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9화. 알 수 없는 정체(1)
옥상에서 떨어진 날 이후부터 나는 공포감에 시달려야만 했다.
일상생활이 불가능할 정도는 아니었지만, 때때로 흠칫 놀라는 일이 잦아졌다.
손에 칼이나 둔기 같은 것을 들고 다니는 학생만 봐도 나를 찌를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으며, 누군가 내 뒤에 다가오기만 해도 경계를 하기 시작했다.
저번에는 간호사가 의료용 가위를 들고 나에게 다가오는 모습을 보고 도망을 치려 했던 적도 있다.
“하……. 인생이 피폐해지고 있어요.”
기구한 운명을 탓하며 한숨을 푹푹 내쉬고 있었다.
“내가 온 사방을 꼼꼼하게 관찰할게. 그러니 너무 걱정하지 마. 사람 많은 곳으로만 다니기로 했잖아.”
“웃긴 게 뭔 줄 알아요? 이제는 제가 믿을 수 있는 사람이 남주인공들만 남았다는 거예요. 그들은 절 절대 해치지 않을 테니까.”
그랬다.
순식간에 포지션이 변한 것이다.
필사적으로 피해야 할 사람들이 내가 유일하게 믿을 수 있는 사람들이 되었다.
그 이외의 사람들은 전부 다 의심의 상대다.
이블린처럼 나에게 아무런 악의가 없는 사람도 나를 해칠 수 있다는 것이니.
일단 도움을 청할 수 있는 사람을 생각해 보자.
세이먼은 일단 호감도가 너무 높으니 제외하기로 한다.
다쳐서 병원에 입원한 날 도움을 받은 것으로 충분했다.
그리고 잰퓨어는 현재 사이가 좋지 않아 무언가 도움을 요청할 수 있는 상대가 되지 못했다.
그렇다면 남은 건 에르셈프뿐이다.
현 상태에서 내가 의지하기에 가장 적합한 상대…….
그리고 에르셈프의 옆에 있으면 나를 노리는 자도 함부로 접근하지 못하겠지.
여러모로 나에게 도움이 되는 남자였다.
그리고, 이런 생각을 한 걸 어떻게 알았는지, 에르셈프는 귀신같이 내 앞에 등장했다.
“루나, 안색이 좋지 않군.”
요새 들어 잠도 통 자지 못한 탓이었다.
거울을 보니 다크서클이 턱까지 내려와 있었다.
“잠을 잘 못 자서요.”
그가 내 발을 맞추며 자연스럽게 교정을 걸었다.
“어디 가는 길이었지?”
“수업에 가는 길이었어요. 열 시에 시작하거든요. 에르셈프는요?”
“강의가 일찍 끝나 빈 시간이 좀 생겨서. 도서관에 가고 있었어.”
“그렇군요.”
에르셈프는 그렇게 말했지만 도서관으로 가는 방향으로 걷고 있지 않았다.
그저 내 옆을 따라오는 기분이었다.
나는 에르셈프에게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에르셈프, 시간이 있다면.”
“?”
“저 좀 데려다줄 수 있나요?”
그러자 에르셈프가 눈에 띄게 놀라는 것이 느껴졌다.
솔직하게 드러나는 반응이 꽤 귀여웠다.
내가 먼저 이런 부탁을 한 경우는 없었으니 당황할 법도 하지.
잠시 말이 없던 에르셈프는 이내 입을 열었다.
“뭐, 네가 부탁해서는 아니고, 시간이 마침 비니까 특별히 해 주지. 어디든. 학교 밖이든, 다른 마을이든, 여관이든 어디든지 데려다줄 수 있어.”
“…여관이 여기서 왜 나오죠.”
“말이 그렇다는 거지.”
그는 마치 기다렸다는 듯 술술 대답했다.
표정은 그리 크게 변하지 않았지만 기분이 좋아 보이는 것 같았다.
“사정이 있거든요. 정령술과 강의동까지만 데려다줘요.”
당당하게 요구했다.
입꼬리를 실룩거리는 에르셈프는 몇 초 뒤에야 목을 가다듬더니 입을 열었다.
“나도 산책을 하는 게 좋아서 그런 거야.”
“…그렇군요.”
그렇게 나는 왕자님의 에스코트를 받으며 강의동에 도착할 수 있었다.
“사정이 뭔지 물어봐도 되나?”
나는 잠시 고민하다가 말했다. 세이먼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말하는 편이 좋을 것 같다는 생각에.
“누군가가 저를 죽이려 하고 있어요. 누군진 알 수 없지만, 하루라도 빠른 시일 내에 잡아내야 해요. 안 그러면…….”
“……?”
“이젠 저를 못 볼지도 몰라요.”
내가 자조적인 웃음을 지으며 말하자 에르셈프의 표정이 순식간에 안 좋아졌다.
그러고는 더 이상 묻지 않았다.
“…끝나고 데리러 오겠네.”
걱정이 담긴 목소리로 나에게 내뱉었다.
“끝나고는 괜찮아요. 사람들이랑 다 같이 나오니까 절 해칠 순 없을 거예요.”
어느새 우리는 정령술과 강의동 앞에 도착했고, 나는 그에게 인사를 했다.
“고마워요, 에르셈프. 덕분에 죽지 않을 수 있었어요, 그럼 안녕히!”
나는 손을 흔들고 강의동 안으로 뛰어 들어갔다.
복도를 걸어가며 창문으로 바라보자 에르셈프가 그 자리 그대로 잠시 서 있는 것을 볼 수 있었다.
그리고 뒤이어 잰퓨어가 강의동 안으로 들어왔다.
“……!”
이렇게 짧은 간격을 가지고 들어오는 거라면 잰퓨어가 나와 에르셈프 뒤에서 걸어오고 있었다는 게 된다.
이런. 잘못한 건 없지만 좋은 상황도 아니었다.
나와 에르셈프가 대화하면서 걷는 모습을 보는 잰퓨어는 무슨 생각이 들었을까.
평소라면 아무렇지 않게 끼어들었을 테지만 그러지 않은 것으로 보아 나와의 관계가 확실히 바뀌었음을 알 수 있었다.
그가 원하는 건 뭘까.
무언가 기다리는 것이 있는 걸까.
수업에서 마주친 잰퓨어는 나를 보고는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
둘 다 서로 인사하지 않았고, 그는 나를 지나쳐 갔다.
그때였다.
[‘잰퓨어 이브’와의 친구 관계가 파괴 직전입니다.]
[‘사랑은 친구부터’ 퀘스트에 따라 페널티가 적용될 수 있습니다.]
시스템의 경고창이 떴다.
이럴 수가!
나는 입을 틀어막았다. 속으로 아닐 거라 생각하고 있었던 잰퓨어와의 관계가 무너지기 일보 직전이라는 것이다.
안 돼! 그렇게 될 수는 없다.
지금까지 잰퓨어와 친구 관계를 유지하려고 했던 노력이 얼마인데, 이렇게 무너져 버린다고?
잰퓨어와 친구가 되기 위해 펀칭 머신 테스트에서 온갖 노력을 했던 기억과, 그와 함께 임무를 돌며 동료로 지내던 때의 기억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다.
어쩔 수 없이 나는 이 빌어먹을 게임 시스템의 노예였다. 시스템이 하라면 하란 대로 잰퓨어와 친구 관계를 잘 유지해야 하는 것이었다.
“하아…….”
나는 수업이 끝나고 말을 걸기로 다짐했다.
이번에는 저번처럼 싸우지 않을 거다. 대화로 잘 풀면 괜찮아질 거다. 잰퓨어는 그럴 만한 사람이니까.
나는 손톱을 깨물며 어떻게 말을 걸지 고민했다.
* * *
드디어 수업이 끝났다.
나는 떨리는 마음으로 잰퓨어를 쫓았다. 그는 맨 뒷자리였기에 가장 처음으로 문을 열고 나갔다.
“잰퓨어……!”
내가 불렀지만 듣지 못한 것 같았다.
사람들 사이로 쏙쏙 나가 잰퓨어를 붙잡으려 강의동을 나갔을 때였다.
“에르셈프?”
에르셈프가 강의동 앞에 떡하니 서 있는 것이다.
아니, 데리러 오지 않아도 된다니까.
“루나.”
그가 나에게로 다가왔고, 나는 잰퓨어를 놓칠 수밖에 없었다.
“안 와도 된다고 했잖아요. 정말 괜찮은데.”
“잠시 걸을까요?”
“……?”
그가 갑자기 나에게 존댓말을 썼다.
뭐지? 갑자기 말투는 또 왜 저래?
완전 제멋대로구만.
나는 에르셈프가 이끄는 대로 언덕을 내려가 교정을 걷기 시작했다.
에르셈프는 별말이 없었다. 원래도 말이 적으니까, 뭐.
“어디 가는 거죠?”
그는 목적지가 있는 듯 나를 어디로 데려가려는 것 같았다.
“좋은 곳을 알거든요.”
그렇게 말하자 순간적으로 잰퓨어 생각이 났다.
처음 강의실에서 말을 텄을 때, 좋은 곳이 있다며 데려가 주겠다는 말을 했었는데…….
그때는 참 곤란했지만 이제 와서 생각해 보면 참 웃긴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처음 보는 사람한테 그렇게 들이대는 사람이 어디 있냐고.
“이리로 와요.”
에르셈프가 데리고 간 곳은 학교 끝자락에 있는 숲속이었다.
“왜 이런 곳에……?”
강의동이 있는 곳과는 거리가 있고, 이곳은 학생들도 산책을 하지 않는 곳이라 인적이 드문 곳이었다.
순간적으로 위협이 느껴졌다. 이곳도 옥상처럼 사람이 아무도 없는 곳이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이 묘한 공기의 흐름. 피부에 소름이 돋는 기분이 들었다.
하지만, 상대는 에르셈프였다.
제2 남자 주인공으로, 무슨 일이 있어도 나를 사랑하는, 날 절대 위협하지 않을 남자.
“왜 이런 곳에 온 거죠?”
내가 의아한 눈빛으로 물었다.
그러자, 에르셈프가 비릿한 웃음을 지었다.
“……?”
“왜 여기에 왔냐고?”
“…….”
“네 목숨을 끊으러 왔지.”
그러고는 에르셈프가 나에게 천천히 걸어오기 시작했다.
“뭐, 뭐예요. 이런 장난치지 말아요. 에르셈프……!”
“장난으로 보이나?”
“제발, 제발 부탁이에요. 이러지 말아요.”
에르셈프에게 애원했다. 이런 장난은 제발 멈춰 달라고.
아까 에르셈프에게 이런 말을 한 것이 화근이었나?
에르셈프가 왜 이러는 거지? 절대 이럴 사람이 아니잖아!
이렇게 살벌한 표정을 지으며 나를 구석으로 밀어 넣는 사람일 리 없다고.
내가 도무지 알 수 없는 상황에 어찌할 바를 모르며 뒷걸음질을 치고 있을 뿐이었다.
어쩌지? 어떻게 해야 하냐고!
정령을 먼저 불러야 하나? 아니면 칼이라도 빼 들어야 하나?
샐라임! 샐라임에게 먼저 말을……!
“읍!!”
* * *
사건이 일어나기 30분 전.
세이먼은 에르셈프를 만나 ‘검술의 이해’ 책을 전해 주었다.
“이런 기본서가 필요하십니까?”
“기본이 가장 중요한 법이지.”
세이먼과 에르셈프는 사이가 그리 좋은 관계는 아니었다.
세이먼의 입장에서 에르셈프는 아주 거슬리는 눈엣가시였다.
뒤에서 루나를 꾀어내려 하는 것도 모자라 이제는 앞에서 대놓고 데이트 신청을 하려 했다.
그런 건 두 눈 뜨고는 용납할 수 없었다.
사실 세이먼은 루나가 다른 남자와 대화를 하는 것도 싫었다.
하지만 그런 감정을 티 냈다간 루나가 도망가 버릴까 봐 숨기고 있는 것이었다.
반면 에르셈프의 입장에서 세이먼은 그저 유치하기 짝이 없는 어린애와 같았다.
사람을 사랑으로 회유하고 보듬어 주는 것이 아닌 그저 떼를 쓰며 고집만 부리는 어린애.
게다가 겉으로는 온갖 친절하고 유순한 학생회장 가면을 쓰고 있으니 볼 때마다 거부감이 들 수밖에 없었다.
그런 자에게 루나를 빼앗길 수는 없다.
자신이 루나를 가지지 못할지언정, 세이먼에게만큼은 절대 가서는 안 된다는 거다.
“고맙네.”
“어려운 일도 아닌걸요.”
세이먼과 에르셈프는 속으로 그렇게 견제하고 있었지만 겉으로는 있는 예의, 없는 예의 다 갖추며 서로를 대했다.
“학생회실에 가는 건가, 세이먼?”
에르셈프가 은근슬쩍 세이먼에게 물었다. 루나를 만나러 가는 것인지, 아닌지 알아내려는 것이었다.
하지만 세이먼은 듣자마자 눈치챘다.
그런 에르셈프의 수작은 눈 감고도 알아낼 수 있는 것이었다.
자신은 에르셈프보다 한 수 위에 있다고 생각했으니까.
그래서 이번엔 에르셈프를 한번 골려 주고 싶었다.
“루나를 만나러 가려 합니다. 요새 일이 있는 것 같아서요.”
그 속에는 ‘너는 모르고 있지?’가 들어 있었다.
자신은 정보의 우위를 점하고 있다는 그런 오만한 말투.
“그런 것 같더군. 아까도 걱정이 되어서 데려다주었네.”
하지만 에르셈프는 아는 사실이었다.
그것도 루나가 자신에게 직접 요청하지 않았는가. 바로 ‘데려다 달라고’.
세이먼은 에르셈프를 향해 미소를 지었고, 에르셈프는 평소와 같은 무표정을 유지했다.
그것이 그들에게는 속을 들키지 않으려는 가면과도 같은 것이었다.
“이만 가 보겠습니다.”
그래도 에르셈프는 한 나라의 왕자였다.
세이먼은 예를 갖추어 인사를 한 뒤 자리에서 빠져나왔다.
시간을 보니 루나의 정령술과 수업이 끝날 시간이었다.
“데리러 가야겠군.”
아무리 자신의 손을 거절하는 루나여도, 지금과 같이 위험한 상황에서는 도움을 받을 것이다.
며칠 전에 병실에서도 그러지 않았는가.
그때의 기억으로 며칠을 행복하게 살았던 세이먼은 기분 좋은 마음으로 언덕을 올랐다.
몇 분 지나지 않아 수업이 끝난 학생들이 몰려나왔고, 그 속에서 루나를 찾을 수 있었다.
하얀 은발 머리의 소녀가 나오자 주변이 빛이 나는 것 같았다.
“루나……!”
세이먼이 이름을 부르며 다가가려고 했는데, 순간 발걸음이 우뚝 멈추었다.
인파 속에서 에르셈프가 나타나더니, 루나에게 다가가는 것이다.
“뭐지?”
세이먼이 미간을 좁혔다.
에르셈프는 좀 전까지 자신과 이야기하지 않았는가?
길은 하나뿐인데 어떻게 금세 여기까지 온 거지?
에르셈프로 보이는 자는 뒷모습만 보였기에 의심이 들었다.
에르셈프가 아닌가?
그럴 리가 없다.
저 회색 머리는 왕족이 아니면 가질 수 없는 고유한 머리다.
그때, 에르셈프와 루나가 언덕을 내려가기 시작했다.
세이먼은 그들을 따라갔다.
에르셈프는 루나를 데리고는 학교의 서쪽 숲으로 향했다.
그곳은 사람들이 잘 지나다니지도 않는 곳인데……?
딱히 자신의 존재를 숨길 생각은 아니었지만 어쩌다 보니 세이먼은 숨을 죽인 채 살금살금 뒤를 쫓고 있었다.
대체 무슨 짓을 하려고 저기로 데려가는 거야?
역시 아예 루나에게 접근하지 못하게 수를 써 놨어야 했나……!
세이먼은 그들이 들어간 숲속을 바라보며 나무 뒤에 숨을 수 있었다.
그들이 대체 무얼 하는지 지켜보았다.
그리고, 곧이어 세이먼은 눈을 커다랗게 뜰 수밖에 없었다. 그가 목격한 광경은,
에르셈프가 루나의 목을 조르고 있는 모습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