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3화. 만반의 준비(1)
레크리드의 목소리는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는 듯 떨리고 있었다.
무슨 소리야.
잰퓨어는 내 남자 친구가 아니라고!
왜 하필 만나도 레크리드의 상점에서 만난 거야.
“절대 아니에요, 레크리드. 잰퓨어, 좀 놔!”
내가 억지로 그의 품에서 빠져나오려 발버둥 쳤다.
그러나 오랜만에 날 품에 가둔 잰퓨어는 쉽게 풀어 줄 생각은 없는 것 같았다.
“루나, 다른 사람의 시선은 신경 쓰지 마…….”
오히려 더욱 세게 안으며 내 머리에 자신의 얼굴을 비비는 것이 아닌가.
이럴 줄 알았으면 그때 도와주는 게 아니었는데!
“누, 누가 봐도 사귀는 것 같은데요……?”
레크리드가 다시 한번 더 물었다.
나는 더 이상 안 되겠다는 판단이 들어,
퍽!
“윽!”
발로 그의 정강이를 찼다.
그제야 팔에 힘을 푼 잰퓨어는 뒤로 빠지며 정강이를 부여잡았다.
“루나, 이런 과격한 애정 표현도 환영이야.”
여전히 입은 다물 생각은 안 하면서.
“네 연갈색 머리 다 뜯기 전에 적당히 해, 잰퓨어. 오해하시잖아.”
나는 계속해서 레크리드가 신경 쓰인 나머지 그쪽을 힐끔힐끔 쳐다봤다.
레크리드가 오해하는 건 원하지 않았다.
누굴 사귈 마음도 없지만, 사귄다는 오해를 받는 것도 싫단 말이야.
“오해예요. 그저 친구랍니다.”
내가 억지웃음을 지으며 그를 향해 말하자, 옆에 있는 잰퓨어가 시무룩한 표정을 지었다.
“그저 친구는 아닌데…….”
그리고는 혼자 중얼거리는 것이다.
레크리드는 그제야 작은 미소를 지으며 나를 쳐다보았다.
“루이아나 씨가 아니라면 아닌 거겠지요. 다행이에요.”
뭐가 다행이라는 거야?
내가 남자 친구가 없는 게?
나는 미소가 지어지는 걸 억지로 참으며 태연한 척을 했다.
그리고 샐라임과 한 다짐을 생각하며 마음을 다스렸다.
레크리드를 좋아하면 끝장난다……!
이놈의 펜던트 효과는 대체 언제까지 가는 거야?
설마 영구적인 건가?
나는 바라보기만 해도 사랑스러운 레크리드의 얼굴을 마주하자 기분이 금세 좋아졌다.
게다가 앞으로 자주 볼 수 있겠다는 생각에 저절로 웃음이 나오는 것이다.
“흐…흐흐…….”
내가 고개를 숙이고 작게 입꼬리를 올리자 이번엔 샐라임의 한 소리가 들려왔다.
“혼난다, 너. 쟤는 인간 형상을 한 마귀라고 생각하랬지.”
그때 레크리드와 잰퓨어가 동시에 입을 열었다.
“루이아나 씨, 비무 대회에 나가나요?”
“루나, 예선전은 잘 끝냈어?”
둘은 목소리가 겹친 나머지 서로를 쳐다봤다.
“…….”
“…….”
자기가 먼저 말하겠다는 표정을 공유하는 것 같았다.
그러고는,
“비무 대회에,”
“예선전은.”
또 한 번 목소리가 겹쳤다.
다시 서로를 쳐다본 둘은 태도를 바꾸었다.
“먼저 이야기하세요.”
“아뇨, 먼저 하세요.”
“…….”
뭐지, 이 분위기는.
“레크리드, 뭐라구요?”
내가 먼저 레크리드에게 무어라 말했는지 묻자, 그가 대답했다.
“비무 대회에 나가냐고 물었어요. 이미 예선전이 치러졌다고 하던데요.”
“잘 모르시나 보군요. 루나와 저는 예선전에서 같은 팀이 되었었답니다.”
나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정확히 말하면 같은 팀은 아니지 않나.
잰퓨어가 내가 대답할 타이밍을 뺏어 가자 나는 입을 다물었는데, 레크리드가 여전히 웃는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저는 루이아나 씨에게 물었는걸요.”
“……!”
레크리드는 아주 태연한 표정으로 그에게 따지는 듯한 말을 내뱉었다.
레크리드의 따끔한 말에 나는 순간적으로 당황해 수습을 하려 했지만, 대화는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뭐 꼭 질문받은 사람만 말할 수 있나요? 어떻게든 대답만 하면 되지.”
잰퓨어 또한 특유의 말장난을 치는 방식으로 레크리드를 상대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자 나는 괜히 레크리드의 반응이 기대가 되었다.
어떻게 나오려나……?
내가 숨을 죽이고 아무 말 하지 않자, 레크리드가 입을 열었다.
“아, 일반적인 사람이라면 안 그런다고 생각했는데, 제가 잘못 생각했나 보군요?”
“세상엔 다양한 사람이 있는 법이랍니다, 사장님.”
“…….”
“…….”
그들은 웃는 얼굴로 서로의 얼굴에 침을 뱉고 있는 것만 같았다.
누구도 팽팽하게 지지 않는 말다툼에서 레크리드가 손을 위로 들며 제지하듯이 입을 열었다.
“손님, 그래서 물건은 다 보신 것 맞으시죠?”
아예 상대하지 않겠다는 말투.
물건을 다 보았으면 이만 나가 달라는 말투였다.
그제야 나는 내가 나설 타이밍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레크리드, 저는 비무 대회에 나가기로 했어요. 어제 예선전을 치렀답니다. 꼴등으로 통과하느라 아슬아슬해서 죽는 줄 알았어요.”
잰퓨어와 레크리드의 말에 모두 대답했다.
그러자 그들은 전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서 필요한 물건을 사러 오신 거군요?”
“네, 맞아요. 추천 좀 해 주실 수 있나요?”
내가 가판대를 둘러보며 천천히 걸었다.
그러자 잰퓨어가 옆에 따라붙는 것이 느껴졌다.
“요즘에 인기가 가장 많은 아이템이에요. ‘뒤통수의 눈’이라는 건데, 착용하고 있을 시 주변에 나타나는 인기척을 금방 알아챌 수 있어요.”
레크리드가 구슬이 알알이 박힌 팔찌를 하나 보여 주었다. 중앙의 눈 모양의 장식물이 포인트였다.
기습으로 날아오는 공격에 취약했던 나는 딱 필요한 아이템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예전부터 샐라임이 알려 주지 않았다면 죽을 뻔한 적이 몇 번이나 있지 않았던가.
“이거로 하나 주세요.”
팔찌를 구입하며 잰퓨어를 바라보자 그가 가만히 가판대를 보며 서 있었다.
골드와 물건을 교환한 뒤 내가 바로 손에 착용하자 효과가 바로 나타나는 것 같았다.
“오!”
주변에 있는 모든 것들이 내 감각에 집중되는 느낌이 들었다.
나는 손목을 이리저리 살펴보며 팔찌를 관찰했다.
고작 이런 구슬 팔찌에서 이런 효력이 나타나다니.
이 세계의 마법이란 정말 신기해.
그때, 잰퓨어의 목소리가 들렸다.
“저도 똑같은 걸로 주세요.”
“?”
내가 휙 등을 돌아 그를 쳐다봤다.
그러자 잰퓨어가 어깨를 으쓱하며 입을 열었다.
“루나만 가지란 법 없잖아.”
“그렇긴 한데…….”
잰퓨어는 이미 물건을 다 본 후인 것 같아 따라 살 것이란 생각을 못 했었다.
하긴, 나만 가지란 법 없긴 하지.
그런데.
“커플로 맞춘 것 같아서 좋잖아.”
이렇게 말하는 것이 아닌가.
정령술과 선배들이 나와 잰퓨어가 같은 팔찌를 차고 있는 걸 보면 분명 엄청난 소문을 퍼뜨릴 테다.
그렇게 되어선 안 돼……!
나는 잰퓨어가 그 팔찌를 사지 못하도록 입을 열려고 할 때였다.
레크리드가 먼저 선수를 쳤다.
“어쩌죠, 손님. 방금 품절되었답니다.”
* * *
나는 레크리드에게 왜 인기 품목인데 재고가 없냐고 따지는 잰퓨어를 끌고 나왔다.
정말, 끝을 모른다니까?
“잰퓨어, 확실히 하자.”
“뭘?”
“너 내 남자 친구 아니야. 착각할까 봐 말하는 거야.”
그러자 잰퓨어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뭐야, 아니었어?”
“?!”
오히려 내가 뭔 소리를 하냐는 표정을 짓자 그제야 장난이라는 듯 잰퓨어가 씨익 입꼬리를 올렸다.
“그러면…….”
“…….”
뜸을 들이던 잰퓨어는 이내 파격적인 말을 내뱉었다.
“앞으로 내가 너 남자 친구 할래.”
“……?”
내가 벙찐 표정으로 입을 벌렸다.
지금 잰퓨어의 호감도가 몇이지?
+
이름: 잰퓨어 이브
나이: 17
직위: 엔리에타 황립 아카데미의 학생
호감도: 36%
+
뭐야, 왜 36%인 거지?
원래는 31%였단 말이야!
그리고 나는 몇 초 지나지 않아 깨닫고 말았다.
예선전을 할 당시 내가 잰퓨어 대신 싸울 때 그의 호감도가 올라갔던 것이다.
나는 정신이 없어 그걸 신경 쓰지 못한 거고.
30%가 위험한 구간인데 그걸 훌쩍 넘어 버리다니.
그래서 이렇게 훅 들어오는 건가.
영롱한 초록색 눈동자를 빛내며 나의 대답을 기다리는 그의 모습은 마치 곧 있으면 날 잡아먹어 버리겠다는 뱀 같았다,
어서 자신의 먹잇감이 되기를 잠자코 기다리고 있는 커다란 뱀 말이다.
나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무슨 소리야, 잰퓨어. 저번에도 말했지만 나는 누구도 사귈 마음이 없다고.”
“그럼 이참에 나를 생각해 보는 건 어때?”
자칫하면 그의 페이스에 휘말릴 수 있다.
아무렇지 않게 구렁이 담 넘어가듯 나에게 말을 내뱉는 그에게 휘말리면 답도 없단 말이다!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마. 널 어떻게 남자 친구로…….”
차마 그의 얼굴을 바라볼 자신이 없어 고개를 숙인 뒤 대답했다.
자꾸만 템트의 꿈속에서 나를 품속에 안아 주던 벗은 잰퓨어의 모습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엄청나게 남자 친구 같은 모습이었지…….
실제로 그렇게 된다면… 행복하긴 하겠다.
호감이 있는 잘생긴 남자의 품에 안기는 건 그 어떤 여자도 좋아할 일일 테니까.
후.
하지만 나에겐 그 전에 오성석을 찾아 소원을 이뤄야 하는 과제가 남아 있었다.
그전까지는 적당히 호감도를 관리하며 거리를 두는 것이 중요했다.
“언젠가 너는 날 좋아하게 될 거야.”
“왜 그렇게 생각하지?”
“내가 그렇게 정해 놓았으니까.”
이번엔 세이먼이랑 비슷한 말을 하는군.
세이먼도 결국은 내가 자신에게 올 거라고 말했었지.
이 남주인공들은 자신감이 넘쳐도 한참은 넘친단 말이야.
그때, 내가 보일 듯 말듯 입꼬리를 올렸다.
예전 같았으면 가차 없이 거절하며 난 널 좋아하지 않는다고 엄포를 놓았겠지.
하지만, 지금은 상황이 바뀌었다.
나도 남주인공들에게 간질거리는 말 한두 마디 정도는 내뱉을 수 있는 처지가 되었다는 말이다.
망설이던 내가 입을 열었다.
“그럼 한번 기대해 볼게.”
“?”
“내가 널 좋아하게 될 그때를.”
그러자 잰퓨어의 표정이 눈에 띄게 변했다.
내가 이런 말을 하는 게 낯설겠지.
원래라면 그의 장단을 맞춰 주지 않았을 테니까.
묘한 표정을 짓던 잰퓨어는 잠시 고민하다가 입을 열었다.
“기대해도 좋아. 죽을 만큼 행복할 테니까.”
* * *
잰퓨어와의 대화를 끝내고 나는 바로 웨어울프의 숲으로 직행했다.
남은 시간 동안 쉬지 않고 수련을 할 생각이었다.
평소처럼 익숙하게 테일러 마을의 게이트를 타고 웨어울프의 숲으로 이동했다.
아직도 게이트가 적응이 안 된 지라 게이트에서 나오고 나면 땅바닥에 엎드려 숨을 고르곤 했다.
“후…하…….”
그러고는 숲의 초입 부분 중 사람이 다니지 않을 장소로 가서 자리를 잡았다.
샐라임에 의하면 웨어울프의 숲은 몬스터의 서식지이기 때문에 사람들이 기피하는 장소라고 했다.
하지만 깊숙이만 들어가지 않으면 웨어울프를 볼 일은 없다고 했다.
그러니 나는 사람이 없는 장소에서 안전하게 마음껏 수련할 수 있다는 거다.
사실 웨어울프의 숲에 온 이유는 수련을 위한 것도 있지만 퀘스트 때문이기도 했다.
+
# 제4 스토리 퀘스트
제목: ‘내공 쌓기’
내용: 검술의 레벨을 8까지 올리시오.
제한 시간: 일주일
보상: 랜덤 카드 1장
페널티: 없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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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 내 검술의 레벨은 6에 불과했다.
고작 일주일 안에 레벨 2를 올리라니.
쉽지 않은 일이라는 걸 아는지, 시스템도 페널티를 주지 않았다.
그런데 보상이 평소와 달랐다.
랜덤 카드라고?
무언가 혜택을 받을 수 있는 카드를 무작위로 받을 수 있는 건가?
알 수 없었지만 랜덤 카드라는 보상은 나의 호기심을 자극했다.
“일단 최대한 가능한 데까지 해 보는 거야.”
“꼬마, 시작하자.”
그렇게 나는 샐라임과 수련을 하려고 했을 때였다.
“……?”
무언가 내 본능적인 감각이 나를 노리고 있다는 위협을 느꼈다.
‘뒤통수의 눈’ 팔찌 덕분인지 나는 순식간에 위협의 근원지를 바로 찾아낼 수 있었다.
휙!
빠르게 등을 돌려 정체가 무엇인지 확인했다.
그리고, 나는 나를 빤히 쳐다보고 있는 형형한 노란색 눈동자를 볼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