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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섯명은 너무 많잖아요 (73)화 (73/156)
  • 72화. 제5 남자 주인공(2)

    예선전이 이루어진 숲에서 나와 아카데미 안으로 들어가던 중이었다.

    나는 세이먼과 에르셈프와 시시콜콜한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그런 일이 있었군.”

    세이먼은 에르셈프에게 내가 에르셈프를 피하는 이유를 알려 주었다.

    히아신스와의 사건을 설명해 준 것이다.

    “그래도 아직 가까이 오는 건 좀 그래요.”

    내가 세이먼 옆에 붙어 에르셈프를 멀리하자 그가 질끈 입술을 깨물었다.

    “세이먼, 당장 비켜.”

    “제가 막은 게 아닌걸요.”

    그렇게 길을 걷고 있었는데, 갑자기 새까만 차림새를 한 남자가 나에게 훌쩍 다가오는 것이 느껴졌다.

    “……!”

    세이먼과 에르셈프 못지않게 키도 크고 몸집도 컸던 그는 검은색으로 차려입어서 그런지 어두운 아우라를 풍기는 것 같았다.

    게다가 저 날카로운 붉은색 눈.

    저 눈빛이 그를 범접하지 못하는 존재로 만드는 것 같았다.

    “이야기 좀 하지.”

    그가 내 앞에 섰다.

    “무슨 일이시죠?”

    난 태연한 목소리로 물었다.

    혹시 아까 내가 엿들은 것에 대해 말하려는 건가?

    옆에 서 있던 세이먼과 에르셈프가 같이 멈춰 서더니 베탄을 바라보았다.

    그러자 베탄 또한 세이먼과 에르셈프를 발견할 수 있었다.

    “램클리프의 총기사단장 베탄 오스가르드입니다. 왕자님,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그가 깍듯하게 예의를 차려 인사를 했다.

    기사여서 그런 건지는 몰라도 행동 하나하나가 절도 있었다.

    “그래, 무슨 일이지?”

    에르셈프가 가볍게 인사를 받으며 물었다.

    새삼 에르셈프가 왕자라는 것이 느껴졌다.

    요즘 들어 같이 지내는 경우도 많고, 허물없이 말을 거는지라 잊고 있었던 것이다.

    “램클리프를 대표해 비무 대회를 참관하러 왔습니다.”

    그러자 에르셈프가 딱딱한 말투로 되물었다.

    “루나에게 무슨 일로 왔냐고 물은 건데.”

    “개인적인 이야기를 하고 싶어서 왔습니다. 잠시 이 아이를 빌려 가도 되겠습니까?”

    “누구 건 줄 알고 빌려 간다는 거지?”

    “죄송합니다. 데려가도 되겠습니까?”

    “그녀에게 묻지 그래. 당사자가 옆에 있는데 나랑 이야기하는 꼴이 웃기군.”

    에르셈프는 아주 태연한 말투로 날카로운 내용을 내뱉었다.

    갑자기 나에게 다가와 말을 건 베탄이 맘에 들지 않는 건가.

    에르셈프의 저런 모습은 수없이 봐 왔던 터라 그리 놀라진 않았다.

    베탄은 고개를 약간 숙인 채 아무 말도 없이 서 있었다.

    “…….”

    마치 자신은 할 말을 다 했으니 더는 상대하지 않겠다는 몸짓 같았다.

    그에겐 왕자를 대하는데도 불구하고 꿋꿋한 자존심이 느껴졌다.

    램클리프라면 라인하르트 왕국 소속이라 왕족에게 잘 보여야 하는 건 당연한 일일 텐데, 베탄은 그러지 않은 것 같았다.

    “가시죠.”

    내가 베탄에게 가자는 눈짓을 보냈다.

    여기서 남자들의 기 싸움이 일어났다간 골치 아파질 것이 분명했다.

    “이만 가 볼게요, 세이먼, 에르셈프.”

    “다음에 뵙겠습니다.”

    베탄은 각 잡힌 인사를 한 뒤, 나를 이끌고는 걷던 방향과는 다른 곳으로 향했다.

    그는 내 등에 손을 대고는 방향을 이끌었는데, 너무 자연스러운 손길이라 뿌리칠 생각도 하지 못했다.

    “…….”

    큰 아름드리나무 밑으로 나를 이끈 그가 이내 입을 열더니,

    긴말할 것 없다는 듯 본론부터 꺼냈다.

    에르셈프 앞에서 예의를 차리던 모습은 온데간데없었다.

    “어디까지 엿들었지? 솔직하게 말해.”

    역시나, 아까 본관에서의 일 때문이었군.

    새어 나갈까 봐 걱정하는 거야.

    “정말 들은 게 없어요.”

    내가 태연한 표정으로 대답하자 베탄이 어림없다는 듯 대답했다.

    “네가 문 뒤에 서 있던 시간은 적어도 5초 이상이야. 그동안 아무것도 듣지 못했다고?”

    그의 차가운 목소리가 내 귀에 꽂혔다.

    “5초 동안 뭘 들어요.”

    아까는 칼이 날아온 탓에 놀라 움츠러들었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게다가 그는 남자 주인공이다.

    나에게 전혀 해를 가하지 않는 사람.

    그러니 나는 더욱 당당해도 되었다.

    “한마디도…듣지 못했다는 건가?”

    그러자 베탄은 천천히 말을 내뱉으며 나에게 가까이 다가왔다.

    마치 나를 위협하려는 듯한 몸짓이었다.

    “무, 무슨…….”

    내가 당황한 목소리로 뭐 하는 짓이냐고 물으려 했을 때였다.

    탁.

    그가 내 양어깨를 잡더니 뒤를 향해 밀었다.

    내 등이 가볍게 나무에 닿았고, 그가 고개를 숙여 나와 눈을 맞추었다.

    “다시 한번 묻지. 거짓말이 들통나는 순간 죽음을 면치 못할 거야.”

    “……!”

    뭐, 뭐?

    죽음을 면치 못할 거라고?

    남자 주인공이 이런 말을 해도 되는 거야?

    아무리 베탄이 다섯 남주인공들 중에 까다로운 공략 상대라고 해도 이렇게 살벌하게 다가오다니.

    상상도 하지 못했다.

    사실 원작 게임에서도 베탄은 살가운 성격이 못되었다.

    루이아나가 그의 외로움을 보듬어 주며 그를 점점 공략하기는 했지만.

    게임 속에서의 첫 만남은 루이아나와 베탄이 계단에서 우연히 부딪치면서 시작된다.

    게임과는 달리 내가 그의 이야기를 엿들으면서 만남이 시작되었지만 그 후도 이렇게 다를 줄은 몰랐다.

    베탄이 어두운 성격이기는 해도 이 정도로 나한테 무섭게 굴진 않았단 말이야!

    선물을 주면 한 번은 거절하지만 두 번째엔 받았고, 데이트 신청도 곧잘 하곤 했는데, 완전 게임이랑 딴판이었다.

    “죽음을 입에 쉽게 올리시네요.”

    내가 그를 올려다보자 그는 시선을 피하지 않고 오히려 고개를 들이밀었다.

    “필요하다면 언제든지 가벼워질 수 있는 게 사람 목숨이야.”

    “만약에 제가 무언가를 들었다면 어떻게 할 작정이었죠?”

    그러자 베탄이 잠시 뜸을 들이더니 대답했다.

    “아마도…….”

    “…….”

    “내 손에 죽었겠지.”

    “!”

    그는 어떤 표정의 변화도 없이 죽음을 입에 올렸다.

    마치 수없이 사람을 죽여 본 인간인 것 같았다.

    목적을 위해서라면 수단은 중요하지 않다는 듯한 말투.

    “하지만 운이 참 좋은 아이야. 네가 죽으면 안 될 이유가 생겼거든.”

    무슨 소리인지 알 수 없었다.

    이제는 베탄이 남주인공이라고 인식되지 않았다.

    마치 언제든지 나를 처치해 버릴 수 있는 악당처럼 굴었다.

    총기사단장.

    그 무거운 직위만큼 그의 실력은 아주 대단할 것이다.

    내가 아무리 실력을 키웠다고 하지만 상대도 안 될 사람이라는 거다.

    그가 나를 죽이려고 한다면 순식간에 목을 벨 수 있을 터.

    하지만 나를 죽이면 안 되는 이유가 생겼다고 했으니 천만다행이었다.

    자칫하면 남주인공의 손에 죽을 뻔하지 않았는가.

    히아신스도 모자라 이제는 남주인공한테서 살해 협박을 받는 상황이 되다니.

    안타까운 인생이다, 루나.

    나는 한숨을 푹 쉬며 그에게 말했다.

    “비켜요. 나가게.”

    그러자 그가 천천히 뒤로 물러섰다.

    나는 그렇게 그에게서 빠져나가려고 했는데, 실수를 했다.

    “엇……!”

    내가 바로 앞에 있는 돌부리를 보지 못하고 앞발을 걸려 버린 거다.

    예상치 못한 상황에서 발을 걸리니 내 몸이 앞으로 고꾸라졌다.

    그때.

    턱.

    그가 한 손으로 내 허리를 잡아 주었다.

    순간적으로 느꼈지만 단단한 팔이었다. 꽤 세게 넘어질 뻔한 것이었는데도 바로 잡힌 걸 보면.

    “뭐 하는 거지?”

    그가 작게 코웃음을 치며 물었다. 이 상황이 어이가 없다는 표정이었다.

    “보, 보면 몰라요. 넘어질 뻔했잖아요.”

    약간 얼굴이 붉어진 내가 시치미를 떼며 말하자 그가 혀로 입술을 핥으며 대답했다.

    “허리가 한 줌이군.”

    “?!”

    내가 눈을 동그랗게 뜨며 쳐다보자 그가 여전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힘을 더 쓰려면 많이 먹어야 할 거야.”

    관심이라고는 단 하나도 없는 표정이었다. 마치 자신의 부하에게 말을 하는 듯한 태도였으니까.

    “제가 알아서 하거든요?”

    내가 어처구니없는 표정으로 그를 쳐다보자 오히려 고개를 갸웃거렸다.

    “검을 잘 쓰던 것 치고는 기본기가 없어. 앞으로도 검을 그렇게 쥐었다간 얼마 안 가 손목이 박살 날 거야.”

    조언 아닌 조언을 한 그는 그 말을 마지막으로 인사도 하지 않은 채 발걸음을 옮겼다.

    볼 일은 다 끝났다는 양 휙 지나가 버리는 게 아닌가.

    “뭐야, 어이없어, 정말.”

    내가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협박할 때는 언제고 갑자기 웬 조언이야? 한 가지만 해야지.

    성큼성큼 걸어가는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새까만 기사복에 검은색 머리를 한 그는 기가 막히게도…….

    “겁나 섹시하긴 하네.”

    매력적이었다.

    가까이서 보니 더욱 느낄 수 있었다. 그를 둘러싼 분위기와 그림처럼 잘생긴 자태를.

    그리고…… 아까는 예선전 때문에 긴장이 되어 잘 느낄 수 없었지만 방금 보고서 알았다.

    “나… 흑발 취향이구나.”

    게임 속 일러스트로 볼 때는 특이한 머리 색을 더 선호하는 경향이 있었다.

    회색 머리의 에르셈프가 내 최애였던 것처럼…….

    하지만 실제로 보니 흑발만큼 강렬한 것이 없었다.

    짙은 밤을 떠올리게 만드는 머리칼은 바람에 아무렇게나 흐트러지는 것까지 매력적으로 만들었다.

    게다가 남성성을 나타내 주는 날카로운 콧대, 그 밑으로 이어지는 아름다운 입술선까지.

    세이먼이 평화의 기사 같다면 이 남자는 어둠의 기사 같았다.

    잘생긴 것도 정도껏 해야지.

    얼굴 때문에 대화에 집중할 수가 없잖아.

    아까는 자칫하면 그냥 그의 얼굴을 감상할 뻔한 상황에 억지로 정신을 잡았어야 했다.

    “휘말리면 안 돼. 안 된다고!”

    고개를 저으며 소리쳤다.

    * * *

    본선 1차 경연이 6일 남았다.

    이 6일을 어떻게 쓰냐에 따라 게임이 달라질 것이다.

    다행히 나는 예선전에서 다치지 않았기에 체력 회복을 해야 할 시간은 필요 없었다.

    바로 1차 경연을 위한 수련과 준비에 들어가야 하는 것이다.

    경연을 위한 준비는 무엇인가?

    바로 포션을 비롯한 필요한 아이템을 구비해 놓는 것을 의미했다.

    지금은 돈이 꽤 넉넉하게 있으니 스탯을 올릴 수 있는 아이템을 살 수 있을 터다.

    “그럼 또 마법 상점에 가야 해?”

    샐라임이 귀찮다는 듯이 묻자 내가 시큰둥하게 대답했다.

    “샐라임이 걷는 것도 아니면서 뭐가 귀찮아요.”

    “귀찮은 게 아니야. 또 그 레크리든가 뭔가 하는 얼굴을 봐야 하는 게 별로인 거지.”

    “하여간 엄청 싫어한다니까. 뭐가 그렇게 맘에 안 들어요?”

    샐라임은 마치 남자 친구를 평가하는 부모님처럼 굴었다.

    “생긴 게 맘에 안 들어. 예쁘장하게 생겼잖아.”

    “그럼 좋은 거 아니에요?”

    “재수 없어.”

    내가 기숙사 방에 앉아서 가지고 있는 아이템들을 정리하며 말했다.

    “그런데 어쩌죠, 샐라임. 레크리드가 오늘부터 우리 학교 안에 들어온다고 했어요.”

    “뭐?!!”

    샐라임이 소리를 꽥 질렀다.

    비무 대회가 시작하면서 학교 내에 마법 상점이 설치되는 것은 게임과 같은 설정이었기에 레크리드가 들어오는 건 나도 알고 있었다.

    그런데 오늘 들어온다는 것은 레크리드가 친절하게도 편지로 알려 준 사실이었다.

    “이, 이런 지독한 놈이……! 기어코 학교 안까지 따라 들어온 거냐!”

    샐라임은 씩씩대면서 소리쳤고, 나는 낄낄 웃으면서 검을 허리에 찼다.

    “어서 사러 가죠.”

    그렇게 학교 중앙으로 가자 이미 말끔하게 마법 상점이 설치된 것을 볼 수 있었다.

    나는 멀리서부터 보이는 빨간 지붕을 바라보며 그쪽을 향해 다가갔다.

    그리고 상점 안으로 들어가자, 익숙한 얼굴이 보였다.

    그것도 둘씩이나.

    “루나!?”

    “루이아나 씨.”

    발랄한 인사의 주인공 덕에 레크리드의 차분한 인사는 묻혀 버렸다.

    크게 다친 줄 알았는데 아니었던 건지, 밖으로 나다닐 수 있게 된 잰퓨어가 나를 보며 활짝 웃고 있는 것이다.

    나와 싸웠던 것은 온데간데없어졌는지 그 이전의 능구렁이 같은 모습으로 돌아와 있었다.

    “루나, 이리 와.”

    “…뭐, 뭐야.”

    이리 오라면서 본인이 다가오는 그는 성큼성큼 걸어와 나를 폭 안았다.

    “!”

    “이 품이 너무 그리웠어…….”

    마치 오랜만에 만난 연인이라도 되는 것처럼 구는 잰퓨어의 모습에 내가 적잖이 당황하고 말았다.

    그런데 당황한 사람은 나뿐만이 아니었다.

    레크리드가 굳은 얼굴로 우리를 쳐다보고 있는 것이다.

    “루이아나 씨……. 남자 친구가 있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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