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0화. 깃발 뽑기(3)
앞도 안 보고 달렸다.
탁 탁 탁 탁!
흙바닥을 뛰는 소리만 났고, 나는 죽을힘을 다해 세이프 라인으로 향하고 있었다.
저 멀리 사람들이 서 있는 세이프 라인이 보였다.
거의 다 왔다.
그리고 내 주변에는 아무도 없었다.
아직 두 자리가 남아 있다고 했으니!
무조건 합격인 것이나 다름없었다.
“헉…헉…헉…….”
그리 먼 길이 아니었는데도 빠른 속도로 뛰어오다 보니 숨이 턱 끝까지 찼다.
그래서 세이프 라인이 보이는 곳부터는 걸어가고 있었다.
뒤를 돌아보아도 아무도 따라오는 자가 없었고, 나는 그렇게 합격을 할 예정이었다.
그런데, 세이프 라인으로 다가갈수록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
세이프 라인에 들어가지 못한 채 그 주변만을 맴도는 사람들이 득실거리는 것이다.
그 사람들은 깃발을 찾는 것에 실패해 다른 사람이 찾아온 깃발을 빼앗으려는 자들이었다.
“이런 양아치 같은…….”
처음 경기가 시작될 때 보았던 거구의 사내와, 마법을 쓰는 듯 지팡이를 가지고 있는 남자, 검은색 옷으로 맞춰 입어 그림자처럼 잘 보이지 않는 여자, 이 셋이 가장 눈에 띄었다.
그리고 나머지 한 일곱 명 정도가 그 뒤에서 나를 호시탐탐 노리고 있는 것 같았다.
어떻게든 깃발 하나를 손에 넣어서 바로 세이프 라인에 골인하려는 속셈이겠지.
내가 마음대로 되어 줄 것 같냐?
나는 깃발을 로브 안주머니에 깊숙이 집어넣으며 길을 지나갔다.
아니, 지나가려 했다.
그때 아까부터 보았던 거구의 사내가 내 앞을 가로막았다.
어찌나 몸집이 큰지 저절로 그림자가 졌다.
“꼬맹아, 여긴 못 지나가겠는데.”
흔해 빠진 악당들처럼 말을 건넨 그는 마치 이런 작은 여자아이면 바로 깃발을 빼앗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얼굴에 여유로운 미소를 띤 것이, 속으로 아주 기뻐하고 있는 듯했다.
“비켜.”
내가 짧게 말했다.
뭐, 들어 먹지도 않을 테지만 예의상 한번 해 봤다.
“비키라고? 어디서 반말이야?”
“반말은 그쪽이 먼저 하셨고.”
딱 봐도 어린 일 학년 같아 보였는지 반말을 쓴 모양인데, 그러면서 나에게 존중을 바라면 안 되지.
그때 지팡이를 들고 있던 한 남자가 옆에서 등장했다.
호리호리한 마른 몸매에 안경을 낀 마법사였다.
“허, 아주 맹랑한 계집애네.”
이곳에 모여 있는 사람들은 전부 거구의 사내 뒤에 있었지만, 사내가 순순히 깃발을 가지고 가도록 놔둘 생각은 없는 것 같았다.
사내가 나를 제압해 놓으면 그 틈을 타 내 깃발을 쏙 훔쳐 갈 생각인 거겠지.
사내는 그저 도구일 뿐인 셈이었다.
마법사는 지팡이를 빙글빙글 돌리며 나를 가리켰다.
“어떻게 운 좋게 깃발을 찾았나 본데, 순순히 넘겨주면 다치진 않을 거야.”
“지랄도 적당히 하세요.”
“뭐라고?”
“깃발도 못 찾은 주제에 어디서 합격할 생각을 해.”
내 얼굴에 비릿한 미소가 떠올랐다.
골목길의 잡배들처럼 나 하나 노리겠다고 모여든 이 사람들이 너무 웃겨서 나온 미소였다.
“양심도 없으시지.”
내가 코웃음을 치며 내뱉자 이번엔 검은색으로 차려입은 암술가가 앞으로 나왔다.
“이것도 방법의 일종이야, 애송아. 죽기 싫으면 그 싹수없는 입 다무는 게 좋을 텐데?”
그녀는 열이 받았다는 듯 표정을 찡그린 채였다.
나는 그들을 쭉 훑어보았다.
대략 열 명 정도.
거의 삼, 사 학년 위주로 있는 것 같은데.
이런 야비한 방법으로 합격할 생각을 하는 사람 중에 일 학년은 별로 없겠지.
고학년이라면 내가 상대하기에 까다로워질지도 모른다.
말은 자신만만하게 뱉어 놨지만, 현재로서 나에겐 샐러맨더나 카사를 쓸 수 없을뿐더러 체력도 많이 고갈된 상태였다.
게다가 열 명이라면… 개개인의 능력치는 달릴지 몰라도 꽤 위험한 상황이 펼쳐질 수 있어.
나는 사람들 너머의 세이프 라인을 살펴보았다.
남은 자리는 고작 두 자리뿐.
깃발의 수는 32개보다 많은 50개이기 때문에 깃발을 찾은 사람이 금세 달려와 합격할지도 모르는 노릇이었다.
어쩌지?
어떻게 해야 가장 빠르고 현명하게 이 녀석들을 처치할 수 있냔 말이야.
그때였다.
스릉.
거구의 사내가 등에 메고 있었던 커다란 도끼를 꺼냈다.
일반 도끼의 다섯 배는 될 듯한 크기로 날이 시퍼런 것이, 아주 강한 위력을 가지고 있을 무기로 보였다.
“애송이는 벌을 받아야 정신을 차리지.”
그러고는 쏜살같이 거구의 사내가 나에게로 돌진했다.
“!!”
순간적으로 발을 움직이지 못한 내가 그의 공격을 허리를 숙여 가까스로 피했고, 잽싸게 거리를 벌렸다.
“양심 운운하더니 이제는 무서운가 보네? 도망가는 걸 보면?”
“닥쳐. 그딴 도발 안 먹히니까.”
내가 싸늘한 목소리로 내뱉었다.
그러자 사내는 잠시 놀랐는지 눈을 동그랗게 떴다가, 이내 코웃음을 쳤다.
“버르장머리 없는 녀석.”
그러고는 또다시 나에게 달려왔다.
이번엔 피하지 않을 거다.
샥!
내가 숏 소드를 뽑아 그의 시퍼런 도끼날을 막았다.
탕!
부르르르.
사내는 엄청난 힘으로 나를 압박해 왔고, 나는 두 손으로 칼을 부여잡은 뒤 온 힘을 다해 막았다.
“생각보다 힘이 강하군.”
내가 에르셈프에게서 배운 검술로 칼을 비틀어 그의 도끼날을 빗겨 낸 뒤 몸을 피했다.
마법사와 암술가는 나와 사내의 대치를 가만히 바라보고만 있었다.
역시, 사내가 나에게 공격하는 틈을 타 몰래 깃발만 빼앗을 셈인 거다.
이 사내와는 근접전으로 간다면 승산이 없었다.
검법과일 것이 분명한 그에게 가까이 다가가는 것은 죽여 달라고 비는 꼴이었다.
거리를 벌리고 최대한 원거리에서 공격하는 것이 맞았다.
“검법과에선 검을 그렇게 가르치나?”
하지만, 보통 사람이라면 그렇다는 것이지, 나는 그와 원거리전을 할 생각이 없었다.
아니, 할 수도 없었고.
샥!
내가 발에 마나를 둘러 아주 잽싼 속도로 사내의 뒤로 몸을 움직였다.
“!!”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었다.
그가 당황한 사이 내가 검을 휘둘러 그의 목을 노렸다.
탕! 탕!
절묘한 타이밍으로 도끼날로 나를 막은 그가 나와 검을 맞부딪치기 시작했다.
“쟤 검법과야……? 마키아를 저 정도로 상대한다고……?”
“무려 덩치가 세 배나 차이 나는 상대를 압박하고 있잖아.”
나는 그와 검을 맞부딪치며 순식간에 오러를 방출했다.
화르륵.
푸른 오러가 짧은 검신을 감쌌고, 사내의 눈이 동그랗게 커졌다.
이렇게 합을 겨루는 동안 오러를 빠르게 방출하는 건 예상하지 못했겠지.
나는 오러를 두른 검으로 사내의 손목을 향했다.
아니, 정확하게 말하면 그가 두 손으로 잡고 있는 도끼 손잡이였다.
카앙!
오러를 두른 칼날이 두터운 손잡이에 아주 강하게 부딪치자 그는 엄청난 진동을 느꼈다.
“악!”
동시에 그는 도끼 손잡이를 놓고 말았다.
검사가 칼을 놓치는 것이란 싸움에서 졌음을 의미했다.
그는 손목까지 찌릿하게 가해진 충격파에 손을 덜덜 떨며 몸을 움직이지 못했다.
“채찍.”
내가 짧게 읊자 허공에 푸른 채찍이 생겨났다.
원래라면 정령에게 충격을 가할 때만 생성할 수 있었던 채찍이지만 스킬의 숙련도가 올라갈수록 채찍을 자유자재로 물건처럼 다룰 수 있게 되었다.
촤악!
나는 길게 늘어난 채찍을 한 번 휘두르며 사내를 향해 던졌다.
휘익!
채찍은 순식간에 남자의 몸을 휘감았으며, 그는 꼼짝없이 제압될 수밖에 없었다.
“제, 젠장!!”
그는 온몸이 꽁꽁 묶인 탓에 욕지거리를 하는 것 외엔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그리고 나는 짧게 내뱉었다.
“다음 차례.”
* * *
저 너머의 세이프 라인을 보자 익숙한 사람들이 눈에 띄었다.
세이먼과 에르셈프.
그 둘은 세이프 라인 코앞에서 싸움을 하고 있는 나를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쳐다보고 있었다.
그뿐만 아니라 세이프 라인에 있는 모두의 시선이 나를 향하고 있었다.
“아직도 나랑 싸우고 싶은 거야?”
내가 나를 둘러싼 그들에게 내뱉었다.
본보기를 보여 줬는데, 아직도 모르겠다고?
사람들은 거구의 사내가 완전히 제압당하자 잠시 당황한 것 같았다.
그런데 그때, 마법사가 소리쳤다.
“다 같이 한 번에 가는 겁니다!”
그리고는 아홉 명의 사람들이 전부 나를 향해 달려오기 시작했다.
“이런, 젠장.”
나는 가장 먼저 내 얼굴을 향하는 칼부터 막아 냈다.
탕!
그다음은 순식간에 내 뒤로 몸을 움직인 암술가였다.
마치 그림자처럼 소리 없는 속도로 내 뒤에 선 그녀는 암술가답게 몰래 내 몸에서 깃발을 빼앗아 갈 생각인 것 같았다.
“그렇게 안 되지.”
내가 팔꿈치로 뒤를 향해 꽂았다.
한 손으로는 칼을 막으면서 남은 한 손으로 행한 몸짓이었다.
“크억!”
그녀가 배를 움켜쥐며 주저앉았다.
내가 그녀의 멱살을 잡고 위로 들어 올렸다. 다행히 마나를 이용해서 겨우 들 수 있는 수준이었다.
그리고 사람들이 몰려 있는 곳으로 있는 힘껏 그녀를 던졌다.
“악!”
피하지 못한 채 그녀의 몸뚱이를 맞아 버린 그들이 다들 엎어지고 말았다.
그리고 나는 숨을 고를 틈도 없이 마법사의 캐스팅을 피해야 했다.
“젠장! 마법사는 골치 아프네!”
그때, 샐라임이 내게 말을 걸었다.
내가 당하든 말든 전혀 신경 쓰지 않는다는 태연자약한 목소리였다.
“꼬마야, 광역기 한번 배워 볼래?”
나는 잠자코 그의 말을 들었다.
탕! 탕!
와중에도 온갖 칼과 매직 캐스팅, 표창을 막아 내는 중이었다. 막아 낸다기보단 피하고 있달까.
그리고 나는 곧이어 물의 정령을 소환해 냈다.
“운디네.”
내 주변에 남은 사람은 네 명.
그들은 하나 같이 손에 무기를 든 채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나는 공중에 생겨난 운디네에게 말했다.
“오늘 처음 만났지만, 한번 해 보자.”
그러고는 머릿속으로 무언가를 그렸다. 동시에 내 모든 마나를 내뿜는 것 같은 느낌으로 운디네에게 명령했다.
“물방울 무도.”
지금으로선 온전치 않은 스킬이었다. 불의 정령인 샐라임이 알려 준지라 잘 알아듣지도 못했고, 운디네와는 친화력이 떨어져 어떻게 될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나에게 남은 단 하나의 방법.
“쓸어버려!”
그러자 사람 모양의 운디네는 순식간에 엄청난 폭포수의 물처럼 변하더니 나를 둘러싼 모든 곳을 물바다로 만들었다.
촤아악.
태풍의 눈이 소용돌이치는 것처럼 강한 힘으로 물결을 쏟아 낸 운디네는 사람들을 저 멀리 쓸어 내기에 충분했다.
‘물방울 무도’는 단 한 번의 공격으로 많은 사람들을 제압할 수 있는 방법이었던 거다. 빠른 속도로 여러 사람을 물리쳐야 하는 지금 이 순간에 제격의 스킬이었다.
“역시, 가르칠 맛 난다니까.”
“…쿨럭! 쿨럭!”
아직 내 레벨에 맞지 않는 스킬을 사용하려다 보니 온몸에서 땀이 흘러나왔다.
숨도 목 끝까지 차서 기침을 계속해서 내뱉어야만 했다.
하지만.
“지금이다. 뛰어!”
사람들이 저 멀리 쓸려 나간 동안이었다.
나는 죽을 힘을 다해 뜀박질을 했다.
다시 잡히지 않게, 어서 빨리 들어가야 한다.
어서……! 어서……!
탁! 탁! 탁! 탁!
그리고 나는.
“용케 들어왔군, 루나.”
에르셈프의 축하와 사람들의 관심을 한껏 받으며 골인할 수 있었다.
나는 품속에서 깃발을 꺼내 감독관에게 흔들었고, 이내 안내 방송이 이어졌다.
“32 자리가 모두 채워졌습니다! 경기를 종료합니다!”
꼴등으로 들어올 줄은 전혀 몰랐다.
내가 싸우는 동안 누군가 한 명이 몰래 지나간 건가?
하지만 어찌 되었든 합격했으니 천만다행인 셈이었다.
“하아…….”
드디어 숨을 몰아 내쉬었고, 에르셈프가 내 등을 두드려 주었다.
내가 정신이 없는 탓에 에르셈프의 손길을 그대로 받고 있자 그가 작게 입꼬리를 올리는 것이 보였다.
그때, 세이먼이 다가와 내 얼굴을 덥석, 부여잡았다.
“?!”
양손으로 내 볼을 잡은 그가 허리를 숙여 내 얼굴을 보더니 입을 열었다.
“누가 그렇게 겁 없이 싸우래요. 걱정되어 죽는 줄 알았잖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