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7화. 의심(1)
약 11층의 높이였다.
소리도 없이 내 뒤로 다가온 누군가가 고의적으로 날 떨어뜨린 거다.
검은 천을 뒤집어썼기에 범인이 누구인지 보지도 못했다.
떨어지는 동안, 많은 생각이 뇌리를 스쳤다.
지금 날 죽이려고 옥상에서 민 거지?
그러면 아무도 없는 옥상으로 나를 부른 사람은 누구지?
이블린이다.
그러면 이블린이 나를 살인 표적으로 지정했단 말인데.
사실 난 며칠 전부터 이블린의 이상한 행동에 의심을 품었었다.
그리고 어젯밤, 나는 이블린을 기억해 냈다.
그녀는 ‘가이즈 인 러브’에 나왔던 캐릭터였다.
다만 극초반에 나오고 워낙 존재감이 없던 탓에 기억을 하지 못했었다.
게임 속에서 그녀는 ‘넬튼’이라는 이름으로 등장했었다.
그러니 이블린을 보고 생각하지 못할 법도 하지.
하지만 ‘넬튼’은 그녀의 성이었다.
현실에서 그녀는 성이 아닌 이름으로 나에게 등장한 것이다.
그렇다면 게임 속에서 그녀는 어떻게 나왔는가?
바로 초반에 여주인공에게 제공되는 작은 시련 같은 존재였다.
루이아나가 여러 남자들의 관심을 받는다는 이유로 질투가 나 그녀의 가방을 화장실에 갖다 버린 아이로 나왔었다.
하지만 그걸 보고 우는 루이아나를 세이먼이 다독여 주면서 둘의 사랑이 진행되었었고, 넬튼은 그저 지나가는 소악당에 불과했다.
그래서 기억하지 못했다.
이름도 다르게 나왔고, 게임에서 하던 행동과도 다르게 행동했기 때문에.
하지만 어제, 동그란 안경에 양 갈래 머리를 한 일러스트가 내 머리를 때리듯이 생각났다.
에르셈프에게 한 소리를 듣고서 기숙사로 돌아오던 도중 말이다.
이블린이 나에게 질투를 하는 것 같다는 생각과, 에르셈프가 해 준 그녀를 조심하라는 말을 듣고 곰곰이 생각한 결과였다.
그래서, 나는 의심하고 있었다.
그녀가 나에게 어떤 짓을 할 수도 있다고 말이다.
이렇게 빠르게 행동할 줄은 몰랐지만.
물론 이블린의 배후가 있을 수도 있다.
그녀는 나에게 살인까지 저지를 만큼의 동기가 없기 때문이다.
그저 나를 괴롭히는 것에 동조하고 싶었을 수도 있지.
그러면 나를 옥상에서 민 사람, 또는 그걸 지시한 사람은 이블린이 아니라 다른 사람이라는 건데.
그렇다면 대체 누구란 말인가?
사람을 이용해서 살인을 계획할 만큼 잔인한 살인자는?
쿵!!
그렇게 나는 11층 높이의 옥상에서 떨어졌다.
11층 높이라 하면, 절대 살아남지 못할, 뼈가 조각조각 부서질 정도의 높이라고 보면 된다.
게다가 드라마에 나오는 것처럼 운 좋게 나무에 걸리는 일도 생기지 않았다.
그렇게 되었다면 조금이라도 살 가능성이 있었을 텐데.
진짜 운도 지지리 없네.
이 세계 너무 가혹한 거 아냐?
열여섯짜리 애를 이렇게 죽여야겠냐고.
만약 이 세계를 관장하는 신과 만난다면, 공감 능력을 좀 키우라고 말해 주고 싶다.
그 정도면 병이니까.
누가 그랬다.
죽기 전엔 수많은 생각들이 몇 초 만에 영화처럼 재생된다고.
나도 지금 몇 초 동안 이 많은 생각들을 다 하고 있으니 틀린 말은 아닌 것 같다.
하지만 나는 좀 다르다.
왜냐면.
죽지 않았기 때문이다.
11층 높이에서 떨어져 살아남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라고 생각하겠지.
그러나 나는 다행히도 준비성이 철저한 사람이었다.
며칠 전 레크리드의 마법 상점에 갔을 때 착용만 하면 머리부터 발끝까지 방어력을 200배 올려 주는 방어구를 샀었기 때문이다.
되게 비쌌는데 일회용이라 욕을 했었지.
살인 표적으로 지정을 당하고 혹시 뒤에서 칼이라도 맞을까 봐 구매한 것이었는데, 입길 잘했다.
“으…윽…….”
주변엔 아무도 없었다.
다들 하교한 뒤여서 그런지 학교 전체가 고요했다.
그 사이에서 쿵! 소리가 났는데도 밖으로 나와 확인하는 사람이 하나 없었다.
단 한 명도 없었다.
갑자기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이 상황이면, 내가 즉사가 아니라 운 좋게 목숨을 건졌다고 해도, 날 도와줄 사람이 아예 없었을 것이다.
누군가 일부러 사람을 쫓아냈나?
파사삭.
입고 있던 방어구가 산산조각이 되어서 부서지는 소리가 들리며 내 의심도 일단은 멈췄다.
옷 안에 입은 탓에 느낌이 불쾌했다.
아무리 방어구를 입고 있었다고 하지만 몸에 충격이 없는 건 아니었다.
특히 머리와 척추뼈가 너무 아팠다.
“끄…응…….”
가까스로 몸을 일으키는 내 몸짓에 순간적으로 헛웃음이 나왔다.
나 진짜 질기게 살아남는구나.
날 민 사람도 어이가 없겠지.
내가 200배 방어구를 입고 있을 줄 어떻게 알았겠어.
나는 무릎을 딛고 일어섰다.
머리가 빙빙 도는 탓에, 온몸이 비틀거리며 중심을 잡을 수가 없었다.
“하아…….”
나무에 기대서 한참 동안 숨을 내쉬고 있는데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그렇다.
맨날 내가 역경에 처해 있을 때마다 나타나는 사람이다.
그는 아마 내가 힘든 상황일 때마다 등장하라는 설정이 부여된 캐릭터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루나!”
다리를 후들후들 떨며 나무에 기대어 있는 나를 본 세이먼이 한걸음에 달려왔다.
“무슨 일이에요! 머리에서 피가 나잖아요!”
내가 이마를 손으로 쓸자 붉은 피가 묻어 나왔다.
이런, 이래서 그렇게 어지러웠던 거였어.
방어구 덕에 죽지는 않았지만, 고작 방어구 하나로 11층 높이의 타격을 전부 흡수하기란 불가능했던 거다.
세이먼은 적잖게 당황한 눈빛으로 나를 쳐다보더니 뒤를 돌아 들쳐 업었다.
“바로 병원으로 갈게요. 정신 차리고 있어요!”
역시 집착남이라곤 하지만 결국 날 구해 주는 건 세이먼뿐이라니까…….
어지러운 상황에서 그런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나는 고개를 떨구며 병원으로 실려 갔다.
* * *
정신을 차린 건 병원 침대에서였다.
역시나 입원을 한 것이었다.
이마에는 붕대가 감겨져 있었고, 온몸에 난 상처들도 치료가 되어 있었다.
그리고…….
옆을 보니 세이먼이 고개를 숙인 채 꾸벅꾸벅 졸고 있는 것이 보였다.
고개가 움직일 때마다 금발 머리가 흔들렸다.
간이 의자에 앉아 팔짱을 끼고 잠을 자는 것이 계속 나를 간호한 것 같았다.
가만히 그의 얼굴을 살폈다.
어떻게 남자가 속눈썹도 이리 예쁘지.
고운 선으로 빚어 놓은 그의 얼굴은 남자다운 선과 부드러운 선이 공존하고 있었다.
나를 도와줘서 그런지 오늘따라 더 잘생겨 보이는 것 같기도…….
그때 내가 움직이며 낸 바스락 소리에 세이먼이 눈을 떴다.
눈을 몇 번 깜빡이더니 고개를 드는 세이먼.
고개를 들어 정신을 차린 나를 보더니 갑자기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그러고는, 침대에 앉아 있는 나를 덥석 안아 품에 가두었다.
“루나……. 너무 걱정했어요…….”
큰 품이 나를 감싸 안자 나는 순식간에 그의 가슴팍과 목의 살결, 특유의 향기까지 모두 다 느낄 수 있었다.
“……!”
그는 내가 마치 날아가 버릴 나비라도 되는 것처럼 굴었다.
“그렇게 걱정했어요?”
“죽을까 봐……. 죽어 버릴까 봐…….”
떨리는 목소리로 내뱉는 그의 목소리는 걱정과 욕망이 모두 담겨 있는 것 같았다.
드디어 나를 품에서 떼어 낸 그가 내 어깨를 잡고는 눈을 맞추었다.
“무슨 일이에요. 왜 화단에서 그렇게 다친 거죠?”
나는 잠시 고민하다가 대답했다.
“옥상에서 떨어졌어요.”
“……!”
세이먼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세이먼은 오히려 나를 위협하는 자가 있다고 하면 발 벗고 나서서 도와줄 사람이다.
그러니 말하는 편이 낫다.
“어, 어쩌다가…….”
“누군가가 저를 밀었어요. 너무 급작스러운 바람에 누군지 볼 순 없었지만 저를 죽이려고 한 건 확실해요.”
“…누가 감히 당신을 죽이려고 하죠?”
“저도 잘은 모르겠지만 누군가가 저를 죽이려고 해요. 자세히는 말할 순 없지만…….”
“진심인가요?”
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그의 표정이 순식간에 얼음처럼 변했다.
손톱을 입에 물며 잠시 생각에 잠겼던 그가 다시 나에게 다가왔다.
“일단 최대한 사람이 많은 곳으로만 다녀요. 그러면 허튼짓은 못 할 테니까.”
“네…….”
“그리고 오늘은 제가 같이 있어 줄게요. 혼자 있으면 위험할 테니.”
맞는 말이었다.
지금은 세이먼의 호감도를 걱정할 때가 아니었다.
당장 죽게 생겼는데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보안관 하나 없는 병원에 혼자 있는 건 스스로 나를 죽여 달라고 비는 꼴이었다.
“그래 줄 수 있나요? 고마워요.”
내가 고맙다며 부탁하자 그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이렇게 수락한 적은 처음이니까 그렇겠지. 맨날 ‘싫어요.’, ‘괜찮아요.’를 입에 달고 살았으니까.
[호감도가 5% 상승했습니다.]
이런 젠장.
그렇다고 이렇게 오르란 법 있어?
내가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오랜만에 그의 호감도를 확인했다.
+
이름: 세이먼 유리츠
나이: 18
직위: 유리츠 가문의 기사
호감도: 47%
+
내가 도움을 승낙한 데에서 호감도가 올라간 건가.
“루나, 당연히 싫다고 할 줄 알았어요. 드디어 저에게 마음을 연 건가요?”
“아뇨, 세이먼은 싸움을 잘하잖아요.”
내가 단번에 아니라고 하자 그는 코웃음을 쳤다. 상황이 웃기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뭐, 아무래도 괜찮아요. 일단 적부터 처리하는 게 좋으니까요.”
그가 아무렇지 않다는 말투로 말했다.
이젠 모든 남주인공들이 내가 싫다고 해도 귓등으로도 안 듣는다.
레크리드는 좀 다르겠지만.
세이먼은 다시 의자에 앉더니 턱을 괴고는 나를 빤히 쳐다봤다.
뭐야. 갑자기 분위기나 잡고.
“루나, 무슨 음식을 좋아해요?”
“갑자기 무슨 말이죠?”
“대화를 하자는 거예요. 당신에 대해 더 알고 싶으니까.”
“…허.”
그러곤 세이먼이 시계를 가리키며 말했다.
달콤하고 부드러운 목소리였다.
“밤은 길잖아요?”
* * *
이블린은 아카데미 정문 옆에 있는 골목에서 누군가를 기다렸다.
입술을 뜯으며 가만히 있지 못하는 것이 아주 초조해 보였다.
그리고 그녀가 기다리는 사람은 곧이어 나타났다.
윤기 나는 긴 갈색 머리를 뽐내며.
“히아신스!”
히아신스와 이블린은 학교가 끝나자마자 만나자고 했지만 무슨 일인지 히아신스가 제때에 나오지 않았다.
줄곧 기다렸던 이블린은 히아신스에게 물었다.
“왜 이렇게 늦은 거야……! 계속 기다렸잖아.”
그러자 히아신스가 대답했다.
“귀찮게 굴지 마. 일이 잘 처리되었나 확인한 것뿐이니까.”
그녀는 날카로운 눈매를 한 채 입은 웃고 있었다.
“어떻게 되었어? 향수는 잘 뿌린 것 같아. 향이 날아가기 전까지는 마력을 쓸 수 없었을 거야.”
“어떻게 되긴. 잘 해결되었지.”
히아신스는 이블린에게 자신의 계획을 말할 생각은 없었다.
이블린은 착해서 써먹긴 편한데 눈치가 너무 없었다.
저런 멍청이한테 괜히 입을 열었다가 뒤가 구려질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녀는 다시 한번 그 장면을 떠올렸다.
바보처럼 난간에 매달린 꼴이란.
천을 뒤집어씌우자마자 얼어붙어 반항 한 번 하지 못한 것이 참 우스웠다.
땅에 처박힌 모습도 확인했으니 전부 해결한 셈이었다.
몸에 마나를 두르거나, 체술 마스터일 경우에는 운 좋게 죽지 않을 수 있었겠지만, 미리 손을 써 두었다.
바로 밀리센트 가문에서 구해다 준 마력 일시 정지 향수를 쓴 것.
그 향을 맡으면 약 십 분 정도 마력을 쓰지 못하는 상태가 된다.
귀족이라도 구하기 힘든 물건이지만 밀리센트 가문에서는 손쉽게 가져다주었다.
혹시라도 루이아나가 어떤 능력을 이용해 살아남을 상황을 없애기 위한 방편이었다.
아무런 능력 없이 그 높이에서 떨어져 살아남을 사람은 한 명도 없다.
분명 떨어지면서 왜 마력이 느껴지지 않는지 당황했겠지.
그 표정을 생각하면 새어 나오는 웃음을 참을 수가 없는 것이었다.
“하하하.”
그녀가 소리를 내어 웃었다.
이블린이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쳐다봤지만 히아신스는 신경도 쓰지 않았다.
머릿속엔 온통 루이아나의 얼굴뿐이었다.
생각만 해도 재수 없는 계집애였다.
“죽어도 싸……. 죽어도 싸다고…….”
그녀는 자기도 모르게 손을 덜덜 떨며 작게 중얼거렸다.
세상은 살 만한 가치가 있는 사람과 죽어도 되는 사람, 이 두 종류로 나뉘었다.
루이아나는 후자에 속했다.
죽어도 되는 사람은 세상에서 없어져 주는 게 공리적으로 좋았다.
그 남자가 주변에 사람도 치워 주었고, 그 애도 날 못 봤고. 아주 운이 좋았다.
그녀는 이블린을 향해 말했다.
“고생했어. 내일을 기대해.”
이블린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블린은 F반 시절부터 히아신스를 동경해 왔다.
아름답고 반짝거리는 얼굴과 머리카락, 항상 화려한 옷들, 거침없는 성격까지.
그래서 히아신스의 부탁 정도는 쉽게 들어줄 수 있었다.
“응, 알겠어.”
그저 루이아나와 친해지라는 것과, 옥상이란 장소를 익숙하게 만들어 달라는 요청뿐이었으니.
대체 히아신스가 무슨 일을 꾸미는지는 모르겠지만 괜찮았다.
“잘했어, 이블린. 아무한테도 말하면 안 되는 거 알지?”
자신이 도움이 된다는 것이 좋을 뿐이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