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다섯명은 너무 많잖아요 (79)화 (79/156)

78화. 적안의 남자(4)

순식간에 내 얼굴에 당황한 기색이 어렸다.

내, 내가 생각한 건 이게 아닌데?

예상과는 다르게 너무 경계하잖아, 이 남자?

마치 내가 아주 불순한 의도를 가지고 자기에게 접근한다고 생각하는 것 같은데.

전혀 아니란 말이야!

나는 단지 퀘스트를 성공해야 할 의무가 있는 것뿐이라고.

“하…하하…….”

나는 애써 억지웃음을 지었다.

이걸 어떻게 풀어야 하지?

“그게 무슨 말씀이에요. 그저 선생님에 대해 알고 싶을 뿐이라고요.”

태연한 목소리로 말하자 그가 여전히 의심스럽다는 표정으로 내게 고개를 들이밀었다.

“거짓말하는 눈빛은 아닌데.”

당연하지. 거짓말이 아니니까!

나는 억울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궁금한 것도 죄인가요?”

억울한 표정으로 말하자 베탄이 눈썹을 꿈틀거렸다.

자신이 너무 했나? 하는 생각을 하는 것 같았다.

나는 재빨리 시간을 확인했다.

제한 시간은 12시간.

퀘스트가 내려오고 6시간 동안 수련을 했으니 남은 시간은 6시간이다.

하지만 우리는 곧 게이트를 타고 헤어질 예정. 지금 퀘스트를 성공시키지 못한다면 더는 기회가 없는 거다.

그러면… 비무 대회 출전 불가라는 엄청난 페널티를 받아야 한다고!

나는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그런 미래가 와서는 안 돼. 무슨 일이 있더라도 이 퀘스트를 성공시켜야만 한다.

“쓸데없는 걸 물어보니까 그렇지.”

베탄이 퉁명스러운 말투로 대답했다.

지금 내가 해야 할 작전은…….

‘미안하게 만들기’다.

절대로 그는 순순히 내가 물어보는 것에 대답해 주지 않을 거다. 그러니 어떻게 해서든 그에게 어떤 감정의 변화를 이끌어 내야 하는데. 그에게 미안함이라는 감정이 얼마나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그걸 유도해서 정보를 알아내는 수밖에 없다.

“너무해요. 저는 선생님과 친해지고 싶었을 뿐인데.”

내가 축 처진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연기도 몇 번 하다 보니 이제는 좀 능청스러워진 것 같았다. 그러자 베탄이 나를 슬쩍 쳐다보는 게 느껴졌다.

아무리 냉혈한이라도 사흘이나 붙어 있었던 제자를 모른 척할 수는 없겠지!

그런데,

“…나는 너에게 오로지 검술을 가르쳐 줄 의무만 있을 뿐이야. 친구 놀이를 할 생각이라면 접어라.”

이렇게 말하는 것이 아닌가.

나는 경악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이게 대체 무슨 일이야?

얘 남주인공 맞아? 어떻게 나한테 이렇게 무정하게 굴 수 있어?

베탄은 그 말을 마지막으로 게이트로 향하려는 발걸음을 옮겼다.

“같이 가요!”

나는 급하게 그를 따라가며 게이트를 들어갔다.

슈우우-

아직도 적응이 되지 않는 게이트를 타며 우리는 테일러 마을에 도착했다.

“헥…헥…….”

내가 과장되게 숨을 몰아쉬자 그가 약간은 관심을 갖는 것이 느껴졌다.

그래, 이거다. 이걸로 동정심을 유발하는 거야.

“흐으……. 선생님, 저 너무 힘들어요.”

“…….”

그는 내 말에 잠시 당황을 했는지 굳은 표정으로 나를 응시했다.

어떻게 반응해야 하나 고민하는 것 같았다. 당황하니 속이 아주 잘 보이는 타입이군.

“괘, 괜찮나? 게이트는 어린아이들도 잘 타는 시설인데.”

“그건 어렸을 때부터 게이트에 적응이 되었기에 그렇겠지요.”

“어렸을 때부터 게이트를 타 보지 않았다는 건가?”

그가 웬일로 나에게 질문을 했다.

내가 한 손으로 머리를 짚고 서 있자 챙겨 줘야 한다는 책임이 든 것 같았다.

“저는 어릴 때부터 갇혀 살았기 때문에… 게이트를 겪은 건 올해가 처음이라고요.

그는 자신의 머리를 쓸어 넘기며 시선을 이리저리 돌렸다.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눈빛이었다.

“갇혀 살았다니, 그게 무슨 말이지?”

이내 그는 나에게 물었다. 갇혀 살았다는 말을 그저 넘기기엔 너무 정이 없다는 생각이 든 것이겠지.

그런데 이 남자, 나에 대해 진짜 궁금한 건 맞나?

그냥 의무적으로 물어보는 것 같은데.

“부모님이 집 밖으로 나가지 못하게 막아서 열여섯 살이 될 때까지 집에 갇혀서 살았어요. 외출은 한 달에 한 번만 가능한 삶이었죠. 어렸을 때 적응되지 않았으니 지금 이렇게 어지러워하는 게 당연해요.”

나는 내 이야기를 줄줄 풀었다. 밀리센트 가문이라는 이야기는 교묘하게 숨기면서 말이다.

자고로 상대방의 이야기를 듣기 위해서는 내 이야기부터 풀어야 하는 법!

“…….”

베탄은 이런 이야기를 듣고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모르는 눈치였다.

당황스럽겠지.

이런 이야기를, 며칠 전에 처음 만난 사람에게 듣다니. 그것도 게이트 앞에서.

“그래서 저는 사람을 잘 믿지 못해요. 저에게 해를 가할 것만 같고, 핍박할 것 같기 때문이죠. 이게 전부 어렸을 적 기억 때문이에요. 선생님은 이런 게 이해가 되나요?”

좋아, 자연스럽게 이야기의 흐름을 그에게 넘겼다.

부디, 제발 본인의 이야기를 해 주길……!

“…나 또한 사람을 잘 믿지 못해. 오랫동안 혼자 자란 탓이야.”

”정말인가요?“

”…내가 이런 이야기를 하다니.“

그는 짧지만 자신의 이야기를 해 주었다.

하지만 나에게 필요한 것은 그의 신상 정보다. 그걸 알아내야 하는데, 이미 아까 한 번 거절을 당해서 또 물어보는 것이 어려웠다.

“선생님이 이름을 알려 주지 않는 것도 그런 이유 때문인가요?”

내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제발… 제발 대답해 주길!

이름 하나 말하는 게 어려운 건 아니잖아?

그러자 베탄이 고개를 저었다. 기분 탓이었을까, 날카로운 인상이 풀린 것 같은 느낌이었다.

“…베탄 오스가르드다. 네게 괜한 경계를 한 것 같군.”

드디어 나를 믿어 주었다!

나는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일단 이름을 알아냈고, 신상 정보라면 나이와 사는 곳, 형제자매 관계 정도인가?

그와 더 대화를 이어 나가기 위해 머리를 굴리고 있었다. 그가 이만 가자며 나를 이끌었다.

“늦었어. 내일도 수련을 하기 위해서는 일찍 들어가는 게 좋아.”

그가 무뚝뚝한 말투로 말했다.

나를 챙겨 준다거나, 걱정한다는 뉘앙스는 전혀 섞이지 않은 채였다.

말을 끝낸 그가 등을 돌리려고 했다. 항상 나와 그가 헤어지는 장소였다.

이렇게 끝나선 안 돼!

난 너에 대해 알아야 한다고!

“이만 가지.”

처음으로 헤어지는 인사를 한 그가 발걸음을 옮겼다.

나는 본능적으로 움직였다.

머리보다 몸이 먼저 반응했다는 거다.

이러고 싶진 않았지만, 어쩔 수 없잖아!

“자, 잠깐만요!!”

내가 뒤에서 그의 팔을 잡아당겼다.

“……?”

지금으로선 그의 바짓가랑이라도 잡아야 할 판국이었다.

제발, 제발 가지 말아 주세요.

당신이 필요하단 말입니다…….

나는 절박한 마음으로 소리쳤다.

“선생님! 제발 저랑 밥이라도 먹지 않으실래요?”

하아.

지금 대체 뭐 하는 짓인가.

나한테 하등 관심도 없는 사람에게 왜 이렇게 질질 매달리고 있는가.

이건 모두 다 시스템 때문이었다.

왜 이렇게 쉬운 퀘스트가 내려오나 했더니, 다른 남주인공들과는 전혀 다른 호감도 0%의 인간을 상대하게 만든 거였어.

내 질척거리는 능력이 얼만큼인지 알고 싶은 거니? 이렇게까지 해서 보고 싶은 게 뭐냔 말이야.

내가 그의 팔을 붙잡은 채 그렇게 말하자 베탄은 뒤를 돌아 나를 쳐다보았다.

붉은색 눈동자가 나를 내려다보니 저절로 무서운 느낌이 들었다.

“오늘따라 왜 이러지?”

“뭐… 뭐가요?”

“왜 괜한 것에 관심을 갖냐는 말이야. 나를 좋아하기라도 하는 건가?”

뭐라는 거야, 이 남자.

나는 순간적으로 너무 당황했지만 이것밖에 수가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차피 호감도도 0%인데 그냥 지르고 보자!

“마, 맞아요!”

“……?”

“…….”

“나를 좋아한다고?”

“네, 네.”

그의 얼굴엔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자신의 귀를 믿을 수 없다는 듯, 인상을 찌푸리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얘가 제정신이 아닌가?”

그러면서 내 이마에 손을 댔다.

“…….”

“열은 없는데.”

“당연하죠. 아픈 게 아니니까요.”

내가 당연한 목소리로 소리쳤다.

지금으로선 이 방법뿐이다. 이 기회를 놓치면 나에게 미래란 없어……!

나는 초롱초롱한 눈빛으로 그의 얼굴을 올려다보았다.

베탄은 남주인공이라고는 하지만, 오성석을 찾는다면 호감도가 얼마나 오르든 상관이 없어진다.

그러기 위해서는 이 방법이 불가피해.

그가 몸을 돌려 내 쪽을 바라보더니 허리를 굽혀 내 눈높이를 맞추었다. 그러고는 꽤 오랫동안 말이 없다가.

“진심이냐?”

짧게 물었다.

나는 속으로 양심이 찔렸지만 어쩔 수 없다는 생각으로 합리화를 했다.

뭐 아예 싫어하는 건 아니니까 어떻게 보면 조금 좋아한다고도 볼 수 있겠지……!

내가 고개를 세게 끄덕였다.

“할 말이 있어요. 그러니 저와 저녁을 같이 먹어 주세요.”

“흠…….”

베탄은 잠시 고민하는 표정을 했다.

내가 이상한 수작을 부리는 건 아닌지 의심하는 것 같달까.

하지만 내 고백을 아무 일도 없던 걸로 할 수는 없었는지 그는 끝내 수락을 하고 말았다.

“…가지.”

나이스!

이렇게 끝나지 않게 되어서 정말 다행이다.

하마터면 베탄을 놓쳐 페널티를 받을 뻔했잖아.

아슬아슬한 순간이었던 걸 생각하며 나는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띠리링.

그는 험버트 시장 가에 있는 한 술집으로 나를 데려갔다.

“이 시간에 여는 건 술집뿐이니까.”

술집엔 사람이 바글바글 넘쳤고 시끌벅적한 분위기였다.

“단장님이 오셨군!”

“오랜만입니다.”

“어린아이 아니오?!”

배불뚝이의 술집 주인이 나를 보자마자 베탄에게 물었고, 그는 아무렇지 않게 대답했다.

“금방 나갈 겁니다.”

동문서답이었지만 나에겐 술을 주지 않을 거라는 무언의 말이 오간 것 같았다.

사람들이 많은 중앙을 건너 구석에 우리는 자리를 잡았다.

어린 소년이 오더니 베탄에게 주문을 받았고, 그가 대답했다.

“플레이트 한 개와 술은 늘 먹던 걸로 한 잔 주게.”

나는 신기한 광경에 이리저리 눈을 돌리며 주변을 살피고 있었다.

춤을 추는 사람들, 무어라 고함을 지르는 주정뱅이들, 눈이 맞은 연인들 등 다양한 사람들이 술집에 몰려 있었다.

“할 말이 뭐지?”

“나이가 어떻게 되세요? 술집에 올 정도면 성인인 건가요?”

내가 능청스러운 연기를 하며 물었다. 스물한 살인 거 다 알고 있지만 네 입으로 말해야 한다고.

그러자 베탄은 순순히 대답해 주었다.

“스물한 살이다. 너는 열여섯이지?”

“어떻게 알았어요?”

“딱 그 나이처럼 생겼거든.”

그가 한쪽 입꼬리를 올렸다. 그 모습은 악마가 생각날 정도로 사악해 보였다.

내가 그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자, 시선을 느낀 듯 그가 내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아까 한 말이 진심이라면 그런 마음은 접어 둬. 나는 코 흘리는 꼬맹이랑 연인 놀이 같은 거 할 생각 없으니까.”

코, 코, 뭐?

그는 단호한 표정으로 말했다.

“어이, 단장님! 이쪽으로 잠시 와 주시게!”

그때, 멀리 있는 테이블에서 베탄을 부르는 목소리가 들렸다.

술에 잔뜩 취한 것 같은 사람들 무리였는데, 베탄과 친분이 있는 사이인 것 같았다.

“젠장, 귀찮게…….”

베탄은 작게 중얼거렸지만 무시할 수는 없는지 이내 몸을 일으켰다.

“잠시 다녀오지. 기다려.”

그의 말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베탄은 나에게 시선도 주지 않은 채 훌쩍 자리를 떠나가 버렸다.

역시 호감도 0%인 사람인 게 분명했다.

눈빛과 말투에서 관심이라곤 단 하나도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하고 있으니 말이다.

나에게 이렇게 대하는 남자라니.

처음이잖아?

‘나에게 이렇게 대한 여자는 네가 처음이야’라는 클리셰가 왜 먹혔는지 이제야 이해가 되었다.

왠지 모르게 나에게 관심이 없다고 하니까 그를 더 주시하게 된다고 해야 하나.

하지만 지금은 그것이 중요한 게 아니었다. 어떻게든 장단을 맞춰 그가 신상 정보를 내뱉도록 만들어야 하니까.

앞으로 알아야 할 정보는 사는 곳과 형제자매의 관계뿐.

어떻게 알아낼 수 있을까?

“…….”

나는 그의 말에 고민하는 척을 하며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그의 사는 곳과 형제자매 관계를 알 수 있는 법…….

그리고, 내 머릿속엔 퍼뜩 무언가가 떠올랐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