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1화. 다가오는 죽음(1)
히아신스는 참을 수가 없었다.
아무리 그래도 넘어서는 안 될 선이라는 게 있는 거다.
루나보다 더 괜찮지 그랬냐고? 내가 그년보다 못난 게 뭔데?
집안도, 외모도, 성격도, 모든 방면에서 내가 낫잖아?!
그래, 겉모습은 반반하니 봐 줄 수 있다고 치자. 그런데 듣도 보도 못한 집안 출신인 계집애한테 내가 밀리는 게 상식적으로 말이 돼?
히아신스는 세이먼을 쏘아보았다. 원망과 증오가 섞인 눈빛이었다.
세이먼과 안 세월이 무려 십 년이었다. 서로의 집을 자기 집처럼 들락날락거리는 사이에, 결혼도 확실하게 예정된 사이였단 말이다.
그런데 이렇게 뒤통수를 친다고?
히아신스가 분노에 부들부들 떨고 있는 반면 세이먼은 그저 건조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사실을 말한 것뿐이라는 듯.
히아신스가 떨리는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네가 그렇게 좋아하는 루이아나……. 많이 봐 둬.”
“……?”
“곧 있으면 끝장날 계집애니까.”
그녀의 얼굴에 비릿한 미소가 떠올랐다.
벌써 두 번이나 그녀를 죽이는 것에 실패했지만, 그녀에겐 마지막 남은 수가 하나 있었다.
절대 피할 수 없는, 게다가 치사율 백 퍼센트의 방법 말이다.
히아신스의 주먹이 잘게 떨렸다.
좀 전에 에르셈프의 모습으로 변장해 루이아나를 죽이려 했건만 뜻밖에 등장한 세이먼 때문에 실패해 버렸다.
세이먼에게 해를 가할 순 없었다. 사실 다치게 할 능력도 없었겠지만.
왜 이렇게 루이아나 주변에는 방해물들이 있는 거야?
한 번에 죽일 수 있을 거라 확신했었는데, 벌써 두 번째 시도까지 실패하자 짜증이 미친 듯이 끓어올랐다. 아주 목숨이 질긴 계집애다.
세 번째 시도에서는 절대 실패하지 않을 테다.
암암리에 공수한 두 개의 물건 중 마지막 하나. 그것을 이용할 거다.
루이아나가 죽는 건 시간문제였다.
“너 마치… 네가 루나를 죽일 것처럼 말하네?”
그때 세이먼이 입을 열었다.
“?!”
히아신스가 당황한 표정을 지었지만 헛기침을 하며 금세 표정을 풀었다.
“무슨 소리야, 세이먼.”
그러자 세이먼 또한 평온한 말투로 말했다.
“설마 그럴 리가 있겠어. 욕심에 눈이 멀어 살인자가 되는 바보는 없을 테니까.”
“으응, 그럼 당연하지. 누굴 죽인다니, 말도 안 돼.”
분노에 차서 실수로 본심을 말해 버린 자신을 탓하며 히아신스가 급하게 수습했다.
하지만 마음속은 타들어 가고 있었다.
세이먼이 자신에게 내뱉은 말들이 가슴에 못처럼 박혀 각인되었다.
루나가 있어서 자신과 결혼을 하기 싫다느니, 루나가 더 괜찮지 않냐느니 하는 말들이 그녀의 머릿속을 빙빙 맴돌았다.
그러자 더욱더 루이아나에 대한 증오심이 불타올랐다.
당장이라도 없애 버리고 싶어서 미쳐 버릴 지경이었다.
바로 내일, 실행할 거다.
설사 자신이 행한 것이라고 들킬지라도 상관없었다.
‘러브문’만 있으면 그의 마음을 사로잡을 수 있으니까.
자존심이 미치도록 상했지만 괜찮다.
시간이 지나면 이런 일도 다 잊힐 거니까.
히아신스는 자신을 스스로 다독이며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 * *
세이먼은 확신했다.
히아신스의 반응을 보자 시험하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녀는 자존심이 상했을 때 티를 내지 않는 성격이 못 되었다. 어떻게든 상대방을 찍어 누르겠다는 욕망을 드러낸다는 거다.
앞으로 루이아나를 보지 못할 것이라는 말은 자신이 루이아나의 죽음과 연관이 되어 있다고 말해 주는 꼴이나 다름없었다.
아까의 가짜 에르셈프가 히아신스라고 백 퍼센트 확정할 수는 없지만 관련된 자라는 건 확실하다.
그렇다면 궁금한 건 이유다.
어째서 히아신스가 루나를 그렇게도 죽이려 하는가?
사실 세이먼은 알고 있었다.
모든 원흉은 자신 때문이었다.
따지고 보면 세이먼 자체의 잘못은 아니었지만 폭탄을 안은 히아신스에게 불을 붙인 건 자신이다.
저번에 병원 휴게실에서 루나와 히아신스가 맞붙은 이후로 자신의 태도가 눈에 띄게 바뀌었으니 히아신스 쪽에서도 대책을 강구했을 터.
세이먼은 히아신스의 허술하지만 전략적인 성격을 잘 알았다. 그리고 원하는 걸 자신의 손에 넣기 위해서 무슨 짓이라도 하는 사람이라는 것도 알았고.
‘마치 네가 루나를 죽일 것처럼 말하네?’라고 그녀를 떠보았을 때 그녀의 표정을 보았다.
당황했지만 애써 표정을 감추는 모습.
자신이 아는 히아신스라면, 루나를 죽일 생각이 없을 경우엔 분명 표정을 확 구기며 자신이 그 정도로 저급하냐고 화를 낼 것이 분명했다.
“수상해. 뒤를 캐야겠어. 이러다가 정말 큰일이 일어날 수도 있어. 제발 그녀가 루나를 덮치기 전에 내가 알아채야만 하는데.”
그는 눈을 가늘게 뜨며 앞으로 히아신스가 어떻게 행동할지 예상했다.
학교에서 사람을 죽일 수 있는 방법은 많지 않을 거다.
학생들이 있을 경우엔 불가능한 건 물론이고, 루나가 소리를 지르거나 반항할 수 있는 방법 또한 선호하지 않을 거다.
그러니 찍소리도 낼 수 없게 목을 조르는 방법을 선택한 것이겠지.
의심하지 않을 에르셈프의 모습으로 변장을 한 뒤 서쪽 숲으로 끌고 가서 말이다.
하지만 루나의 뒤를 쳐 검으로 한 번에 죽이는 방법도 있었을 텐데, 왜 그렇게 하지 않았을까?
안 될 이유라도 있는 건가?
아니면…….
아직 실행하지 않은 건가?
“설마, 절대 그래선 안 돼.”
세이먼이 새파래진 얼굴로 중얼거렸다.
자꾸만 최악인 미래가 생각나 미칠 것 같았다.
루나가 비명 한 번 못 지르고 숨통이 끊기는 모습.
그리고 보란 듯이 흡족해할 히아신스의 얼굴까지.
그렇게 되면 자신은 꼼짝없이 히아신스와 결혼해야 할 거다.
벌써부터 나이츠 가문과의 본격적인 혼담이 이루어지고 있으니까.
세이먼은 졸업 후의 미래를 떠올렸다.
그의 모든 미래엔 루나가 함께 있었다.
어떻게든 자신의 옆에 있게 만들 생각이었는데, 그 전에 그녀가 죽어 버린다면 자신은 어떻게 하란 말인가.
절대 안 된다. 감히 내 것을 건드리는 사람은 용서할 수 없으니.
그녀는 나만의 것이다.
죽어도 내 곁에서 죽어야 한다.
그 어떤 누구도 그녀의 생사에 개입할 수는 없었다.
그 범인이 십 년 지기 친구인 히아신스일지라도 아무 상관 없다.
히아신스는 아버지에게 순종하는 척 보이기 위한 도구였을 뿐.
“직접 나서야 해.”
* * *
나는 기숙사로 돌아와 이불을 뒤집어썼다.
자꾸만 몸이 떨렸다.
몬스터를 만났을 때도, 템트의 꿈속에서 죽기 직전이었을 때도, 옥상에서 떨어졌을 때도 이러지 않았다.
그럼에도 이렇게 몸이 덜덜 떨리는 이유는,
절대 그러지 않을 거라 믿은 사람이 배신했기 때문이다.
물론 세이먼은 진짜 에르셈프가 아니라고 했지만 내 목을 조르던 에르셈프의 살기 어린 얼굴을 잊을 수 없었다.
우악스러운 손길이 가느다란 목을 잡자 나뭇가지가 부러질 것 같이 힘을 전혀 쓸 수 없었다.
나는 전생의 기억이 아직도 커서, 종종 전생의 몸을 가진 사람처럼 행동할 때가 있었다.
사십 킬로그램 정도의 짐을 한 번에 들려고 한다거나, 나무에 매달려 위로 올라가려고 할 때처럼 말이다.
원래의 나였으면 그 정도 중량은 껌이었고, 보조 도구 없이도 턱걸이는 손쉽게 할 수 있었다. 그런데 아까 깨달았다.
체술을 익혔다고 하지만 나는 절대 전생의 몸처럼 강하지 않다. 사십 킬로그램의 중후반 정도 나갈 것 같은 나는 남자의 악력에 저항 한 번 못해 볼 정도로 나약한 인간이었던 거다.
그건 나름대로 충격이었다. 그리 강하진 않아도 내 몸 하나는 지킬 수 있을 거라 생각했던 내가, 단 한 번의 잘못된 판단으로 죽을 뻔했으니 말이다.
한 가지 더 나를 불안하게 하는 점은, 이러한 일이 더 이상 일어나지 않는다는 보장이 없다는 것이었다. 난 아직도 살인 표적으로 지정된 상태였고, 범인은 어떻게든 내 숨통을 끊어 놓으려 별 방법을 다 강구할 거다. 그러니 앞으로 이런 일이 없기 위해서는, “강해져야 해.”
그 누구도 무시할 수 없을 만큼.
딱 봐도 강자의 내공이 느껴지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거다.
“수련에 들어가자, 꼬마. 네 목숨 지키려면 그 방법밖에는 없다. 목을 졸려 말을 할 수 없어도 정령을 부를 수 있도록 수련하고, 그 새끼한테 반격을 날릴 수 있을 정도로 체술과 검술을 단련하자. 지금으로선 그뿐이다.”
샐라임 또한 이 상황이 위험하다고 판단한 것 같았다.
“하지만 수련을 할 공간이 없어요. 공터에서 연습하다가 뒤통수에 칼이라도 맞으면 어떡해요.”
내가 절망스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인정하고 싶지 않지만 사실이었다. 지금의 나는 기습으로 날아오는 칼을 피하지 못할 정도로 약했다.
임무에서 여러 번 몬스터들을 만나고, 전투를 해 보았다고 하지만 그건 모두 첸테 선배와 잰퓨어의 엄호가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동료가 있는 팀과 개인은 천지 차이니까.
“게이트를 타고 밖으로 나가는 거야. 이론만 가득한 수업도 필요 없어. 다 제쳐 버리자. 단기간에 성장하는 방법으로는 이것밖에 없어. 이젠 중요한 게 뭔지 구분하자는 거다.”
잠시 생각에 잠겼던 나는 이내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샐라임의 말이 맞았다. 아카데미의 수업 방식대로 내 실력을 키우기에는 너무 더뎠다. 게다가 좀 있으면 친선 경기로 비무 대회도 시작할 테니 임무 활동 또한 중단될 것이었다.
수업에 좀 빠지는 건 나중에 세이먼에게 처리해 달라고 부탁하면 괜찮을 거다.
“내가 볼 때 너는 절대 허무하게 생을 마감할 운명은 아니다. 뒤통수에 칼을 맞아도 버젓이 살아날 사람이라는 거야. 이건 단지 숨바꼭질일 뿐이야. 네가 먼저 찾아내기만 하면 돼. 너 머리 쓰는 거 잘하잖아.”
신기하게도 그의 말을 듣자 차츰 긴장이 풀렸다.
그렇다.
나에겐 전생에서 22년을 산 짬이 있었다. 고작 열 몇 살 된 애송이가 나한테 덤비는 건 코웃음이 나는 일이었다.
지금까지 범인이 내 앞에 나타나길 기다렸던 내가 바보처럼 느껴졌다.
이제는 내가 손수 나서서 적극적으로 찾아 주지.
“본때를 보여 주라고, 꼬마.”
잔뜩 경직되었던 몸이 풀리기 시작했다.
믿거나 말거나지만 정령의 말이니 한 번 믿어 보기로 했다.
죽는 건 그 어떤 것보다 무서웠지만,
미친년처럼 살아야지.
고작 이런 일로 겁먹고 주눅 들어 기숙사 방 안에 갇혀 있을 내가 아니다.
오히려 각성하면 각성했지, 이런 모습은 나에게 어울리지 않는다.
어느새 눈빛엔 생기가 돌았고, 온몸에 기운이 넘쳤다.
그리고 마음속에선 무언가가 끓어올랐다.
진정으로 강해져야만 해.
아무도 날 얕잡아 볼 수 없게.
밀리센트 가문도, 날 살인 표적으로 삼은 자도 날 건들지 못하게 힘을 길러야 한다.
죽음은 전생에서 한 번 경험한 걸로 충분하다.
“기필코 살아남는다.”
어떻게든 잡초처럼 살아남아 버젓이 살아갈 거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