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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섯명은 너무 많잖아요 (54)화 (54/156)
  • 53화. 친구(2)

    이럴 수가. 이 잘생긴 남자는 뭐지?

    잘생긴 것뿐만 아니다. 그를 둘러싼 공기가 순식간에 달라졌다.

    빛이 나는 것 같기도 했고, 오묘한 분위기를 풍기는 것 같기도 했다.

    칠흑같이 검은 눈동자는 보기만 해도 빠져들 것 같았으며, 헤어 나오고 싶지 않았다.

    뭐야, 나 지금 반한 거야?

    “레…크리드.”

    내가 나지막이 부르자 그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제 이름을 아시는군요?”

    헉, 맞다.

    레크리드는 나에게 이름을 알려 준 적이 없는데.

    나도 모르게 불러 버렸다. 하지만 이름을 너무 부르고 싶었다!

    그는 여전히 펜던트를 한 손으로 만지작거리며 나를 여유롭게 쳐다봤다.

    미쳤어, 루나! 정신 차리라고.

    얘를 좋아하면 끝장이야, 끝장!

    나는 마구 고개를 흔들었다. 그러자 레크리드가 푸흣, 하고 웃었다.

    “펜던트가 아주 아름답군요. 어떤 물건인지 알 수 있을까요?”

    아는 건지 모르는 건지 그는 순진한 얼굴을 한 채였다.

    마법 상점 주인이면 이런 것쯤은 딱 알아야 하는 거 아냐?!

    손수건으로 감싸 놨으면 이유가 있겠거니 해야 하는 거 아니냐고!

    하…….

    내가 이마를 부여잡았다.

    그를 쳐다보지 않을 때는 좀 나았다. 그런데 그와 눈이 마주치면 너무나도 사랑스러워 품에 가두고 싶었다. 강아지 같아.

    차라리 처음 보는 사람이었으면 애정도가 10% 정도 올라 봤자 그저 그런 수준일 텐데, 나는 레크리드에 대해 꽤 많이 아는 수준이었다.

    그의 말투나, 성향, 좋아하는 음식까지도. 게임을 했으니 당연히 아는 것이었다.

    그러니 그 수준에서 애정도가 10% 오르자 다른 남주인공들은 다 제칠 정도로 멋있게 느껴지는 것이다.

    “그… 그 펜던트는 지니고 있으면 상대방의 애정도가 오르는 아이템이라고 알고 있어요.”

    그러자 레크리드는 흥미로운 눈을 그리며 입꼬리를 당겼다.

    “그렇군요. 그것도 모르고 그만.”

    “…….”

    “얼굴이 붉은데, 혹시 저한테 반하신 건 아니죠?”

    그가 웃으면서 농담을 건넸다.

    아니, 자기한텐 농담일지 몰라도 나한텐 아니라고!

    심장에 화살을 맞은 것마냥 그의 얼굴이 내 마음에 꽂혔다.

    “그, 그럴 리가요!”

    내가 아닌 척 고개를 휙 돌렸다.

    그는 내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눈을 굴리며 나를 살필 뿐이었다.

    레크리드의 호감도는 현재 6%다.

    그리고 아마도 잰퓨어처럼 호감도가 낮을 때도 치고 들어오는 성격은 아닌 것 같다.

    아직은 낯을 가리고 나에 대해 약간의 호기심만 가진 정도겠지!

    하지만 레크리드 또한 남주인공 중 하나다.

    게임에서 레크리드의 주 무기는 바로 애교 많고 붙임성 좋은 성격이었다.

    마치 내가 키우는 듯한 느낌을 주는 소년 같은 매력의 캐릭터였단 말이다.

    호감도가 좀 오르게 되면 애교를 장착하고는 나에게 다가올 수 있어.

    그때… 그때가 되면 어떡하지?

    너무 사랑스러워서 미쳐 버리면 어떡하냔 말이야!

    지금도 그와 시선을 맞추고 싶은데…….

    미치겠군.

    얼른 퀘스트를 완료하고 돌아가야 해!

    내가 템트의 비늘을 꺼내 건넸다.

    그러자 그가 눈을 동그랗게 뜨며 입을 열었다.

    “굉장한 물건을 가져오셨군요.”

    “팔 수 있는 건가요……?”

    “템트의 비늘은 인간이 섭취할 경우 약 이십 분 동안 물속에서 지낼 수 있어요. 호흡도, 움직임도 모두 자유롭죠. 물론 가공을 거쳐야 하긴 하지만요.”

    그가 진지한 목소리로 말하며 비늘을 이리저리 살펴보았다.

    자칫해서 찢어지기라도 할까 걱정이 되는지 아주 조심스러운 손길이었다.

    “어쨌든, 모두 팔겠습니다.”

    “흠…….”

    그는 가만히 턱을 잡고 고민을 하더니 이내 입을 열었다.

    “며칠 뒤에 다시 와 주실 수 있을까요?”

    “네?”

    “가격 측정이 애매해서 팔려면 시간이 좀 걸릴 것 같네요. 템트의 비늘은 워낙 구하기 어려운 거라 부르는 게 값이기도 하구요.”

    그는 내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다시 한번 보자는 말을 했고, 나는 잠시 고민을…….

    “네! 올게요!”

    하지 않았다.

    지금 가면 레크리드가 보고 싶을 것 같은걸.

    머리보다 입이 빠르게 나갔고, 나는 이 판단이 맞는 건지 틀린 건지 구분하고 싶지 않았다.

    “너… 드디어 미친 거냐?”

    이 상황을 보던 샐라임이 넌지시 말을 던졌고, 나는 절로 지어지는 미소를 참으며 뒤를 돌았다.

    그때, 레크리드가 말을 걸었다.

    “성함이 어떻게 되시죠?”

    “루이아나 밀, 윌리어스입니다.”

    “루…이아나.”

    그가 내 이름을 중얼거리며 종이에다가 무언가를 작성했다.

    카운터 앞에 기대서서 늘씬한 다리를 뽐내는 그의 모습은 아름다운 청년 같았다.

    나는 그의 모습을 바라보았고, 내가 얼마나 그를 빤히 쳐다보고 있는 줄은 몰랐다.

    “하하……. 뚫어지겠어요.”

    “네?”

    “계속 보시잖아요. 왜 그런 거예요?”

    레크리드가 평소와는 달리 흥미로운 눈빛으로 나를 대했다.

    나는 당황한 나머지 손으로 입을 가렸다.

    뭐, 뭐야. 내가 그렇게 빤히 쳐다보고 있었나?

    “…….”

    내가 아무 말 하지 않자 그가 내 앞으로 성큼 다가왔다. 가게가 좁아 조금만 걸어도 내 앞에 당도할 수 있었다.

    그는 나와 같은 나이였지만 키는 머리 하나가 차이 날 정도로 키가 컸다. 그런 그가 갑자기 손을 들어 나를 향해 뻗었다.

    “나뭇잎이 붙어 있네요.”

    떼어 낸 나뭇잎을 나에게 보여 주며 그가 말했다.

    “……!”

    난 내가 미친 것 같다고 생각했다.

    그저 그가 내 머리를 향해 손을 뻗었을 뿐인데 이상한 생각이라도 한 것처럼 가슴이 두근거렸다.

    아주 살짝, 내 머리카락에 그의 손이 닿은 건데도 불구하고 마치 볼을 쓰다듬은 것처럼 얼굴이 확 붉어졌다.

    나는 붉어진 얼굴로 그를 올려다보았다.

    그는 아직은 앳된 소년티가 가득한 얼굴, 까맣게 빛이 나는 흑안, 부드러울 것만 같은 도톰한 입술을 가지고 있었다.

    내가 그의 얼굴을 훑자, 그가 맑은 눈망울을 굴렸다.

    “루이아나 씨.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하고 있는 거예요.”

    “아무것도 아니에요.”

    “흐음. 문제가 있는 것 같은데.”

    “……!”

    그가 그 말을 내뱉으며 자신의 손을 내 이마로 가져다 댔다.

    차가운 그의 손바닥이 내 얼굴에 닿자 냉기가 느껴졌다.

    “열은 없는 것 같고.”

    내 표정이 굳자 레크리드는 입꼬리를 올리며 풋, 하고 웃었다.

    뭐지, 뭔데 이렇게 여유로운 거야?

    마치 나를 가지고 노는 듯한 기분이잖아.

    원래 레크리드가 이런 성격이었던가?

    아닌데. 원래는 살랑살랑 꼬리를 흔드는 강아지 같았는데.

    “얼른 가 봐야겠어요.”

    그런데 왜 그렇게 여유롭고 속을 알 수 없는 사람 같은 거지?

    귀여운데 이런 면도 있으니 더 매력적이기도 하고?

    나는 가방을 챙기고는 모자를 푹 눌러쓰며 그에게 인사를 했다.

    “안녕히 계세요.”

    그러자 레크리드가 가볍게 손을 흔들어 주었다.

    “조만간 또 봐요. 루이아나 씨.”

    그가 내 이름을 부를 때마다 내 가슴이 얼마나 찌릿찌릿하는지 그는 절대 모를 거다.

    설마 이게 사랑이라는 건가……?

    전생에서도 진지하게 남자 친구를 사귀어 본 적이 없기에 이 이상한 마음이 낯설었다.

    나는 밖으로 나와 심호흡을 했다.

    그러자 샐라임의 언성 높은 목소리가 쩌렁쩌렁 들려왔다.

    “쟤를 좋아하는 게 아니라 펜던트 때문에 애정도가 올라간 것뿐이야, 이 멍청아!”

    샐라임의 말을 듣고 밤바람을 쐬니 정신을 좀 차릴 수 있었다.

    “헉… 제가 뭘 한 거죠?”

    뭘 하긴 뭘 해.

    그냥 남자한테 한눈에 반해서 그 앞에서 요조숙녀처럼 군 거지.

    “너 남자 잘못 만나면 인생 종 친다. 응? 알겠냐고!”

    “아, 알겠어요……. 소리 지르지 마요.”

    “…에르셈프 그 자식 때도 분위기에 휩쓸리더니, 아주 그냥 내가 너 때문에 미쳐 죽겠다.”

    나는 빠른 걸음으로 학교로 향하며 샐라임과 대화를 나눴다.

    “내 봉인을 푸는 방법도 안 물어봤잖아.”

    “맞다. 며칠 후에 또 가니까 그때 꼭 물어볼게요.”

    “지금 좋아하는 거 아니지? 쟤랑 이어지면 어떻게 죽는댔더라? 상사병?”

    “아…….”

    그의 말을 듣자 순식간에 생각이 정리가 되었다.

    그리고 떠올랐다.

    레크리드가 좋더라도, 절대 받아 주면 안 된다는 것을.

    속으로 되뇌었다.

    받아 주면 안 된다. 받아 주면 안 된다…….

    아니, 받아 주는 게 문제가 아니라 내가 넘어가게 생겼다고!

    괜찮아.

    예상치 못해서 당황한 거지 다시 보면 그렇지 않을 거야.

    나는 어깨를 푹 숙이며 작게 중얼거렸다.

    “하지만 설레는 건 어쩔 수 없네요.”

    “알아, 나도 겪어 봤,”

    “뭘요?”

    “아니야. 별말 아냐.”

    샐라임은 흠흠거리며 헛기침을 했고, 나는 의아한 얼굴을 할 뿐이었다.

    * * *

    다음 날이 밝았고, 어느새 이블린과의 약속 시간이 다가왔다.

    나는 식당에 들러 여러 가지 음식을 산 다음 본관 옥상으로 올라갔다.

    옥상은 처음인데… 학생도 올라갈 수가 있구나.

    문을 열고 옥상으로 나가자 신선한 여름 바람이 나를 맞이해 주었다.

    푸른 하늘과 가까이 있는 느낌이라 기분이 좋았다.

    “루나! 여기.”

    그때 뒤에서 이블린이 나를 불렀고, 나는 품에 한가득 음식을 든 채 그녀에게로 다가갔다.

    “뭐야.”

    나는 그녀의 앞을 보고 놀랄 수밖에 없었다.

    그녀도 나처럼 음식을 한가득 사 들고 온 것이다.

    나랑 똑같은 생각을 한 건가?!

    “나도 이렇게 많이 사 왔는데!”

    내가 품에 안은 음식들을 보여 주자 우리는 웃음이 터졌다.

    “여러 가지 사서 나눠 먹으려고 했지. 이게 요새 인기가 많대.”

    “고마워.”

    이블린이 여전히 웃으며 주스를 건넸고, 나는 사과 샌드위치를 주었다.

    “나 이거 완전 먹어 보고 싶었어!”

    “정말? 다행이다.”

    사과 샌드위치를 보며 좋아하는 이블린을 보자 괜스레 마음이 뿌듯해졌다.

    이래서 친구가 좋은 거라니까.

    솔솔 불어오는 바람을 맞으며 우리는 옥상 한편에 기대앉아 음식을 먹었다.

    이블린은 생각보다 말이 많았고, 나에게 여러 가지 질문을 했다.

    “루나, 너 남자가 많다고 소문이 자자해.”

    “응?”

    처음 듣는 소식이었다.

    내가 그런 걸로 소문이 났다고?

    그래 봤자 세이먼과 에르셈프, 잰퓨어 셋뿐인데.

    그것도 많은 편이라고 봐야 하나?

    “어떻게 꼬신 거야? 궁금해.”

    “꼬셔……?”

    “아니, 어떻게 친해진 거야?”

    흥미롭다는 듯 눈을 초롱초롱 빛내며 내 대답을 기다리는 그녀를 나는 거부할 수가 없었다.

    “아니… 그… 다 다른 이유긴 한데.”

    “응!”

    “일단 세이먼은 내가 전학 와서 잘 모를 때 나를 많이 도와줬고, 에르셈프는…….”

    “우와, 왕자님을 그냥 막 불러도 돼?”

    그녀가 샌드위치를 아삭, 베어 물며 물었다.

    “어쩌다가 그렇게 됐어. 왕자님이라는 호칭을 반가워하는 것 같지도 않고.”

    “정말? 왜 싫어한대?”

    “듣기 싫은가 봐. 내가 말할 때마다 표정이 안 좋더라고.”

    에르셈프가 왕자라는 호칭을 좋아하지 않는 건 게임에서부터 나온 설정이었다.

    자세한 이유는 모르지만 왕실에서의 사정이 있겠지.

    하지만 ‘게임에서 플레이하다가 알게 되었어.’라고 말할 순 없으니 대충 둘러댔다.

    그래도 거짓말은 아니니까.

    “그럼 마지막 한 명은? 다른 아카데미에서 온 애 있잖아.”

    “너 되게 잘 안다.”

    “응……?”

    내가 주스를 한 모금 마시며 말했다.

    어떻게 이렇게 잘 알고 있는지 알 수 없는 노릇이었다.

    그렇게 자세하게 소문이 퍼졌나?

    하긴 그런 미모의 남자들이니 학생들 사이에서 유명할 법도 했다.

    “잰퓨어는 다른 학교여서 모를 줄 알았는데 아니까 신기해서.”

    내가 아무렇지 않게 대꾸하자, 이블린의 얼굴이 눈에 띄게 굳었다.

    앗.

    나는 그 표정을 보고는 실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너무 재수 없게 들렸나?

    “아니, 아니. 정보력이 좋다는 거였어. 나는 친구가 없어서 소문 같은 걸 전혀 모르거든.”

    빠르게 수습하자 이블린이 이내 웃음을 지었다.

    “하하, 그런 뜻이었구나.”

    “잰퓨어는 나랑 같은 반에 같은 팀이라 친해졌어. 임무를 다니다 보니까 어쩔 수 없이 알게 된 거지. 사실 다들 그렇게 친한 편도 아니야.”

    “에이, 셋 다 너를 좋아한다고 그러던데?”

    내가 놀라며 부인했다.

    “아니야! 그런 거 아니라고. 실제로 보면 알 거야. 별로 안 친해.”

    “그렇구나.”

    그녀는 고개를 끄덕이며 들었다.

    이런 게 궁금한 건가? 나에 대해 물어볼 줄 알았는데 전부 남자 이야기뿐이라 약간 기분이 묘했다. 하긴, 다들 남자에 관심이 많을 나이니까.

    내가 열여섯 살 때는 어땠더라…….

    게임에 빠져 남자고 뭐고 맨날 집에 짱박혀 오타쿠처럼 살았었…네.

    “너랑 이야기하니까 재미있다.”

    이블린이 약간은 수줍게 말했다.

    내가 열여섯 또래 여자애들이랑 친해지는 법을 몰랐구나.

    남자 이야기를 좋아하는 거였어.

    나는 웃으며 이블린을 쳐다봤고, 이블린은 곧이어 나에게 말했다.

    “그러면 거기서 누가 제일 좋아?”

    “응?”

    누가 제일 좋냐니?

    나는 얘네들이 좋다고 말한 적이 없는데.

    그냥 셋 중에서 맘에 드는 사람을 고르라는 건가?

    “글쎄, 난 별로 생각이 없어서…….”

    “우와, 넌 그 셋도 성에 안 차는 거야? 멋있어!”

    내가 손사래를 치며 부인했다.

    “아니 그런 게 아니라.”

    “정말 부럽다, 루나. 그래도 한 명만 골라 봐. 응?”

    나는 지금 내가 무슨 이야기를 하고 있는 건지 당최 알 수가 없었다.

    이 셋을 좋아하기는커녕 엮이기도 싫은 사람한테 최애를 고르라고 하라니.

    그냥… 대충 대답할까?

    “굳…이 고르라면 세이먼……? 가장 안 지 오래되기도 했고.”

    “헉! 멋져! 학생회장님이 가장 좋은 거구나.”

    “하하…. 다시 말하지만 절대 아니야. 난 아무런 감정 없다구.”

    “말은 그렇게 해도…….”

    “응?”

    “아니야.”

    그리고 잠시 말이 없던 이블린은, 곧이어 나에게 물었다.

    “그럼 있잖아.”

    뜸을 들이던 그녀는 나에게 내뱉었다.

    “나도 소개해 주면 안 돼……?”

    얼굴을 발갛게 물들인 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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