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6화. 오해(2)
해제 방법을 아는 사람이 있다니!
별 기대 없이 물어본 것이었는데 생각보다 큰 수확이 있어 놀랐다.
“그 사람은 누구죠?”
“레인타운 마을에 사는 키베리아 씨예요. 한평생을 정령술사로 사셨다가 지금은 집에서 연구를 하며 지내시죠.”
레인타운이라면 고블린을 잡으러 갔을 때 갔던 마을이었다.
게이트를 타면 금방 갈 수 있는 곳이기도 했고.
“안 그래도 험버트 시장에 오신다는 말이 있었어요. 제가 소식을 전해 드릴게요.”
“소식을 어떻게 전할 수 있죠?”
내가 의아한 얼굴로 묻자, 레크리드가 낡은 종잇조각을 들고 걸어 나왔다.
“여기에 지문을 찍어 주면 당신을 찾아서 편지를 보낼 수 있답니다. 기특한 울리프를 통해서 말이죠.”
그는 구석에 있는 새장을 가리키며 말했다.
새장 안에는 커다란 새 한 마리가 푸드덕대고 있었다.
목에는 ‘울리프’라는 이름표를 매단 채 나를 쳐다보는 눈빛은 매우 고약해 보였다.
“요새는 이런 것도 되는군요.”
나는 종이에 지장을 찍으며 말했다.
역시 마법이 존재하는 세계는 남다르다 이건가.
“세상이 참 좋아졌죠. 참, 그리고 루이아나 씨.”
“네?”
“곧 있으면 제가 아카데미 안으로 들어갈 거예요.”
이미 아는 사실이었다.
게임 속에서도 그렇게 진행되니까.
학생으로서 들어오는 건 아니다.
레크리드는 비무 대회가 시작되면서 아카데미 안에서 물건을 팔기 시작한다.
게임 속에서는 그때부터 루이아나와 레크리드의 관계가 가까워지는 것으로 되어 있는데, 지금은 그 시점보다 전이라 그런지 레크리드와의 접점이 그리 많지 않았다.
나한테 적극적으로 다가오는 느낌도 들지 않고.
하지만 레크리드가 남주인공이라는 건 변하지 않는 사실.
날 죽음으로 몰고 갈 수 있는 사람이라는 거다.
“정말인가요?!”
나는 모르는 척 태연하게 말했다.
그러자 레크리드는 한 손가락으로 볼을 긁었다.
“아마 자주 보게 될 거예요.”
시선을 왼쪽 위로 향한 것이, 왠지 부끄러워 보였다.
아, 귀엽다.
하지만 나는 최대한 감정을 참기 위해, 표정을 들키지 않기 위해 뒤를 돌았다.
“…그렇군요.”
짧게 대답한 뒤 급하게 가방을 챙겼다.
레크리드는 등을 돌린 나에게 입을 열었다.
“그때 봐요!”
그의 목소리는 마치 나를 향해 외치는 것 같았고, 그때를 기다린다는 것처럼 들렸다.
나는 고개를 돌려 잠깐 뒤를 돌아본 다음, 가게를 나섰다.
* * *
시장에서 나와 학교로 돌아가던 중이었다.
길거리의 분위기가 평소와 달랐다.
로브에 스카프로 꽁꽁 싸맸다고 하지만 예전처럼 나를 쫓는 사람들이 붙을 법한데, 그러지 않았다.
며칠 전에 나왔을 때도 그렇고, 오늘도 그렇고.
이전의 암살자가 했던 말과는 달라.
아카데미 앞에서 죽치고 기다린다는 그의 말과는 달리 내가 시장에 갔다 올 때까지 나를 쫓는 그 누구도 발견할 수 없었다.
무슨 변화가 생긴 건가?
살인 표적 퀘스트가 진행되고 있기에 나를 살해하려는 사람은 존재한다.
아직도 나를 죽이려는 사람이 나타나질 않으니 답답한 노릇이었다.
차라리 얼굴을 알면 좋을 텐데.
누군지 당최 감도 오지 않으니 어떻게 대비를 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그렇게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아카데미 정문에 다다랐을 때였다.
“에르셈프?”
에르셈프와 딱 마주치고 말았다.
미간이 얕게 좁혀진 것이 무언가 맘에 안 드는 게 있어 보이는 사람 같았다.
무슨 일이 있는 건가?
그때, 에르셈프가 말을 걸었다.
“어딜 다녀오는 길이지?”
왠지 모르게 오늘따라 더 날카로운 목소리군.
분명 누군가가 에르셈프의 심기를 건든 게 분명해.
“시장에 다녀오는 길이었어요.”
내가 가방을 가리키며 말했다.
“…….”
“무슨 일이 있나요?”
궁금해진 내가 묻자, 에르셈프가 잠시 뜸을 들이더니 입을 열었다.
“너는 내가 왕자라는 호칭을 왜 싫어하는지 알고 있나?”
“…그게 무슨?”
갑자기 왜 이런 이야기를 하는 거지?
왜 싫어하냐니, 왕자로 태어난 걸 싫어한다는 설정이었잖아.
내가 반문하자 에르셈프가 말을 이었다.
“…내 태생이 수치스럽기 때문이야. 마음 같아선 이 거지 같은 호칭을 버리고 떠나 버리고 싶거든.”
시선을 내리깐 그는 약간은 우울해 보였다.
“갑자기 왜 이런 말씀을 하시는지요?”
의아한 얼굴로 내가 묻자, 에르셈프의 입에선 뜻밖의 이름이 나왔다.
“이블린이라는 자가 묻더군. 왕자라는 호칭을 왜 싫어하냐고.”
그제야 나는 또 한 번 머리를 칠 수밖에 없었다.
옥상에서 대화를 할 당시 내가 에르셈프에 대해 말한 것이 떠올랐다.
“듣기 싫은가 봐. 내가 말할 때마다 표정이 안 좋더라고.”
그 말을 그대로 에르셈프에게 전한 거야?
도대체 왜?
그저 순수하게 이야깃거리를 꺼낸 건가?
아니면…….
나와 에르셈프 사이를 이간질이라도 하고 싶었던 건가?
생각할수록 이블린의 속마음을 알 수가 없었다.
식당에서 하던 말부터 잰퓨어와 에르셈프 앞에서 한 말까지.
나를 팔아서 남자들이랑 친해지고 싶기라도 한 건가?
“죄송합니다. 그런 의도로 말을 한 게 아니었는데 제가 실수를 한 것 같습니다.”
일단 고개를 숙여 사과를 했다.
에르셈프에게는 이 사안이 아주 예민한 문제일 거다. 이걸 아무렇지 않게 거론하고 건든 것이 그에게는 충분히 상처가 될 수 있었다.
“…아니, 사과를 들으려 한 말이 아니야. 그저.”
“……?”
“이블린이라는 자를 조심하라고 말하고 싶었어.”
그는 예상외의 대답을 내놓았다.
이블린을 조심하라니.
“이만 가지.”
에르셈프는 그 말을 끝으로 자리에서 사라졌다.
나는 그 자리에 서서 잠시 동안 움직일 수가 없었다.
* * *
다음 날이 되어도 찝찝한 마음은 이어졌고, 나는 그 상태로 정령술과 수업에 가야만 했다.
그리고 잰퓨어를 마주해야만 했는데, 그는 나에게 인사를 할 뿐, 평소처럼 장난을 걸어오진 않았다.
“안녕, 루나.”
손을 흔들며 지나가는 그는 힘이 아주 없어 보였다.
내가 대꾸를 하자 그는 나를 지나쳐 갔고, 자리 또한 내 옆자리가 아닌 다른 자리에 앉았다.
그러자 뒤에선 선배들이 떠드는 소리가 들려왔다.
“쟤네 싸웠나 봐.”
“이래서 같은 과에서 사귀면 안 된다니까?”
나는 애써 무시하며 수업이 시작되길 기다렸다.
곧이어 펠리엇이 들어왔고, 출석을 부르기 시작했다.
“루이아나 윌리어스.”
그는 내 이름을 호명한 뒤 내가 대답하자 가볍게 미소를 지어 주었다.
그때 잰퓨어와 내가 친구 관계가 끊기지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잰퓨어는 속도 없는 걸까.
그렇게까지 말했는데 아직도 나와 친구를 유지하고 싶은 걸 보면.
날 정말 많이 좋아하는 것 같았다.
뒷자리를 힐끗 보자 턱을 괸 채 수업을 듣고 있는 잰퓨어의 모습이 보였다.
잰퓨어도 수업은 뒷전에 두고 다른 생각에 잠겨 있는 것 같았다.
괜히 기분이 찝찝했다.
이블린 때문에도 마음이 뒤숭숭한데, 잰퓨어 마저 신경 써야 한다니.
그리고 난 수업이 끝나고 잰퓨어에게 말을 걸기로 마음먹었다.
그래, 어제는 내가 말이 심했지.
사과하는 거야.
이런 사이로 지내고 싶진 않았다.
앞으로도 같은 반에서 계속 얼굴을 마주할 텐데 이건 남보다도 못한 사이 같았다.
지루한 수업이 끝나고 나는 인파 속에서 잰퓨어를 찾으며 밖으로 나가고 있었다.
그때, 누군가가 내 등을 톡톡 두드렸다.
“?”
내가 뒤를 돌아보자 처음 보는 남자가 나에게 쪽지를 건네고 있었다.
같은 정령술과 선배인 것 같았다.
“너한테 전해 달래.”
난 작게 고개를 끄덕이고는 쪽지를 손에 쥐었다.
나보다 먼저 나간 잰퓨어가 사라지기 전에 붙잡아야만 했다.
어디로 간 거지?!
사람들이 우르르 건물 밖으로 나왔고, 그제야 나는 잰퓨어를 찾을 수 있었다.
천천히 그에게 다가갔다.
“잠깐 이야기 좀 해.”
“응, 그런데.”
“?”
“아까 받은 건 뭐야? 어떤 남자애한테 쪽지 같은 걸 받던데.”
잰퓨어가 묻자,
“뭐가?”
나도 모르게 말이 툭 나왔다.
잰퓨어와 대화할 생각에 정신이 팔려 쪽지는 안중에도 없었다.
안 그래도 지금 얼굴 마주 보는 것도 껄끄러워 죽겠는데 다른 것에 신경 쓸 여유가 없었기 때문이다.
잰퓨어와 빨리 화해를 하려는 생각에 마음이 급했다.
“아, 별거 아니야.”
내가 짧게 대답하자 잰퓨어가 작게 코웃음을 쳤다.
지금 무슨 반응이지?
“왜 말을 못 해?”
“별거 아니라니까?”
내가 반복해서 대답하자 잰퓨어는 한쪽 눈을 찌푸리며 반문했다.
“별거 아니면 말할 수 있잖아?”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니라.”
내가 침착한 목소리로 말하려 했는데, 그의 목소리는 점점 싸늘하게 식어 갔다.
“찔려서 그래?”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찔리는 게 없다면 말할 수 있을 텐데.”
“자꾸 찔리긴 내가 어디에 뭘 찔려. 말장난 그만해.”
그러자 잰퓨어는 평소와 달리 싸늘한 시선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넌 내가 하는 게 다 장난 같아?”
“그게 무슨…….”
당황스러웠다.
왜 갑자기 이렇게 흘러가는데?
“됐다. 나는 할 이야기 없으니까 가 볼게.”
그러고는 나를 휙 지나치더니 언덕을 내려갔다.
잰퓨어는 여전히 나에게 기분이 상해 있는 모양이었다.
사이좋게 지낼 순 없어도 적어도 생사를 같이 한 친구로서 평범하게는 지내고 싶었다.
그런데 이건 평범은커녕 날 아예 거부하고 있잖아.
한 손으로 이마를 짚었다.
어제의 에르셈프부터 잰퓨어까지.
나에 대해 단단히 오해를 하고 있는 것 같았다.
아니, 이까짓 쪽지가 뭐라고. 나는 꼬깃꼬깃 접힌 쪽지를 펴 보았다.
수업이 끝나고 옥상으로 와 줘.
“왜 굳이 쪽지로…….”
남의 글씨를 볼 일이 없었기 때문에, 누가 쓴 것인지는 알 수 없었다.
그러나 옥상이라면 이블린밖에 없지.
나는 의아한 마음과 함께 항상 이블린과 식사를 하던 옥상으로 향했다.
11층에 올라 옥상을 향하고 있는데, 아주 좋은 향기가 나는 것이 느껴졌다.
본관의 옥상은 사람이 잘 오지 않아 나와 이블린이 전세를 내고 있다고 해도 무방할 정도였다.
옥상에 도착해 문을 열고 들어갔다.
끼익-
“이블린.”
텅 빈 공간이 나를 맞이했다.
아무도 보이지 않는 것이, 아직 오지 않은 모양이었다.
나는 항상 이블린과 밥을 먹던 옥상 난간 쪽으로 향했다.
밥 생각이 없어 음식을 따로 사 오진 않았다.
그저 이블린과 이야기나 나눌 생각이었다.
휘잉.
옥상이라 바람이 세게 불었다.
늦여름의 시원한 바람을 받으며 나는 난간에 기대서서는 하늘을 바라보고 있었다.
“날씨 참 좋다.”
착잡한 내 기분과는 달리 하늘은 참 예뻤다.
위에서 내려다보자 학생들이 다들 집으로 가는 것이 보였다.
순식간에 웅성거리던 건물 앞이 고요해졌고, 나는 그저 바람을 느끼고 있을 뿐이었다.
그리고 나는 전혀 나의 신변이라든가, 안전에 대해 걱정하지 않고 있었다.
이런 곳에서 무슨 일이 일어날 것 같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
그러다 문득 이런 생각이 뇌리를 스쳤다.
이런 곳에 내가 혼자 있을 경우, 살인자는 얼마나 기뻐할까?
소리 소문도 없이 나를 처치했다는 생각에 쾌재를 부를 것이다.
그리고, 우려하던 일은 단숨에 일어났다.
휙.
누군가 내 머리에 검은 천을 뒤집어씌웠다.
“!!”
순식간에 시야가 새까맣게 차단되었고, 동시에 누군가가 내 몸을 안쪽으로 돌렸다.
그러고는 내 목덜미를 잡은 채, 난간 밖으로 밀어 넣었다.
“누, 누구, 읍!”
목을 조이며 난간 밖으로 내 몸을 민 누군가는 그대로, 나를 떨어뜨려 버렸다.
“허억!”
단말마의 비명과 함께 나는 어느새 힘없이 떨어지고 있었다.
정신을 차린 나는 샐러맨더를 불러 무엇이라도 하려 했지만 내 몸에 넘치던 마나가 하나도 느껴지지 않았다.
게다가 너무 빠른 속도로 떨어지느라 샐라임과 대화를 나눌 시간도 없었다.
쿵!
그렇게 나는 옥상에서 추락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