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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섯명은 너무 많잖아요 (59)화 (59/156)
  • 58화. 의심(2)

    새벽 내내 세이먼에게 시달렸다. 온갖 수작은 다 부렸다.

    “난 당신이 아무것도 가지지 않은 사람이었으면 좋겠어요.”

    지난번처럼 머리카락을 부드럽게 쓸어내리기도 하고,

    “그래야 나에게 온전히 의지할 수 있을 테니까.”

    내 손가락을 가지고 놀듯 하나하나 만지작거리다 와락 손깍지를 끼기도 하고.

    “아무 데도 가지 말아요. 평생, 제가 이렇게 간호해 줄게요.”

    이런 식이었다.

    밤인 데다가 둘만 있으니 그의 욕망이 끓어넘친 것이다.

    처음엔 힘이 없어서 가만히 놔두다가, 나도 그 이상한 분위기에 휩쓸릴 뻔했다.

    하지만 나는 옆에 샐라임이 있었고, 이 잔소리쟁이 정령 덕분에 정신을 차릴 수 있었다.

    “세, 세이먼, 제발 그만!”

    호감도가 오르지 않도록 온갖 짓을 다한 나는 무탈하게 아침을 맞이할 수 있었다.

    몇 주 동안은 내원을 하라는 의사 선생님의 말을 듣고 나서 나는 병원 밖으로 나왔다.

    당장 가야 할 곳이 있으니까.

    뚜벅뚜벅.

    나는 빠른 걸음으로 마법과 강의동을 찾았다.

    그리고 마법D반의 교실을 찾아내 허락도 없이 뒷문으로 들어갔다.

    쉬는 시간이어서 다들 신경을 쓰지 않았다.

    그래서 나는 쉽게 이블린을 찾아낼 수 있었다.

    “이블린.”

    책상에 앉아 친구와 수다를 떨고 있던 이블린은 나를 보더니 눈을 동그랗게 뜨며 물었다.

    “무슨 일이야, 루나? 여기까지 다 찾아오고.”

    너무나도 태연한 목소리였다.

    무슨 일이냐고?

    네가 옥상으로 불러서 저세상 갈 뻔한 거 따지러 왔다.

    “나와.”

    짧게 말하고 문으로 나가자 그녀가 뒤에서 따라오는 것이 느껴졌다.

    나는 이블린이 뒷문으로 나오자마자 팔목을 잡고 빈 강의실로 끌고 갔다.

    벌컥!

    문을 박차고 들어간 나는 이블린을 벽에 밀친 뒤 멱살을 잡았다.

    “대체 지금 뭐 하는 짓이지?”

    내가 날카로운 목소리로 물었다.

    갑작스럽게 이런 상황을 당한 이블린은 어찌해야 할지 모르는 것 같았다.

    이상했다.

    수상한 기운이 있는 사람치고는 너무나도 순진해 보였다.

    11층에서 떨어진 나를 보고도 놀라지 않았고.

    연기인 줄 알았는데 아닌 것 같았다.

    내가 예상한 반응은 이런 게 아니었단 말이다.

    “뭐, 뭐를 말하는 거야, 루나. 이것 좀 놓고 말해.”

    그녀가 답답하다는 듯 내 손을 풀려 했지만 나는 놓아줄 생각이 없었다.

    “뭘 말하는 거냐고? 어제 옥상으로는 왜 나오라고 했지?”

    “…옥상이라니? 난 그런 말 한 적 없어…….”

    “항상 같이 밥을 먹던 곳이었잖아! 쪽지도 보냈고! 네가 아니면 누가 나를 옥상으로 부른단 말이야?!”

    내가 언성을 높였다.

    모르쇠로 일관하는 그녀의 모습이 가증스럽게 느껴졌다.

    “난 아, 아무것도 모른다고! 갑자기 와서 왜 이러는 건데……? 모르는 사람 붙잡고 물어봤자 아무것도 나오지 않아……!”

    하지만 그녀는 내가 이런 분위기를 조성한 것만으로도 겁을 먹는 사람이었다.

    나를 옥상에서 떨어뜨리는 극악무도한 짓을 꾸밀 만큼 간이 부은 사람은 아닌 것 같았다는 거다.

    그리고 생각해 보면 정령술과 선배에게 쪽지를 전달받은 것이기에 보낸 사람이 이블린이 아닐 가능성도 있었다.

    이블린을 사칭한 누군가이거나.

    이블린이 시치미를 떼는 거거나.

    그녀의 반응을 봐서는 전자가 맞는 것 같았다.

    털썩!

    내가 그녀의 멱살을 놓았다.

    “캑! 캑!”

    그녀가 막혔던 기침을 쏟아 냈다.

    “마지막으로 물을게. 난 널 사칭해서 날 옥상으로 부른 사람을 찾고 있어. 예상 가거나 생각나는 사람 없어?”

    이블린은 손가락을 꼼지락거렸다.

    “몰라……. 그런 거 모른다고.”

    그러고는 귀찮다는 듯이 대답했다.

    “그래?”

    나는 한번 숨을 내쉰 뒤 그녀에게 물었다.

    “넌 내가 왜 이렇게 찾아왔는지 궁금하지도 않아?”

    “……!”

    “너희 반까지 찾아와서 너를 사칭한 사람을 묻는데 내가 무슨 일을 겪었는지 전혀 알고 싶지 않은 거냐고.”

    “네, 네가 먼저 갑작스럽게 굴었잖아. 물을 시간도 주지도 않았고.”

    “그래. 그럼 지금은 궁금하기는 해?”

    그러자 이블린이 목소리를 가다듬으며 대답했다.

    “흠, 흠! 뭔데.”

    “어제 옥상에서 누군가가 나를 밀었어.”

    “……!”

    순식간에 그녀의 표정이 사색이 되었다.

    역시, 그녀는 몰랐던 거다.

    이 반응은 절대 연기할 수 있는 게 아니다.

    “거짓말 치지 마. 그러면 어떻게 여기에 있는데?”

    “운 좋게 살았어. 난 어제 너한테 옥상으로 올라오라는 쪽지를 받았고, 그래서 옥상으로 올라갔는데 너는 없고 나를 죽이려는 누군가만 있었지.”

    “…….”

    “이래도 예상 가는 사람이 없어?”

    이블린은 눈을 피했다.

    “무언가를 알고 있는 거지?”

    내가 다시 묻자 그녀가 입술을 꽉 깨물더니 말을 내뱉었다.

    “살, 살았으면 된 거 아니야? 난 아무것도 모르니까 더 이상 묻지 않았으면 좋겠어.”

    허.

    나는 어처구니가 없어서 헛웃음이 나왔다.

    살았으면 된 거 아니냐고?

    그게… 정말 사람이 할 수 있는 말인가?

    나는 허탈한 목소리로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우리, 친구라고 생각했는데 아니었나 보네.”

    “…….”

    “나만 그렇게 생각한 거였어. 그렇지?”

    나는 대답을 기다리는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이블린은 말이 없었다.

    그렇게 빈 강의실엔 정적만이 흘렀다.

    잠시 그녀를 쳐다보던 나는 발을 돌려 강의실 밖으로 나왔다.

    더 이상 그녀를 추궁하고 싶지 않았다.

    더욱 실망만 할 테니까.

    처음으로 사귄 친구를 이렇게 기억하고 싶지 않으니까.

    “하…….”

    기숙사로 돌아가는 길이 아주 멀었다.

    * * *

    몸과 마음이 회복되기까지는 며칠이 걸렸다.

    수업도 제치고 기숙사 방에만 틀어박혀 나가질 않았다.

    “너… 이러다가 변사체로 발견돼.”

    모든 상황을 함께한 샐라임은 나와 둘이 있는 상황이 되자 여러 가지 말을 해 주었다.

    “나도 자세히는 보지 못했지만 여자인 건 확실해. 팔이며 손가락이 아주 얇았거든.”

    날 민 사람이 여자라고 말해 주었고,

    “친구는 나랑 하면 되지. 그런 녀석 잊어버려. 살면서 상처도 받고 그러는 거지. 응?”

    위로도 해 주었다.

    방에 며칠간 처박혀 있는 동안 샐라임이 있어 주었기에 그나마 버틸 수 있었다.

    하지만 확실한 건, 아직도 범인을 찾지 못했다는 거다.

    여자인 데다가, 나에게 적대심을 품고 있는 사람이라면 한 명 있기는 했다.

    히아신스 나이츠.

    하지만 그녀가 나를 죽일 만큼의 원한을 가지고 있을까?

    남자 하나 때문에 나를 죽인다는 건 내 상식상으로는 이해가 되지 않았다.

    “일단 용의선상엔 올려놓고.”

    사실 그녀를 제외하면 그 누구도 나를 죽일 만한 여자는 생각나지 않았다.

    아니면 밀리센트 가문의 지령을 받은 다른 학생일 수도 있다.

    하지만 그렇게 따지면 나는 전교생을 의심해야 하는 상황에 놓이게 된다.

    나와 연관이 없어도 나를 죽일 수 있다는 것이니 말이다.

    “하……. 머리 아파.”

    “네 머리부터 어떻게든 치료해 봐. 또 피 나잖아.”

    꼬박꼬박 병원에 가지 않아 상처가 짓무른 것 같았다.

    더 심해지면 안 되기에 어쩔 수 없이 나갈 채비를 했다.

    * * *

    히아신스는 하교를 하던 중이었다.

    친구들과 교정을 걸으며 정문으로 향하고 있었다.

    친구들은 시시콜콜한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지만 히아신스의 머릿속엔 그런 것 따윈 들어오지 않았다.

    당연히 학교에 소문이 날 줄 알았는데 아니었다.

    본관 건물 앞에서 떡하니 죽었으니 화제가 되었을 법도 한데 아무런 말이 없었다.

    나한테 해가 가지 않게 조용히 처리해 준다고 해서 소문이 안 난 건가?

    뭐, 그럴 수 있었다.

    그 계집애가 자살해서 죽었다는 게 학교에 퍼지면 볼만하겠다고 생각했건만, 아쉬웠다.

    그나저나, 그 시체를 치울 걸 생각하니 온몸에 소름이 쫙 돋았다.

    실제로 자신이 루이아나를 밀었을 때, 땅에 떨어진 소리만 듣고 자리를 뜬 것은 겁이 나서였다.

    피를 흘리는 그녀의 모습을 보면 평생 기억에 남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온갖 민폐 덩어리인 계집애가 나에게 정신적 피해까지 준다면 용서할 수 없을 거다.

    “히아신스, 오늘 새로 연 디저트 가게에 갈까?”

    옆에서 물어 오길래 흔쾌히 대답했다.

    “좋지, 오늘은 내가 살게.”

    “정말?!”

    밀리센트가에게 돈도 두둑이 받았겠다, 거슬리는 존재도 사라졌겠다, 이제 앞으로는 세이먼과의 밝은 앞날만이 남아 있을 뿐이었다.

    생각만 해도 행복에 겨워 춤을 추고 싶었다.

    ‘러브문’만 받으면 당장 이 거지 같은 아카데미를 중퇴하고…….

    “……?”

    행복 회로를 돌리던 그녀의 생각이 우뚝, 멈추었다. 왜냐하면…….

    “히아신스?”

    절대 있어서는 안 될 사람이 있었기 때문이다.

    “……?”

    며칠 전에 죽인 계집애다.

    옥상에서 밀어 산산조각 났을 그 아이.

    그 아이가 지금 버젓이 앞에 서 있는 거다.

    그것도 자신의 이름을 부르면서.

    “…….”

    히아신스는 사색이 되어 몸을 부르르 떨었다.

    어떻게, 어떻게 살아 있는 거지?

    분명히 밀었는데? 그 높이에 살아 있을 수가 없는데?

    마력이 정지되어 아무 손도 쓰지 못했을 텐데?

    히아신스가 눈을 동그랗게 뜬 채 아무 말을 하지 않자,

    “하긴, 우리가 인사할 사이는 아니지.”

    루이아나는 그렇게 말하며 지나갔다.

    무슨 일을 겪었냐는 듯 가볍고 아무렇지 않은 몸짓으로.

    저게 11층 높이에서 떨어진 사람의 모습이란 말이야?

    머리에 무언갈 붙인 걸 본 것 같긴 한데, 온몸이 너무 멀쩡하잖아!

    팔다리, 머리, 배, 모두 다 정상이었다고!

    “히아신스, 괜찮아? 안색이 안 좋아.”

    “네가 싫다고 했던 걔 맞지? 진짜 싹수없다.”

    친구들은 옆에서 물어봤고, 히아신스는 애써 괜찮은 척을 했다.

    친구들에게 괜한 티를 내고 싶진 않았다.

    이건 전적으로 자신에게 주어진 임무였다.

    “말도 안 돼…….”

    그녀는 다시 발걸음을 옮겼다.

    해가 지는 중이라 주황색 노을빛이 그녀의 얼굴을 비추었다.

    빨간 그녀의 얼굴이 오늘따라 더 날카롭게 보이는 것 같았다.

    “미안한데, 오늘은 먼저 집에 갈게.”

    친구들에게 급하게 인사를 한 뒤 마차를 탔다.

    덜컹덜컹.

    “으으!!”

    그녀는 주먹을 쥐어 자신의 허벅지를 때렸다. 이 끓어오르는 분을 참을 수가 없었다.

    뭐 하나 내 뜻대로 되지 않는 계집애였다.

    한시라도 빨리 세상에서 사라졌으면 하는 존재가 계속 그녀의 성질을 긁어 왔다.

    “그래, 진정하고 생각해 보자.”

    루이아나는 죽지 않았다.

    이유가 어찌 되었든 간에 버젓이 살아 있다.

    불사신이라도 되는 건가?

    말도 안 돼. 그럴 리가 없잖아.

    운 좋게 살아났다고 한들 그 높이라면 적어도 온몸이 부서져야 할 텐데.

    부서지기는커녕 사지 멀쩡히 붙어 있는 것이었다.

    “짜증 나…….”

    히아신스는 루이아나를 옥상에서 미는 그날만을 위해 몇 주를 준비한 것을 생각하니 치가 떨려 왔다.

    멍청한 이블린의 비위도 맞춰 주고, 루이아나의 뒤를 쫓아다니며 이블린에게 정보도 갖다 주고, 그 남자에게 자신의 계획을 몰래 전달까지 한 뒤, 옥상에 아무도 올라오지 않도록 문단속을 하는 노력까지 했는데.

    하지만 어떻게 생각하든 간에, 답은 하나였다.

    죽지 않았으니 다시 죽여야 하는 것.

    옥상에서 미는 것이 가장 손에 피를 묻히지 않는 방법이라고 생각하여 행했던 건데, 이런 불상사를 낳아 버린 거다.

    확실한, 아주 확실한 방법이 필요해. 목숨이 끊어지는 것을 내 눈으로 확인할 수 있는 그런 방법.

    그러기 위해서는…….

    “내가 나서야겠어.”

    그녀가 작게 중얼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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