잠시 후 베탄이 자리로 돌아왔다.

그는 사람들에게 시달리고 온 건지 피곤한 기색이 역력했다.

한숨을 푹 내쉰 그가 자리에 앉으며 아까 하던 말을 이었다.

“알아들었으리라 믿겠네. 그래도 약속은 약속이니 비무 대회가 끝날 때까지는 내가 가르쳐 줄 거야.”

베탄이 낮은 음성으로 중얼거렸다. 주변이 시끄러운지라 그가 내 귀에 얼굴을 가까이 대며 말했다.

“선생님 뜻이 그렇다면 그렇게 하겠어요.”

내가 굳게 결심한 듯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베탄은 손가락으로 음식을 가리켰다.

베탄이 다른 일행에게 가 있을 때 나온 술과 음식이 테이블 위엔 손도 안 댄 듯 깨끗하게 올려져 있었다.

“어서 먹어. 넌 많이 먹어야 해.”

웬일로 챙겨 주는 말을 하는 베탄을 빤히 바라보았다.

“…….”

나는 입술을 꽉 깨물었다. 그러고는,

탁.

순식간에 내가 그의 앞에 놓인 술잔을 손에 들었다.

그리고 입에다가 쏟아부었다.

벌컥벌컥.

와인색을 띠는 액체는 이름은 전혀 모르겠지만 아주 향긋한 냄새를 풍겼다.

“……?!”

당황한 채로 벙찐 베탄이 입을 벌린 채 나를 쳐다보았다.

“키햐.”

너무나도 맛이 좋았다.

원샷을 때리니 이렇게 속이 시원할 줄이야.

쿵!

내가 빈 술잔을 테이블에 소리 나게 내려놓았다.

“지금 뭐 하는……?”

베탄이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나에게 물었다.

“뭐 하긴요. 술 마셨죠.”

내가 능청스럽게 대답했다.

아마 나를 정신 나간 사람으로 보고 있겠지? 하지만 내 계획은 이제부터였다.

“…너 미쳤어? 이걸 왜 네가 마셔.”

그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며 나에게 물었다. 어이가 없어서 화도 못 내겠다는 표정 같았다.

“…….”

그때였다.

내 눈꺼풀이 탁, 풀렸다.

시선을 빙글빙글 돌리다가, 입술을 달싹이다가, 초점 없는 눈빛으로 베탄을 응시했다.

베탄은 아직도 어처구니없는 표정으로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나는 한마디 더 얹었다.

“선생님, 저 앞이 잘 안 보여요…….”

그러자 베탄의 표정이 일그러지는 게 보였다.

내가 몸을 비틀거리며 일어섰다. 그러자 그가 금세 내 옆으로 오더니 내 팔뚝을 붙잡았다.

“…이리 나와. 어린 여자애 데리고 술 먹인 거 퍼지면 끝장이니까.”

이 동네는 소문이 나면, 다음날 모두가 알 정도로 좁은 동네였다. 그리고 그는 직위가 높은 만큼 평판도 잘 관리해야 하는 것이었다.

“이런 젠장…….”

나는 몸을 비틀거렸고, 그는 내 어깨를 붙잡은 채 술집 밖으로 나왔다.

나오는 길에, 술집 주인이 나를 빤히 쳐다보는 것이 느껴졌다.

내가 슬그머니 고개를 들자 그가 내게 윙크를 해 보였다.

뭐야, 저 아저씨. 친한 척하기는.

그 와중에 아무도 보지 못하게 좁은 골목으로 나를 데려간 그는 나에게 추궁하듯이 물었다.

“대체 왜 그런 짓을 한 거야? 처음부터 그저 술이 먹고 싶었던 거야? 그럼 그렇게 말을 했어야지!”

“허… 웬일로 말이 많으시대.”

“뭐, 뭐……?”

“평소에도 그렇게 말 좀 하세요. 입을 꿰맨 건지 도통 말을 안 하니까 내가 알아들을 수가 있어야지. 독심술이라도 배워야 하나 했다니까?”

내가 멈추지 않고 입을 나불댔다. 평소에 속으로만 생각하고 있던 걸 입 밖으로 꺼내니 속이 시원하면서도 웃겼다.

“…….”

베탄은 붉은 눈으로 나를 내려다보기만 하고 아무 말이 없었다.

계속해서 넘어지려는 나를 그가 붙잡아 줄 뿐이었다.

“너 집이 어디야.”

나를 데려다주려는 듯 그가 물었다.

“기숙사 늦어서 못 들어가요…….”

이미 열 시를 넘긴 시각. 기숙사의 문은 닫힌 지 오래였다.

“본가가 있을 거 아니야.”

그가 마지막 희망이 담긴 것처럼 물었고,

“들어가서 또 갇히라고요?”

내가 대답했다.

“하…….”

베탄이 진심을 담은 한숨을 내쉬었다.

진짜 이 꼴통을 어떻게 해야 하나 싶은 표정이었는데.

제발 바닥에만 버리고 가지 말아라, 제발!

“이리 와.”

그가 내 어깨를 잡아서 부축하더니 골목에서 나왔다.

“고개 들지 말고 여기 대고 있어.”

그는 내 머리를 잡아 자신의 팔뚝에 갖다 대었다.

순식간에 그의 두꺼운 팔에 얼굴을 박게 된 나는 그의 움직임을 따라 비틀거리는 걸음으로 따라갔다.

와중에도 퀘스트를 해결해야 한다는 일념 하나는 확고했다.

그는 마차를 잡은 뒤 나를 먼저 올려 태웠다. 내 몸이 가볍게 들렸고 쉽게 올라탈 수 있었다.

“9번가 3블록으로 가 주게.”

그가 자신의 집 주소를 읊었다.

성공이다.

직접 주소를 말하게 만들었으니 반은 성공한 셈이었다.

이제 남은 건 형제자매 관계뿐인데.

나는 나른한 얼굴로 창문에 얼굴을 기대었다. 안 그래도 수련을 하느라 피곤한 몸이었다.

가만히만 있어도 잠시 쏟아질 판이어서, 차가운 유리창에 얼굴을 대고 정신을 다잡았다.

나는 퀘스트의 잔여 시간을 확인했다.

남은 시간은 고작 한 시간.

그 시간 안에 형제자매 관계를 알아내야 한다.

“후우…….”

옆에선 베탄이 창문에 팔꿈치를 대고 턱을 괴고 있는 것이 보였다.

저 한숨, 진심인데?

나는 약간은 미안한 마음이 들었지만, 동시에 어쩔 수 없다는 생각을 했다.

나도 살아야 한다고.

내가 눈을 끔뻑 뜨고 있자 베탄이 눈을 굴려 내 쪽을 쳐다보았다.

“자라.”

“안 졸려요.”

“눈 다 풀렸는데.”

“원래 이래요.”

나는 따박따박 말대답을 하며 그의 집으로 향했다.

가는 도중에 그가 얼마나 한숨을 쉬었는지 셀 수조차 없었다.

* * *

집에 도착하자 베탄은 일단 마차에서 내려 내 쪽 문으로 돌아왔다.

내가 계속 눈을 감고 있자 그가 내 몸을 번쩍 들어 올리는 게 느껴졌다.

“어어……!”

“자는 척하는 게 편할 거야.”

그가 조용히 중얼거렸고, 나는 눈을 꼭 감았다. 베탄이 문을 열고 들어가자 메이드가 그를 맞이하는 소리가 들렸다.

“내가 가르치는 아이야. 정신을 잃어서 데리고 왔어. 내일 새벽에 나갈 거야.”

눈을 감고 있어서 잘은 몰랐지만 베탄이 계단을 오르는 것 같았다.

“아, 그리고 손님용 방 하나를 준비해 줘. 내 방이랑 가장 가까운 곳으로.”

“네, 알겠습니다. 도련님.”

그는 일단 자신의 방에 나를 데리고 왔다. 눈을 떠보니 그의 서재인 것 같았다.

그는 나를 의자에 앉힌 뒤, 자신은 무릎을 꿇은 채 나와 시선을 맞추었다.

“헤일리에게 걸리면 골치 아파질 거야. 방을 마련해 줄 테니 오늘은 거기서 쉬어.”

그의 동생인가?

“헤일리……?”

“내 여동생이야. 요새 나를 결혼시키려 난리여서 너를 보면 호들갑을 떨 게 분명해.”

“또 다른 분은 없나요?”

“없어. 헤일리가 유일한 내 동생이니까.”

그리고 곧이어 시스템의 음성이 들려왔다.

[‘대화할까요’ 퀘스트에 성공하였습니다.]

[보상이 제공됩니다…….]

[보상으로 랜덤 카드 1장이 제공되었습니다!]

나는 드디어 퀘스트를 해결했다는 마음에 너무 기뻐 소리 내어 웃었다.

“하하.”

“?”

동그란 그의 눈이 나를 쳐다보는 걸 애써 무시하면서, 나는 눈을 감았다.

* * *

번쩍.

눈을 떴다.

잠을 자긴 잤다. 너무 피곤한 탓이었다.

베탄은 정신을 잃은 나를 손님용 방에 눕혀 주고, 이불까지 덮어 주고 나갔지만 사실 난 조금 졸릴 뿐 제정신이었다.

술에 취한 적도 없었고, 몸에 힘이 풀린 적도 없었다.

왜냐하면…….

애초에 술을 마신 적이 없기 때문이다!

베탄의 신상 정보를 알아내기 위한 방법을 고안하던 도중, 내 머릿속에 떠오른 것은 바로 취객 연기를 하는 것이었다.

술에 취해 행동 불능 상태가 되면 그가 자신의 집에서 재워 주겠지, 하는 생각이었던 것이다.

아마 대화만을 통해 알아내려고 했다면, 아예 스승과 제자 관계마저 끊길 각오를 했었어야 할 거다.

베탄은 그만큼 경계심이 강하고 의심이 많은 사람이니까.

하지만 문제는 내가 술을 입에도 못 댄다는 점.

전생의 나는 술을 한 모금만 마셔도 정신을 못 차릴 정도로 술이 쥐약이었다.

이 루이아나 몸에서는 어떨지 모르겠지만, 이 몸도 허약할 것 같기도 했고, 일단 술 자체에 대한 거부감이 있는지라 실제로 술을 먹는 건 부담스러웠다.

게다가 미성년자가 술을 먹었다는 사실이 알려지면 술집에 피해가 갈 수도 있고 말이다.

그래서… 술집 주인을 매수한 것이다.

나에겐 골드가 차고 넘치기 때문에, 골드 몇 푼을 쥐여 주며 술을 음료수로 바꿔 달라고 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베탄이 다른 일행에게 잠시 갔다 온 것은 신의 자비라고 할 정도로 다행인 일이었다.

“인생 한번 다이내믹하구나.”

여기는 베탄의 집이다.

며칠 전까지만 해도 죽이니 살리니 했던 사람의 집에 와 있다는 것이 어이가 없었다.

나는 다시 이불 속으로 기어 들어갔다.

“베탄이 오기 전까지는 잠자코 여기 있는 게 맞겠지.”

이불을 덮고 잠을 청하려 했건만, 이상하게 눈이 말똥말똥했다.

“…….”

눈을 깜빡이며 천장을 보았다. 갑자기 걱정이 몰려왔다.

내가 이런 짓을 해서 베탄이 앞으로 나를 안 본다고 하면 어쩌지?

난 그에게 아직 배워야 할 것이 많이 남았는데! 

그리고 퀘스트가 내려오면 어쩔 수 없이 내가 접근해야 한단 말이야.

다른 남주인공들은 나를 절대 떠날 리가 없다는 확신이 있어서 괜찮았다.

하지만 베탄은 호감도가 0%니 오히려 그가 떠날까 봐 내가 걱정해야 했다.

“뭐, 어쩌겠어. 그 방법밖에 생각나지 않았는걸.”

나는 잠이 오지 않는 나머지 몸을 일으켰다. 그러고는 방문 앞을 서성거렸다.

어제 베탄이 했던 말이 생각났다. 손님용 방을 자기 방과 가장 가까운 곳으로 달라는 말.

끼익.

나는 조심스럽게 문을 열었다.

복도 맞은편에 방 하나가 보였다.

저 방이 베탄의 방인가?

잠에서 덜 깬 탓일까. 나는 왠지 모를 마음으로 방에서 나와 맞은편의 방 앞에 섰다.

그러고는 문을 열었다.

부드럽게 문이 열렸고, 나는 얼굴을 빼꼼 들이밀었다. 혹시 안 자고 있을 수도 있었다.

그때였다.

“하암.”

복도 반대편에서 누군가가 문을 열며 방 밖으로 나오는 소리가 들렸다.

“!!”

깜짝 놀란 나는 베탄의 방으로 몸을 집어넣었다.

문을 살며시 닫은 내가 숨을 내쉬었다.

“후우. 깜짝야.”

아마도 그의 동생 헤일리가 자다 말고 잠깐 나온 것 같았다.

“…….”

그의 방으로 들어온 나는 베탄의 방을 한번 둘러보았다. 짙은 회색으로 인테리어 된 그의 방은 그와 꽤 잘 어울렸다.

“잘 자고 있네.”

그는 침대에 누워 잠을 자고 있었다.

나는 그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칠흑같이 까만 머리칼이 아무렇게나 흐트러져 있었고, 입에선 작게 숨을 내뱉고 있었다.

“예쁘다.”

나도 모르게 입에서 나온 말이었다.

하얀 피부와 위로 솟은 반듯한 콧대, 베일 듯한 턱선까지, 마치 뱀파이어가 생각나는 듯한 모습이었다.

나는 홀린 듯이 그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베탄 특유의 날카로운 인상은 그의 눈동자에서 오는 것 같았다.

이렇게 눈을 감고 있으니 마치 달콤한 말을 속삭일 것처럼 다정해 보이는 것이다.

“잘 때가 제일 낫네.”

어느새 나는 그의 얼굴 옆으로 가 유심히 그를 관찰하고 있었다.

일러스트로만 보던 캐릭터가 이렇게 눈앞에 있으니 신기한 마음 때문이었다.

꿈을 꾸는 건지 길게 뻗은 그의 속눈썹이 파르르 떨렸다. 동시에 미간에 인상을 썼다.

나도 모르게 내 손가락을 그의 미간에 대려 가까이하고 있을 때였다.

“…….”

인기척을 느낀 것일까.

그가 눈을 살며시 떴다.

반쯤 감긴 눈꺼풀로 그가 나를 쳐다보며 말했다.

“…이제 온 거야?”

아주 다정한 눈빛으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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