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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섯명은 너무 많잖아요 (68)화 (68/156)
  • 67화. 비무 대회 준비(3)

    “말해 봐. 왜 날 밀친 거지?”

    그가 황당하다는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사실…….”

    내가 말끝을 흐렸다. 아무것도 모르는 에르셈프에게 어떻게 말을 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히아신스는 이미 퇴학을 당했지만 에르셈프를 사칭했다는 게 밝혀진다면 그녀는 추가적인 벌을 피하지 못할 것이다.

    이걸 대체 어떻게 설명해야 하는 거야.

    처음부터 끝까지 설명하려니 내가 살인 표적이 되어 살해 협박을 받았었다는 이야기까지 전부 해야만 한다. 도저히 엄두가 나질 않았다.

    그는 다시 한번 나에게 다가왔다.

    “윽!”

    내가 소리를 내며 벤치 뒤로 피하자 그의 표정이 순식간에 사색이 되었다.

    “…….”

    “미, 미안해요, 에르셈프.”

    에르셈프의 잘못이 아니라는 걸 알면서도 가까이 오는 게 싫었다.

    이건 단지 내 생존 본능에서 온 행동이었다.

    “나, 나를 이렇게 피하다니…….”

    그는 절망스러운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평소에는 뭐든지 덤덤하게 받아들이는 에르셈프였는데, 내가 피하는 모습이 꽤 충격적이었나 보다.

    그는 포기하지 않았다. 이번엔 내게 손을 내밀었고,

    “악! 가까이 오지 마요!”

    내가 손으로 막는 시늉을 하며 저리 가라는 제스처를 취했다. 에르셈프는 진정으로 슬퍼하는 것 같았다.

    “내가, 내가 루나에게마저 기피해야 할 존재가 되어 버리다니…….”

    “에, 에르셈프…….”

    나는 그저 벤치 뒤에 숨어 그의 이름을 부를 뿐이었다. 그러자 에르셈프가 땅을 바라보고 있던 고개를 들더니, 입을 열었다.

    “안 되겠군. 다음에 다시 찾아오지.”

    무언가 결심한 표정이었다.

    뭐지? 뭔 생각이라도 떠오른 건가?

    그는 그 말을 마지막으로 미련 없이 자리를 떠났다.

    미안해요, 에르셈프. 도저히 어쩔 수가 없었어요.

    그렇게 에르셈프를 보내자 갑자기 잠자코 있던 샐라임이 입을 열었다.

    “잘했어, 꼬마. 저놈은 아예 받아 주지를 말라고.”

    아주 통쾌하다는 목소리로.

    아무래도 그를 제대로 마주하려면 시간이 좀 지나야만 할 것 같았다.

    “후…….”

    에르셈프에게서 빠져나온 나는 길게 숨을 내쉬었다. 그러고는 원래 향하던 길인 본관으로 발을 돌렸다.

    본관에 도착하자 세이먼이 학생들에게 지원서를 받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세이먼은 학교 일로 항상 바쁘구나. 학생회장 일도 하면서 검술 수련까지 겸한다는 것이 새삼 대단해 보였다.

    “루나도 지원하려고 왔나요?”

    “네. 한 번 도전해 보려고요.”

    “아까는 에르셈프와 잰퓨어가 지원서를 내고 갔는데, 루나도 참가한다니 좋네요.”

    “세이먼은요?”

    “저도 물론 참가한답니다. 작년에는 아쉽게 이 등을 했지만 이번에는 우승을 노리고 있어요.”

    “!”

    그러고 보니 세이먼은 우리 학교의 수석이었다.

    그런 사람과 함께 비무 대회를 나가야 한다니.

    벌써부터 쉽지 않은 길이 될 것이라고 느껴졌다.

    그뿐만 아니라 에르셈프는 저번에 암살자와의 대면에서 보았듯이 엄청난 실력을 가지고 있는 검사였다.

    잰퓨어 또한 정령술과에서 행한 마력량 테스트에서 이 등을 한 장본인이었다.

    비무 대회에서 준우승을 하기 위해서는 이들과의 싸움을 피하지 못할 것이다.

    내가 세이먼과 에르셈프의 검술 실력을 이길 수 있을까?

    한 번도 그들과 겨뤄 보지 않아 가늠이 되지 않았다.

    잰퓨어도 마찬가지였다.

    나는 그저 마력량 테스트에서 1등을 한 것뿐이었다.

    마력량이 높은 것과 실제 전투 실력이 좋은 것은 꽤 차이가 났다.

    정신없는 전투 상황에서 빠르고 올바른 판단을 내리고, 정교한 스킬을 부리는 것은 많은 실전 경험에서 나오는 것이었다.

    게다가 나는 아직 1학년이다.

    4학년 선배들도 대부분 출전한다고 들었고, 우리 아카데미보다 수준이 높은 엔리에타 아카데미 학생들도 많이 나올 것이었다.

    상대적으로 실전 경험이 부족한 나는 차이가 나는 만큼 연습으로 메우는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나에겐 그동안 피를 토하면서 한 샐라임과의 수련이 있다.

    마냥 나도 제자리걸음은 아니었다.

    수업도 빼먹고 한 특훈인 만큼 다른 학생들보다 뛰어난 실력을 보여 줄 거다.

    “후후…….”

    긴장되는 마음 반, 설레는 마음 반이 되어 나는 작게 웃음을 지었다.

    재미있는 일이 벌어질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비무 대회는 예선전과 본선 1차, 본선 2차로 나뉘어요. 예선전으로 본선에 나갈 32명을 뽑는답니다. 여기서 80%는 다 떨어진다고 봐야 하지요.”

    내 뒤로 지원서를 넣는 사람이 없자 세이먼이 나에게 설명을 해 주었다.

    “모든 시합에는 경기 방법을 제외하고는 규칙이 없어요. 그런 만큼 부상자도 많으니 몸조심해야 해요, 루나. 요새 더 핼쑥해진 것 같아 걱정이에요.”

    비무 대회에 대해 설명을 해 주던 세이먼은 갑자기 내 몸 걱정으로 말을 돌렸다.

    나는 불쑥 말을 꺼냈다.

    “세이먼, 저랑 붙게 되면 어떻게 할 거예요?”

    “네?”

    “저 다치게 할 수 있어요?”

    내가 은은한 미소를 띠며 그에게 묻자 그도 입꼬리를 올렸다.

    “어떻게 해 줄까요.”

    네가 원하는 대로 해 주겠다는 그의 말투.

    그 자신만만한 말투는 그의 탄탄한 실력에서 나오는 거겠지.

    그 뛰어난 실력으로 과연 나를 제압할 수 있을까?

    내가 조그마한 상처가 나도 안절부절 걱정하는 세이먼이, 나에게 피해를 입힐 수 있냐는 거다.

    나는 여유로운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약속 하나 하죠.”

    “뭔데요?”

    “서로 봐주기 없는 걸로. 그리고 끝나고 나서도 뒤끝 없는 거예요.”

    그러자 세이먼이 웬일로 웃음을 터트렸다.

    “하하하…….”

    이렇게 웃는 모습은 처음 봤기에 나는 약간 놀랐다. 이게 그렇게 웃긴 말인가?

    “알겠어요. 무조건 본선 2차 토너먼트까지 올라오는 거예요, 루나.”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예선전은 일주일 뒤였다.

    80%가 떨어진다는 예선전은 실력자 32명을 뽑기 위한 거름망에 불과했다.

    그리고 그 32명으로 벌이는 불꽃 튀기는 싸움이 사실상 비무 대회의 핵심인 것이다.

    예선전은 무조건 통과해야 한다.

    상위 20% 안에 드는 싸움.

    크다면 크고, 작다면 작은 수치였다. 한 번도 다른 과의 학생과 겨뤄 본 적은 없지만, 이상하게 자신감이 들었다.

    “할 수 있어.”

    소원을 이루기 위해서라면, 물불을 가리지 않을 거다.

    * * *

    매일매일 눈코 뜰 새 없이 수련을 하느라 시간이 가는 줄을 몰랐다.

    금세 일주일은 지났고, 어느새 비무 대회의 막이 올랐다.

    공중에는 엔리에타 아카데미와 비젠티아 아카데미의 친선 경기를 기념한다는 현수막이 늘어섰다.

    축제 분위기처럼 들뜨긴 했지만 예전의 적성 테스트 행사와는 느낌이 사뭇 달랐다.

    마법 협회에서 온 사람들이 학교 안을 지나다녔고, 소속 기사처럼 보이는 사람은 갑옷을 입은 채 돌아다녔다.

    “우와……. 마법 협회 사람들은 이런 느낌이구나.”

    라인하르트 왕국의 마법 협회인 ‘램클리프’에서 온 사람들과 율리우스 제국의 마법 협회인 ‘볼프문트’에서 온 사람들이었다.

    그들의 목적은 비무 대회를 지켜보며 실력 있는 학생들을 스카웃 하려는 것이었다.

    보통 4학년들이 주로 스카웃을 당하며, 졸업 후에 해당 마법 협회에 소속되어 일을 한다고 들었다.

    “비무 대회 참가자들은 이쪽으로!”

    선생님들이 학생들을 인솔하며 소리쳤다.

    경기는 아공간으로 만들어진 숲에서 이루어졌다.

    스케일이 큰 경기인 만큼 새로운 공간을 만들고, 학교 내부에서 경기를 지켜볼 수 있도록 시스템을 만들어 놓은 것이었다.

    “으, 떨려.”

    예선전이 시작하기까지 15분이 남아 있었다.

    나는 화장실이라도 갔다 올 생각으로 본관 건물로 향했다.

    다들 경기를 지켜보는 참관석이나 숲으로 가 있었기에 본관에는 사람이 드물었다.

    그렇게 화장실을 갔다가 복도로 나와서 걷고 있는데, 빈 강의실 안에서 무언가 대화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소곤거리며 말하고 있는 것이 마치 비밀스러운 이야기를 주고받는 것 같았다.

    “혼란스러운 틈을 타 진행하는 걸세…….”

    “만에 하나 눈치를 챈다면…….”

    나는 엿들을 생각은 아니었지만 자연스레 들려오는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대체 무슨 소리를 하는 거지?

    무언가 일을 꾸미려는 것 같은데…….

    강의실의 문 뒤에 숨어 그들의 얼굴을 확인했다.

    나이가 지긋이 든 노인과 젊어 보이는 사내의 뒷모습이 보였다. 노인은 마법 협회의 간부처럼 보였고, 사내는 지시를 받고 움직이는 일원인 것 같았다. 몸에 견갑을 입은 걸 보니, 기사인가?

    그때였다.

    휙!

    날카로운 단검이 강의실 문에 콱! 꽂혔다.

    “흡!”

    순식간에 날아온 칼날에 너무나도 놀라 얼어붙을 수밖에 없었다.

    “쥐새끼가 말을 듣고 있네요.”

    사내가 낮은 목소리로 조용히 읊었다. 그러고는 대답을 기다리지 않았다. 성큼성큼 나에게로 다가와 내 앞에 섰다. 나는 눈을 동그랗게 뜬 채 사내를 마주할 수밖에 없었다.

    딸꾹질이 나올 것 같은 느낌을 참으며 그 사내와 마주하자,

    “어디까지 엿들었지?”

    검붉은 적안이 날카로운 시선으로 나를 훑고 있었다.

    “!!”

    그리고 그 눈동자를 봄과 동시에 상태창이 떠올랐다.

    +

    이름: 베탄 오스가르드

    나이: 21

    직위: 램클리프 마법 협회의 총기사단장

    호감도: 0%

    +

    “…….”

    이렇게 마주할 줄은 몰랐기에 손으로 입을 틀어막았다.

    비무 대회가 시작하면서 마주칠 것은 알았지만, 이렇게 살벌하게 만날 줄은 몰랐다.

    제5 남자주인공, 베탄 오스가르드.

    그는 냉정한 성격과 거침없는 행동, 위압감을 주는 아우라를 뽐내는 사람이었다. 그리고 남주인공들 중 유일하게 성인이어서, 야릇한 묘사를 도맡는 역할이었다.

    게다가 일러스트도 어찌나 잘 뽑았는지 마치 마왕이 떠오르는 듯한, 어두운 분위기의 미남으로 인기를 얻었다.

    나를 발가벗기는 듯한 붉은색 눈동자와 오뚝하게 솟은 코, 굳게 다물어져 고집 있는 인상처럼 보이는 입술. 그리고 새까만 머리칼까지. 한순간에 그에게 압도되었다고 보아도 무리는 아니었다.

    “아무것도 못 들었어요. 그냥 지나가다가 사람이 있길래…….”

    내가 당황한 나머지 말끝을 흐리자 그가 미간을 약간 좁히며 나를 내려다보았다.

    그의 입장에서는 나는 작고 어린 여자아이로밖에 보이지 않겠지.

    그러니 내가 뭘 들었다고 한들 그리 신경 쓰지 않을 터다.

    그런데, 그가 갑자기 한 손으로 내 턱 끝을 잡았다.

    “!!”

    그리고는 얼굴을 자세히 들여다보았다. 여전히 약간 인상을 쓴 채였다.

    “매우… 닮았군.”

    “……?”

    “내가 아는 여자와 매우 닮았어. 출신이 어디지?”

    “작은 상인 집안입니다. 그런데 이, 이것 좀…….”

    내 턱을 잡은 탓에 고개가 들려 목이 아팠다. 그러자 남자가 손을 거두었다.

    그의 거침없는 손길에 정신이 없었는데, 그때 머릿속에 퍼뜩 무언가가 떠올랐다.

    “맞다, 예선전!”

    강의실 안 시계를 보니 오 분이 채 남아 있지 않았다.

    나는 급한 마음에 고개를 꾸벅 숙이고는 뒤를 돌아 발걸음을 빨리했다. 그러자 뒤에서 남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지켜보지.”

    낮고 짙은 음성이 복도를 울렸고, 나는 잠깐 뒤를 돌아보았다.

    그는 그 자리에 서서 내가 뛰어가고 있는 걸 그대로 지켜보고 있었다.

    나는 다시 고개를 앞으로 한 뒤 예선전 장소를 향해 달렸다.

    “헉…헉……. 다행이다.”

    일 분 남기고 경기장에 도착한 나는 깜짝 놀랄 수밖에 없었다.

    수많은 학생들이 빼곡하게 서 있었기 때문이다.

    이렇게 많을 일이야!?

    아는 사람은 없나 이리저리 살피고 있는데, 경기장 위쪽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경기 시작을 알리는 안내 방송이었다.

    “곧 있으면 제18회 비무 대회 예선전이 시작됩니다. 이번 예선전의 경기는…….”

    주변이 한순간에 조용해졌다.

    웅성거리던 학생들도 전부 숨을 죽이고 귀를 기울였다.

    어떤 경기가 나올까.

    족히 200명은 될 참가자들 중 32명을 뽑을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인가.

    나 또한 떨리는 마음으로 안내 방송에 집중했다.

    그리고, 드디어 예선전의 막이 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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