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4화. 친구(3)
내가 의아한 표정으로 물었다.
“누굴?”
“아, 아무래도 안 되겠지……? 학생회장님에 왕자님, 그리고 타 학교 학생이니까…….”
아. 셋을 다 소개해 달라는 말이었구나.
나는 적잖게 당황스러웠다.
내가 무슨 중개인도 아니고 그들을 소개해 줄 권한이 있는 사람도 아니었다.
친해지고 싶으면 그냥 먼저 다가가면 될 텐데.
에르셈프는 왕자님이니 다가가기 힘들다 쳐도, 나머지는 아마 환하게 웃으면서 반겨 줄 사람들일 거다.
내가 한동안 말이 없자 이블린이 급하게 말을 덧붙였다.
“그, 그냥 같이 지나가다가 마주치면 인사라도 시켜 달라는 말이었어! 오해하지 마…….”
“아. 당연하지! 바로 소개해 줄게.”
후.
다행이다.
곤란한 걸 요구하지 않아서.
몇 없는 친구인데, 그녀를 실망시키고 싶진 않았기 때문이다.
“그럼 이만 일어날까?”
이블린은 음식을 다 먹었는지 이제 슬슬 가 봐야겠다고 했다.
“응. 다음에 또 보자.”
그녀를 보내고 나는 옥상에 남았다.
나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내가 예민한 건가?
이상하게 기분이 묘했다.
나보다는 남자들에 관심이 있는 느낌이랄까.
하지만 이해할 법도 했다.
이 나이 또래 여자애들은 잘생긴 남자들을 팬클럽을 형성하듯이 좋아하는 경향이 있으니까…….
그만큼 많이 좋아하는 건가.
그래서 나한테 누굴 좋아하는 거냐고 꼬치꼬치 물은 거일 수도 있어.
겹치는 게 싫을 수 있으니까.
그럼 에르셈프나 잰퓨어 중에 좋아하는 사람이 있는 건가?
“아휴, 모르겠다.”
전생의 나이는 스물두 살이었다.
열여섯 살의 나이로 돌아가려고 해도 쉽사리 잘되지 않는 것이었다.
그만 생각하자고 마음먹고 나는 옥상을 내려왔다.
* * *
그 후로 이블린과 마주치는 날이 눈에 띄게 많아졌다.
우연이라고 하기엔 그 전과 너무 다르다…….
나랑 친해지고 싶은 건가?
“루나! 어디 가는 중이야?”
“수업 가고 있었어. 너는?”
“난 이제 다음 수업 가려고. 오늘 끝나고 뭐 해?”
이렇게 그녀가 먼저 약속을 잡곤 했다.
정령술과 강의동으로 가는 길에 서서 그렇게 이야기를 하고 있는데,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루나!”
뒤를 돌아보니 잰퓨어가 옅은 갈색 머리를 흩날리며 걸어오고 있었다.
그는 빙긋 미소를 지으며 여유롭게 걸어오고 있었는데, 옆을 보니 이블린이 그에게 시선을 고정하고 있었다.
잰퓨어는 성큼성큼 걸어와 내 앞에 섰고, 손바닥을 내 머리 위에 툭 올려놓았다.
“뭐 하는 거야.”
“오늘따라 기분이 좋던데, 널 보는 날이라서 그랬나 봐.”
“쓸데없는 소리.”
“정말인데, 이렇게 딱 만났잖아?”
내 머리에 올려놓은 그의 손을 내가 억지로 떼어 내며 한마디를 하려고 할 때였다.
옆에 있는 이블린이 여전히 수줍은 표정으로 내 뒤에 숨어 있는 것이다.
아, 지금 인사를 시켜 주면 되겠구나.
내가 잰퓨어를 보며 이블린을 가리켰다.
“잰퓨어, 내 친구야. 이름은 이블린.”
그러자 잰퓨어가 특유의 입꼬리를 당겨 웃는 미소를 지으며 이블린 앞에 섰다.
“안녕? 루나 친구구나. 반가워.”
그러고 가볍게 손을 흔들자 이블린이 고개를 들어 슬쩍 보더니,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말했다.
“아, 안녕하세요…….”
“수줍음이 많은 친구구나. 난 잰퓨어야.”
“네에…….”
그녀는 그 말을 끝으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이만 갈까? 늦겠다구.”
잰퓨어는 나에게 어서 빨리 가자고 말하며 팔을 잡고 이끌었고, 나는 어쩔 수 없이 이블린에게 인사를 했다.
“나 먼저 가 볼게, 이블린. 안녕!”
급하게 인사를 하자 이블린이 살짝 눈을 흘기는 것이 보였다.
잰퓨어랑 이야기를 더 하고 싶었나?
좀 더 붙잡아 놓을 걸 그랬나.
하여간 낯을 많이 가린다니까.
다음번에 보면 억지로 이야기라도 시켜 줘야겠다는 생각을 하며,
“좀 놓으라고!”
잰퓨어의 손길에 이끌려 갔다.
* * *
비무 대회 준비를 위해 임무 활동이 잠시 중단되었고, 이론 수업을 위주로 수업이 진행되었다.
지루한 수업이 끝나고, 다들 강의실에서 나오고 있던 참이었다.
“그러니까 어제 내가 신발을 하나 샀는데…….”
“끝나고 케이크 먹으러 갈까?”
웅성거리는 사람들 속에 익숙한 사람이 정령술과 강의동 앞에서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었다.
세이먼……?
왜 여기에 있는 거지.
그는 나를 발견하자마자 한걸음에 달려와 내 앞에 섰다.
“루나, 오랜만이에요.”
그와 마지막 만남은 학생회실에서였다.
나에게 온갖 집착을 퍼붓는 말을 하고는 홀연히 사라진 날.
내가 그의 집에 찾아가려다가 암살자를 만나고, 에르셈프와 같은 방에서 잤다는 사실은 꿈에도 모르겠지.
아무튼, 그때 어색하게 끝났기 때문에 여전히 나는 세이먼이 편하지 않았다.
“뭐죠?”
내가 짧게 대답했고, 곧이어 뒤에서 잰퓨어가 우리에게 다가왔다.
“세이먼 맞죠? 이렇게 보네요.”
예전에 식당에서의 만남 이후로 처음일 테다.
잰퓨어가 인사하자 세이먼이 친절한 미소로 받아 주었다.
다시 봐도 저 미소는 정말 진짜 같아서 소름이 돋는단 말이지.
어떻게 사람을 감쪽같이 속일 수 있을까.
“음…….”
하지만 곧이어 세이먼은 잰퓨어가 계속 떠나지 않고 함께 있자 난처한 듯한 표정을 지었다.
아마 나와 둘이서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을 테지.
“무슨 일이에요, 세이먼.”
내가 한 번 더 묻자, 세이먼이 어쩔 수 없다는 얼굴로 대답했다.
“밥이라도 먹으러 가자고 하려 했어요.”
나와 어색함을 풀고 싶은 걸까?
그때, 잰퓨어가 끼어들며 대신 대답을 해 주었다.
“좋은데요. 같이 가요. 셋이서.”
잰퓨어는 나와 둘이서 밥을 먹든, 셋이서 밥을 먹든 전혀 상관하지 않는 것 같았다.
그에게는 알 수 없는 여유가 있었다.
같은 과에 같은 팀이라는 게 그에게 여유를 주는 걸까.
나랑 함께하는 거면 뭐든 좋아하는 것 같았다.
“네. 그러죠.”
세이먼은 이내 동의를 했고, 나는 어쩔 수 없이 껴서 따라가고 있었다.
식당 앞에 도착하면 나는 홀랑 빠져야지.
그렇게 언덕을 내려오며 본관을 향해 걸어가고 있었는데 또 한 명의 익숙한 인영이 보였다.
오늘 무슨 날이야?
왜 이렇게 무더기로 만나는 거냐고!
에르셈프가 반대쪽 언덕에서 내려오고 있는 것이 보였다.
귀신같이 우리를 포착한 그는 금세 다가왔다.
“어디 가는 거지?”
“밥을 먹으러 가고 있었답니다, 왕자님.”
“…….”
하아.
그렇게 우리 넷은 또 한 번의 저녁 식사를 하게 되었다.
“요새 루나랑 많이 친해진 것 같던데, 잰퓨어.”
에르셈프가 잰퓨어에게 말을 걸었다.
“매일같이 붙어 있으니 정이 들 수밖에 없는 것이지요.”
세이먼은 옆에서 콧방귀를 뀌고 있었다. 마치 비교도 안 되는 상대를 보는 것처럼.
세이먼은 오히려 사람들 앞에 있을 때는 나에게 크게 관심을 표현하지 않았다.
자신의 마음을 감추고 싶은 걸까?
반면 에르셈프는 나와 한방에서 잔 이후로 나를 쳐다보는 눈빛이 달라졌다.
무언가… 욕망이 들끓는 눈동자랄까.
금방이라도 나를 사로잡아 안고 싶다는 분위기를 풍겼다.
물론 겉으로는 평소처럼 냉담하게 굴었지만.
잰퓨어는… 여전히 여유가 넘치는 태도였고, 항상 구렁이가 담 넘어가듯이 내 말을 받아치며 은근슬쩍 스킨십을 하곤 했다.
나는 수프를 떠먹으며 그들을 관찰했다.
눈이 호강하는구나, 호강해.
“루나, 끝나고 나와 노을을 보러 가는 건 어떤가? 데이트는 아니니 오해하지 말도록.”
그때 에르셈프가 나에게 물었다.
파격적인 질문에 나는 잠시 대답을 하지 못했다.
“네…네?”
당황한 틈을 타 세이먼이 대신 차분하게 입을 열었다.
“루나는 저와 함께 할 이야기가 있어서요.”
거기에 잰퓨어가 한마디 더 얹었다.
“어, 나랑 같이 기숙사 들어가려 했는데. 아니었어, 루나?”
“…….”
난 아무것도 한다고 한 적 없다고요.
“할 말이 있으시면 지금 하세요.”
셋을 향해 말했다.
단둘이 있을 때 하지 말고 지금 이야기하란 말이야.
효율성 있게 살자고, 다들!
그때였다.
내가 세 명의 남자들 사이에 갇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 하고 있는 상황에서,
또 한 명의 나를 찾는 사람이 나타났다.
“이블린?”
그녀는 친구들과 함께 있었는데, 저 멀리서 나를 발견하자마자 나에게 달려왔다.
“루나! 찾고 있었어. 같이 밥 먹자고 했잖아.”
“미안해. 어쩌다 보니 끌려와서……. 같이 먹을래?”
그러자 이블린이 테이블에 앉아 있는 세이먼, 에르셈프, 잰퓨어를 차례대로 훑어보았다.
“그래도 돼……?”
“당연하지. 어서 앉아.”
이블린은 미트파이를 사서는 세이먼 옆에 앉았다.
긴장을 했는지 행동이 부자연스러웠다.
“제 친구예요.”
내가 소개했고, 반응은 다들 상이했다.
“학생회장 세이먼 유리츠입니다.”
“아까도 봤었지? 반가워.”
“…….”
세이먼은 친절한 목소리였지만 사무적인 말투를 사용했고, 잰퓨어는 형식상 반응했으며, 에르셈프는 아예 대꾸도 하지 않았다.
“이블린이에요, 루나 친구인데 잘 부탁드려요…….”
그녀는 기어 들어가는 목소리로 말을 했다.
세이먼만이 미소로 받아 주었다.
후.
내가 이래서 소개해 주기 싫었는데.
다들 사회성이 없잖아, 사회성이.
하지만 이블린은 너무나도 만족스러운 듯한 표정을 지으며 파이를 우물우물 먹고 있었다.
그때 잰퓨어가 물었다.
“루나, 그래서 끝나고 뭐 할 거야?”
“……?”
지금 셋 중에서 하나를 고르라는 건가?
난 그냥 샐라임과 쉬고 싶은데…….
지금도 밥을 먹는 것뿐인데도 진을 팍팍 쓰고 있었다.
그냥 침대에 누워 샐라임과 시시콜콜한 대화를 나누고 싶었다.
“난 기숙사에 들어가려고 하는데.”
그러자 잰퓨어가 코웃음이 섞인 웃음을 지으며 대답했다.
“역시, 루나는 날 선택해 주었어.”
괜히 오버하며 행복하다는 제스처를 취하자 에르셈프와 세이먼의 표정이 금세 찌그러졌다.
그런데, 그때 찬물을 끼얹은 건 뜻밖의 사람이었다.
“…그래 봤자 소용없을 텐데.”
이블린이 혼자서 중얼거린 것이다.
“?”
다들 얼굴에 물음표를 띄우며 이블린을 쳐다봤지만 그녀는 눈을 동그랗게 뜨며,
“네?”
하고 반문했다.
“지금 뭐라고…….”
잰퓨어가 묻자 그녀는 눈썹을 늘어뜨리며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아, 아무 말도 안 했어요.”
다들 고개를 갸우뚱거렸지만 이블린의 순수한 얼굴에 의문을 넣고 싶진 않은 것 같았다.
그녀는 괜스레 멋쩍은 미소를 지었다.
저녁 식사가 끝나자 이블린이 나에게 다가와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나 때문에 불편했던 건 아니지……?”
내가 손사래를 쳤다.
“절대 아니야! 원래 성격이 다들 저래.”
“헤헤, 다행이다.”
그녀는 그제야 굳었던 얼굴을 풀며 웃었다.
“루나! 어서 가자.”
쓰레기를 버리러 갔던 잰퓨어가 다가와 나를 이끌었고, 나는 이블린을 챙겼다.
“가는 길까지 같이 가자.”
“응. 좋아.”
나는 이상하게 묘한 기류를 느꼈지만 애써 무시했다.
그저 기분 탓일 가능성이 컸기 때문이다.
하지만, 우려하던 일은 다음 날 바로 일어났다.
교무실에 일이 있어, 본관에 갔다가 내려오고 있던 참이었다.
일 층에서 우연히도 잰퓨어와 함께 있는 이블린을 볼 수 있었다.
벌써 말을 튼 건가?
서로 시시덕대며 웃고 있는 것이 많이 친해졌다는 느낌을 풍겼다.
하루 만에 금세 친해졌네.
나는 그들에게 다가갔다.
“어, 루나! 어디 갔다 오는 길이야?”
나를 발견한 잰퓨어가 나에게 물었다.
“임무 보고 때문에 교무실에 갔었어.”
“그런 일이 있으면 나랑 같이 가지. 난 언제나 대기 중이라고.”
잰퓨어가 평소와 같이 나에게 장난을 걸었다.
나도 평소처럼 짧게 대꾸하려 했을 때였다.
옆에서 이블린이 의아한 표정을 지은 채 나와 잰퓨어를 번갈아 쳐다보고 있는 것이다.
“……?”
내가 이블린을 쳐다보자 그녀는 크게 뜬 눈을 굴리더니, 이내 입을 열었다.
“루나, 왜 말하지 않는 거야?”
무엇을 말하는 거지?
나는 고개를 갸우뚱하며 물었다.
“무얼?”
그러자 이블린이 한쪽 눈썹을 찡그리며 말했다.
“넌 세이먼이 가장 좋다고 했잖아.”
“……?”
도대체 왜 그러냐는 듯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