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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섯명은 너무 많잖아요 (61)화 (61/156)

60화. 알 수 없는 정체(2)

에르셈프는 살벌한 눈동자로 나에게 다가오기 시작했다.

“빨리 좀 죽어 주라……. 응?”

그러고는 혼자서 중얼거리기 시작했다.

혼잣말을 계속해서 되뇌는 그의 모습은 미친 사람 같았다.

“왜 이래요, 진짜……!”

털썩!

나는 뒷걸음질을 치다가 밑으로 주저앉고 말았다.

풀밭 위에 쓰러졌기에 손에는 풀과 흙이 잡혔다.

이게 진짜 내가 아는 에르셈프가 맞아?

나한테 검술과 마나 운용법을 알려 주고, 함께 암살자를 처치했던 그 에르셈프가 맞냐고!

내가 지금 헛것을 보고 있는 건가? 살인 표적으로 지정된 것에 너무 겁을 먹어서 환각을 보고 있는 건가?

“샐라임, 이게 진짜예요? 제가 잘못 보고 있는 게 아니냐구요……!”

“진짜야. 저 자식이 너를 위협하고 있는 것도 사실이고.”

“마나를 사용해서 도망이라도 쳐야 하는 거 아니에요?!”

“안 돼. 너 지금 몸 상태에서 마나를 잘못 쓰면 후유증이 얼마나 갈지 몰라.”

궁지에 몰렸다는 생각에 샐라임에게 말을 내뱉었다. 당장 죽게 생겼는데 후유증 따위 생각하지 말고 뭐라도 해야 하나?

손을 앞으로 뻗으며 나에게 다가오는 에르셈프는 이내 내 앞에 무릎을 굽히고 앉았다.

주저앉아 있는 나의 눈을 마주친 다음,

덥석!

그의 손이 내 목을 부여잡았다.

“윽, 윽!”

두껍고 커다란 남자의 손이 내 목을 조르자 내 얼굴에 피가 몰리기 시작했다.

숨을 쉴 수가 없었다.

기도가 꽉 막혀 아무런 공기도 들어오지 않는 느낌에 나는 몸부림쳤다.

“죽어. 죽으라고.”

에르셈프의 보랏빛 눈동자는 어느새 살기로 물들어 있었다.

그가 왜 나에게 이런 짓을 하는 건지, 나를 살인 표적으로 삼은 사람이 에르셈프였던 건지, 모두 다 알 수 없었다.

다만 확실한 건, 나는 곧 이 남자에게 목을 졸려 사망할 운명이라는 거다.

이렇게 죽을 순 없어……!

나는 몸을 마구 버둥거리며 에르셈프의 몸을 발로 찼다.

하지만 끄떡없이 내 뒤통수를 나무에 짓누르며 계속해서 목을 누르는 것이다.

“지금 감히 날 발로 찼어? 죽음을 앞당기는구나?”

그러고는 그 무엇보다 차가운 목소리가 내 귀를 울렸다.

나는 눈이 튀어나올 정도로 크게 떠졌다. 정말, 이대로 있으면 죽을 것이 분명했다.

결국, 숨 쉬기도 힘든 상태에서 마나를 끌어 올리기 위해 집중을 시도했다.

너무 늦었나? 죽음 앞에서 놀라운 집중력을 발휘하길 바랄 뿐이었다.

그때였다.

누군가가 바람처럼 나타나 에르셈프의 몸을 밀쳐 내며 같이 바닥으로 쓰러졌다.

쿠당탕!

“헉…헉…….”

나는 그제야 나무에 등을 기대며 숨을 몰아 내쉬었고, 계속해서 기침을 내뱉었다.

조금만 더 있었으면 눈이 뒤집혔을 거다.

에르셈프는 바닥에 굴러떨어지며 소리를 질렀다.

“어떤 자식이야!”

눈앞에 나타난 사람은 세이먼이었다. 그는 온몸이 흙 범벅이 되어 에르셈프와 바닥을 뒹굴고 있었다.

“루나! 괜찮은 거예요?!”

세이먼은 나를 걱정하는 와중에도 일어서서 에르셈프에게로 다가갔다.

에르셈프는 계획했던 일이 틀어졌다고 생각했는지 땅바닥에 앉아 있었고, 세이먼은 그 자리에서 칼을 뽑았다.

이어서 세이먼이 에르셈프의 목에 칼을 겨누었다.

“지금 무슨 짓인가?”

“그건 제가 묻고 싶은 말입니다.”

세이먼이 칼을 겨눈 손을 거두지 않고, 부드득 이를 갈며 말했다.

“시해 죄로 잡혀가고 싶은 모양이지?”

“그전에 당신의 목숨이 날아갈 거야. 어째서 이런 일을 벌인 거지?”

세이먼의 목소리가 낮게 울렸다. 에르셈프에게 어떤 존칭도 쓰지 않는 모습이었다.

“칼을 거두어라.”

감히 어디서 칼을 겨누냐는 양, 에르셈프가 내뱉었다.

하지만 세이먼은 물러서지 않았다.

“왜 목을 조른 거지? 감히 루나를 죽일 작정이었던 거야?”

세이먼은 인상을 세게 찌푸렸다.

“눈엣가시였다고 해도 루나를 아끼는 마음만큼은 깊은 사람이라고 여겼는데. 쓰레기 같은 당신이 루나 옆에 있었다는 사실이 끔찍하군.”

“…….”

“대답하지 않겠다면 대답을 들을 때까지 종용하는 수밖에.”

세이먼은 에르셈프가 왕자든 아니든 아무런 상관을 하지 않는 것 같았다.

그는 자신의 것에 해를 가한 자를 엄벌에 처하겠다는 사람 같았다.

에르셈프가 검은 신경도 쓰지 않는다는 듯 자리에서 일어나 옷을 툭툭 털었다.

“다시 한번 말하지. 후회하기 전에 검을 거두어라.”

“피하는 걸 보니 겁이 나는 모양인가 보군.”

세이먼이 에르셈프를 도발해 왔다.

하지만 에르셈프는 세이먼의 얼굴을 쳐다보지 않았다.

그 틈을 타 세이먼이 에르셈프를 향해 칼을 휘둘렀다.

허리를 향해 크게 휘둘렀기에 절대 칼을 뽑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이었다.

탕!

에르셈프가 순식간에 허리춤에서 칼을 뽑아서 세이먼의 칼을 막아 냈다.

자칫하면 에르셈프의 허리가 날아갔을 정도로 아찔한 타이밍이었다.

“결투를 피할 수 없을 겁니다.”

세이먼의 말에 에르셈프는 말이 없었다.

그저, 매서운 눈빛으로 칼을 맞부딪치고 있을 뿐이었다.

* * *

에르셈프는 세이먼과 거리를 벌렸다.

세이먼에게 한 번의 공격이라도 허용할 경우 자신은 꼼짝없이 세이먼의 페이스에 휘말릴 것이 분명했다.

세이먼은 거리를 벌리는 에르셈프가 의아했다.

그는 검법A반에서 에르셈프와 몇 차례 대련을 해 왔었다.

아니, 굳이 대련을 하지 않았더라도 에르셈프는 이미 알려진 엘리트 중에서 엘리트, 가히 천재라고 불릴 수 있는 수준급의 검사였다.

자신마저도 에르셈프에게는 상대가 되지 않는다고 할 정도로 그는 압도적으로 강했단 말이다.

그런 에르셈프가… 결투에서 주눅이 든다니, 말이 되지 않는다.

“당신… 뭐지?”

세이먼이 짧게 내뱉었다. 그럼에도 몸은 이미 에르셈프를 향해 달려들고 있었다.

검을 맞부딪치면서도, 서로의 목을 향하면서도, 뒤를 노리면서도 계속해서 의문이 들었다.

이건 에르셈프의 실력이 아니다.

이 정도로 형편없지 않다. 지금의 에르셈프는 자신의 검을 맞받아치기는커녕 어렵사리 수비만 하는 것에 그치고 있었다.

수비라고 해서 탁월한 것도 아니었다.

몸놀림이 아주 엉성해 우스꽝스러운 수준이었다.

팔과 다리에선 옷이 찢기며 피가 흘렀고, 숨 조절조차 하지 못하며 헉헉대고 있었다.

“다시 묻는다. 넌 누구냐.”

세이먼은 무언가를 떠올렸다.

최근에 어디선가 들은 적이 있다. 다른 사람의 모습으로 변신할 수 있는 약물이 존재한다는 것을. 보통 파티와 같은 곳에서 쇼를 보여 주기 위한 물건으로 사용되지만, 다른 곳에 남용할 가능성이 충분히 있었다.

설마. 이렇게 감쪽같이 변할 수 있다니. 저 고고한 눈빛마저도 똑같았다.

자신과 검을 겨루지 않았더라면 절대 눈치채지 못했을 것이었다. 저 헉헉대고 있는 남자가 진짜 에르셈프라기엔 너무나도 검술 실력이 형편없다.

또한, 루나는 며칠 전에 자신의 신변이 위협받고 있다고 털어놓았다. 옥상에서도 누가 밀었다고 했으니 누군가 변장을 해 그녀에게 다가갔다고 해도 무리는 아니다. 어째서 그녀를 이렇게까지 죽이려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지금 중요한 건 저 남자의 정체를 알아내는 것이었다.

샤샥-

세이먼은 순식간에 에르셈프의 목에 칼을 겨누었다.

마치 그림자처럼 눈에 보이지 않을 정도로 가볍고 날렵한 몸짓이었다.

“말해. 넌 누구지?”

“…….”

에르셈프는 아무런 말이 없었다.

세이먼은 더욱 칼을 갖다 대며 위협했다.

“어디서 보낸 자냐. 소속과 신원 모두를 밝혀라.”

하지만 에르셈프는 아무런 반응도 하지 않았다.

그러고는 곧이어, 그의 발밑에서 무언가 갈라지는 소리가 들렸다.

펑!

무언가가 터지며 검은 연기를 만들어 냈다.

연막탄이었다.

앞이 보이지 않게 형성된 연기는 에르셈프가 세이먼의 제압 속에서 빠져나갈 수 있게 도와주었고, 그는 쏜살같이 달려 나갔다.

탁! 탁! 탁!

뜀박질하는 소리가 들려왔고, 그 소리는 멀어지듯이 점점 작아졌다.

“루나! 루나!”

세이먼은 연막탄이 터지자마자 빛과 같은 속도로 루나가 있던 자리로 몸을 던졌다.

연막탄 속에서 에르셈프가 루나를 노릴 수도 있겠다는 위험에서 온 행동이었다.

그러고는 루나를 자신의 품에 안은 뒤 검은 연기가 없는 쪽을 향해 달렸다.

“콜록! 콜록!”

루나가 기침을 했고, 세이먼은 최대한 숨을 참으며 숲 깊숙이 들어가 검은 연기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괜찮아요!?”

루나는 기침을 할 뿐 다친 곳은 없어 보였다.

세이먼은 루나를 조심히 땅 위에 내려놓은 뒤 그녀에게 눈을 맞추었다.

“다친 곳은! 없는 거죠? 어디 봐 봐요!”

마치 내가 조금이라도 상하면 안 된다는 것처럼 그는 나를 이리저리 살피기 시작했다.

하지만 목을 보고서는 그의 몸짓이 우뚝, 멈추었다.

새빨간 손바닥 자국이 선명하게 남아 있는 것이다.

“젠장…….”

“괜찮아요, 세이먼. 저는 괜찮으니까.”

“뭐가 괜찮아요!”

“아까 에르셈프는 어떻게 된 거죠? 어떻게… 에르셈프가 그럴 수 있죠?”

그러자 세이먼이 한숨을 푹 쉬며 말했다.

“에르셈프가 아닌 것 같아요. 칼을 겨누어 봤을 때 바로 알았어요. 에르셈프의 실력이 아니라는 것을. 너무나도 조악했어요.”

“이럴 수가……. 그럼 누가 에르셈프로 변장이라도 했다는 건가요?”

“현재로선 그럴 가능성이 커요. 다른 사람으로 변장하는 방법은 찾으려면 찾을 수 있으니까.”

세이먼은 그렇게 말하면서 머릿속에 한 사람이 계속해서 떠올랐다.

검을 휘두를 때마다 항상 빗겨 나가는 일정 각도의 궤적과, 상대방을 막을 때 손바닥을 쓰는 안 좋은 습관까지.

그 모든 패턴을 그대로 가지고 있는 사람이 한 명 있었다.

바로 히아신스.

검을 다루는 방식이 너무나도 익숙했다.

히아신스와는 대련 때 도움을 준 적이 많아 그녀의 실력을 정확히 알고 있었다.

그녀가 어떤 공격 패턴을 쓰는지, 수비할 때의 허점은 무엇인지 전부 다 말이다.

그렇기에 계속해서 생각나는 것은 막을 수가 없었다.

그녀가 설마 이런 짓까지 벌였을까? 의심이 되는 동시에, 과연 그녀가 이 정도로 잔인한 인간이었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제게 안겨요.”

일단은 밖으로 빠져나가야 한다.

이곳은 위험하니까.

세이먼은 루나를 다시 들어 올리며 숲을 헤쳐 나가기 시작했다.

* * *

세이먼은 루나를 기숙사에 데려다준 뒤, 학생회실로 돌아왔다.

그리고, 소파에 앉아 문을 바라보고 있었다.

이쯤이면 들어올 때가 되었기 때문이다.

오히려 지금 들어오지 않으면 이상할 정도로 세이먼이 기다리는 그 사람은 늘 규칙적이었다.

벌컥.

늘 하던 것처럼 문을 열고 들어온 사람은 바로 히아신스였다.

“세이먼!”

그녀는 평소와 같았다.

관리를 받은 듯 찰랑찰랑한 갈색 머리부터 화려한 드레스까지.

오늘은 목에 단 빨간 리본이 포인트인지 계속해서 만지작거렸다.

“왔어?”

그녀가 세이먼의 옆자리에 앉았다. 아주 가까이 앉아 허벅지가 맞부딪쳤다.

히아신스는 아무리 세이먼이 자신을 밀어 내도 상관하지 않았다.

히스테리를 부리다가도 다음 날이 되면 아무렇지 않은 표정으로 세이먼을 보기 위해 학생회실로 찾아오곤 했다.

그 시각이 오후 5시, 바로 지금.

하루도 빠지지 않고 왔었고, 오늘도 온 것이었다.

“세이먼, 표정이 안 좋네. 무슨 일 있어?”

그녀가 다정하게 물으며 손가락을 세이먼의 뺨에 갖다 대려 했다.

탁!

세이먼이 그녀의 행동을 제지하기 위해 손목을 잡았다.

“앗!”

그가 잡은 손목이 아픈지 히아신스가 신음 소리를 냈다.

하지만 세이먼은 여전한 눈빛으로 그녀를 쳐다보기만 할 뿐이었다.

“손목을 삐었는지 좀 아프네? 하하…….”

세이먼은 눈을 날카롭게 떴다.

의심스럽다.

좀 전에 겪은 모든 상황이.

그리고 이 일이 히아신스와 관련이 있다는 강력한 직감이 그를 지배했다.

그는 자신의 감을 믿었다.

아까의 에르셈프가 히아신스일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었다.

그 자가 보여 준 검술 솜씨가 완벽하게 그녀와 일치했고, 그녀는 루나에게 완연한 적대감을 가지고 있었다.

높은 가능성을 가지고 있다는 이유만으로 세이먼의 눈동자가 순식간에 싸늘하게 식었다.

이젠 히아신스에게 잘해 줘야 할 이유도 사라진 것 같았다.

히아신스의 가문인 나이츠 백작 가문과 좋은 관계를 유지해야 한다는 아버지의 부탁도 이제는 상관할 바가 아니었다.

머릿속을 지배하는 것은 오로지 한 여자뿐이었으니까.

그래서, 세이먼은 내뱉었다.

“우리가 결혼할 수 있었으면 참 좋았을 텐데.”

“……?”

시험해 보기 위함이었다.

“안 그래?”

“그, 그게 무슨 말이야. 세이먼? 나와 결혼해 주겠다는 말이야?”

그녀의 얼굴에 화색이 돌며 몸을 돌려 세이먼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그런데, 확신이 들지 않아.”

“왜, 왜……?”

“루나가 있어서.”

세이먼의 한마디에 히아신스의 얼굴에 바위가 하나 떨어진 것처럼 표정이 굳었다.

“뭐?”

“루나만 없으면 널 좋아했을 텐데.”

“…….”

히아신스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오랜 사랑이었던 남자가 자신의 마음을 산산조각 내 부수는 기분이었다.

‘루나만 없으면 널 좋아했을 거라고……? 내가 그년 대체품이라는 거야……?’

세이먼의 말 한마디 한마디가 못을 박듯이 마음에 균열을 냈다.

“난 그녀와 결혼하고 싶어.”

“지금 말 다 했어……?”

아무리 그래도 세이먼이 이런 식으로까지 말했던 적은 없었다.

루이아나 그 계집애는 단지 한눈을 판 상대였잖아! 

내가 있는 집으로 돌아와야 하는 것이잖아!!

하지만 세이먼은 안타깝다는 표정으로 내뱉었다.

상대방을 전혀 고려하지 않는 말투였다.

“미안해, 히아신스.”

“…….”

“루나보다 더 괜찮지 그랬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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