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다섯명은 너무 많잖아요 (56)화 (56/156)

55화. 오해(1)

“왜 잰퓨어에게 말해 주지 않는 거야……?”

순식간에 정적이 흘렀다.

우릴 둘러싼 공기가 확 얼어붙었다.

그리 말이 많던 잰퓨어도 얼굴을 굳힌 채 입을 꾹 다물고 있었다.

“지금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내가 언제 그런 말을.”

당황스러운 목소리로 이블린에게 말했다.

“며칠 전에 말했잖아, 옥상에서. 아니야?”

“…….”

그러자 이블린이 갑자기 ‘헉!’ 하는 소리와 함께 손으로 자신의 입을 가렸다.

“비, 비밀이었어? 난 그것도 모르고 그만…….”

놀란 표정으로 어쩔 줄을 몰라 하는 것이다.

나는 그 상태의 이블린을 끌고 본관 밖으로 나왔다.

그리고 건물 뒤로 가서 입을 열었다.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이블린. 다시 말하지만 나는 저 셋한테 아무런 관심도 없어. 네가 오해하는 거라고.”

내가 최대한 침착한 목소리로 말했다.

이블린이 오해를 해도 단단히 하고 있는 것 같으니, 풀어 줘야겠다는 마음뿐이었다.

“미안해, 루나. 나는 그저 잰퓨어가 안쓰럽게 느껴져서…….”

“…이런.”

무어라고 설명해야 할지 모르겠군,

이 셋이 나를 좋아하는 이유가 게임 속 남주인공이어서 그런 것이라고 말할 수도 없고.

내가 저 셋의 호감도를 올리면 결국 죽는다는 말을 할 수도 없고.

그래서 아무리 다가와도 나는 밀어 낼 수밖에 없다고 말을 할 수도 없고.

참 답답하다.

“아무튼, 이블린. 나는 저 셋과 엮이고 싶은 생각이 전혀 없으니까 그런 말은 하지 말아 줘. 괜히 오해를 살 수 있잖아.”

그러자 이블린이 고개를 푹 숙이며 발을 꼼지락거렸다.

“미안해……. 다음부턴 입조심할게.”

진심을 담아 사과하는 모습에 나는 괜히 내가 미안해지는 느낌이 들었다.

아무런 악의 없이 한 행동일 텐데.

단지, 좀 눈치가 없을 뿐.

“이만 가자.”

풀이 죽어 있는 이블린을 이끌었다.

그렇게 건물 앞으로 나갔을 때는, 잰퓨어가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나는 잰퓨어를 못 본 척 이블린과 정문 쪽을 향해 걸으려고 했다.

그런데, 잰퓨어의 목소리가 나를 붙잡았다.

“루나, 기다려.”

이블린이 던진 한마디에 이렇게 파장이 커지다니.

나는 뒤를 돌아 잰퓨어를 마주했다.

“왜?”

“이야기 좀 해.”

그는 평소와는 다른 얼굴을 하고 있었다.

무표정한 얼굴이, 마치 다른 사람처럼 보였다.

“지금 해.”

단호하게 말하자 옆에 있던 이블린이 놀라는 것이 느껴졌다.

어떻게 이리 퉁명스럽게 말할 수 있나 싶겠지.

이블린, 목숨이 걸려 있다면 더한 짓도 가능하단다.

“다리로 가자. 둘이 이야기하고 싶어.”

잰퓨어의 얼굴은 담담했다.

그저 장난기가 빠진 얼굴로 나와 할 이야기가 있는 사람처럼 보일 뿐이었다.

“…….”

나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고, 그와 같이 다리로 향했다.

이참에 입장 정리를 하는 편도 나쁘지 않을 테니까.

* * *

잰퓨어와 처음 만났던 다리로 향했다.

여전히 사람은 다니지 않았고, 우리만이 이곳에 존재했다.

그는 도착하자마자 본론을 꺼냈다.

“좋아한다던 사람이 세이먼이었어?”

“…!”

그러고 보니 예전에 내가 잰퓨어에게 좋아하는 사람이 있다고 털어놓은 것이 생각났다.

당연히 거짓말이라 나는 금방 잊어버렸는데, 잰퓨어 입장에선 아니었던 거다.

그때는 잰퓨어와 거리를 두기 위해 행했던 대책이었는데 그게 이렇게 이어질 줄이야.

“아니야. 이블린이 오해한 거야. 난 좋아하는 사람 없다고.”

“하지만 그땐 있다고 했잖아. 그것도 엄청 많이 좋아한다고.”

“…….”

할 수 있는 말이 없었다.

예전에 내가 뱉은 말이 있으니 잰퓨어는 당연히 그렇게 믿고 있을 테고.

이제 와서 거짓말이었다고 부정을 하자니 잰퓨어와 친구 관계가 끊어질까 봐 무서웠다.

“루나, 말해 줘. 세이먼을 좋아하는 거야?”

[호감도가 5% 상승했습니다!]

잰퓨어는 집요하게 물어 왔다.

경쟁 심리인 건지, 호감도마저 오르고 말았다.

그는 어떻게든 이 대답을 듣고 싶어 하는 것 같았다.

“그렇다면 어쩔 건데?”

“그건…….”

잰퓨어가 말을 흐렸다.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걸까.

“그건 아무래도 상관없다고 말해 주려 했어.”

“…뭐?”

“그 정도로 나한테 자신이 없진 않거든.”

그는 숙였던 고개를 들며 내 눈을 마주했다.

“상관이 없다니, 나를 좋아하기라도 하겠다는 거야?”

“응. 지금까지 그래 왔고, 앞으로도 그럴 거고.”

나는 재빨리 잰퓨어의 호감도를 확인했다.

+

이름: 잰퓨어 이브

나이: 17

직위: 엔리에타 황립 아카데미의 학생

호감도: 31%

+

남주인공의 태도는 30%를 기점으로 변하기 시작한다.

그러니 지금처럼 물러서지 않고 적극적으로 들이대는 거다.

게다가 잰퓨어의 호감도는 당최 감을 잡기가 어려웠다.

호감도가 한 자릿수일 때도 나에게 연인이 될 사람이라느니, 온갖 추파를 던졌던 사람이기 때문에.

지금 잰퓨어의 마음은 대체 어떤 상태일까?

“좋아하지 마.”

내가 짧게 내뱉었다.

그러자 잰퓨어가 한쪽 눈을 찌푸리며 나에게 되물었다.

“무슨 소리야?”

“좋아하지 말라고. 난 너한테 아무런 관심도 없으니까.”

나는 눈을 딱 감고 말했다.

이렇게 죄 없는 사람한테 모질게 굴어야 한다니.

게다가 항상 나를 위해 주고 구해 주려고 노력하던 사람이었는데.

그의 얼굴을 쳐다보는 게 힘들었다.

“상관없는데?”

“……?”

“네가 나한테 관심이 없어도 괜찮아. 난 그저 널 볼 수 있으면 좋으니까. 이 학교에 있을 때까지는 네 옆에 붙어 있을 생각이야. 그러니까 거부하지 마.”

“그걸 말이라고…….”

“뭐라 말하든 소용없을 거야. 난 한번 결정한 건 안 바꾸는 사람이니까.”

“넌 자존심도 없어?”

“그까짓게 뭐가 중요한데? 자존심 때문에 너 못 보면 누가 책임져 준대?”

“너 좋아하는 애들 수두룩하잖아. 왜 거기서 안 찾고 나한테 와서 이러는 거냐고!”

내가 약간 언성을 높이자 잰퓨어가 당황한 것이 느껴졌다.

그렇게까지 내가 자신을 싫어할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겠지.

“너… 내가 그렇게 싫어?”

잰퓨어의 목소리가 떨렸다.

관심이 없는 것과 싫어하는 건 엄연히 다르다.

대개 사람들은 싫어함이 아니라 무관심이 사랑의 반대말이라고 하지만,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무관심은 내가 자존심만 내려놓는다면 상대와 가까이 있을 수 있었다.

하지만 싫어하는 건 상대를 놓아 줘야만 했다.

상대를 진정으로 사랑한다면 그래야 하는 게 맞는 거니까.

그때, 샐라임이 말을 걸었다.

“루나, 친구 관계 깨져도 괜찮아?”

그렇다.

나는 이 규칙에 속박되어 있었다.

다시 한번 그냥 펠리엇과 좋지 않은 관계가 될까, 생각해 보았지만 그건 싫었다.

앞으로 비무 대회가 열리면서 계속해서 마주해야 할 텐데, 학교생활이 꼬이는 건 사양이었다.

나는 흥분을 가라앉히고 최대한 목소리를 가다듬으며 말했다.

“우리 친구로 지내자. 그게 서로에게도 좋잖아? 넌 상처만 받을 뿐이야…….”

그러자 잰퓨어가 인상을 확 구겼다.

평소의 선한 인상이 순식간에 날카롭게 변하자 당황스러웠다.

“넌 날 정말 비참하게 하는구나.”

떨리는 목소리가 느껴졌다.

참고 참았던 말 같았다.

싸늘하게 식은 시선은 나를 향했고, 나는 그 어떤 대답도 할 수 없었다.

그는 날 탓하지 않았다.

왜 자신의 감정을 부정하냐고, 왜 모른 척하냐고 힐난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는 잠시 말이 없다가 짧게 내뱉었다.

“가 볼게.”

그러고는 등을 돌려 발걸음을 옮겼다.

“…….”

나 또한 기분이 착잡했다.

단순히 살기 위해서 잰퓨어를 밀어 내는 게 쉬울 것이라고 생각한다면 오산이었다.

나도 사람이었다.

인간적인 마음도 있고, 정도 있었다.

임무를 나갔을 때도, 항상 좋은 자리와 좋은 물건들을 먼저 챙겨 주고, 내가 위험에 빠질까 봐 매번 걱정을 했던 사람이다.

“괜찮아. 네가 할 수 있는 최선의 선택이었어.”

샐라임이 위로를 해 주었다.

나도 알았다.

이렇게 해야만 한다는 것을.

하지만 마음이 좋지 않은 건 어쩔 수 없는 것.

나는 최대한 이성적인 생각을 하려 노력하며 다리를 내려왔다.

* * *

오늘은 레크리드의 상점에 가는 날이었다.

벌써 며칠이 지나 약속한 날짜가 다가온 것이었다.

“너 내가 딱 지켜볼 거야. 허튼짓 하기만 해 봐.”

샐라임은 감시관처럼 나에게 엄포를 놓았다.

“걱정하지 마세요. 아무 일도 없을 테니까!”

이미 전날 샐라임은 나에게 세뇌를 시켜 주었다.

레크리드를 좋아하면 인생이 망한다…….

레크리드랑 이어지면 상사병이 걸린다…….

레크리드가 아무리 좋아도 밀어 내야 한다…….

거의 백 번은 입으로 내뱉은 것 같았다.

아무리 펜던트의 효과가 강하다고 한들 내 의지를 꺾을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렇게 나와 샐라임은 ‘매그넘 마법 상점’에 도착했다.

이번엔 다른 손님이 먼저 와 있어 레크리드가 응대를 하고 있었다.

“요새 가장 화제인 변신 물약이에요. 상대의 머리카락만 있으면 삼십 분 동안 그 사람의 모습으로 변할 수 있답니다! 파티에서 쓰기엔 최고죠.”

손님에게 물건을 설명하고 있는 모습은 소년이라고 보기엔 어려울 정도로 어른스러워 보였다.

그가 가판대에 몸을 비스듬히 기대며 계속해서 입을 열었다.

그의 얼굴은 한 손에 물약을 든 채 가리키는 것만으로도 눈에 띌 만큼 매력적이어서, 물건에 관심이 없더라도 사고 싶게 만들곤 했다.

눈꼬리를 사르륵 접으며 예쁜 웃음을 짓는 그의 모습은 마치 상대방에게 호감이라도 있는 사람처럼 보이기도 했다.

나는 고개를 휘적휘적 저으며 가판대에 올려진 물건을 찬찬히 살펴보았다.

살 만한 게 있나?

나도 아이템을 강화하면 좋을 텐데.

아주 단단해 보이는 방어구부터 손목에 끼우는 팔찌까지, 없는 물건이 없었다.

흥미롭게 물건을 보고 있는데, 레크리드가 손님을 보냈는지 나에게 다가왔다.

“오셨네요, 루이아나 씨.”

“네.”

샐라임이 세뇌를 한 탓에 레크리드의 얼굴을 보는 것이 그리 어렵지 않았다.

“정 어려우면 마귀라고 생각해 봐. 사람의 형상을 한 마귀!”

샐라임이 옆에서 중얼거렸다.

“그래서 물건을 팔 수 있을까요?”

내가 본론을 꺼냈다.

“물론이죠. 가격 책정에 대해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그는 나를 가판대 옆에 있는 작은 창고 같은 공간으로 이끌었다.

은밀한 이야기를 할 때 쓰이는 곳 같았다.

불빛이 옅어 그리 환하지 않았고, 나와 레크리드가 앉자 공간은 꽉 차 버렸다.

“가격은 이렇게 제시가 됩니다.”

그는 종이를 꺼내더니 기다란 펜으로 쓰며 나에게 설명을 해 주었다.

펜을 잡은 손가락마저 하얗고 길었다.

나는 종이를 보느라, 그의 손을 보느라 정신이 없었다.

“여기 있습니다.”

결국 펜던트와 비늘을 합쳐 70만 골드에 팔기로 한 나는 두둑한 금화를 받을 수 있었다.

[‘보고 또 보고’ 퀘스트에 성공했습니다!]

보상은 없었기에 따로 알림창이 뜨지는 않았다.

돈을 얻은 김에 아까 보던 다른 물건 몇 개도 구입했다. 비무 대회든 언제든 도움이 될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제 그걸 물어볼 차례가 되었다.

무려 샐라임이 봉인에서 빠져나올 수 있는 방법 말이다.

“레크리드, 무엇 좀 물어봐도 될까요?”

“그럼요.”

“저번에 이 칼이 심상치 않다고 했잖아요. 그게 무슨 뜻이죠?”

“아. 저 칼 말씀하시는구나?”

그러자 그가 내 허리춤을 가리키며 대답했다.

“네! 무언가 알고 있는 거죠!?”

내가 초롱초롱한 눈빛으로 물었다.

이걸 알아챈 사람은 지금까지 레크리드뿐이다.

대체 어떻게 안 거지?

“저는 마력 감지력이 뛰어나요. 칼 안에서 대단하고 아주 뜨거운 기운이 느껴졌어요.”

그의 말에 나는 빠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이 칼 안에는 정령이 봉인되어 있어요. 혹시 이 봉인을 푸는 방법에 대해 아는 게 있나요?”

그러자 레크리드가 매끈한 턱에 손가락을 대더니 잠시 말이 없었다.

과연 아는 걸까?

제발 알았으면 좋겠는데…….

매일 함께 대화를 나누는 것도 좋았지만, 이제는 샐라임이 칼에서 나왔으면, 하는 바람이었다.

실제로 모습을 드러내면 정령계로도 돌아갈 수 있고, 자신의 실력을 뽐낼 수도 있다고 했다.

그때, 생각에 잠겨 있던 레크리드는 무언가 생각이 난 듯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리고 입을 열었다.

“해제 방법을 아는 사람이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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