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4화. 시들어 버린 꽃
하지만 그녀는 내 목에 상처를 낼 순 없었다.
“!!”
아니, 애초에 팔을 움직일 수조차 없었다.
바로 불꽃 칼날로 변해 있던 샐러맨더가 그녀의 팔을 단단히 붙잡아 움직이지 못하게 제압해 버린 거다.
“이! 이게 뭐야!”
단숨에 오른팔을 붙들린 히아신스가 마구 버둥거렸지만 샐러맨더는 더욱 단단히 옥죌 뿐 움직임을 허용하지 않았다.
퍽!
내가 그제야 팔꿈치를 뒤로 찔러 그녀의 배를 가격한 뒤 그녀에게서 빠져나왔다.
“억!”
명치를 맞은 그녀가 단말마의 비명을 지르며 앞으로 고꾸라졌다.
와중에 칼을 쥔 오른팔은 허공에 묶여 있었다.
“나를 죽이려면 더 치밀했어야지. 이 정도의 칼부림으로 나를 죽일 수 있을 거라 생각한 거야?”
“크흑…….”
그녀가 분한 듯 이를 악물었다.
“루나! 괜찮은 겁니까!?”
세이먼이 잔뜩 구겨진 표정으로 나에게 달려왔다. 내 얼굴을 쥐고는 이리저리 살피며 괜찮냐고 묻는 그는 나보다도 더 흥분한 상태인 것 같았다.
“괜찮아요. 이 정도로 죽을 사람 아니라고요.”
내가 태연하게 내뱉었다.
저번에 가짜 에르셈프에게 목을 졸려 봐서 히아신스에게 인질로 잡혀 있는 상황에서도 그리 겁이 나지 않았던 것이다.
그리고.
“겁내지 마. 목에 칼을 들이밀고 있어도 빠져나갈 방법은 충분히 많으니까.”
붙잡혀 있는 동안 이렇게 샐라임이 말해 준 덕분이기도 했다.
히아신스는 샐러맨더 덕분에 완전히 제압당한 상태였고, 내가 그녀에게서 빠져나오자 인질극은 종료될 수 있었다.
곧이어 선생님들이 도착했다.
“무슨 일이지? 급한 상황이 있다고 들었는데.”
그들은 히아신스의 상태와 내 목에 난 핏자국을 보고는 사색이 되었다.
학교에서 이런 일이 일어난 것이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이었다.
“이, 이게 지금 무슨 짓인가? 당장 저 학생을 교무실로 데려가게.”
그제야 샐러맨더가 그녀의 팔을 풀어 주었고, 그녀는 힘없이 칼을 떨어뜨렸다.
이젠 모든 것이 끝났다.
그녀의 욕심도, 학교생활도 전부 다.
허탈한 표정을 짓는 히아신스의 시선은 내 쪽을 향하고 있었다.
여전히 내 앞에서 안절부절못해하는 세이먼의 모습을 보며 자신의 위치를 깨달은 것이다.
“…….”
그녀는 아무 말이 없었고, 이내 시선을 거두었다.
나는 세이먼의 도움을 받아 곧장 병원으로 향할 수 있었다.
병원까지 갈 정도의 상처는 아니었지만 다친 부위가 목이라 다들 걱정하는 것 같았다.
세이먼은 병원으로 나를 데려다주었다.
“같이 들어가요.”
“네? 혼자 갈 수 있는데…….”
“혹시나 무슨 일이 생겼으면 어떡해요. 어서 같이 들어가요.”
그는 내 목의 상처 말고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는 듯이 내 손을 덥석 잡고 이끌었다.
“……!”
“이리 와요.”
그의 손이 내 손에 닿자 따스한 감촉이 느껴졌다.
검을 잡는 사람이라 손에는 온갖 굳은살이 박여 있었다. 그렇지만 감촉이 나쁘지 않았다.
오히려 그의 검을 향한 진정성이 느껴지는 것 같았다.
나도 저 정도가 될 정도로 기술을 연마해야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으니까.
“미치는 줄 알았어요. 상상하고 싶지 않은 미래가 계속 떠올라서…….”
그는 계속해서 애정 어린 눈길로 나를 바라봤다.
너무 소중해서 눈에 넣고 싶을 정도라는 듯, 진심이 느껴지는 눈빛이었다.
“걱정해 줘서 고마워요. 그리고 팔라신에게 맹세하지 않아서 다행이에요.”
나 또한 그가 나를 위해 히아신스에게 미래를 저당 잡히는 짓은 하지 않길 바랐다.
그리고…….
옥상에서 떨어졌을 때 나를 구해 준 것부터, 가짜 에르셈프에게 목을 졸릴 때 나타난 것, 방금 인질극까지. 일련의 사건을 거치면서 나는 세이먼이 달라 보이는 느낌을 경험했다.
항상 내가 위기에 처해 있을 때마다 나타나서 기사님처럼 나를 구해 주는 그의 모습은…….
아무리 남주인공을 밀어 내야 하는 나라도 내 마음을 움직이기에는 충분했다.
그를 믿고, 또 의지하고 싶었다.
세이먼의 얼굴을 바라보자 가슴 깊은 곳에서 묘한 기분이 솟아오르는 걸 느꼈다.
걱정과 염려로 넘실거리는 눈빛, 나를 향하는 짙은 시선.
그 시선 아래에서 나는 온전한 애정을 느꼈다.
“이리 와요.”
세이먼이 내 어깨를 감싸며 자신의 품에 넣었다.
자칫하면 깨져 버릴 것처럼 조심스럽게 나를 다루는 모습이었다.
그가 주는 따스한 온기에, 나는 이상하게도 마음이 울렁거렸다.
긴장이 풀린 탓인지, 이렇게까지 나를 소중히 여겨 주는 사람이 있다는 자각 때문인지 알 수 없었다.
“사실 루나라면 빠져나올 수 있다고 생각했어요. 절대 그렇게 죽을 사람이 아니라고 믿었으니까. 그래서 저도 당신을 믿고 맹세하지 않은 거예요.”
그의 목소리는 어느새 차분해져 있었고, 평소처럼 다정한 사람으로 돌아왔다.
그런데도 그는 아직 내 손을 놓지 않고 있었다.
“세, 세이먼, 그런데 이 손 좀…….”
“왜요, 문제 있어요?”
“그건 아니지만.”
“좀만 잡고 있을게요. 너무 놀라서 누가 손을 잡아 줘야 할 것 같아요.”
* * *
히아신스는 퇴학 처리를 당했다.
내 음식에 독약을 탄 것과, 인질극을 벌인 사건이 그 이유였다.
전자는 세이먼이 증인이 되어 주었고, 후자는 말하지 않아도 식당에 있던 모든 학생들이 보았기 때문에 정상적으로 반영될 수 있었다.
그리고 드디어 길고 길었던 살인 표적 퀘스트가 끝이 났다는 시스템의 음성이 들려왔다.
[‘죽음을 피해라!’ 퀘스트에 성공하였습니다!]
[보상이 제공됩니다…….]
[전설급 아이템 ‘수없이 봉인된 반지’가 제공되었습니다!]
퀘스트의 내용은 범인을 죽이라는 것이 아니었다.
단지 ‘그 또는 그녀에게서 필사적으로 살아남으시오.’였기 때문에 이번 퀘스트를 성공했다고 나온 것 같았다.
히아신스를 퇴학시킨 것으로 내가 그녀에게서 살아남았다고 인정이 된 것이었다.
사실 나는 히아신스가 범인이었던 걸 알고 나서도 그녀를 해칠 생각은 없었다.
일단 장소가 학교 식당이었기 때문에 내가 그녀에게 피해를 입혔을 경우 나 또한 제명을 면치 못할 것이기 때문이었다.
먼저 싸움을 걸어온 사람이 벌을 받아야 하는데, 휘말린 나까지 벌을 받는 건 너무 억울하지 않은가?
그래서 불꽃 칼날로 히아신스의 목을 위협했을 때도 피를 보지 않길 원했던 것이다.
자칫 그녀의 잘못이 흐려질까 봐.
하지만 한 가지 걸리는 점이 있었다.
그건 바로 히아신스가 죽은 것이 아니라 단지 퇴학을 당했다는 점.
만약 히아신스가 죽었을 경우엔 내가 세이먼과 이어져 호감도 100%를 찍는다 하더라도 나를 독살할 사람은 없게 된다.
하지만 지금은 히아신스가 죽은 것이 아니기 때문에 시간이 지나고 나를 또 살해하려 할 수 있게 되는 것이고.
그렇게 되면 여전히 내가 세이먼 루트로 엔딩이 끝났을 경우 히아신스에게 또다시 독살을 당할 가능성이 있다는 이야기가 된다.
아예 해치워 버려야 했을까? 하지만 현실적으로 불가능했다.
히아신스는 무려 백작 가문의 영애였고, 내가 그녀를 처치할 수 있는 장소는 학교 내부뿐이다.
학교 안에서 백작 가문의 영애가 죽었다면 얼마나 큰 파장이 일어났을까?
사건의 전말을 조사하고자 학교를 샅샅이 뒤졌을 것이다.
그 속에서 내가 잡히지 않으리란 보장도 없고.
그러니 나는 최선의 상황에서, 최선의 선택을 한 것이었다.
샐라임의 도움을 받아 수련도 계속해서 정진할 것이고, 당분간 평화로운 나날이 지속될 테니 더 이상 걱정할 거리는 없었다.
“에휴, 과연 그럴까.”
이 세계에 떨어지면서 나에게 생긴 가장 큰 습관은 평화로운 상황이 주어지면 의심부터 하게 된다는 점이었다.
분명 시스템이 나를 가만히 놔두지 않을 것이 뻔하다.
죽이려는 게 아니라면 이제는…….
“설마!”
나는 미간을 작게 좁혔다. 그 이유는,
슬슬 마지막 남자 주인공이 나올 때가 되었기 때문이다.
그의 이름은 ‘베탄 오스가르드’.
지금까지의 남주인공의 만남들 대부분이 게임과 달랐기 때문에 베탄과의 만남도 분명 예상대로 흘러가지 않을 거다.
베탄과의 만남은 사실 가장 기대되기도 했다.
제일 마지막에 나오는 인물인데도 불구하고 앞선 남주인공들의 인기를 바로 제쳐 버리기 때문이다.
검은 머리에 붉은 적안.
어두운 밤이 연상되는 그는 유일하게 나를 압도할 수 있는 존재가 될 것이다.
아직 만나 보진 않았지만 느낌이 그랬다.
“도대체 어떻게 흘러가게 될지…….”
알 수 없는 미래가 나를 맞이할 것이고, 나는 온몸으로 그것을 받아 낼 준비가 되었다.
그렇게 기숙사 방에서 안정을 취하며 생각을 정리하고 있을 때였다.
똑똑똑!
뾰족한 무언가가 내 방 창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뭐지?”
푸드덕 푸드덕!
창문을 바라보자 커다란 새가 마구 날갯짓을 하는 모습이 보였다.
눈이 새까맣고 풍성한 갈색 깃털을 가진 새는 목에 ‘울리프’라고 적혀 있었다.
“레크리드의 새……!”
자세히 보니 울리프의 발에는 작은 편지가 묶여 있었다.
내가 창문을 활짝 열자 울리프가 창틀에 가뿐히 앉더니 마구 울어 대기 시작했다.
“짹! 짹! 짹짹! 짹!”
무언가를 말하는 것 같기는 한데 당최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아우, 시끄러워.”
내가 한쪽 귀를 틀어막으며 울리프에게 다가갔다.
아직도 시끄럽게 울고 있는 새는 내가 다가오자 마구 부리를 휘저었다. 계속해서 자신을 표출하는 것 같은데…….
“미안한데 난 못 알아듣겠다.”
그러고는 발에 묶인 편지를 풀어냈다.
아니, 풀어내려 했다. 그러자,
“째액!!!”
퍽!
울리프가 아주 큰 소리로 울며 발로 나를 퍽! 밀어 버리는 게 아닌가.
“악!”
구석으로 나가떨어진 내가 얻어맞았던 배를 붙잡고는 일어섰다.
“뭐야! 왜 그러는데!”
뭔 이유인지 나에게 불만이 있는 것 같았다.
대체 뭐냐고!
어떻게 알아들으라는 거야!
“쉿. 조용히 하자. 얌전히, 얌전히.”
내가 살금살금 다가가 다시 발에 손을 대자,
퍼억!
새는 커다란 크기인 만큼 발도 우악스럽고 컸다.
그 발에 얻어맞으니 저 멀리 나가떨어지지 않을 수가 없는 거다.
“야, 너 죽고 싶어? 응? 동물이라고 내가 봐줄 것 같아?”
열이 뻗친 나는 눈을 시퍼렇게 뜬 채 다시 달려갔다.
그리고는 덥석 다리부터 붙잡은 채 편지를 거의 찢다시피 풀어냈다.
“쫌! 가만히! 있어!”
그리고 나는 세 번째 시도 만에 성공할 수 있었다.
꼬깃꼬깃 구겨진 편지에는 빨간 인장이 붙어 있었다.
무려 레크리드에게 온 편지다!
뭐라고 왔을까?
벌써부터 심장이 뛰는 것 같았다.
레크리드는 유일하게 나를 가슴 뛰게 만든 장본인이다.
여타 남주인공들과는 다른 의미를 가진다는 거다!
“아주 그냥 입이 귀에 걸렸네.”
옆에서 지켜보고 있던 샐라임이 한마디 툭 던졌고, 나는 듣는 둥 마는 둥 편지를 톡, 뜯어 보았다.
[루이아나 씨에게.
일주일 뒤 키베리아 씨가 매그넘 마법 상점에 방문하기로 했답니다.
그때 와 줄 수 있나요?
아, 그리고 울리프가 좀 사나워요.
그럴 땐 머리를 쓰다듬어 주면 금세 잠잠해진답니다.
낯을 많이 가리는 녀석이라 새로운 사람을 꺼리더라고요.
그럼 얼른 얼굴을 보길 바라면서 이만 마칠게요.
답장 부탁해요.]
나는 편지를 가슴에 폭 안았다.
편지만 읽어도 레크리드의 부드러운 목소리가 직접 읽어 주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또, 또 시작됐네. 정신 교육 한 번 들어가야 하겠어?”
샐라임이 옆에서 중얼거렸다.
“키베리아 씨가 내일모레 방문한대요! 샐라임의 봉인 해제 방법을 알 수 있을 거예요!”
나는 여러모로 기쁜 마음에 가벼운 발걸음으로 답장을 쓰기 위한 종이를 찾았다.
울리프는 여전히 창틀에 앉아 가끔씩 짹짹거리며 눈을 부라리고 있었다.
[그럼요, 일주일 뒤 찾아갈게요.]
짧게 답장을 쓴 나는 울리프의 다리에 묶어 주기 위해 다시금 다가갔다.
“머리를 쓰다듬으면 잠잠해진댔지…….”
여전히 새까만 눈동자를 휘릭 휘릭! 돌리며 주변을 탐색하고 있는 울리프는 내가 다가오자 나를 빤히 쳐다봤다.
“자, 자 착하지……. 난 널 해치지 않아요…….”
그리고 내가 머리 위에 손을 갖다 댄 순간이었다.
“으억!!”
어김없이 울리프는 발로 나를 걷어찼고, 나는 눈이 데굴데굴 굴러가는 느낌을 받으며 나동그라져야 했다.
나는 열받은 목소리로 소리쳤다.
“이 새 새끼가 죽고 싶어서 환장했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