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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섯명은 너무 많잖아요 (69)화 (69/156)
  • 68화. 깃발 뽑기(1)

    “이번 예선전의 경기는 바로 ‘깃발 뽑기’입니다!”

    안내 방송의 낭랑한 음성이 경기장에 울려 퍼졌다.

    “경기장에는 총 50개의 깃발이 숨겨져 있습니다. 땅속에 묻혀 있기도 하고, 나무 위에 매달려 있기도 하죠. 방법은 간단합니다! 깃발을 찾아서 이 세이프 라인까지 돌아오는 겁니다.”

    예선전 ‘깃발 뽑기’는 간단히 말하면 깃발을 뽑아 돌아오는 선착순 게임이었다.

    합격자 자리는 오직 32개뿐.

    깃발을 찾았더라도 32명 안에 들지 못하면 탈락인 시스템이었다.

    “경기는 32명이 모두 채워지는 순간 종료됩니다. 그럼 시작하겠습니다!”

    그러자 숲으로 들어가는 길을 막고 있던 철문이 열렸다.

    세이프 라인은 지금 서 있는 숲의 입구.

    경기가 시작하자 세이프 라인에 서 있던 대부분의 학생들은 우르르 숲속으로 들어가기 시작했다.

    선착순인 만큼 빠르게 찾아서 돌아올 생각인 것이었다.

    하지만 그러지 않은 학생들도 많았는데.

    숲의 입구 쪽에서 자리를 잡은 채 앉아 있는 거구의 사내가 보였다.

    딱 봐도 힘이 세 보이는 사내는…….

    “앞에서 깃발을 뺏을 셈이군.”

    내가 학생들을 둘러보며 중얼거렸다.

    어떤 학생은 빗자루를 가지고 있었는데, 휙 올라타더니 하늘 위로 쑥 올라갔다.

    “위에서 정찰할 모양인가 보네.”

    경기가 시작하고 나서도 세이프 라인에 남은 학생들은 다들 머리를 한 번 굴린 사람들이었다. 빠르게 들어가 봤자 아무런 소용이 없다고 느낀 거겠지.

    나 또한 마찬가지였다. 막무가내로 찾는 건 질색이니까.

    “샐러맨더.”

    나는 샐러맨더를 소환해 명령했다.

    “가장 가까운 깃발이 어디 있는지 찾아와.”

    그러자 샐러맨더는 하늘로 치솟더니 빠르게 날아갔다.

    샐러맨더가 깃발을 찾아 다시 돌아오면 그때 움직여도 된다.

    다른 정령술사라면 마나 소모가 크겠지만, 나는 전혀 상관할 바가 아니었다.

    여유롭게 서 있는데, 저기서 세이먼과 에르셈프가 보였다.

    그들도 무언가 다른 방법을 생각한 건가?

    “세이먼, 에르셈프.”

    옆에 세이먼이 있으니 에르셈프를 봐도 그리 무섭지 않았다. 조금 신경이 쓰이긴 했지만 저번보다는 확실히 나았다.

    “루나! 안 그래도 찾고 있었어요.”

    “저요?”

    “함께 다닐래요?”

    세이먼이 에르셈프와 함께 셋이서 깃발을 찾으러 가자고 제안해 왔다.

    “깃발을 찾는 건 절대 쉬운 일이 아닐 거예요. 혼자 이리저리 찾으러 다니는 건 비효율적이죠. 셋이서 나눠서 정찰하면 훨씬 나을 겁니다.”

    나는 잠시 고민했다.

    “음…….”

    옆에서 에르셈프는 곁눈질로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저번에 내가 밀친 이후로 나에게 다가오기 어렵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안에는 몬스터들도 득실득실할 겁니다. 저희가 도와줄게요.”

    세이먼은 계속해서 설득해 왔고,

    “…….”

    에르셈프는 입을 꾹 다문 채 말이 없었다. 잠시 고민한 나는 딱 잘라 말했다.

    “괜찮아요. 혼자 가도 되니까.”

    “?!”

    그들은 놀란 것 같았다.

    왜 이런 제안을 거절하냐는 듯한 표정이었다.

    다른 학생들이었다면 웬 떡이냐, 하고 좋아했을 게 분명했다.

    무조건 합격할 실력자 두 명이 도와준다고 하니 완전 땡큐지.

    그런데 나는 괜찮았다. 굳이 나를 도와줄 필요도 없다. 예선전조차 내 힘으로 통과하지 못한다면 본선에 올라가도 의미가 없다.

    이건 내가 상위 20% 안에 드는지 확인할 수 있는 테스트. 남의 도움 없이 테스트에 임할 필요가 있었다.

    “왜 거절하는 거죠?”

    세이먼이 묻자, 내가 대답했다. 옆으로 날아온 정령을 맞이하며.

    “아, 이제 샐러맨더가 도착했네요. 정찰을 보내 놨었거든요.”

    “…….”

    “그럼 다들 행운을 빌어요!”

    샐러맨더가 드넓은 경기장을 샅샅이 날아다니며 가장 가까운 깃발의 위치를 알아 왔으니 굳이 그들의 도움이 필요 없었다.

    “으이그, 예쁜 것.”

    내가 샐러맨더를 품에 안으며 쓰다듬어 주었다.

    샐러맨더는 기분이 좋은 듯 한 번 빙글, 돌더니 나를 깃발의 위치로 이끌기 시작했다.

    * * *

    샐러맨더가 날아가는 방향으로 따라가고 있던 참이었다.

    뭔가가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가까이 가면 갈수록 알 수 없는 마나의 흐름이 느껴지는 것이다.

    “근방에 몬스터가 있다. 조심해.”

    금세 알아차린 샐라임이 먼저 경고해 주었다.

    그리고 샐러맨더가 이끈 곳으로 간 결과, 숲속에 있는 작은 공터가 나왔다.

    작은 공터 안에는… 나를 맞이해 주는 무언가가 있었다.

    ‘웨어베어.’

    몬스터의 머리 위에는 이름이 작게 적혀 있었다.

    겉모습은 곰과 인간을 섞어 놓은 모양새였다.

    수인형 몬스터는 처음 마주했기에 순간적으로 당황했다.

    웨어베어는 기가 막히게 귀가 좋은지 내가 가까이 다가온 것만으로도 경계 태세를 취했다.

    갈색 털이 난 얼굴을 이리저리 휘릭 휘릭! 돌리며 나를 찾는 모습은 꽤나 위협적이었다.

    “깃발은 어디 있다는 거지?”

    나는 나무 뒤에 숨어 웨어베어를 바라보며 깃발을 찾았다.

    이 근처에 있다는 건데…….

    “!”

    나는 그제야 깃발을 찾을 수 있었다.

    파란색 깃발은 웨어베어의 짧은 꼬리에 묶여 있었다.

    “싸워서 쓰러뜨리는 수밖에 없겠군.”

    그때였다.

    “31 자리가 남았습니다.”

    경기장 위쪽에서 안내 방송이 들려왔다.

    벌써 한 명이 깃발을 찾고 돌아온 것이었다.

    이렇게 빨리?

    경기가 시작한 지 채 삼십 분이 되지 않았다.

    대체 누구일까.

    조금씩 조급해지기 시작했다.

    빨리 쓰러뜨리고 돌아가자.

    “몬스터 정보 확인.”

    +

    이름: 웨어베어

    등급: D

    설명: 곰과 인간이 섞인 수인형 몬스터다. 깊은 산속에 살기 때문에 마주치기 쉽지 않다. 등급은 높지 않지만 만약 마주친다면 바로 도망치길 권한다. 곰의 특성을 가지고 있는 웨어베어는…….

    +

    여전히 몬스터 정보는 쓸데없이 길단 말이지.

    핵심만 보여 달라고, 핵심만.

    길게 늘어진 글자들을 확인한 나는 웨어베어의 약점을 보고 눈을 동그랗게 떴다.

    약점이 없다고……?

    딱히 약점이라 할 부위가 없기 때문에 그저 쓰러질 때까지 패는 수밖에 없다고 나와 있었다. 위력이 아주 강한 몬스터는 아니지만 처치하는 것이 꽤 귀찮기 때문에 보면 피하라고 써 있었던 것이다.

    “일단 거리를 벌려 놓고, 공격한다.”

    내가 나무 뒤에 서서 카사를 소환해 냈다.

    그리고 샐러맨더와 카사에게 명령했다.

    “공격해.”

    샐러맨더와 카사가 웨어베어 앞으로 쏙 나가 몬스터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크르르…….”

    웨어베어는 자신을 위협하는 것들이라고 생각했는지 금세 날카로운 이빨을 드러냈다.

    펑! 펑!

    샐러맨더와 카사가 붉은 화염을 웨어베어에게 쏘아 댔다.

    “채찍.”

    그리고 뒤에서 내가 길게 채찍을 꺼내 카사와 샐러맨더에게 버프를 걸어 주었다.

    채찍을 얻어맞은 정령들이 더욱 빨갛게 변하며 웨어베어를 공격했다.

    “크아악!”

    웨어베어는 뜨거운 듯 불길에 사로잡혀 몸부림을 쳤다.

    나는 계속해서 정령들에게 채찍질을 가했다.

    착! 착!

    웨어베어의 머리 위에 뜬 체력 수치가 크게 닳았고, 샐러맨더와 카사는 더욱 힘을 가하며 공격해 댔다.

    “폭발해. 두 번에 죽여 버리자.”

    그러자 샐러맨더가 웨어베어의 앞으로 가 펑! 하고 스스로를 폭발시켰다.

    펑!

    폭죽이 터지는 소리와 함께 폭발한 샐러맨더는 그대로 정령계로 돌아갔고, 카사가 그다음 차례로 다가갔다.

    펑!

    웨어베어의 배 쪽에서 폭발한 카사 또한 정령계로 돌아갔고, 웨어베어는 온몸에 붙은 불꽃을 잠재우려 마구 흙바닥을 뒹굴었다.

    “이제 내가 나설 차례.”

    그리고 나무 뒤에 숨어 있던 내가 웨어베어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정령을 폭발시키지 않아도 충분히 웨어베어 정도는 처치할 수 있었지만 이번 경기는 바로 선착순.

    빠르게 처치하고 빠르게 돌아가는 것이 가장 중요했다.

    “29 자리 남았습니다.”

    경기장 위에서는 사회자가 자리가 하나씩 채워질 때마다 말해 주었고, 그것은 참가자들을 초조하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나는 숏 소드를 뽑아 웨어베어에게로 돌진했다.

    웨어베어의 체력 수치는 단 한 방의 일격으로 죽을 만큼 남아 있었고, 나는 단숨에 칼을 휘둘렀다.

    슉!

    하지만 생각보다 잽싼 웨어베어가 허리를 숙이며 내 칼을 피했고, 나에게 주먹질을 했다.

    웨어베어의 주먹은 위력이 꽤 있었지만 둔탁하고 느렸고, 나는 가뿐하게 피하며 오른손에 쥔 숏 소드를 빠르게 왼손으로 바꿔 쥐었다.

    그리고 오른손으로 주먹을 쥐어 웨어베어의 턱밑을 갈겨 버렸다.

    퍽!

    “끄흑!”

    짧은 신음을 내고 죽은 웨어베어는 바닥에 털썩 쓰러졌고, 나는 꼬리에 단단히 묶인 깃발을 풀어내었다.

    “좋았어. 이대로 세이프 라인까지만 가면 돼.”

    구겨진 깃발을 펴서 주머니에 잘 넣은 다음 바닥에서 일어났다.

    벌써 세이프 라인에 도착한 학생들은 운 좋게 땅속에 숨겨진 깃발이나, 나무에 매달린 깃발을 찾은 경우인 것 같았다.

    아니면 탐지 마법을 이용해 손쉽게 찾은 경우 같기도 했다.

    일단은 나도 빠르게 깃발을 찾았으니 이제 돌아갈 일만 남았다.

    “주먹이 좀 얼얼하네.”

    마나를 두른 채 주먹질을 했는데도 주먹이 빨갛게 변해 있었다.

    그만큼 웨어베어의 방어력이 높았다는 것이다.

    딱 한 방만 때리긴 했지만 주먹을 맞힐 때의 감각은 아주 단단한 돌을 때리는 것 같았다.

    주먹을 만지작거리며 세이프 라인까지 돌아가고 있었다.

    “26 자리 남았습니다.”

    아직 여유가 있으니 굳이 서두를 필요는 없었다. 천천히 가도 무조건 통과니까.

    그렇게 가고 있었는데, 어디선가 남자의 신음 소리가 들려왔다.

    “악!”

    “윽!”

    “커억!”

    안 봐도 누군가에게 두들겨 맞고 있는 것 같았다.

    한번 볼까?

    궁금한데.

    나는 남자의 소리가 들리는 쪽으로 걸어갔다.

    시간이 많이 남았으니 이 정도 여유는 부려도 된다.

    슬금슬금 폭행의 현장으로 다가간 결과, 나는 입을 떡 하니 벌렸다.

    내가 본 장면은…….

    “잰퓨어……?”

    잰퓨어가 거대한 사마귀 몬스터에게 맞고 있는 모습이었기 때문이다.

    그것도…….

    “완전 처 맞고 있잖아……?”

    잰퓨어는 그렇게 체력이 다 닳을 정도로 지쳐 보이진 않았다.

    그리고 내가 아는 잰퓨어는 원거리 공격을 주로 하기에 저렇게 직접적으로 맞는 경우는 별로 없을 텐데.

    “기습 공격이라도 당했나?”

    어쩌다가 근접전으로 휘말려 거대 사마귀에게 맞고 있는 것 같았다.

    나는 바위 뒤에서 그 모습을 지켜보며 잠시 고민했다.

    “이걸 도와줘, 말아?”

    혹시라도 도와주게 된다면 남은 자리가 없어질지도 몰랐다.

    만약 나까지 휘말리게 된다면 예선전은 바로 탈락이었다.

    난 꼭 이 예선전에 붙어야 하는데…….

    “악! 제발! 도와! 주세요!”

    하지만 내가 고민하는 걸 알기라도 하는 사람처럼 잰퓨어는 도움을 요청해 왔다.

    “후……. 루나, 너 이렇게 오지랖이 넓다고?”

    내가 스스로에게 물었다.

    이건 오지랖이다, 오지랖이다.

    스스로 잘 해결하겠지.

    비무 대회에 출전했으면 그 정도 능력은 있을 테니까.

    “…….”

    그런데 부상이라도 당하면 어쩌지?

    아니면 죽을 수도 있잖아?

    “어떡하지!”

    나는 원래 가던 길로 가려던 발걸음을 멈추고 다시 잰퓨어 쪽을 돌아보았다.

    퍽! 퍽! 퍽! 퍽!

    이리저리 공중에서 사마귀에게 주먹질을 맞고 있는 모습이었다.

    너덜너덜해진 그의 옷과 더러워진 얼굴.

    거대 사마귀는 아주 적수라도 만났다는 듯 신나게 잰퓨어를 패고 있었다.

    지금 잰퓨어를 도와주면 예선전에서 탈락할지도 몰라…….

    “18 자리 남았습니다.”

    남은 합격자 자리는 벌써 열 명대로 들어섰고, 어서 세이프 라인으로 향해야만 했다.

    하지만…….

    나는 한숨을 쉬며 말을 내뱉었다.

    “젠장, 내가 저걸 어떻게 지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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