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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섯명은 너무 많잖아요 (76)화 (76/156)

75화. 적안의 남자(1)

베탄은 기다란 칼을 집어넣은 뒤 나를 깔고 있는 웨어울프의 몸뚱이를 걷어내 주었다.

“흐아!”

막혔던 숨을 내쉬며 가까스로 나무에 기댈 수 있었다. 웨어울프와 대치할 적에 모든 체력을 다 쓴지라 다리에 힘이 풀려 후들거렸다.

정식 기사복을 차려입은 그가 나를 내려다보았다.

“일개 학생이 웨어울프의 숲에 올 생각을 하다니, 겁도 없군.”

나는 의아한 얼굴로 그를 쳐다보았다.

“어떻게 여기에……?”

그러자 베탄이 잠시 눈을 굴리더니 대답했다.

“일이 있어서 왔다가 우연히 마주쳤어.”

그럴 수가 있나? 하긴, 웨어울프의 숲은 위험하기에 사람들이 기피하는 곳이지만 베탄 정도의 실력이라면 상관없을 테니까.

뭐, 숨기는 게 있다고 할지라도 내 알 바는 아니었다. 지금은 생명을 지킨 것만으로도 감격이었다.

“감사해요. 이대로 끝장나는 줄 알았는데, 덕분에 살았어요.”

내가 안도의 숨을 푹 내쉬었다.

“말했지 않나. 네가 죽으면 안 되는 이유가 생겼다고.”

“그게 대체…….”

저번에 말했을 때도 그랬지만 지금도 그가 무슨 말을 하는 건지 알 수 없었다.

내가 죽으면 안 되는 이유라니. 무언가를 알고 있는 것 같았지만 지금으로선 추궁할 힘이 없었다.

베탄이 나에게 성큼 다가왔다.

“일어날 수 있겠나? 여기는 꽤 숲 안쪽이라 다른 녀석들이 나타날 수 있어.”

정신없이 싸우면서 어느새 숲 안쪽으로 들어와 버린 것이었다.

“그런데 어떻게 웨어울프를 한 번에…….”

내가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그렇게 강했던 웨어울프를 한 방에 죽여 버린 것이 충격적이었기 때문이다. 그러자 그가 대답 없이 코웃음을 쳤다.

“이만 일어나.”

나는 최대한 다리에 힘을 주려고 노력을 했지만 도저히 일어날 수가 없었다.

“…….”

내가 무언의 눈빛으로 그를 쳐다보았다. 부축을 좀 해 줄 수 있냐는 의미였다.

“벌써 밤이야. 밤이 되면 웨어울프의 후각이 더욱 활성화…….”

주변을 이리저리 살펴보며 눈을 굴리던 그가 나와 눈이 마주치자 말을 딱 멈추었다.

“…….”

그러고는 말없이 나에게 다가와 내 허리를 감싸고는 일으켜 주었다. 그리고 등에 팔을 둘렀다.

“걸어 봐.”

하지만 몇 걸음 걷지 않아 나는 풀썩 쓰러질 수밖에 없었다. 웨어울프에게 허벅지와 정강이, 배를 전부 얻어터진 덕에 도저히 힘을 줄 수가 없는 것이다.

“…이런.”

나는 주저앉은 채로 그를 쳐다보며 입을 열었다. 그에게 도움을 받는 것이 민망했기 때문이다.

“이제는 제가 혼자 갈게요. 먼저 가세요. 웨어울프도 처치했고, 조금만 쉬면 움직일 수 있을 거예요.”

하지만 베탄은 무뚝뚝한 목소리로 대꾸했다.

“피 냄새를 맡고 금세 녀석들이 달려올 거야. 빨리 움직이지 않으면 안 돼.”

그러고는 나에게 등을 내보이며 무릎을 굽혔다.

“……?”

내가 말이 없자 그가 고개를 돌려 힐끔 나를 쳐다보았다.

“업혀.”

“……!”

“애먼 상상하지 말고 어서 업히지 그래? 시간이 없어.”

“…….”

그의 말에 나는 어쩔 수 없이 그의 등에 올라탔다. 꾸물거리며 몸을 움직이자 그의 팔에 힘이 들어갔다.

“무겁나요?”

내가 조심스럽게 물었지만 그는 아무런 대답이 없었다. 마치 쓸데없는 소리는 하지 말라는 것처럼.

저벅저벅.

나는 그렇게 어제 처음 만난 베탄의 등에 업혀 숲을 지났다. 밤바람이 시원하게 불었고, 불빛 하나 없는 어두운 숲속엔 나와 베탄 둘뿐이었다. 가끔씩 베탄이 팔을 고쳐 잡는 것이 느껴졌고 나는 그의 등에 딱 붙어 있을 수밖에 없었다.

“주먹을 날릴 때 엄지와 중지 쪽으로 날리면 안 돼. 손목 다쳐.”

길을 걷던 그가 조용하게 말을 내뱉었다.

“싸우는 걸 봤어요?”

“응.”

“어디서부터요?”

“전부 다.”

웨어울프와 싸우는 모든 과정을 봤다는 건 시작할 때부터 나를 봤다는 건데.

“왜 진작 안 도와줬어요!?”

내가 고개를 오른쪽으로 틀며 묻자 그가 간지럽다는 듯 어깨를 으쓱거렸다.

“어떻게 싸우나 보고 싶어서.”

그러고는 아무렇지도 않은 말투로 이렇게 말하는 것이 아닌가. 신나게 얻어터지고 있는 나를 뒤에서 지켜보고 있었다고?! 내가 죽기 직전까지 손 놓고 기다렸단 거잖아!

“아, 아니. 그걸 보고 안 도와줬다고요?! 윽, 저 피까지 토했는데? 지금도 너무 아픈데?”

그런데 베탄의 말투가 너무 태연해서 이걸 따져도 되는 건가, 싶었다. 마치 안 도와주는 건 내 마음인데 왜 뭐라 하냐는 듯한 말투여서.

“대부분의 사람들 자기보다 월등히 강한 적을 만났을 때 진짜 역량을 터트릴 수 있지. 그걸 보고 싶었을 뿐이다.”

나는 어이가 없어서 무어라 말이 나오지 않았다. 베탄이 내 스승도 아니고, 왜 내 역량을 시험하려는 거야? 하지만 어이없던 것도 잠시, 하나의 의문이 떠올랐다.

“…그래서 어땠어요?”

나를 평가받고 싶은 마음 때문이었다.

지금까지 누구에게 따끔한 지적을 받은 적이 없기에 내 실력이 어느 정도인지 궁금했다.

“저번에도 말했지만 검술과 체술의 기본기가 너무 부족해. 그 실력으로 본선에 나갔다간 금세 떨어지고 말 거다.”

“…그런가요.”

그의 말을 듣고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검술을 비롯한 모든 술법들을 배우기 시작한 지 고작 1년이 채 되지 않았다. 마나 운용에 재능이 있어 금세 따라 한다고는 하지만 탄탄하지 못한 기본기는 숨길 수 없는 것이었다.

“그럼 어떻게 해야 하죠?”

조용한 목소리로 물었다.

바람이 스쳐 지나가는 소리만 들릴 뿐 주위가 전부 고요했다.

“제대로 배우는 수밖에 없겠지. 밑동이 탄탄하지 않은 나무는 금세 무너지고 말 거야.”

“제대로 배운다는 것은…….”

내가 말끝을 흐리자 그가 간결하게 대답했다.

“좋은 스승을 만나는 거지.”

나에게 스승은 샐라임 뿐이었다.

펠리엇 또한 선생님이라고는 하지만 나에게 정령술을 제대로 가르친 적은 없기에 스승이라고 부르기엔 애매했다.

샐라임은 정령이기 때문에 정령술에는 강했지만 검술과 체술에는 기본기엔 약한 모습을 보였다. 주인이었던 사람들이 이미 강했던 탓에 기초 훈련은 잘 보지 못했나 보다.

게다가 칼에 갇혀 목소리만 내는 탓에 적극적으로 내게 정확한 몸짓을 알려 줄 수 없었다. 샐라임의 말만 믿으면 실력자가 될 것이라고 믿었지만, 생각보다 현실은 만만치 않았다. 검술과 체술은 사람과 맞부딪쳐야 하는 만큼 직접 옆에서 가르쳐 줄 스승이 필요했던 것이다.

“어떻게 웨어울프를 한 번에 해치울 수 있었던 거죠?”

아까 했던 질문이었다. 그는 대답하지 않았지만 나는 정말로 궁금했다. 베탄은 내가 지금까지 본 사람 중에서 손에 꼽을 정도로 강했으니까.

“말로 설명할 수 없어. 수만 번의 반복 끝에 진정한 참격이 나오는 거니까.”

그의 목소리에서 진지함이 묻어 나왔다.

검술에 대해서는 그 어떤 가벼움도 허용하지 않는 것 같았다.

총기사단장이라는 직위 때문일까. 베탄은 말로 하지 않아도 압도적으로 강한 자라는 분위기가 풍겨왔다.

나도 저런 분위기를 갖고 싶었다. 그러면 아무도 나를 함부로 건들지 않을 텐데. 실제로 만나니 게임 속 남주인공이라는 생각보다, 닮고 싶은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잠시 망설이다가 입을 열었다.

깊은 고민 끝에 나온 말이었다.

“…절 가르쳐 주세요.”

그에게 검술과 체술을 배울 수 있다면 본선 1차를 통과하는 것 정도는 수월해질 것 같았다.

나는 오성석을 손에 넣기 위해서라면 그 어떤 짓까지 해야 하는 마당이다. 이번에 오성석을 빼앗겨 버리면 소원을 이룰 수 있는 방법은 아예 사라져 버리고 말 테니까.

게다가 지금 베탄의 호감도는 0%.

나를 구해 주고, 업어 줬는데도 호감도가 0%라는 것이었다.

무슨 말만 해도 호감도가 오르던 잰퓨어와는 달리 베탄은 나에게 그 어떤 관심도 없는 것이다. 그러니 다른 남주인공들에 비해 훨씬 안전한 상대라고 볼 수 있었다.

하지만 그는 작게 코웃음을 쳤다.

“나에게 가르침을 받는다는 게 무슨 의미인 줄 아나? 혹독한 입단 시험을 거쳐서 들어온 기사들 또한 나가떨어지는 게 내 훈련 방식이다. 너 같은 애가 내 훈련을 받을 수 있을 리가 없어. 물론 그럴 생각도 없었지만.”

어찌 보면 거만한 것 아닌가 싶겠지만 오히려 그의 자신감과 배포가 느껴졌다.

그래서 더욱 욕심이 생겼다.

왜 나라고 못 받을 거란 생각을 하는 거지? 나도 하면 충분히 잘할 수 있다고.

“저 무조건 이번에 상품을 타야 해요. 그렇지 않으면 제 인생은 끝장이라고요.”

간절한 목소리로 소리쳤다.

그러자 베탄이 희미하게 입꼬리를 올렸다.

“듀이타나 말인가? 그렇게 탐낼 물건이 아니라고 말해 주지.”

“아니에요, 그게 아니라…….”

내가 말을 멈췄다.

오성석 이야기를 꺼냈다가 혹시라도 그가 오성석에 관심을 갖게 될까 봐, 하는 걱정 때문이었다.

베탄은 나를 도와주고 싶은 마음은 전혀 없는 것 같았다. 세이먼이나 에르셈프였다면 오히려 발 벗고 나서서 가르쳐 줬을 텐데, 베탄은 나에게 관심이 없으니 가차 없이 거절할 뿐이었다. 그렇다고 세이먼과 에르셈프에게 도움을 요청할 수는 없었다. 호감도가 걱정될뿐더러, 그들과 맞서 싸워야 하는 입장에서 나를 가르쳐 달라고 하는 건 내 공격 패턴과 약점을 모두 공개하는 꼴이었으니까.

어느새 우리는 숲을 나와 게이트 앞까지 다다랐다.

“이제 걸을 수 있을 것 같아요.”

내 말에 베탄이 나를 조심스럽게 내려 주었다. 말은 툭툭 내뱉어도 상대방을 대하는 몸짓엔 배려가 묻어 있었다.

나는 게이트 앞에 서서 베탄의 팔을 잡았다.

한 번만 나를 도와 달라는 눈빛을 가득 보내면서.

“제발요. 이번 비무 대회가 끝날 때까지만 부탁할게요.”

그가 내가 붙잡은 자신의 팔을 내려다보았다.

이렇게 애원할 일인가 싶겠지.

하지만 나는 정말 간절했다.

이 상태로 본선에 들어갔다간 금세 떨어질 것이라는 베탄의 말이 나를 불안감에 빠뜨렸다. 남은 시간이라도 수련에 정진하지 않으면 나에게 가망은 없어……!

“진심인가?”

그가 작게 미간을 찌푸리며 나를 쳐다봤다.

내 눈빛엔 간절함이 배어 있었을 거다.

그 눈빛을 보았는지, 그의 표정이 갑자기 변했다. 마치 무슨 생각이 떠오른 사람처럼.

그때를 놓치지 않고 마지막으로 어필했다.

“잘할 수 있어요. 믿어 주세요.”

대체 남주인공에게 뭘 하는 건가 싶겠지만 어쩔 수 없었다.

베탄과 같은 실력을 가지고 싶었다.

지금 당장 그 정도를 바라는 것이 아니다. 기본기라도 다질 수 있도록 지도해 달라는 것뿐이다. 게다가 매일같이 기사들을 지휘하는 사람이니 남을 가르치는 것에는 탁월할 것이 분명했다.

갑자기 표정이 바뀐 베탄은 한쪽 눈썹을 치켜들더니, 이내 입을 열었다.

“좋다. 정 그렇게 원한다면 가르쳐 주지.”

그는 한쪽 입꼬리를 올린 채였다.

기분 탓일까.

왠지 그가 뒤에서는 다른 생각을 하고 있는 것 같다는 느낌을 받았다.

아니겠지.

그리고 맞다고 해도 나는 실력만 키우면 다른 건 필요 없다.

그것만이 내 목표니까.

그런데 베탄이 이어서 입을 열었다. 아주 여유로운 표정을 지으며.

“대신… 조건이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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